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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시대를 사는 신앙인

LNCK 2024. 3. 21. 20:00

03/17/24 [설교] “양극화 시대를 사는 신앙인"  - YouTube

 

양극화 시대를 사는 신앙인      행5:33~42      2024.03.17.

▲도입 일화

20여 년 전에 뉴저지에서 작은 백인교회를 목회할 때, 독일계 교인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네 자녀가 있었는데, 자녀의 배우자들이 인종과 종교가 각각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가톨릭, 한 사람은 유대교, 또 한 사람은 불교인, 또 하나는 무슬림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닌데, 그냥 자녀들이 각자 원하는 대로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제가 처음 부임해서 심방을 했더니, 그 교우님이, 자기 자녀들의 그런 사정을 제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이들이 모이면, 저는 같이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할 주제를 얘기합니다. 
하나는 정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종교 문제입니다.
이 문제만 나오면, 아이들이 논쟁을 하고 결국 싸움으로 비화됩니다. 
그래서 어느 해부터인가 그것을 철칙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니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그런 이야기 할 수도 있지..., 
그게 싸울 일인가?' 하고 속으로 제 혼자 생각을 했습니다. 

정치 문제와 종교 문제는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미국 남부로 계속해서 많은 중남미 난민들이 몰려드는 이유가 뭡니까? 

중남미 나라들의 정치가 망가지다 보니까, 자기 생명을 내걸고 탈출하는 거 아닙니까? 
정치 문제와 종교 문제는, 각각의 사람들의 삶에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 식구들끼리 허심탄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하지요. 
저는 그 가정의 어머니가 매우 의견이 강한 분이어서, 
'아마 자녀들이 어머니의 완고함을 배웠나 보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것이 일부 사람들의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2003년 즈음의 일입니다. 

◑양극화 문제로 곳곳에 마찰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정치와 종교 문제로 인한 논쟁과 분열,
이것은 미국과 한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아마 인터넷의 영향인듯
그것을 우리말로는 양극화, 폴로라이제이션이라 그렇게 부르지요.  polarization

사람들의 생각이 완전히 양극단으로 나뉘어 있어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의견이 다르면 헤어지던가/ 싸우던가 .. 둘 중 하나밖에는 다른 옵션이 없게 된 것이죠. 
그로 인해서 정치적인 견해의 차이로 인해서 부부가 나뉘고,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고, 
형제자매가 다투며 갈라지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수십 년 동안 쌓은 우정을, 한 순간에 원수로 바꾸게 되고요. 
한 자리에서 모여서 기도하며 찬송하던 교우들이, 서로 얼굴을 붉히고 싸웁니다. 

담임목사나 혹은 교회 중직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공공연하게 표현해서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것도, 요즘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종교로 인한 갈등과 분열은, 그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종교 분쟁이 있었고,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도 심한 분열이 있었죠.

 

사람이 어떤 한 종교에 깊이 심취하게 되면,

자신의 종교를 절대화하게 되는 경향으로 흐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는 물론이요, 다른 종교라도, 종교 이슈로 자기 목숨 버리기를 불사합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의 중요한 갈등과 전쟁은, 모두 종교로 인한 것이다' 라는 말이 
결코 지나친 과장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근대화 이후 한국에 종교분쟁이 없는 것은 참 다행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종교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한 나라도 있고요. 
북한 같은 나라에서는, 아예 종교를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몇 해 전부터, 한국 사회에 보수와 진보의 첨예한 갈등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정치 문제이든, 종교 문제이든, 혹은 다른 어떤 사안이든, 
자신의 확신을 절대화시키는 경향이 심해졌다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에 문제입니다. *비하해서 근본주의, 원리주의, extreme 라고 부르죠.  

확신은 좋은 것입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과 결정의 과정입니다. 
인생은 그 각각의 선택과 결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죠. 

그런 확신이 없으면, '선택 장애' 혹은 '결정 장애'를 겪게 되고, 
중요한 결정과 선택에서 머뭇거리다가 시기를 놓치고 실패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 확신이 너무 지나쳐서, 
다른 사람도 모두 자신과 같은 생각, 자신과 같은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1%도 허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 권력으로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려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선을 넘으면 '확신범'이 되지요. 
우리 시대의 문제는 잠재적인 '확신범'들이 많아졌다는데 있습니다.

  *확신범 :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자기 확신이 결정적 동기가 되어 일어나는 범죄

◑본문 설명 : 확신에 찬 두 부류, 산헤드린과 사도들

 

('사도행전 말씀 동행'의 진도를 따라 읽은) 오늘 본문에는 

두 편의 확신이 충돌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은 오늘의 양극화 시대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거울 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면
이 시대를 지혜롭게, 바르게 사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을 전한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행5:11절~

그 두려운 사건으로 인해서, 믿는 이들이 개인적인 삶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성령께 온전히 깨어 있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더욱 민감해지고, 충만해지니까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고, 
그로 인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되었고, 
믿는 이들은, 거룩하고 진실한 언행을 통해서,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칭송하더라' 5:13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다시 잡아서 옥에 잡아가둡니다. 
그들은 수개월 전에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풀어준 적이 있지요. 4:18

하지만 그 경고와 협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고, 그들의 공동체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성전권력자들은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사도들을 붙잡아서 공의회 앞에 세웁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전혀 굽힐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죽인 자는 바로 당신들이요!' 라고 고발하면서 그들의 양심을 흔듭니다. 

사도들의 태도의 격분한 공회원들이, 나사렛 예수를 처치한 것처럼
이 사도들도 처치하려고 합니다. 
주모자 Jesus 를 제거한 마당에, 추종자들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막 동조하는 기색을 보이자, 
가말리엘이 등장해서 좌중을 진정시킵니다. 
그는 사도들을 내보내게 하고는, 공회원들을 설득하지요. 

가말리엘은 바울 사도가 회심하기 전에 배웠던 스승이었습니다. 
당시 율법교사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공회원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겠지요. 
한 사회에 이런 권위를 가진 원로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가말리엘은, 과거에 메시아를 자처해서 문제를 일으켰던 드다와 유다의 이야기를 하지요. 5:36~37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이 진짜 메시아인 줄 알고 따랐는데, 결국은 가짜로 드러났고 
그들이 처치되자 그 운동이 다 사라졌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요.
이 사람(사도)들에게 손을 떼고,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 사람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스스로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가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  5:38~39

가말리엘은,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서 격분해 있는 공회원들에게,  
'여러분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가말리엘 자신도, '사도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즈음 되었을 때 가말리엘은 
'혹시 내 확신이 틀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던 겁니다. 

예수를 처형한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가만히 보니 
'혹시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가말리엘은, 자신이 확신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틀릴 가능성이 있다면, 
그 확신을 가지고 극단까지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에 하나 자신들이 틀렸는데도 극단까지 밀어붙였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격분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중재하려는 노력은, 종종 양쪽 모두에게서부터 욕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흥분해서 들썩거렸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잠잠해집니다. 
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높임 받던 가말리엘이 
'우리가 틀릴 수도 있음을 잊지 맙시다' 라고 얘기했을 때 
감히 누가 나서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설득을 당하고, 
그리고는 사도들을 불러다가 매질을 한 다음에, 
다시 한번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고, 설교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준 다음에 풀어줍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0

▲하지만 사도들은 전혀 주눅들지 않습니다. 매질을 당하고 나오면서 
사도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1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 집 저 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습니다. :42 

이게 웬일입니까?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매질 당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느끼고 기뻐했다는 겁니다. 

이런 이상한 자부심과 기쁨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로 인해서 오히려 기뻐한
이 이상한 현상을 여러분은 경험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목격해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얼마 전에 수년 동안 장애를 겪고 있던 남편을 보내신, 교우님의 말씀이 생각이납니다. 
70대 여인의 힘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남편의 수발을 드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분을 뵈올 때마다, 그분의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어렵지 않으냐'고 물으면 
'몸은 힘들지만 마음과 영혼은 기쁨이 충만하다'고 하셨습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하다 보니, 기쁨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고통 중에 맛보는 그 이상한 기쁨을, 그분은 제게 증명해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배우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높은 존재(주님)라면 
그분을 위한 희생과 고통은, 기쁨일 뿐만 아니라, 큰 영광이 됩니다.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을 찾아가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나를 좀 써 달라고' 부탁을 하지요. 
한동안 그를 지켜본 김구 선생은, 얼마 후에 윤봉길 의사를 불러서 
'내가 지금 거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이 거사를 임자에게 맡겨도 되겠소?' 그렇게 질문을 하지요. 

그때 윤봉길 의사가 '그 말씀을 들으니, 저는 가슴에 번민이 없어지고, 제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그렇게 답을 했다고 하지요. 

'내가 믿고 존경하는 선생이, 나를 믿고 그 일을 내게 맡겼으니, 
그리고 내 희생이, 내 사랑하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니... 
그렇다면 내 한 목숨 바치는 것, 그것은 자부심이요. 기쁨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하면,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 때문에 고난받을 때, 
그것을 영예로 여기고 기뻐했다는 이 이상한 현상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사도들은 그분을 위해서 고난을 자초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분이 탁월한 지혜와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위해서, 내가 손해를 감수하고, 고난을 자초할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론 자신의 생계를 버리고, 자기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 따라다닌 이유는, 그분을 통해서 자기가 출세할 그런 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체포되자, 모두 다 달아난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의 일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제자들의 눈이 열리고 보니 
예수님은 위대한 예언자나 훌륭한 율법교사 정도가 아니라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영원한 제국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장차 영원한 나라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그들 가운데 찾아오셔서, 자기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 영원한 나라를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과거에 하신 일을, 대신해서 계속 이어가도록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슬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져갈 자신 같이 미약한 존재들을, 
하나님의 그 영원한 일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전부가 되셨고, 절대가 되셨습니다. 
그것은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를 믿어주고, 거사를 맡긴 것과는 비할 수 없는 영예가 되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열심을 내어 그리스도 예수를 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확신을 봅니다. 
-한편에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확신이 있고요. 
-다른 한편에는 사도들의 확신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며 무리를 선동하고 있는 

  영적인 사기꾼이라는 확신이 있었구요. 
-다른 한편에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된 구원자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의원들은, 자신들의 확신에 근거하여 
자신들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박해하고,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위 밑줄과 비교)
그들(반대 의견자)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모욕을 당하거나 박해를 당해도,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그것을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들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확신과 다른 점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이 <확신의 충돌>에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이 이길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사실 이 확신의 충돌로 인해서, 나중에 오랜 세월을 두고, 사도들은 하나 둘 순교를 당합니다. 
충돌할 때마다 깨지는 쪽은 사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끝내 이긴 사람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렀던 사람들은 
죄악을 쌓아갔던 것이고, 

그들(확신범)이 주는 불이익과 고난을 감수하며 
자신의 신앙을 따라 산 사람들은, 의를 쌓아갔습니다. 

가말리엘이 경고한 대로, 그들은 자신의 확신으로 인해서 
결국 하나님을 맞서는 잘못을 범하게 된 것이지요. 

◑적용

 

특별히 어떤 중요한 선택이나 결정을 할 때, 
그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그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확신에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그렇고, 신앙적인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확신이 지나치면, 악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처럼 양극화가 심한 시대에는, 더욱더 자기 확신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에 대해서, 분명한 의견을 가지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우리가 이해하는 것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확신이 도를 지나지 않도록,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그르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저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확신이 혹시나 지나쳐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 분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내 마음이 어떠한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본문의 공회원들처럼, 언행이 폭압적으로 나아간다면, 확신범이 될 가능성이 99%죠.

만일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이 내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면, 
경계선에 와 있다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고 하는 불안감을, 어떻게든 잊어버리려고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죠.

그것을 인정하면 극단 extreme 으로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게 만듭니다. 

그것은 '지는 것'이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그래서 눈 질끈 감고, 내가 옳다고 칼을 휘두르는 것이지요. 

정치적인 문제이든, 종교적인 문제이든,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나의 의견을 확신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의견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견에는 언제나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확신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진리는 스스로를 증명하는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그 진리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따라서, 그 진리를 따라 삶으로 
진리가 스스로 말하게 할뿐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양극화가 극심해진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두 가지 모순되는 과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 하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살라'고 하는 부름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마5:8

불행하게도 미국에서나 한국에서 믿음이 좋다는 이들이,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신의 의견을 절대화시켜서 다른 사람들을 혐오하고, 배척하고, 박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인해서,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기독교를 혐오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두고, 마음 아파 합니다. 
하지만 마음 아파하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상황이 변화되도록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의 의견을 절대화시켜서 다른 사람의 설 자리를 빼앗고, 
인격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데까지 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말리엘처럼, 
자신의 의견을 과신한 과신한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려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손에 쥔 칼을 내려놓게 해야 합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해주고, 협력하며, 
공동선을 이룰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그렇게 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호소해야 되겠지요. 

2)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과제는 
진리를 더욱더 독실하게 따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고 인정해 준다'는 말은 
내 믿음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대상은, 나의 의견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나의 의견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깨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다만 나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나게 해서 
다른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논쟁도, 협박도, 회유도, 박해도 아닙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분이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가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 때 
믿는 이들은 때로 손해도 볼 수 있고, 모욕도 당하고, 박해도 당합니다. 

하지만 내 의견이 아니라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그런 고난을 당할 때, 손해를 당할 때, 본문의 사도들처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궁금해 할 것입니다. 
'예수가 무엇이길래, 저 사람들은 저토록 자신들을 희생하는가? 
저렇게 고난 당하면서도, 저렇게 손해 보면서도, 저렇게 불편해 하면서도,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의문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에 대해 주목하게 만들고, 
그때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본문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 
에워싸여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절대화 시켜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혐오하고, 협박하고, 압살하려고 합니다. 

이런 시대가 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은 더욱더 그렇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기에, 우리는 더욱 조심스럽게, 더욱 면밀하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의견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신지를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신실하게 믿고 의지하여 
우리의 언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고집과 아집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우리의 속삭임을 통해서 전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확신에 차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주먹을 내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포용의 두 팔을 활짝 벌려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신다'고 하는 믿음이 있어야만 
그것을 믿는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염려하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모든 믿는 이들의 기도요,
소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절대화시키고, 목청 높여 부르짖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타도하자고 외치는 것은.. 그것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그냥 자기 감정을 따라 행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묵묵히 자신의 모든 언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필요해진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평화의 도구로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은, 이 어려운 과제를 우리 마음에 담고 
우직하고 충성스럽게, 그리고 넉넉하고 따뜻한 품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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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을 어느 설교에서 듣고서

지난 15년간 사회, 또는 교회, 또는 가정이나 동창회 같은 

사람 모이는 곳에서 지켜보았는데,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어떤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윌리엄 보세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①당신이 아는 사람 중 25%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당신을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②다른 25%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설득하면 당신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③다른 25%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럴 듯하게 설득하면 당신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④마지막 25%는 언제나 당신을 좋아하며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끝까지 당신 편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를 분석하면

아무리 성자요, 위대한 인물이라도 그를 지극히 싫어하는 층이 있는가 하면

(약 25%, 이것은 사실입니다. 마더 테레사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를 무조건 지지하는 층이 있습니다

(약 25%, 이것도 사실입니다. 외국 독재자를 존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②, ③번은 소위 유동적, 또는 부동(浮動)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건에 따라서 그를 좋아했다가,

또 마음을 바꾸어 그를 싫어했다가 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신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확신범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런 부동층의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호감을 갖게 하여

나의 지지자로 만드는 길은 → "소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신 있게 행동하면, 나를 좋아하지 않다가도 설득되어

결국 나를 좋아하게 될 것이고 (위의 ②),

 

소신 없이 이리 저리 흔들리면, 나를 좋아 했다가도 설득되어

나중에는 나를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위의 ③).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인데,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심적으로 무척 괴로운 일입니다.

 

목회자들은, 설교 시간에 인상 쓰며 설교자를 노려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설교가 듣기 싫다는 내색으로 성경책을 계속 뒤지는 등의 불쾌한

행동을 표출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관록 있는 설교자는, 대개 설교를 귀담아 듣는 성도를 쳐다보고

설교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에서 부아가 일어나서 평상심을 잃게 되고

결국 설교를 망친다고 합니다.

 

바울의 경우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갈 4:14)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도 그를 싫어하고 미워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 대해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도 했습니다(빌 1:17).

런데도 바울이 굴하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것은,

그런 와중에도 자기를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영접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도 평소에 자기를 노려보는 사람보다는,

우러러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는 얘기입니다.  

 

사람 사는 사회는 아무리 잘해도, 반대파는 있게 마련이고,

아무리 못해도, 지지파는 있게 마련인 모양입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삽시다!

너무 억지로 반대파를 지지파로 만들려 하지 말고,

그런 일은 좀처럼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더 큰 분란이 일어나니까요.

 

윌리엄 보세이의 말을 확대 해석하면

그런 시도가 모두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는 언제나 어디서나 지지파/반대파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선한 천사라 하더라도,

무조건 나를 반대하는 사람은 25%는 있다는 것입니다. 어딜 가더라도요.

그 25%는 내버려두고 살아야지, 그들을 설득하고, 대화하고... 그런 시도가 헛되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