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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LNCK 2024. 3. 20. 15:53

https://www.youtube.com/watch?v=FQ2YEIX4ahs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눅7:36~50          ☞ ▣사랑

◑문제 제기 : 왜 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이 그리 적은가?
   답 : 참된 죄용서를 받지 못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죠. 
기독교 신앙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으로 시작되었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죠?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시는만큼 사랑하셨고, 
또한 그 사랑이, 영원 전부터 시작된 사랑임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신자들이, 
자신을 사랑으로 섬길 것을 언제나 기대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을 매일 섬기고 있는가요? 
우리 자신에게 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안에 팽배한 문제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섬겨요. 주일날 와서 예수님께 예배드려요. 
또 주일이든지 평일이든지 교회에 나와서 봉사도 해요.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이 분명히 있어요. 

자 그런데 문제가 뭐냐? 바로 그 마음이, 사랑이 없는 차가운 마음으로, 
그냥 어쩔 수 없으니까 섬기는... 그런 상황들이 우리 삶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매 주일 교회들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향한 그 큰 사랑으로 인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님을 향한 그 큰 사랑으로 인해, 그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서 
다른 성도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요?

사실 우리가 마음을 측정할 순 없어요. 그렇죠. 
그래서 통계나 수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섬기는지, 
혹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차가운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지, 
우리가 통계나 수치로는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만 제가 제 삶을 돌이켜 보고요, 그리고 제 신앙생활을 돌이켜 봤을 때, 
사실 예수님을 향한 섬김이, 굉장히 차가운 마음으로 드려지기가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섬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게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겠죠. 

어떤 분도 이렇게 쉽게 생각해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거.. 그거는 목사님, 장로님, 선교사님들이나 하는 거죠.'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게 뭐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겨야함을 
오늘 우리는 배울 겁니다. 

오늘 설교의 대지입니다.
"죄의 용서를 경험한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여성과 한 바리새인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을 통해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그 단 한 가지를 
우리는 배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단 한 가지가 뭐라고요? 
바로 죄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제가, 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말했는지 이해하시겠어요? 
왜냐면 모든 그리스도들이 다 이미 죄의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참된 의미를 오늘 설교를 통해 배울 거예요. 

◑1.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죄 용서를 받기를 바라십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죄인인 여자를, 동시에 만나주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죠.

 

눅7:36~39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대면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두 사람을 발견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함께 식사하기를 바랐던 바리새인 시몬이에요. 

 

두 번째 사람은 시몬의 집에 초대된 예수님을 보기 위해, 찾아온 여인이었는데요.
이 여인은 그냥 동네에 있는 아주 평범한 여인 중에 하나가 아니었어요.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여자였어요. 아마 창기이든지, 성적인 죄를 지었나봐요.

그래서 두 사람은 완전히 상반되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사회적, 종교적으로 아주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에요. 
사회적 신망을 받았던 사람이죠. 

이 두 사람이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모든 종류의 사람을 사랑하시고 (상류층이나 하층에 관계 없이)
또한 모든 종류의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길 바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시몬은 바리새인이었죠.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아주 높은 지위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 지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할 정도로 
굉장히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죠. 

또한 시몬은, 단순히 종교적으로 신망 받았을뿐만 아니라 
금전적으로도 잘 살았던 것처럼 보여요. 지금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어요. 

저녁 식사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보통 일반 서민들이 베푸는 저녁식사가 아니었습니다. 왜죠? 
지금 이 '죄인'이라 불렀던 여자가 그 저녁 식사에 왔어요. 그 말이 뭐예요?
예수님을 포함해서,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서 잔치를 배설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당시에, 정말 아무나, 누구나 와서, 그냥 마음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느냐? 
그건 아니었어요. 중요한 인물들이 식사를 끝낼 때까지, 그들은 기다려야 했어요. 

그 초대된 중요한 사람들이 식사를 다 마치고 난 뒤에,
가난한 사람들은 그 남은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시몬이 예수님을 저녁식사에 초대했어요. 그래서 오셨어요. 
그리고 초대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시몬이 굉장히 잘 살고 있었던 사람이며, 마을 잔치 같은 자리가 배설되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그 사회에서 꼭대기에 있던, 엘리트였던 사람이라는 것이죠. 

△또 예수님께서 이 엘리트였던 바리새인 시몬의 그 식사초대에 응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시몬을, 자신의 친구로 여겨 주셨다는 의미기도 해요. 

왜냐면 유대인들에게는, 같이 식사하는게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물론 우리 한국인도 그런 면이 있지만, 유대인처럼 강하지는 않아요.
한국인들도 아무하고나 밥을 같이 먹지는 않죠. 

그러면서도 누구랑 밥 한 번 같이 먹는 일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그냥 빈말로 '만나서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하잖아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기와 동등하거나, 혹은 자기보다 높거나, 
그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해 줄 만한 사람들과만 초대해서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절대로 이방인들, 죄인들과 밥을 같이 먹지 않았어요. 
유대인들이 이방인, 죄인들과 밥을 같이 먹는 것은, 아주 큰 죄를 짓는 거였어요.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부정하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부정함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또는 죄인으로 취급되던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셨어요.
종종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하셨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얻었던 별명이 있었습니다.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였죠.  눅7:34

여러분 아시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가장 큰 대적으로 나옵니다. 
그러함에도 예수님께서 이 바리새인인 시몬조차도 사랑하셨고, 
그가 구원받기를 원하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세리 삭게오 집을 찾아가셨듯이, 바리새인 시몬 집도 찾아가셨어요.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만을 사랑하신 게 아니라, 모든 계층을 다 사랑하셨어요)

▲죄인인 여인의 등장

예수님과 시몬의 식사가 무르익어갈 때 즈음에 
초대받지 않은 일반 동네 사람들 가운데,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중요 인물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됐었죠. 
그런데 그 사람 중에 하나가 조용히 일어서더니, 예수님의 뒤편으로 다가가서 옥합을 깨뜨렸어요.

:37~38 '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 여자는, 예수님을 향한 자기의 뜨거운 마음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예수님 앞에 뒤에 서서 울다가, 곧 이어서 앉아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입맞추었어요.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가 우리 식사하는 상황에서는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등 뒤에 와서, 예수님의 발을 닦을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당시 문화적 배경을 조금 알면, 쉽게 이해됩니다.
(TV 여행 채널을 보면, 아직도 중동에서는 이런 자세로 식사하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당시 유대인들은, 만찬을 할 때, 비스듬히 누워서, 왼팔로 몸을 지탱한 상태에서 식사를 했어요. 

마치 '칼잠'을 자는 자세로 식사를 했는데, 그게 그 문화에서는 '편안한' 식사 자세였어요.
이런 자세로는, 여자가 예수님의 등 뒤로 와서 예수님의 발을 씻고 향유를 부을 수 있죠.

▲예수님은 뿌리치지 않으셨어요.

이 상황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데, 

시몬과 그곳에서 함께 식사하던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사실이 있어요. 
바로 이 여자는 온 동네에 죄인이라고 소문났던 여자였던 거예요. 

그런 여자가 예수님의 발을 만질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뿌리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시몬으로 하여금 실족하게 했다는 것이죠. 

'왜 더럽고 부정한 여자가 자신을 만지는데, 대체 왜 그냥 내버려두시는 건가?
그렇다면 이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는 거죠.

시몬이, 예수님께서 죄인인 여자가 자신의 발을 손대도록 가만히 있어주셨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던 것은, 문화적 배경이 있습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유대인들은 부정한 사람이나 이방인들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면, 그 부정함이 나에게 전해질 수 있다 라고 믿었어요.  

자 그래서 시몬은, '지금 거룩한 하나님의 예언자 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 더럽고 부정한 여자가 자신을 만짐을, 그냥 그대로 둔 것은 
지금 스스로를 부정하게 한 거기 때문에, 
이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언자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의 정체를 아주 깊이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39절에 나오죠.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자 그런데 39절을 한글 성경으로 보면,

'이 사람 Jesus 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지금 시몬이 속으로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는데, 긴가 민가 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완전히 의심하고 있지는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글 표현상으로.

 

그러나 39절을 영어로 보면 '가정법'을 사용합니다. 
'if he were a prophet, would have known'  KJV
'만약 그가 선지자라면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영어문법 '가정법 과거'로 해석하면.. 가정법 과거는 '부정 no'으로 해석하죠.
그래서 '만약 그가 선지자라면, 그가 누구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참 선지자가 아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시몬이 그렇게 자기 마음속으로 짐작했다는 것이죠. 의심했다는 것이죠.

긴가 민가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부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가짜네!' 하고요. 가정법 과거.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언자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자기 마음속으로 내린 것이죠. 헬라어도 가정법으로 나와 있다고 합니다. 주1)

▲자 그럼 예수님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그걸 모르셨을까요? 
그 여자가 자기를 손대게 놔 두면, 
시몬과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실족할 것을 다 아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여인을 내버려두신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사회에서 정말 시궁창 속에 사는 그런 더러운 죄인 또한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지금 본문에 두 부류가 나옵니다.
-시몬 : 사회의 존경받는 지도층, 바리새인, 부자, 경건한 종교인 (의 대표)
-여인 : 사회에서 멸시받는 계층, 중한 죄인 (의 대표)
예수님은 극과 극의 두 계층의 인물들을, 모두 다 사랑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본문을 계속 읽다 보면
이 두 사람의 자리가 역전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훨씬 존귀하게 여기셨어요.

예수님께서 시몬도 죄 용서 받기를 바라셨어요. 
자 그런데 시몬의 결론은 어떻게 내리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사람 아니다'란 결론을 내리죠. 
하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이 여자는, 예수님을 이 세상의 모든 분보다 가장 높이 계신... 
자신의 주님이며, 왕으로 모심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자, 자기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여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시몬)의 차이는
바로 예수님을 대하는 이 두 사람의 태도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아래 단락에서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2. 죄 용서를 참되게 경험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 시몬의 마음을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일깨우시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눅7:40~4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왜 누구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또 다른 누구는 그렇지 못한지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동일한 채권자에게 빚을 졌죠. 
-한 사람은 500 데나리온, 500일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꽤 많은 돈이죠. 거의 2년 연봉이죠.
-다른 사람은 50 데나리온을 빚졌어요. 거의 2달 봉급이죠. 

그런데 두 사람 다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채권자가 두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 중, 
누가 더 채권자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게 될지.. 시몬에게 물으시고요. 
시몬이 당연한 대답을 하죠.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43

:42~43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바리새인이었던 시몬과 
죄인이라 불렸던 여인 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경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비유에서, 빚을 적게 탕감 받은 사람이 시몬을 가리킨다면, 
적게 빛을 탕감받은 사람은, 오늘날 우리 실제 삶에서, 정말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일까요?

*상당히 신학적 질문입니다.  

자 여러분, 시몬이 지금 '죄의 용서'를 경험했나요? 
경험 못했죠. 왜 못했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언자가 아니라'고 마음속에 결론지었잖아요. 
즉 예수님을 안 믿었잖아요. 
그래서 시몬은 죄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비유에서 적게 탕감은 받았지만 말이죠.

자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이 비유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예수님께서 500 데나리온 탕감 받은 자와, 50 데나리온를 탕감 받은 자의 예를 드실 때, 
두 사람 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 무슨 말이냐면, 예수님께 죄를 용서 받은 사람 중에요. 
큰 빚을 용서 받은 사람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 중에 '나는 예수님께 죄 조금만 용서 받았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물론 비유만 보면, 두 사람 다 탕감 받았으니까 
'두 사람 다 죄를 용서받은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두 종류의 용서받은 사람을 얘기하는게 아니고,
둘 중에 한 사람만 참되게 죄를 용서받은 사람인 거예요. 
둘 중에 하나(시몬)는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시몬은 자신의 죄가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하게 된 것이고요,  (*탕자의 비유의 큰 아들과 비교해 보세요)

이 여자는 자신의 큰 죄를 알았기 때문에, 
또한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존재적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그를 믿었기 때문에, 죄 용서를 경험하고, 구원에 이르는 그 대표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3.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1. 참된 죄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겁니다. *주제
바로 시몬이 그랬어요. 시몬은 죄 용서를 못 받았죠. 

예수님이 시몬에게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셨다 해도 
시몬이 엄청 감사했을까요? No 

왜죠? 시몬은 자신이 죄가 많다고 생각을 안 했어요. 
자기가 죄를 많이 용서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2. 참된 죄의 용서를 경험한 죄인만이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의 용서를 경험한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의 빛을 졌고, 또한 탕감 받았는지를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교회를 다니시서 
'죄의 용서'에 대한 교리를 많이 들어서, 
막연히 '내 죄가 용서되었겠거니'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그분들은 아직 자신의 죄가 용서됐는지/ 안 됐는지 모르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죄의 용서를 경험하셨다면, 여러분이 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뭐냐면 '내가 엄청나게 크고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안다는 거죠. 
그리고 자신의 죄의 용서에 대해 생각하면, 
그 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언제나 감격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의 빛을 줬는지 정확히 모르고 살아가요. 

하지만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 많은 죄를 용서받았는지... 언제나 기억하고 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시몬과 죄인인 여인을 생각해보죠. 
시몬은 바리새인인 자신이, 죄인이라 낙인찍힌 여인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하였기에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과 식사를 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이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왔을 때, 
그녀를 자기 마음속으로 정죄할뿐만 아니라, 바로 예수님도 함께 정죄했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이 세상의 구원자를 자기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죄를 자백할 생각도.. 용서받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하나님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어요. 
성경 읽을 때, 복음을 들을 때 '내가 죄인인 건 알겠는데, 내가 그렇게 큰 죄인이라고요?' 
'내가 지옥에 갈만큼 나쁜 죄인이라고요?' 
'내가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 될만큼 질이 나쁜 죄인이라고요?' 라는 의구심을 품으셨다면,
여러분은 아직 죄의 용서를 받을 준비가 안 되신 거예요. 

자 어떤 사람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냐면,
바로 이 여성을 보세요. 

지금 모든 사람에게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았던, 
정말 시몬과 상반되는 모습을 가진 여성을 보세요. 

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죄인 아주 잘 알았을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 임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이 여성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발을 닦고 향유를 부을 때 
38절에, 예수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더니 
그녀는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을 만지기 전부터, 예수님 뒤에서 흐느껴 울고 있었어요. 
새번역에서 '울면서'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 '클라이오'는
조용히 흘리는 눈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옆에서 누군가 막 흐느껴 우는 거 있잖아요. 소리 내서 우는 거,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는 정도로 아주 슬피 우는 울음을 표현할 때 사용됐던 단어였어요. 

무슨 말이냐면, 이 여성은 예수님 앞에 서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누리지 못하고 
많은 눈물을 지금 예수님 앞에 쏟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대체 왜 예수님의 발을 흥건히 적셔서 닦아야 할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자 그녀의 멈추지 않는 눈물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을 향해 너무나 많은 죄를 지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송구함이 있었을 거예요. 

-자신의 죄를 돌이키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며 회개하는 눈물이 있죠. 
회개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그 많고 더러운 죄들을 
예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사실로 인한 기쁨의 눈물, 

더 나아가서, 죄를 용서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죄인인 자신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그 은혜에 대한 감사도 내포되어 있었을 겁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과 같이 더러운 죄인의 섬김을 기쁘게 받아 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감격이 있었을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이에요. 
그리고 알아요. 지금 내가 예수님 발을 만지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판단, 정죄할 걸 다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갔어요.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서 나아갔어요. 
예수님의 발을 만졌어요. 어떤 두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어요. 
'예수님이 나를 못 만지게 하시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근데 여인이 발을 손대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이 가만히 계셨던 거예요.
이 여자가 자신을 섬기기를 기뻐하셨고요. 그 기회를 주신 거예요. 

그러면서 그 여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시작하면서, 
그 흘렸던 눈물이 더 큰 눈물이 되는 거예요. 왜요? 
'나 같은 죄인의 섬김도 기쁘게 받아 주시는구나' 하면서
 
그 감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자가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4. 본문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 여인이 죄를 용서받은 시점이 언제였나요? 

여러분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여자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예수님을 섬겼으니까, 예수님을 사랑했으니까 
'그 때 죄 용서를 받았구나'라고 느끼실 수도 있어요. 

근데 오늘 본문에 진리는 그게 아닙니다.
이 여인은 사실 오늘 그 잔치 자리에 나오기 전에
시몬의 집에 가기 전에, 이미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지금 향유를 챙겨서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겁니다. 
보세요. 동네에 죄인인 한 사람이 있었죠. :37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 집에서 음식을 잡수고 계신 것을 들었어요. 
그때 즉흥적으로 간게 아니에요. 즉흥적으로 예수님을 섬기러 간게 아니고요. 
예수님이 모신단 얘기를 듣고, 향유가 담긴 옥합을 챙겨 가죠. 

자 무슨 말이냐면, 지금 이 여자는, 예수님께 감사할 이유가 이미 있던 여자예요. 
예수님을 이미 사랑하기 시작했던 여자예요. 

이 여자는 이미 예수님을 과거에 어디선가 만났어요. 
죄 용서를 이미 경험한 여자예요. 그러하기에 예수님을 섬기고 경배하기에 나아왔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47절에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
-48절에 '네 죄가 용서 받았다'
-50절에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죠.

이 3가지 동사가 다 어떤 시제냐? 현재 시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여자가 예수님을 눈물로 섬겨서 죄의 용서를 받았다면,
예수님은 현재 시제를 분명히 사용하실 거예요. 

자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세 번 다 현재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계세요. 
현재완료 시제는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 상황이에요. 
근데 내가 이 상태에 있는 이유가 뭐냐면, 과거의 시작된 한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현재완료 시제의 예를 들면, 제가 1985년에 태어났죠. 그래서 제가 오늘까지 살아있죠. 
내가 태어났기에 여전히 내가 숨쉬고 있다... 자 이겁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죠? '네가 죄를 용서 받아 왔다'라고 현재완료 시제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번역을 사실은 '용서 받았다'라고 하면 안 되고,
'네가 죄를 용서받아 왔다'라고 하는게, 사실 문자적으로 옳은 번역입니다. 

또한 '네가 네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아 왔다'가 좀 더 정확한 번역이 되는 거예요. 

자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죄를 용서하신 시점이, 
'그 날 저녁 식사가 있기 이전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순간이었구나' 라는 거죠.

앞서 눅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마도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인자, 사람의 아들인 자신이
이 땅에서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었던 거예요. 
그 예수님을 만났던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죄의 용서를 경험 상태로 
오늘 이 시몬이 예수님을 초대한 그 식사 자리에 조용히 나아갔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 죄의 용서를 경험한 일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난 사건임이 확실하고요. 

그녀가 죄의 용서와 구원에 이른 이유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예수님 섬겨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죄 용서 받는 거 아니에요. 
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눈물 흘릴 수 있는 겁니다. 
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거고요. 
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길 수 있음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그녀가 완전한 죄 용서에 이르는 구원을 경험한 근본적인 이유가 뭡니까? 
그녀가 섬겼기 때문인가요? 그리고 울었기 때문인가요? 아니죠. 

50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시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해 왔다'  *현재완료시제

그러니까 예수님을 처음 만난 시점부터 이 여자는 예수님을 믿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 메시아이시고, 
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능이 있는 분임을 믿었던 거예요. 

그로 인해 그녀는 죄의 용서를 경험했고요.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그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 거죠.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세요? '평안히 가라'  :50
'너에게 내 평화가 있다. 너는 하나님과 이제 화평을 이루었다. 나와 화평을 이루었다'
라고 말씀해 주고 계신 겁니다. 

▲정리하면, 여러분은 이제 왜 이 바리새인인 시몬과, 
죄인이라 불렸던 이 여인이 
완전히 다른 태도로, 예수님을 대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불러 식사 대접을 할 정도까지는 존중했지만, 
예수님을 향한 그의 섬김은 거기까지였어요. 

예수님을 향한 시몬의 섬김이, 거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스스로의 죄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또한 예수님을 통해 죄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 내에서, 정말 차가운 마음으로, 
(참된 그리스도인도 때때로 마음이 차가워질 때가 있어요. 제가 그걸 말하는게 아니라) 
교회를 오래 나오셨지만, 예수님을 향한 섬김이 언제나 거기까지신 분들이 있어요. 
언제나 차가운 분들이 있어요. 마음이 항상 차가워요. 어디에도 뜨거움이 없어요. 

그리고 언제나 섬길 때, 항상 선을 그어요. '하나님, 저는 여기까지만 섬깁니다. 
만약에 교회를 나올 시간과 내 취미생활에 겹치면, 저는 항상 취미생활을 선택할 거예요. 
여기까지예요.' 

'하나님, 제가 헌금 드릴 텐데, 저는 요.만큼 밖에 못 드려요. 
제가 즐길 거 많아요. 그래서 요만큼만 드리겠습니다.' 

봉사할 수 있어요. 불쌍한 사람 도울 수도 있죠. 
'하지만 제 시간이 남을 때만 도와드릴 거예요. 제가 조금이라도 바쁘면 
제 시간은 절대로 더 이상 못 드려요.' 라는 분들이 있어요. 

본문의 시몬의 모습이에요. 
나름 주님을 섬겨요. 예수님께 음식 대접하고 있죠. 

하지만 그 어디도,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없어요. 
자 그런 분들은, 아직 죄의 용서를 경험하지 않았을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반대로 죄인으로 불렸던 여인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어요. 
그녀는 만약 자신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예수님을 섬기면,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 할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과 죄의 용서의 구원을 경험한 그녀에게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아니죠. 두려워요. 

근데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이, 그녀의 마음에 생겨났죠. 
바로 자신의 죄를 용서한 예수님의 사랑이죠.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여러분이 예수님 섬기실 때, 두려울 때가 있어요. 
창피한 일을 당할지 모를까봐 두려울 때가 있어요. 

그럴 때 그것을 이겨낼 원동력이 뭐라고요?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죠. 
나의 그 큰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그 크신 은혜로 인하여, 
내가 그를 너무 사랑하여서,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자의 변화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전도 그렇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분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 섭니까? 못 서요. 

다른 사람들 앞에 나가서 어떠한 행동도 못해요. 집안에서만 조용히 있죠.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거는 죽기보다 싫죠. 

이제 여자를 보세요. 온 동네 사람들이,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손가락질하던 죄인이에요. 
돌을 던지던 죄인이에요. 부정하다고 가까이 하기도 싫었던 여자예요. 

그런데 그 여자가 지금 예수님께 나아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용기를 갖고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세요. 그게 뭡니까? 

바로 이게 변화입니다. 어떤 변화에요? 
참되게 구원을 받고,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들만이 보일 수 있는 그 변화를, 이 여자가 경험하게 된 겁니다. 

죄의 용서를 참되게 경험한 그녀는, 
이제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그 어떤 장애물도 두려움 없이 뛰어넘을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것이죠. 


◑5. 죄 용서를 참되게 경험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참된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완전한 죄 용서를 경험한 '죄인'이라 불린 여자와, 
-거룩한 종교지도자로 불린 시몬이 
예수님을 대하는 차이는 어떻습니까? 

44절에서 그 차이를 한번 보세요.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물-눈물 비교

 

여자의 겸손한 모습을 보세요. 
1세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샌달 신고 다니던 곳이었어요. 
발이 흙으로, 땀으로 더러워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눈물로 씻고요, 자기 머리털을 풀러서 닦고 있어요. 

45절, '너는 내게 (얼굴에)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 어디에 지금 줄곧 입을 맞추고 있어요. 
예수님의 그 더러운 발에 입을 맞추고 있어요.   *얼굴-발 비교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으나, 
그런데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기름-향유, 머리-발 비교

여러분, 향유는 굉장히 비싼 거였습니다. 
사실 이 여자가 나름 돈을 꽤 모았었어요. 향유가 있었다는 것은 돈을 꽤 모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지금 예수님의 머리도 아니에요. 
예수님의 발에, 그 더러운 곳에 부었어요.

무슨 뜻이냐면, 여자는 자신이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을 만질 수 없는 
더러운 죄인임을 알았던 거예요. 

대신에 예수님의 발만이라도, 예수님의 가장 더러운 부분이라도 
만지고 섬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던 거예요. 

예수님의 가장 더러운 부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그것을 깨끗하게 만들고, 
섬기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던 거예요. 차이가 보이시죠?

시몬은 이거보다 더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럴 자원도 충분히 있었어요. 
(머리에 기름을 붓고 예수님 입을 맞출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여인은 반대의 모습을 보였죠. 완전 다른 모습을 보였죠. 
그 섬김의 차이가 우리 눈앞에 선명해 보입니다. 

자 이 차이가 어디서 기인한 거죠? 
47절 '그러므로 내가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 (용서 받아 왔다: 현재 완료)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 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여러분, 예수님 사랑하고 싶으십니까? 한 가지만 아시면 돼요.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죄를 용서 받았는지... 그 한 가지만 아시면 돼요. 

그렇다면 이 죄 많은 여자가, 죄의 용서를 경험한 이유가 뭐라고요? 
50절에 나오죠.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해왔다. 평안히 가라' 

자, 믿음이었어요. 앞서 이미 말했듯이 
예수님께서는 반복해서 현재완료 시제를 사용하시면서
이 여자가 섬김으로 인해 구원받은게 아니라, 울어서 죄용서 받은게 아니라 
그 전에 이미 구원받았음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여인이 많은 죄를 용서받게 된 이유가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믿음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순서를 헷갈리시면 안 돼요. 아주 중요한 순서죠. 
1) 먼저 믿는 거예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요. 그 뒤에 일어나는게 뭐죠? 
2) 바로 죄의 용서를 경험하는 거예요. 
3) 세 번째는 사랑하는 겁니다. 

여러분 죄 용서 받기 전에, 예수님 사랑하라는게 아니에요. 
죄 용서 못 받았으면 사랑 못해요. 
시몬이 그래서 예수님 사랑 못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섬길 수 없던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있었죠. 
그녀가 예수님을 참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이 여인의 뜨거운 사랑과 섬김을 마주하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합니다.
'이 여인과 우리가 다른게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여인이 경험한 구원과, 죄의 용서와, 
우리가 경험한 구원과, 죄 용서의 차이점이 뭐죠?

차이가 없어야 돼요. 여러분 우리는 동일한 예수님을 믿고요.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고요. 
동일한 죄의 용서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적용/  여러분, 이 여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예수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우리의 모든 것을 던져 예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거예요. 왜요?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죠.

이 여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모든 것을 던져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왜요? 

우리가 안수 받아서의 목사 돼서요? 신학을 공부해서요? 아주 특별한 뭐 환상을 봐서요? 
아니죠. 죄의 용서를 받아서요.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쉽게 얘기하죠. '나 예수님 믿어요. 나 죄 용서 받았어요. 나 구원 받았어요.' 

여러분, 쉽게 얘기하는 거 좋아요. 그 고백 좋아요. 
근데 '내가 믿습니다'라는 고백에, 열매가 어떻게 돼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 예수님을 사랑합니다'가 돼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믿음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생물을 만들어냅니다. 
살아있는 사랑이, 내 안에 시작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내가 믿습니다' 하는데, 사랑이 없어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백날 고백하는데,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어요. 
예수님을 향한 섬김이 없어요. 그럼 뭐예요? 
내가 말하는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의 어떤 종교적 의식이나 종교적 행위가 중요한게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있으시죠? 예수님 믿으시죠? 
자 그 믿음을 어떻게 증명하실 거예요? 예수님을 사랑함을 통해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경험을 하셨어요? 
죄의 용서를 경험하셨죠. 구원을 경험하셨죠. 

자 여러분, 그거 하나면 되는 겁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뭐였어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단 한 가지' 

여러분, 그 단 한 가지가 뭐예요? 
바로 죄의 용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에 이르렀다면, 그걸 믿는다면, 
그거 한 가지만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경험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겨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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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39절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에서 헬라어 본문은 가정법을 사용하죠.
헬라어 문법적으로 2종 조건문입니다.

조건문에는, 1종 조건문이 있고, 2종 조건문이 있는데 
1종 조건문은 가능한 가정문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내가 내일 월마트 가면 (제 딸에게) 너 장난감 사줄게' 
가능한 이야기죠. 내가 월마트에 갈 수 있어요. 그리고 사줄 수 있어요. 그게 1종 조건문이에요. 
근데 지금 바리새인 시몬은 1종 조건문을 사용하고 있지 않아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언자라면' 에서 2종 조건문을 사용합니다. 

뭐냐면 이런 거예요. '내가 만약에 새라면 훨훨 날아갈 텐데...' 
2종 조건문은, 불가능한 이야기를 말할 때 사용하는 거예요.

그런 일이 안 일어날 걸 알고, 얘기하는게 2종 조건문이에요. 
지금 그 2종 조건문을 시몬이 그리스어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언자라면' .. 불가능한 상황을 전제하고 얘기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