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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봄

LNCK 2024. 3. 19. 17:21

예루살렘의 봄          행5:12~42          ☞ 사도행전

◑도입 

여러분,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 아시죠? 
1968년 1월 5일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집권자가 됩니다. 

소련 공산당 밑에서 오랫동안 늘려왔던 사회에, 자유의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언론의 자유,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공산당 이외의 야당도 인정하겠다, 거주 이전의 자유도 허용하겠다... 
공산국가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자유의 행동 계획을 내어 놓습니다. 

비밀경찰의 권력도 제한하고, 
경제적으로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서방국가와의 관계도 개선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체코 국민들이 환호합니다. 
그 열망의 물결을 타고, 그 동안 눌려왔던 개혁의 요구가 분출합니다. 
거리에는 활기가 돌고, 자유로운 대화가 오가고, 시민들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칩니다. 

'우리가 변화를 이루어내고 있다'는 자부심, 
'우리에게 밝은 미래가 있다'는 기대가 꽃 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흐름을 불안하게 여긴 소련이,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인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습니다. 
그해 8월 20일입니다. 프라하의 시민들은 소련제 탱크에 맨몸으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소련은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워 무고한 시민들을 사살하며, 체코 나라가 망하기까지 
또한 소련이 망하는 년도인 1989년까지 그곳에 주둔합니다. 

한 여름에 몰아 닥친 눈설이, 차가운 겨울의 시작이었습니다.    주1) 유응부의 시조
비록 프라하의 봄은 짧게 끝났지만, 
프라하는 이후로 '자유를 향한 열망'을 담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프라하는 세계인들의 평화의 상상력에 숨결을 불어 넣었습니다. 

1980년에 한국에서 민주화 요구가 분출했을 때, 
세계인들은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고,     *프라하의 봄에 빗대어
2010년 11년에는 '아랍의 봄'이 지구촌에 기대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예루살렘의 봄>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정말 가슴 설레는.. 마치 '예루살렘의 봄'과 같은,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역동적으로 확장되는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 행5장입니다.

◑1. 온 도시의 부흥, 도시를 향한 구원 계획

지난 주일에 보았던 아나니아 와 삽비라 사건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영향은 교회 밖으로까지 미칩니다. 

그 사건의 결론을 성경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5:11 '온 교회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온 교회'.. 교회 안이죠.
'이 일을 듣는 사람들' ..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을 말하죠.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 이 사건이 이제 공적인 사건이 되어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5:12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민간에' among the people, 
즉 백성들 가운데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솔로몬 행각' 
이곳은 당시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항상 모이던 중심지였죠.
행각은 오늘날 아케이드 처럼, 지붕은 있으나 한쪽 벽이 없이 트여진 곳입니다.
그러니 내리쬐는 햇빛을 피하기 좋아서, 사람들이 자연히 모여드는 곳이었죠.

5:15절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거리에'
이 말은 플라테이아 라는 단어인데, 
그냥 보통 '거리'가 아니고, 아주 '큰 대로, 광장 public square'을 의미합니다.   주2)

서울의 광화문 광장에 비견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거리에'를 '광장에'라고 번역해도 좋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이 예루살렘에 아주 공적인 공간에서 일어난 
퍼블릭한 이벤트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5:18절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영어 성경들을 보면 대부분 in the public jail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나 영어 성경에는 '공적인 감옥' 이라고 번역했는데, 
우리 말에는 그냥 '옥'이라고 해서, 악간 의미가 축소되는 경향이 있죠. 
한글 번역에는 'public' 이란 말이 반영되지 않고, 그저 'jail'만 반영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데서는 그냥 '감옥 jail'이라 그랬는데, 
여기 본문에서 만큼은 'public jail' 이라고 썼습니다.   *ἐν τηρήσει (Jail) δημοσίᾳ (public)

저자인 누가가, 지금 되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아주 '공적으로, 집권자들에 의해서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5:16절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지금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5:21절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굉장히 큰.. 뭔가 이렇게 큰 판이 벌어진 거죠. 
우리말로 하면 국회 본회의가 백성들의 관심 가운데 소집되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도시 예루살렘의 플라테이아, 그 중심대로에 
불과 얼마 전에 예수님이 나귀 타고 입성하셨잖아요. 
바로 그 대로(본문에 '거리') 입니다. 

백성들이 그때 이 대로를 꽉 채우고 뭘 기대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병 고치는 기적,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서
당시 그들이 당하고 있던 압제에 대한, 정치적 해결을 기대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셨고, 정치적 접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실망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근데 그 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두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눅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마치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이 부르잖아요. 
여러분, 그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과 안타까움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구약에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대표적으로 니느웨죠.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전도했을 때,
'그 성이 다 함께 망할 것이다' 예언했는데 
왕부터 시작해서,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다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는 심판을 면합니다. 도시 전체가 회개하고, 도시가 심판을 면한 거예요. 

도시 단위로, 혹은 나라 단위로 심판을 받거나, 구원을 받는.. 
이런 예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개인적이에요. 우리 각 사람이 각각 심판받을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판단하십니다. 구원은 개인적입니다. 

그러나 그 개인의 믿음도, 사회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커뮤니티, 공동체가 중요해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 
온 가정이 함께 예수 믿는 걸 말씀하는 거죠. 

오늘 여기 앉으신 많은 분들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자랐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의 삶이 본래 그렇습니다.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만약 그가 일제시대 때 태어났다면, 꿈을 펼치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가 북한 땅에 태어났다면, 대단히 제한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 그러잖아요. 

믿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도시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꿈을 꾸십니다. 

한 나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회복되는 꿈을.. 하나님이 꾸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북한 땅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 성도들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고, 
우리가 사는 도시인 포항 땅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되는 줄 믿습니다. 

▲'니느웨' 라는 도시가 회개한 사건은    *오늘날의 이라크 모술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비전에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눅11: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다'
하지만, 요나가 열심히 전도한 것은 아니에요.
요나는 니느웨가 망하길 바랬어요. 그래서 거기서 전도도 마지못해 이야기했어요. 
'여러분이 회개하지 않으면, 이 성은 망할 것입니다' 대충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니느웨가 회개했어요. 

거기에 비하면, 지금 예루살렘에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회개와 죄사함의 길을 아주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눈에 엄청난 일들이 벌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고, 예루살렘 전체가 막 술렁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은, 여기에 저항하는 거예요. 
사도들을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18

행5:19~20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때 성령이, 주의 사자를 통해, 사도들을 옥에서 끌어내어 풀어주면서
뭐 하라 그럽니까? '생명의 말씀을 목숨 걸고 계속 전해라' 

여러분, 지금 예루살렘 백성들의 관심은, 막 일어나는 치유 사역에 있을거예요.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의 핵심이 있는 겁니다. 생명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무엇인가요?

행3장에서 베드로가 한 말을 다같이 읽어 볼까요.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여러분 이 생명의 주인을 죽였습니다!' 
생명으로 가득 찬 분, 죽음이 그를 가둘 수 없는 거예요.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메시지, 그게 '생명의 말씀'이에요. 

'예수가 부활하셨다. 예수가 생명의 주인이시다.' 
그리고 그 생명의 힘이, 오늘도 살아서 움직이고,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이 선포될 때에, 듣는 자가 살아나는... 
여러분 '살리는 힘이 있는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에요. 

때로 이 힘은, 기적으로, 
눈에 보이는 질병의 치유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러분 침상이나 요를 들고 와야 될 정도로 
걷지도 못하는.. 사실은 눈으로 보기에는 그냥 누워 있기만 하는.. 
죽은 자와 방불한 그런 사람들이 막 일어납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세요.
그것도 큰 대로에서요!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예수님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의 병자,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의 중풍병자, 자기 발로 못 움직이니까 
친구 네명이 들고 와가지고 지붕을 뜯고 달아내렸죠.
예수님이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근데 여러분, 가성비로 따지면요. 베드로가 훨씬 강해요. 
예수님은 그 난리 치고, 집 하나 다 부수고 중풍병자 한 명 고쳤어요. 

베드로는 길가에 지나가는데, 그의 그림자만 봐도 막 일어나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요14:12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은 미리 말씀하셨죠. '너희들은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교회 안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고, 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날 '도시적 부흥, 나라적 부흥'을 꿈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이 있는 분들은 '성시화 운동'을 하잖아요!

행2장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자, 예루살렘 전역에 '도시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집단 개종 mass evangelism 하고는 다릅니다. 
도시 전역에 부흥의 물결이 술렁이지만.. 구원은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받는 거죠.

여러분 요3장에서 장애인이 한 명 일어났잖아요. 
그러면서 온 예루살렘에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미 그전에 하루에 3천명씩 세례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당시에 예루살렘에 인구가 대략 한 5만~7만이었을 겁니다.  
물론 명절 때 방문객들이 오면 훨씬 더 많았겠지만, 
어쨌거나 예루살렘은 수 십만이 살 수 있는 그런 큰 도시가 아니에요. 
성지순례 가서 보면 old city 는 작습니다. 

몇 만 명 인구밖에 안 되는 이 도시에, 하루에 3천명이 세례를 받았다면,
가는 곳마다 세례 받는 줄이 서 있었을 거예요.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이에요. 

근데 바로 그 도시의 큰 도로에서, 막 즐비하게 병자들이 누워 있고 
사도들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막 일어난다... 이거는요. 
'야 베드로가 그만큼 세다' 이게 아니고, 
지금이 아주 특별한 스페셜 그레이스, 특별한 은혜의 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이란 도시에 폭포수 같은 은혜를 보여줍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골짜기에 마른 뼈가 살아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겔37장

이것이 다양하게 성취가 되는데 
1) 그리스도의 부활로 실제로 현실이 되죠. 
2) 사도들의 스피릿, 영적인 기개가 살아나는 겁니다. 
3) 누워있던 병자들이 일어남을 통해 성취되었습미다.

그래서 사도들, 병자들, 비겁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강한 용사로 일어서는 거예요. 행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기다리던 이스라엘 나라의 아름다운 회복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게 '예루살렘의 봄'이라 할 수 있잖아요. 

◑2. 시기,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말씀으로 가득채우십시오!

성령과 부흥의 역사에는 항상 반대하는 세력들이 나타납니다. 
마치 '프라하의 봄'을 막아선 사람들처럼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예루살렘의 봄'이 못 오도록, 
그 성령의 역사를 막아 서고 있는 거예요. 복음을 핍박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나중에 이 예루살렘이 어떻게 되었는가요? 
계11:8a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위 구절의 '길'도 똑같이 '플라테이아'입니다. 광장, 또는 대로.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병자를 고치던 바로 그 길에, 
이제는 죽은 자가 막 벌떡벌떡 일어나던 그 길에, 
나중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된다...'  계11:8

계11:9b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이 곳은 예루살렘이죠. 
여러분 신약 성경에 예루살렘을 가리켜 '소돔이다. 애굽이다' 라는 말이 있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충격적인 말인가요! 우리가 그걸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미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망할 것이다.' 
왜 예루살렘이 망했습니까?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망했다? 
꼭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잖아요. 
너무도 분명하게 회개와 죄 사함의 기회를 주시잖아요. 

그런데 예루살렘은 복음을, 사도들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망하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 죄지어서 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아서 망하는 거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지옥 가는 사람 없어요.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죄인입니다. 
죄인이어서 지옥 가는게 아니고요. 회개 안 해서 망하고 지옥 가는 거예요. 

나를 구원하러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돌이킬 기회를 주셨는데, 거부하고 오히려 짓밟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의 봄' 베드로가 전도하던 이때는
AD 20년대 말 혹은 AD 30년대 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사도행전,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때는 아마도 AD 80년~ 90년대 때로 추정됩니다. 
꽤 시간 차이가 있죠. 그 사이에 뭐가 있었습니까? 

AD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끔찍하게 망하는, 부서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은요. 이걸 아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의 독자들도 그 역사를 거예요. '아~ 이렇게 이루어졌구나' 
얼마나 안타까운 역사입니까! 그죠. 

하나님의 약속, 그 약속 성취의 중심이 돼야 될 도시가 
그렇게 비참하게 망한 망했던 그 역사를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초대교회 역사를 돌이켜 보는 거예요. 

그들은 왜 복음을 거부했나요? 왜 사도들을 핍박했나요? 
5:17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감정적인 반응이죠. 

5:26절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두려워함이더라'
여러분, 핍박하는 자가 더 두려워합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개가 무서우면 짓는다' 
핍박하던 사람들이 지금 몹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5:33절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크게 노하여'
시기, 두려움에 이어서 분노입니다.   
이게 전부 다 감정적인 반응이에요. 감정적인 반응!

시기두려움분노가 가득한 이들에게 
바리새인 가말리엘 랍비가 여유를 갖자고 주문합니다. 

5:39절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대적하는 자' 
'데오마코스'란 말은, 그냥 의견을 달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칼을 들고 싸우는 걸 말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을 향해서 칼부림하는 사람이 된다 라는 이야기에요. 얼마나 이런 무서운 말입니까. 

제가 2년 전에 '에포케' (Epoche, 판단유보, 판단중지를 뜻하는 헬라어)   
라는 단어를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εποχη

감정에 이끌려 폭력을 사용하는 경향,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태도, 
이런 성향이 모두에게 조금씩이나마 있을 수 있는데, 우리 모두에게 에포케가 필요합니다.

지금 세계의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게 근본주의예요. 
기독교에도 근본주의가 있고, 이슬람에도 근본주의가 있고, 문화마다 다 있습니다. 

근본주의란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는 거죠. 
이것과 거리를 유지하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찍이 그리스 철학에서는 '에포케 - 판단 유보'의 미덕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판단할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거죠. 

'내 생각엔 이렇지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가 성숙한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서구인들에 비해서 꽤 감정적입니다. 서구에 비해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근대 토론 문화가 서구에서 와서 그런지, 
회의를 하고, 토론하고,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고, 그 결론에 승복하는 문화가 잘 안 되어 있습니다. 

의견을 모으자고 회의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더 싸울 때가 많아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한국 사람들이 제사 지낼 때 사과나 배의 윗부분을 조금 자르잖아요.
그 이미지를 우리가 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내 의견이 있으면요. 좀 자르는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디 가서 커피를 주문했는데, 
뚜껑도 없는 컵에 커피를 가득 줬다고 하면, 
그 컵을 들고 가야 돼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잔에 가득한 커피를 그냥 들고 가면, 
손을 댈 수도 있고, 옷을 버릴 수도 있고, 민폐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깝지만 좀 버려야 돼요. 좀 아까워도 좀 비워야 돼요. 
커피가 아깝지만, 만약에 옷 버리면, 세탁비가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어떤 회의를 하거나, 어디서 뭐를 할 때도,
가족끼리도 중요한 대화가 있을 때에, 
먼저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의견을 반드시 꼭 관철시켜야 된다!' 이런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면, 내가 위험할 때가 많습니다. 

언제가 위험한가 하면, 내 확신으로 꽉 차 있을 때죠. (마치 근본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조금 버리는게 좋습니다. 
절반쯤 버리면 좋고, 최소한 약 20% 이상은 좀 버리고, 
대화를 시작해야... 그래야 상대방과 대화가 되고, 회의가 됩니다.   

'내가 100% 맞고 너는 다 틀렸다'
그런 자세로 나아가면... 정말 회의하다가, 화해하려고 대화하다가... 더 싸우게 됩니다.
항상 '에포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부부가 대화해도, 애들과 대화해도 
기본적인 자세가 '내가 최소한 20%는 양보하겠다'는 자세로 임해야.. 대화가 됩니다.

자녀들한테도 '내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놈의 고집을 꺾어 놓고야 말겠다'라고 
대화를 시작하면요... 틀림없이 여러분은 후회할 결과를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비워야 됩니다. 가득 차면 위험합니다. 아까워도 버리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사람이 가득 차는 것은요... 뜨거운 커피잔을 생각하십시오. 손을 뎁니다.

△여러분, 기도도 그렇습니다. 기도는 비우는 시간입니다. 
내가 비워 놓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거예요. 

때로 우리는 100%, 그 이상 
'나는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분하고, 내 의견은 너무 맞고요... 
상대방은 이건 뭐 너무 말도 안 된다...' 라고 생각할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럴 때도 '내가 모르는 뭐가 있겠지...' 
그럴 때도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또 좀 다를 수 있겠지...'  하면서 에포케-판단유보 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회의에 들어갈 때나, 중요한 대화를 할 때 
여러분 꼭 기도하고 들어가십시오. 

내 주장과 내 의견이 너무 가득 차 있으면, 
뜨거운 커피라고 생각하고, 내 의견을 좀 버리는게 좋습니다. 여유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부터 그렇게 해보세요. 여러분의 인생이 바뀔 겁니다. 
그렇게 한 몇 년만 살면요. 여러분 모두 다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이 될 겁니다. 가말리엘처럼! 

▲무엇으로 나를 가득 채울 것인가요?
지난 주에 살펴 본 아나니아,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5:3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가끔씩 사탄이 내 마음 속에서 요동치고, 뭐 속삭이고... 
이런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가득한 게 문제'입니다.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5:17
여러분 시기와, 질투와, 분노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시기, 질투, 분노합니다.
문제는, 그 시기로 꽉 차서.. 시기가 가득한 게 ... 그게 문제예요. 

반대로, 가득하게 차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수의 말씀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28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시기에서 오는 분노'가 마음에 가득하였고, :17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득하였습니다. :28     

여러분, 우리가 세상 것으로, 내 감정적인 것(시기, 분노)으로 꽉 채우면 안 됩니다. 
살다 보면 분노할 수 있죠. 
그러나 여러분 분노하더라도, 그 분노가 나를 가득 채우게 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완고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여러분 자녀들 아무리 철이 없다 그래도,
살다 보면 틈이 생길 때가 있어요. 

아무리 완고해도, 여러분 돌이켜 보세요. '내 사고에 균열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죠. 
그때 여러분, 그 균열에 뭐가 들어가는가? 그게 인생을 결정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자녀들이 너무 말 안 들어도 '야 너는 왜 내 말 안 듣니?' 그러지 마세요.
자녀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아무리 말해도, 말을 안 들어요. 

오늘 본문에 '이 도시에 말씀이 가득하게 했다.' 여러분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도시에 말씀이 가득하면... 
여러분 가정에 말씀이 가득하면... 

평소엔 여러분의 자녀들이 진짜 말을 안 듣는 거 같아도,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하면,
언젠가 자녀가 살아가면서, 그 사고에 틈이 있을 때가 있거든요.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 틈새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때부터 말씀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환경이 중요하고, 공동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막 살아가더라도, 건강한 가정,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 안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틈새로 말씀이 들어갈 때가 있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완고한 사람은 없어요.
아무리 못된 말을 하더라도, 밤에 한 번쯤은 '내가 너무 심했나?' 자기를 돌아본다고요.

그 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려면, 공동체 안에, 특별히 여러분의 가정 안에,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가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8절에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3. 봄꽃을 꺾어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왜 복음을 그렇게 극구 거부했는가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8b

'예수가 의인이다. 예수가 선지자다. 예수가 메시아다. 죄가 없었다.'
라고 하는 걸, 사두개인들이 인정을 하면, 
'내가 죄인이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자기들이 그걸 아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그들이, 사도들이 전하는 말을 안 듣는 것 같아도, 
다 듣고 있어요. 다 알고 있어요. 
(여러분 아십니까? 안티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아니까 반대하는 거예요.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내가 죄인 되는데?' 그러니까 극구 반대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 하시는 것은, 우리를 벌 주려고,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러십니다.  5:31 
그렇죠. 회개해야 사니까,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 얻고,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은혜 가운데, 이 복음이 있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의 말이 뭡니까? 
'너희들만 죄인이다'가 아니에요. 
베드로도 죄인이고, 요한도 죄인이고, 다 죄인이에요. 

모두 다 예수를 배반하고 버렸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그때부터 다른 삶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 다른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가요? 

▲5:40~42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보세요. 사도들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가졌습니다. 
아무리 유혹해도 흔들릴 수 없는 분명한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살아가야 될 이유, 분명한 목표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하는... 서로 위로하고, 서로 기도해주고, 세워주는 형제자매들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들의 삶에 봄이 온 거예요. '예루살렘의 봄'

하나님은 이 공동체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봄'이 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행1:8절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라는 말을 가만히 보면요,
'예루살렘 찍고 빨리 나가라' 그런 말이 아니에요. 

예루살렘에 말씀이 충만하고, 
그러면 그게 온 유대와 세계 땅 끝까지 간다는 거죠. 

그러니까 본래 예루살렘은, 구약 전체에 나오잖아요. 
그렇죠.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다.  사2:2~3 
말일에 시온에 영광이 있을 것이다' 예언서 전체가 그렇네요.   

그게 본래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기회를 주신 거예요. 
'예루살렘의 봄'이, 세상 전체의 봄을 가져오는 효시가 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예루살렘의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았고, 
지금 다시 사도들을 통해서,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가말리엘의 발언으로, 위기에 몰렸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겨우 살아났다. 다행이다.' 
이게 주제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위기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복음의 행진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더 강력해지는 공동체였습니다.         

진짜 위기는, 이 교회에, 사도들에게 있는게 아니라, 
예루살렘의 그 권력자들에게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위기.. 그것보다 심각한게 어디 있습니까? 
이제 이 역사가 멸망으로 달려가는 내리막길을 막 가는 거예요. 

그렇게 막 가는데, 가말리엘이 '잠깐 우리 생각 좀 해보자' 라고 호소하면서 
일단 브레이크를 밟은 겁니다. 

예루살렘의 봄을 막아선 이 사람들은, 마치 자기 집 정원에 봄이 오는게 싫어서, 
봄꽃을 꺾고, 가지를 짓밟고, 나무를 뽑은 사람들이에요. 그게 성공할까요? 
아뇨. 그래도 봄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정원은 황폐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봄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집밖에 나가면 다 봄이에요. 
자기 집만 찬바람 부는 겨울이에요. 봄꽃을 다 뽑아버렸으니까요.

그게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그들이 막아도, 예루살렘을 넘어서서, 복음은 세계로 증거되고 말았습니다. 
봄이 오는 것을, 그들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애통하셨던 거예요. 
여러분 이런 맥락에서, 오늘 이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이 지금 예루살렘에 정말 특별한 은혜, 
생명의 말씀이 강력하게 선포되고, 
사도들의 그림자만 스쳐도 막 사람이 일어나는 이런 특별한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5:15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두 가지예요. 하나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또 하나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일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은혜의 때를 놓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우리 가정을 통해서, 하기를 원하시지만, 
나 없이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우리 교회를 통해서 참 귀하게 사용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준비되고, 우리가 이 일에 깨어있고, 순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귀한 때에,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요. 하나님은 우리 없이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다른 사람, 다른 교회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또한 우리 한국 교회가 이 은혜의 때를 놓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부름을 알아야 돼요. 
은혜 주실 때, 그 은혜를 주시는 이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돼요. 

믿음으로 응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 자녀들을, 우리의 교회를 귀하게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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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조선시대 충절의 상징인 사육신 중의 한 분 유응부의 시조가 있습니다. 

간밤에 불던 바람에 눈서리가 친단 말인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는구나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낙락장송'은 큰 나무죠. 단종 당시에 김종서 같은 충신이 참살 당한 것을 빗대죠. 
'못다 핀 꽃'은 젊은 선비들을 말합니다. 
이제 막 산과 들에 꽃처럼 피어나려고 하는 새싹 같은데 
눈서리가 내려서 꺾였다는 안타까움입니다. 

계절감각으로 보면 꽃이 피려 한다는 것은 봄이 된다.는 말이죠. 
'눈서리'는, 시절을 역행해서 엄혹한 겨울이 닥치는 상황을 말합니다. 
역사 속에 이렇게 순리의 역행하는 안타까운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주2)
철학자 중에 플라톤이 있죠. 플라톤은 원래 본명이 아니에요. 
플라톤은 어깨가 굉장히 넓었다고 합니다. 
본래를 레슬링 선수였고요. 레슬링 코치까지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어깨가 넓은 친구'라는 별명으로 '플라톤'이란 이름이 붙었죠. 

그래서 '플라테이아'는 대단히 넓은 대로, 광장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