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도서요약, 천국의 열쇠

LNCK 2024. 3. 20. 18:50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한달 한권 책읽기 - YouTube

천국의열쇠(A.J. 크로닌) - YouTube

 

◈ <천국의 열쇠>         마16:19        도서 요약글 스크랩

A J 크로닌의 대표적인 작품 <천국의 열쇠>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책입니다. 
그 이유는 인생의 문제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어떤 작가보다 명확하게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제게 책 한 권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없이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꼽을 겁니다. 
그만큼 이 책은 저의 '인생책'이기도 하고, 삶의 의미를 명확하게 제시해준 책이기도 합니다. 

제가 한 명의 목회자로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천국의 열쇠>에 나오는 프란시스 치점 신부를 닮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제 인생의 가장 값진 평가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록 A J 크로닌이 가톨릭 작가여서, 개신교와 약간 교리의 차이가 있지만
이 책이 주는 감동은, 그 교리의 차이를 뛰어넘고도 남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다 정리할 수는 없지만, 영상에 너무 익숙한 우리들이
이 책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그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하루, 마음을 먹고, 이 책을 읽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그 어떤 시간보다도 귀한 의미를 주리라 확신합니다. 

또한 이 책은, 왜 희망과 소망이 다른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맨 마지막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설 <천국의 열쇠>는 1938년 9월,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프란시스 치점 신부가, 자기 인생을 회고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높은 지위도 아니고, 가진 재산도 없는 보잘 것 없는 프란시스 치점 신부의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

▲프란시스 치점은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영국의 스코틀랜드는, 개신교 중에서도 장로교가 강한 지역이었고 
종교개혁 이후에 가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피의 보복을 행했던 그런 역사를 가진 땅이었습니다. 
프란시스 치점은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와, 개신교 신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의 가정에서, 종교는 아무런 갈등이 되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신앙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개신교도들이었던 마을 사람들은, 가톨릭 교도였던 프란시스의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왜냐면 100년 전에는 가톨릭이 장로교를 박해했지만,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가톨릭 신자가 마을에 나타나지 않도록 경고를 하기도 했고, 그들을 혐오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어린 프란시스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믿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일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종파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존경하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다. 
서로의 종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서로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아버지는 아주 착한 사람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아버지를, 마을 사람들이 해치려는 것일까?' 

프란시스는, '종교'라는 말 앞에 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죠. 
따뜻한 피가 돌고 있는 심장 한복판에, 갑자기 예리한 칼이 박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죠.

'같은 하나님을 제각기 서로 다른 방법으로 예배한다고 해서 
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것은 어린 프란시스에게, 자기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수수께끼였습니다. 
프란시스는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프란시스의 어린 시절 친구는 안셀모 밀리(중요 인물, 기억하세요)였습니다. 
안셀모 밀리는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프란시스와는 아주 대조되는 인물입니다. 

안셀모 밀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의 외아들이었고, 
성당에서는 언제나 신앙심이 좋다고 칭찬을 받던 꼬마였습니다. 

그는 어린이 성가대원이었고, 기도할 때면 무릎을 꿇고 언제나 눈물로 기도하는 어린이였습니다. 
그래서 성당 수녀들은 안셀모가 '꼬마 성인'이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습니다. 

안셀모와 프란시스의 다른 모습은 어린 시절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이렇습니다. 
안셀모는 신이 나서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열심히 기도를 했지만, 
프란시스는 불현듯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안셀모는 프란시스를 가리켜 '나의 제일 친한 친구'라고 하는데도 
안셀모의 지나친 신앙심 앞에서, 프란시스는 왠지 이상한 불편함을 느낄 뿐이었죠. 

주일학교에서 안셀모가 '나는 구세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찬미합니다'라는 열정적인 말을 했을 때 
프란시스는 자기 호주머니 속에 있는 유리구슬을 만지작거리면서 
온몸이 빨개지도록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꼬마 프란시스와 안셀모의 비교되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평화로운 프란시스의 가정에 먹구름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비가 많이 내리던 날 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폭행을 당해서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 후에,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폭우로 인해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 가고 맙니다. 

다음날 이 부부는 서로를 껴안은 채, 강변 모래사장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된 프란시스 치점은 외할아버지 집으로 보내집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났습니다. 프란시스를 맡아서 키우고 싶어 했던 폴리 고모가 있었지만 
그 집의 재산과 유산을 탐낸 미세스 글레니(외가쪽)가 프란시스의 양육권을 가로챘고, 
그렇게 프란시스는 그녀의 집에 살게 되었던 겁니다. 

미세스 글레니는 교회에 가면, 순교자와 같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지만 
집에 오면 망나니 같은 자기 아들 말콤을 극진하게 대합니다. 
13살이던 프란시스는, 지독한 편애를 경험하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미세스 글레니는, 프란시스가 학교에 다니는 비용도 아까워서 
그를 조선소에 보내 돈을 벌어 오도록 강요합니다. 

이 어린 시절에 프란시스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던 친구는 
약국집 아들 윌리 탈룩이었습니다. (나중에 의사가 되어 중국에 와서 치점을 도웁니다)

탈룩은 '조금씩 돈을 모아서 그 집을 떠나라'고 프란시스에게 조언합니다. 
프란시스는 그 집을 떠나려고, 조선소에서 번 돈을 차곡차곡 몰래 모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기차 티켓을 구입하려는 순간 
이제껏 자신의 모아두었던 돈을, 미세스 글레니가 가로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프란시스는 영양실조로 인해서 야위어 갔고 늑막염을 앓게 됩니다. 
이때 폴리 고모가 나타나서, 프란시스의 병원 진단서를 보여주면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폴리 고모 덕분에 다시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된 프란시스는 
그녀의 바람대로 가톨릭 사제가 되는 길로 들어섭니다.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을 한 겁니다. 

▲그렇게 신학교에 들어선 프란시스 치점은, 
어린 시절의 친구 안셀모 밀리를 거기 신학교에서 만나게 됩니다. 

안셀모 밀리는, 어린 시절부터 늘 그랬듯이 장학생이었교, 
교리에 충실한 모범적인 학생이었습니다. 

반면 프란시스 치점은, 무조건 믿으라는 것에 대해서는 늘 고민하고 다시 생각하는... 
다시 말해서 신학교에서 볼 때는 문제 학생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고, 신학교에 입학해서도 
이렇게 프란시스 치점과 안셀모 밀리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둘은 신학교를 졸업해서, 안셀모 밀리 신부와, 프란시스 치점 신부가 되었습니다. 
프란시스 치점은 탄광마을에 부임했고, 그곳에서 키저 신부를 돕는 보좌신부가 되었습니다. 
키저 신부는, 탄광 마을에서 이런 존재로 묘사됩니다. 

「키저 신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종교를 하나의 공식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것은 내면적 깊이나 정신적 의미가 전혀 없는 완고한 것이었다. 
'순종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 
이것이 그의 마음이 새겨진 신조였다. 

탄광 마을의 성당이라, 가난한 데다가 상당한 빚을 지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아무리 운영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신자들에게 협력을 구해야 했지만, 
키저 신부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호소하는 대신, 
자신이 타고난 사나운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어 마구 화를 냈다. 

강론 때에도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그 완강한 턱을 앞으로 쑥 내민 
도전적인 자세로 신자들의 열심 부족과 게으름을 나무라며 이렇게 설교했다. 

'당신들이 지금 앉아 있는 이 성당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기여하고 있습니까? 
헌금을 나한테 내라는게 아니고, 하나님께 바치라는 겁니다. 

나는 헌금함에서 은화를 보고 싶습니다. 시시한 동전이 아니라, 번쩍거리는 은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헌금을 많이 낸다면, 이보다 더한 선행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 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키저 신부와 그 마을 신도들의 마음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키저 신부와 달리 치점 신부는, 
오지와 벽촌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동시에 한밤중에도 성당에서 홀로 기도하는 생활을 조용히 이어나갑니다. 
사람들을 심방하고, 한밤중에 기도하는 치점 신부의 모습은 
키저 신부와 갈등을 더욱 키울 뿐이었습니다. 

한밤 중에 성당에서 기도하고 나오던 치점 신부를, 키저 신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어딜 갔다 오는 건가?" 
"성당에 다녀옵니다." 

"뭐라고, 이 한밤중에?" 
"안 됩니까? 제가 하나님을 깨우기라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프란시스는 미소를 띠려고 애썼다. 

"아니, 자네는 지금 나를 깨운 걸세"  (같은 사택을 쓰는 모양)
그리고 키저 신부는, 그동안 참았던 분통을 터트렸다. 

"제발 그만두게, 이런 어리석은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이곳을 수도원으로 생각하면 정말 곤란하네. 
기도하고 싶으면 낮에 하게. 
자네가 내 밑에 있는 한, 밤에는 조용히 잠을 자게!" 

프란시스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격렬한 반발을 꾹 참았다. 
그리고 곧 자기 침실로 돌아왔다. 
이곳에서의 '선행'이란 자기 자신을 억제하며  *선행은 가톨릭의 강조점
윗사람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았다. 

그는 키저 신부의 정직하고 고지식한 면, 동정에 대한 철저한 결벽증 같은 
좋은 점만 생각하는데 주의를 집중시키려고 애썼다.」 

▲그렇게 탄광마을 교구에서 사역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치점 신분은 성 도미니크 성당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곳에서 치점 신부는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결점 많은 성직자'였던데 반해서 
안셀모 밀리 신부는 순종과 성실함을 인정받는, 신뢰받는 성직자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리아의 우물 사건'이 터집니다. 
병을 앓던 한 소녀가, 안셀모 밀리 신부의 기도에 의해서 마리아의 모습을 보게 되고 
말랐던 샘물이 생겨났는데, 그물을 마시자 소녀는 그 병에서 낳았고 
소녀의 몸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난 상처와 똑같은, 거룩한 상처인 성흔이 생기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밀리 신부와 주임 신부가 조작한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면, 더 능력 있는 성직자 라는 평판과 함께 
승진할 수 있는 야심으로 인해서... 둔갑된 그런 기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미심쩍어 했던 치점 신부는, 이것의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기로 합니다. 
의사였던 친구 탈룩에게 이 소녀의 상태를 문의해 본 결과,
이 소녀는 조울증을 앓고 있었고, 
'마리아의 샘물 사건'은 기적이 아니라, 그저 지하수가 흘러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치점 신부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신앙을 더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지냈다. 
자기도 아무 고통스러운 투쟁 없이, 아무런 의심 없이, 
밀리 신부처럼 무조건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뭐든지 그대로 태평스럽게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니, 자기도 믿어야 할 것은 믿고 있다. 
다만 외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밑바닥부터 철저히 믿고 싶은거다. 

남을 사랑하려고 무던히 애쓸 때, 
목욕통 속에 더러운 벼룩이 우글거리는 것 같은 빈민굴에서 힘껏 일할 때, 
병자나 불구자 같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때만큼은 그래도 마음속에 신앙을 느낀다. 

그러나 현재 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 어딘지 미심쩍은 일은 
내 신경을 몹시 날카롭게 할뿐, 아무런 신앙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내 속에 있던 기쁨조차 시들게 하고 있었다.」

이 소녀를, 성공과 승진의 기회로 삼았던 안셀모 밀리 신부에 비해서, 
소녀 그 자체를 불쌍하게 여겼던 프란시스 치점 신부는, 참 대비되는 성직자였습니다. 

▲이렇게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걷습니다.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밀리 신부는 주요 요직에 배치됩니다. 

그러나 프란시스 치점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중국으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1902년, 중국으로 치점 신부가 파송될 때, 
밀리 신부는 해외 선교국 책임자 자리에 있었습니다. 

치점 신부의 전임자였던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로울러 선교사는
해외 선교국 국장인 안셀모 밀리 신부에게, 선교 보고서를 보냅니다.

그 편지를 받아 읽고 나서, 
안셀모 밀리 신부는, 치점 신부에게 편지를 합니다. 

「치점 신부가 파송될 중국 파이탄의 성당은, 설립된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출석교인 수가 4백 명에, 세례를 받은 사람이 1천 명을 넘었기에,
꽤 괜찮은 선교지다」 라고 안셀모 밀리는 치점에게 알려줍니다. (가톨릭은 출석율이 낮음)

그렇지만 치점 신부가 도착한 중국 파이탄은, 선교 보고와는 너무도 다른 곳이었습니다. 
성당은 폭우로 인해서 무너져 있었고, 세례 교인이 1천 명이라는 것은 
사실 돈으로 사람들을 동원해서 세례를 받게 했던 숫자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 선교의 공공연한 관행이었고, 
중국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그들이 쥐어주는 돈 몇 푼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전임자였던 로울러 신부에게 돈을 받으면서 성당 일을 도와주었던 왕씨 부부는 
새로 부임한 치점 신부에게도 돈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믿음을 가진 체하는 것은, 기회주의자에 불과한 것이라 보고, 
치점 신부는 돈을 주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왕씨부부는, 그 지역에서 가톨릭 교회와 치점 신부에 대해서 온갖 나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닙니다. 

치점 신부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파이탄에서 선교를 시작했지만, 
아무런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곳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작은 진료소를 세웁니다. 
폴리 고모로부터 받았던 얼마의 돈을, 
의사 친구였던 탈룩에게 보내서, 기본적인 의료용품과 약을 받았습니다. 
진료소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조금씩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지역에 유지였던 사람의 아들을, 치료해서 목숨을 구해주게 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실 이 사람은, 이 지역에서 상당한 재력가였습니다. 

자기 아들의 생명을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가 신자가 되겠다고 했지만, 
치점 신부는, '믿음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성당 부지를 마련해주고, 아담한 성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성당을 완공하자, 선교본부에서 3명의 수녀를 파송합니다. 
독일인이었던 베로니카 원장 수녀, 프랑스 출신의 클로틸드 수녀, 

벨기에 출신의 마르타 수녀가 파송되어 왔습니다. 

독일의 명망있는 귀족 출신의 베로니카 수녀는, 
치점 신부가 허드렛일을 솔선수범하고, 중국 사람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성직자의 위엄이 없다고 불만을 가졌습니다. 
치점은, 베로니카 수녀의 태도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베로니카 수녀는 그곳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고, 
취점 신부는 성직자의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동역자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파이탄에 페스트가 창궐합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파이탄에는 시체들이 쌓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치점 신부는 그곳에 구호소를 세우고, 의사 친구였던 윌리 탈룩을 부릅니다. 
치점 신부의 요청에 탈룩은 의료봉사대에 지원해서 파이탄에 도착합니다. 

치점 신부와 탈룩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고치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완고했던 베르니카 수녀도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의사 탈룩은 위생과 방역에 주력하면서, 페스트의 위기를 극복해 나갑니다. 
그렇지만 친구 탈룩이 페스트에 감염됐습니다. 탈룩은 죽음의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회개를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치점 신부는, '인간이 괴로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회개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입술의 회개보다, 마음 진심의 회개를 강조한 것임)

탈룩은 자신이 신앙이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치점은, 탈룩에 선한 행위로 인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길 거라고 말합니다. 
(입술의 신앙보다, 탈룩의 삶과 행위의 신앙을 강조한 것임)

그 대화에 베로니카 수녀는, 치점 신부의 말은 교리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기에 
파이탄을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베로니카 수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의 태도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의심스러운 것 뿐이에요. 
탈룩 의사의 임종 때 하신 말씀이라든가, 
그리고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하신 말씀도요. 
그분은 믿음이 없는 자였습니다. (아마 가톨릭교회에 입교하지 않은 자)
그런데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말씀을 신부님이 하셨어요. 
신앙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분에게요." 

그러자 치점 신부는 대답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도 판단하실 겁니다." 

베로니카가 대답했다. 
"그분은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도대체 그리스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 아니었나요?"

치점이 말했다. 
"당신의 정의대로 한다면, 기독교 신자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7일 중에 하루만 교회에 나가고, 나머지 6일은 거짓말도 하고, 중상 모략으로 남을 속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겁니까? 탈룩은 적어도 그런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을 돕다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말이죠." 

"치점 신부님, 그분은 자유주의자였어요." 
"베로니카 수녀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을 당시에, 
그 시대의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유사상가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형을 당하셔야 했던 겁니다."」 

▲그러던 중에 페스트는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이탄에 폭우가 내렸고, 아담하게 지었던 성당은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때 고위 성직자의 위치에 있었던 안셀모 밀리 신부가, 선교지 시찰로 파이탄을 방문했습니다. 
다시 마주한 치점과 밀리 신부는, 너무도 다른 위치,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치점 신부는 선교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밀리 신부는 선교 보고를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같은 나이였지만, 한 사람은 나이보다 훨씬 늙고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이보다 훨씬 젊고, 세련되고 품위 있는 고상한 성직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지 시찰을 마치던 안셀모 밀리는, 치점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선교본부에는, 선교지의 회심자, 세례 받는 사람의 수, 
선교 성과를 나타내는 그래프가 그려져 있는데, 
치점 신부는 가장 실적인 낮은 성직자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치점 신부도, 다른 선교지처럼, 돈을 들여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해서 
실적을 높이라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점이 가난한 중국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있으면, 
성직자의 위엄과 품위가 전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옷을 입고, 하인들을 들여서라도, 성직자의 위엄을 갖출 것을 충고합니다. 

그 말이, 치점 신부의 마음을 칼날처럼 후벼 팝니다. 
그러나 치점 신부는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베로니카 수녀의 오빠였던 백작은, 거금을 들여서, 그곳에 성당을 재건하도록 했고 
이들은 학교와 고아원을 세워서, 사람들을 섬기는 선교사역을 파이탄에서 계속 감당합니다. 


▲그때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그동안 사이가 데면데면 했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친밀감이 없이 예사롭다)
프랑스의 클로틸드 수녀와 벨기에의 마르타 수녀는 돈독한 사이가 됐습니다. *연합국 측

두 사람은, 독일 출신의 베로니카 수녀와는 냉랭한 관계가 됐습니다. 
성당에서는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기도해야 될지, 독일을 위해 기도해야 될지 
수녀들은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클로틸드 수녀는 프랑스 신문을 꺼내면서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이것은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추기경이 발표한 성명서예요. 이렇게 나와 있어요. 
'사랑하는 동포여, 프랑스군과 연합군의 전우들이여!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우리를 도와 
오늘의 위대한 발전을 이끌어 주셨다. 이 고난의 때를 맞이하여 
하나님은 다시 한번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이때 베르니카 수녀도 지지 않겠다는 듯, 독일 신문을 꺼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프랑스 추기경이 일방적인 견해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어요. 
다만 저도 들려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쾰른, 뮌헨, 에센의 대주교님들의 공동성명서입니다.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의 국민들이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요된 이 정의의 전쟁에서 
우리와 더불어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조국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최후까지 싸우기를 제군들에게 명령한다.'" 
(*같은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가 쇼비니즘에 빠져서, 서로를 적으로 여김)

그러자 치점 신부가 소리칩니다. 
"그만, 그만하시오. 하나님도 그런 제멋대로의 호소에 이미 질리셨을 겁니다. 
저는 당신들의 추기경님이나, 대주교님들의 견해를 비난하지 않겠습니다. 

그 높으신 분들에 비하면, 저는 이름도 없는 인간이고, 
중국의 황무지에 있는 가련한 스코틀랜드 사제일뿐입니다. 

그렇지만 당신네들은 왜 느끼지 못합니까? 
이런 행위들의 어리석음과 야비함을... 왜 올바로 판단할 수 없습니까? 

우리 거룩한 가톨릭 교회가, 아니 세계의 기독교 교회 모두가
이 세계대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성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직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사도인양 신자들을 축복해서 
전쟁터로 보내어, 영혼과 육신이 갈기갈기 찢기며, 서로 죽이고 파괴하게 하고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 그러면 너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으리라' 
교회마저 강단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가이사는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산지나, 콩고의 고무를 욕심내는 재벌가와 정치가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랑을 설교하고, 인간의 인류애를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죽여라. 없애 버려라. 증오로 대항해라.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찔러라' 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국가의 모든 교회와 대성당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의 아부하는 자와 비겁한 자들(성직자)의 외침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흐릅니다. 파이탄에 함께 있었던 베로니카 수녀가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소식이 들려옵니다. 

베로니카 수녀가, 로마의 시스티나 수녀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안셀모 밀리 신부는, 본국 큰 성당의 주임신부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치점 신부는 여전히 파이탄에서 평범한 사제로 있었고, 
성직자로서의 위엄이 전혀 보이지 않는, 늙고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안셀모 밀리는, 치점 신부가 휴가를 얻어서 로마를 방문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에, 치점 신부는, 그토록 방문하고 싶었던 성지 로마 방문을 꿈꾸고, 
베로니카 수녀를 만날 생각에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전보가 나라들었습니다. 치점 신부가 로마를 방문하는 기회가 취소되고 
그 자리에 밀리 신부가 대신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윗선과 가깝게 닿아있었던지라, 위에서 봤을 때 
로마를 방문하는 기회가,
오지에 파송된 치점 신부보다는, 
유능하고 품위있는 밀리 신부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릅니다. 

치점 신부는 자신의 인생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이 인생을 허비한 것은 아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자신의 인생이 죄 때문에 불행한 것은 아닌지... 
답을 찾을 수 없는 박탈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세상을 떠납니다. 
폴리 고모가 세상을 떠났고, 
클로틸드 수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치점 신부는, 30여년의 선교 세월을 마치고, 파이탄을 떠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사랑했던 사람들의 무덤 밖에는 없습니다. 

맨 처음 파이탄에 왔을 때, 로울러 신부의 선교 보고처럼, 개종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치점 신부의 헌신적 흔적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시점 신부와의 이별을 눈물로 안타까워 하고 있었습니다. 

떠나는 치점 신부에게 사람들이 말을 건넵니다. 
"내세가 어떤 것인지, 저는 지금까지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세가 있다면, 그곳에서 신부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가게 될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500명의 신자들이, 치점 신부가 떠나는 모습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지켜봅니다. 
그들의 모습이, 치점 신부에게는 중국에서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리고 늙은 몸을 이끌고 치점 신부는 고향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밀리 신부를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치점 신부는 늙고 남루한 모습이었던 반면 
밀리는 고위 성직자여서, 비서를 통하지 않고서 함부로 만날 수 없는 그런 신분이었습니다. 

만나자고 했던 시간은 오전 11시였는데, 시계는 벌써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밀리 신부는 12시 50분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는 고위 성직자다운 고상한 위엄이 있었고, 치점의 외모에 비해서 훨씬 젊고 품위 있어 보였습니다. 
그는 리무진을 타고 다녔고, 스웨덴 안마를 받으면서, 최고의 음식을 먹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밀리 신부는 선교 보고서 이야기를 꺼냅니다. 
'치점 신부가 36년간 파이탄에서 개종시킨 신자의 숫자는, 
전임자였던 로울러 신부가 5년간 개종시킨 숫자보다 훨씬 더 적다'는 지적을 남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은 비슷하게 출발해서, 지금 이만큼의 위치까지 올랐는데, 
치점은 선교사로서도 실패했다는 그런 의미를 남긴 겁니다. 

그리고 1시에 고위 정치인들과 점심 약속이 있다면서, 그 자리를 바쁘게 뜹니다. 
그가 탄 검은 리무진 자동차는, 급히 그곳에서 출발했고 
그 차는 흙탕물을 치점 신부의 몸에 튀기고 떠납니다. 

치점 신부는 기도합니다. 
"오 주님, 평생에 단 한 번의 소원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저의 뜻을 제발 이루어 주소서!"

(신앙은 죽을 때까지도 갈등한다는 뜻?)

▲<천국의 열쇠>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치점 신부의 삶의 궤적이 너무 깊이 느껴지고, 
그래서 그의 마음이 너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무엇인가가 콱 박힌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초라함, 서글픔, 비굴함, 자괴감, 박탈감, 무력감... 
이런 감정을 평생 안고 살아온 치점 신부의 마지막 기도는 

"오 주님, 제발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저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
라는 기도에, 마음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는 것에 동의하게 되는 것은 
프란시스 치점의 삶이, 결코 실패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천국의 열쇠>는 프란시스 치점과 안셀모 밀리라는 대비되는 두 인물을 보여줍니다. 
밀리 신부가 희망의 상징이라면, 시점 신분은 소망의 상징입니다. 

밀리 신부의 인생을 성공했다고 말한다면, 
치점 신부의 인생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밀리는 언제나 그 시선이 미래를 향하고 있었지만, 
치점은 바로 이 순간, 현실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 다를 겁니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천국의 열쇠>일까요? 
하나님은 어떤 인생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열어 가실까요? 
프란시스 치점일까요, 안셀모 밀리일까요? 

한국 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프란시스 치점일까요, 안셀모 밀리일까요? 
나의 모습은 누구와 가까울까요?

이 책을 읽어 보시기를 진심으로 추천드립니다.
이 책 속에는 전쟁, 질병, 가난, 기근, 배신 등이 추상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을 읽으실 여러분들에게 감히 이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묵묵히 걸어가신다면, 여러분들은 승리자이고, 
천국의 열쇠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마16:19절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죠.
그에게 교회를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 현실에서, 밀리 신부가 교회를 맡고, '천국의 열쇠'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현실에서는, 치섬 신부가 결국 '천국의 열쇠'를 받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