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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을 때 사람들이 슬퍼할까?

LNCK 2024. 3. 19. 22:05

https://blog.naver.com/karamos/220215826840

 

내가 죽을 때 사람들이 슬퍼할까?    요11:17-35      2011.10.23.      ☞ ▣호스피스 설교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만큼 살다가 죽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생을 잘 산 사람은 잘 죽고,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사람은 죽음도 엉망입니다.

그의 죽음이 사람들한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냥 '고생하다가 죽었구나.' 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잘 죽어야 합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살지 않고, 잘 죽는 법은 없습니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하고,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려면 그 사람이 죽어 관 뚜껑을 덮을 때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 사람의 죽음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여러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성경에 나오는 몇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최초로 창조하신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죽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5장 5절을 보면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 기자가 기록한 인류의 조상, 최초의 인간의 첫 번째 죽음입니다.

사실 이 죽음은 대단한 사건인데, 성경 기자는 한 줄의 간단한 말로 죽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담, 그는 비록 아내 하와의 꼬임이기는 했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보려고 시도했던 사람입니다.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영생불사해보고 싶었던 야망을 가졌던 아담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창3:4

 

그 후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은, 그의 후손답게 죽지 않고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만

결국 아담처럼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다는 불노초와 보약을 찾아먹고

온갖 의료기술과 각종 약, 최근의 줄기세포치료까지 모든 것이

이 땅에서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영원토록 살아보려는,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지만 결국 죽었다는 것은 대단한 뉴스입니다.

성서는 아주 짤막하게 아무 감정 없이

하나님처럼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아담이지만 ‘결국 죽었다’고

한 줄로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5:5

 

아담이 죽은 후 인간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내려졌습니다. 인간은 죽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고,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죽음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죽는 것을 보면 '아, 그도 인간이었구나.' 새삼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2. 성경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25:8~9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부고가 실려 있습니다.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라’

 

사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가운데 아브라함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때때로 아브라함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내용을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며 지키는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세 가지 시험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세 가지 시험에 합격한 믿음의 사람,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어, 하나님 사랑에 합격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통과하기 어려운 시험에 통과한 것입니다.

 

또한 지나가는 나그네, 하나님의 천사들을 접대해서, 이웃사랑의 시험에도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렇게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샘플로라도 이 세상에서 오래 오래 더 살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 오래 살면, 좋은 일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려면, 이 세상에서 별로 필요 없는 사람, 해로운 사람을 데려가시고

아브라함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게 하셔야 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3. 파란 많은 인생을 산 야곱, 하나님의 축복을 누구보다 많은 받은 야곱도 죽었습니다.

창47장에 보면 야곱의 죽음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은 그 어떤 사람의 죽음보다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행복한 죽음을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147세, 적지 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애굽에 갈 때에 130세였고, 17년을 애굽에서 살다가 죽게 되었는데

총리대신의 아버지로서 영화롭게 애굽에서 노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앞날을 알지 못하지만

꼭 한 가지 언젠가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분명하게 일어날 죽음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인류의 불행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고, 창49:33

아들 요셉을 불러 유언을 하고, 열두 아들을 불러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창49장에 보면, 열두 아들에게 했던 축복기도가 나와 있고

자신의 장지까지 미리 마련하고 거기에 묻어달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죽음을 맞이할 때의 모습이 49:33절에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이 성경 가운데 나오는데 50:3절을 보면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국무총리 아버지의 죽음이지만, 이방인인 야곱의 죽음에

어떻게 애굽 사람이 70일 동안이나 곡을 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곡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애굽에서 17년을 살면서 잘 살았던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이방인지만

그의 죽음을 70일 동안 애곡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4. 다윗의 죽음

열왕기상 2:10절에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라’고 기록되어 있죠.

 

이때 다윗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기록된 것은 없지만

삼하5:4절에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70세, 당시로서는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통일 이스라엘의 제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기자는 정말 짧게 그의 죽음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열왕기 성서기자의 기록이 아쉬웠던지

왕실 역사가인 역대기 기자는 역대상 29:28절에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라고 조금 더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런 역대기 사가들의 기록과는 다르게, 성경에 나타난 실제 역사를 보면

다윗왕은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죽음을 맞이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다윗은 수많은 신하들과 참모들을 거느리고 천하를 호령하고 살았던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늙어 병들어 누워있을 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에게 처첩이 많아 아들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버지가 죽으면 누가 왕이 될까, 치열한 권력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죽음과 씨름을 하고 있는데, 이미 반란을 일으켰던 압살롬도 있었고,

아도니야는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급한 나머지 자신이 왕이 되어 취임식을 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사랑했던 밧세바는, 당연히 다윗의 시중을 들여야 함에도

자신의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신하들과 결탁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장에 보면 밧세바가 병들어 누워 있는 다윗의 침상에 찾아와

다윗에게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신하와 처첩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게 급급하여

홀로 남은 늙고 병들은 다윗왕의 곁에는, 수넴 여자 아비삭만 있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다윗도, 마지막에는 아비삭이라는 어린 여자의 곁에서 죽어갔습니다.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입니까? 권력무상이 아닙니까?

살아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권력을 가졌으면 뭐합니까?

이렇게 고독하고 쓸쓸하고 외롭게 다윗은 한생을 마쳤습니다.

 

▲5. 솔로몬의 죽음

역사상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였을까요?

열상11:43절에 ‘솔로몬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읍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이것이 솔로몬의 부고입니다. 몇 살에 죽었는지 기록조차 없습니다.

(다윗이 39세(주전999년)에 솔로몬을 낳음(삼하12:24). 31세 즉위, 40년 재위, 71세 사망)

 

그 많은 재산과 금은보화가 그를 죽음에서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 많은 재산과 금은보화, 호화로운 왕궁을 내어놓고 빈손으로 무덤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금은보화가 여러분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어놓고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솔로몬의 죽음이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6. 모세의 죽음

성경 가운데 감동적인 죽음을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신명기 34:1절 이하에 모세의 죽음이 바로 그런 죽음입니다.

 

모세가 죽을 때 120세로 당시는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30일을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가운데 나오는 인물 가운데 세상을 떠나 사람들이 울었다는 기록은

제가 아는 한 미리 말씀드린 야곱과 모세 두 사람입니다.

 

*이 설교의 주제는 ‘내가 죽을 때, 야곱과 모세 두 사람처럼,

누군가 울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장례식은 자식 잔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장례식에 애곡했다는 것은

모세의 자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모세를 보고 애곡한 것입니다.

 

자식 때문에 인사로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 때문에 찾아오는 장례식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이긴 했지만, 장례식다운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욱 애곡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해야 할 일을 많이 남겨놓고 죽었기 때문에

더욱 슬퍼하였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사정을 했지만,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할 일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은 모세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30일 동안 슬퍼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게 한 것을 인정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슬퍼하며 울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데려가셨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죽음입니다.

 

▲7. 신약의 나사로의 죽음

신약성경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몇 살에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친구였다고 하니, 아마 서른 안팎으로 생각됩니다.

 

요11:19절,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라’

33절에는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라고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의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해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나사로의 죽음은 식구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울렸고, 예수님까지 울렸던 죽음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많은 사람을 울리고

예수님까지도 울렸는가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사로가 죽어 많은 사람을 울었고, 예수님도 울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울리는 죽음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인생을 잘 산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들을 울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치는 말

지난 주 이O호 집사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제 머리에 떠나지 않는 생각 '내가 죽으면 내 장례식에 누가 올까? 와서 뭐라고 할까?

누가 울까? 운다면 왜 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장례식은 어떨 것 같습니까? 누가 올 것 같습니까?

와서 무슨 말을 할 것 같습니까? 몇 사람이나 여러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장례식을 집례 하는 목사가 여러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목이 메여 설교할 것 같습니까? 조문객 중 몇 사람이나 슬픔에 목이 메일 것 같습니까?

 

여러분, 인생을 잘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났는데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렸다할지라도 인생을 실패한 사람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내 장례식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드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잘 죽는 사람이, 인생을 성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건성건성 믿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야 인생을 잘 살 수 있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죽음을 죽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인생을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