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끝까지 견뎌내라 계2:10 2024.03.17.스크랩, 정리 ☞ <인내, 오래참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도입 : 요한계시록을 써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에 예수님께서 보내신 그 편지 오늘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나누면서 정말 기억해야 하고 붙들어야 할 요한계시록,
아니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당시 핍박으로 혼란한 시대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우리 주님께서 쓰신 목적이 희망과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진행 중이며,
대만이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는 여전히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The world is under God’s control!
오늘 이 시대가 이 계시록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 시대는 너무너무 힘들고 흔들리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곳곳에서 전쟁의 이야기들, 재난 소식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여전히 통치하고 계신다’라는 그 메시지가
우리에게 가장 큰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로 재난과 기아와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 박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다고 박해하는 것을 우리는 피부적으로 느끼지를 못하지만,
세계에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박해 가운데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의 7명당 1명씩, 박해를 당하고 있는데
그 숫자가 3억 6천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중에 3억 1200만 명은 목숨을 걸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1990년대는 한 40여 개의 나라가 예수 믿는 것을 금했다면
2023년에 76개 나라가 예수 믿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박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미래에 정말 희망이 필요한 이때
우리에게 복음이 들리는데, 그것이 오늘 요한계시록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혼란한 시대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우리 주님께서 쓰신 목적이 희망과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그 이후
우리 주님께서 소망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셔서 이 편지를 쓰셨다면,
‘이 요한계시록을 전달 받은 이후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최근에 라오디게아 지역의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주1)
특히 라오디게아 교회터는 활발하게 발굴 작업 중입니다.
최근에 발굴한 교회는 놀랍게도 그 규모가 상당히 큰 데다가
바닥의 모자이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초대 교회로 사용되던 눔바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까지
발굴이 가능할 것같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골4:15~16
최초 라오디게아 교회로 사용되었던 눔바의 집은, 가정집이었을 것이고,
지금 발굴 중인 바닥 모자이크가 깔린 규모가 큰 교회당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초대교회 박해기(1~3세기)에도 살아남았고,
그 이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새로 발굴된 교회는 고대 바실리카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교회 바깥 입구쪽에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AD 343년부터 381년까지 있었던 라오디게아 공의회(Council of Laodicea AD.343-381)
에서 결의된 60가지 교회법령 (Canon) 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AD313년 기독교 공인이후에 콘스탄티누스는 종교회의를 주재하여
기독교 진리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습니다.
AD 321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고
AD 343~381년 까지 교회법령들을 결의하는 ‘라오디게아 공의회’를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역사적으로 무시 못할 가치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께서 ‘미지근해서 내가 너희들을 내 입에서 토해버리고 싶다’고 말했던
그런 혹독한 지적을 받았던 교회잖아요. 계3:16
그런데 그 편지의 쓴소리가 약이 되었던 것인지,
나중에 (비록 2세기가 지난 후이지만) 라오디게아 공의회가 일어났고
거기에서 신조, 즉 우리가 믿어야 할 그 내용들이 결정되었으며,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 *AD 321, 삼위일체론 정립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곳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공인 이후인 4세기 초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번성의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고와 예수님의 말씀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까?
우리도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미지근한 상태에 있고, 큰 문제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문제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셔도,
이 라오디게아 성도들처럼 변화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예수 믿고 감옥 가는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고 멈추게 하는 그런 유혹들,
이런 문제들 앞에서 흔들리고 견고히 설 수 없을 때
오늘 우리는 이 메시지와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설 수 있었다면 우리도 설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변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변할 수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저 설교자는 이 말씀, “죽도록 충성하라, 즉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이 말씀이
예수님이 일곱 교회에게 주신 결론적인 메시지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메시지이기도 하죠.
우리 주변의 상황들이, 정말 중간에 포기하고 주저 앉고 싶은 여건들이 있지만,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라는 거죠.
△본문 계2:10절은 손양원 목사님의 좌우명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본명은 손연준입니다.
1939년 애양원 목회자로 부임한 후,
그는 본래 이름인 ‘연준’을 애양원의 이름을 빌어 ‘양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여수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건물에 가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현판이 박혀있습니다.
「1950년 9월, 애양원 부흥회 마지막 토요일 날 설교본문은 계2:10절이었습니다.
이 설교가, 손목사님의 거의 마지막 설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주 수요일 날 잡혀가셔서, 15일 후에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그래서 이 설교는, 평소에 손목사님이 정말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나환자 성도님들에게 ‘유언처럼’ 남겨졌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설교에서, ‘순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감을 주셨고, 기도로 미리 순교를 준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때가 왔다. 순교를 각오하라.
우리가 이제껏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 받았으니,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순교할 때다.
잘 살려고 노력 말고, 잘 죽기를 원하라...’
이 마지막 설교는, 평소에 아버지 손 목사의 생활신조였습니다.」 (손동희 권사 간증에서)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선배들의 위대한 신앙유산을 물려 받아서,
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서도 ‘죽도록 충성하는’ 그런 후배들이 계속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가장 최초로 받았던 서머나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이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계속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에, 이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은 누구입니까?
이렇게 우리가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앞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환경은 ‘죽도록 충성해야’하는,
우리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미래이기 때문이에요. 히12:4참조
◑어떻게 맡겨주신 사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죽도록 충성하고, 내가 받은 사명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나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저는 아래 3가지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1. 발로 굳게 서 있으라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나 요한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참음.. 다른 말로 ‘인내’인데요. 헬라어로 휘포모네 죠.
이 말은 ‘아래서(휘포), 머무르다, 함께하다(메노)’의 합성어죠.
어떤 무겁고 힘든 일이나 물체가 있는데,
그 아래서 떠받혀주는 일, 버텨주는 일,
누가 떠받치고 있는데, 그를 도와서 함께 떠받치는 일에 동참하는 일.. 등을 나타냅니다.
큰 압력을 견디고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그랬다는 것이죠. ‘참음에 동참’ 1:9
아무리 큰 박해가 있고, 버티고 서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고 할지라도
굳게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바스테의 40명의 순교자
예를 들면, AD 320년 니키니우스 황제가 통치할 때
튀르키예 세바스테라는 지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로마 12군단이라는 강력한 군대 안에 40명의 크리스천이 Caesar is my Lord라고
고백하는 것을 거부하고 Jesus is my Lord라고 사람들 앞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건입니다. 그때 그 지역 총독 아그리콜라는 이들의 옷을 다 벗기고
연못 얼음 물속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추위 고문을 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이라도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면,
거기에서 나오게 해서 옆에 있는 사우나 온천수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살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40명의 군인들이 그 연못 얼음 위에 벌벌 떨면서 서 있던 그중에
군인 한 명이 도저히 못 있겠다며, 연못에서 나와서 옆에 있는 사우나 안으로 들어갔습니다.(위 그림)
총독은 ‘이제 39명밖에 안 남았구먼’ 하고 웃을 때
그들을 지키던 군인 중 한 명이, 자기 옷을 다 벗었습니다.
군복을 벗고 저들과 똑같은 속옷 바람에 그곳으로 뛰어가면서
Jesus is my Lord라고 말하며 “총독이여 여전히 40명이 서 있습니다.”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고 견디는 있는 사람,
예수님과 함께 견고히 서 있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는 비결은 이렇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계1:9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환난과 참음에 동참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과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 문화혁명이 1966년도에 일어났습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 당국은 크리스천들을 말살시키려고 했습니다.
교회를 다 불태우고 믿는 사람들을 처벌했고, 선교사는 추방했으며 성경은 불태웠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당시 크리스천은 약 100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드디어 문화혁명이 끝났습니다. 과연 모두 말살되었을까요? 아니면 몇 명이나 남았을까요?
놀랍게도 5천만 명의 크리스천이 되어서 우리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들은 모두, 밧모섬의 사도요한과 같이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2.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라
계1:17 ‘내가 그분을 볼 때 나는 죽은 사람처럼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자기의 오른손을 내게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I am)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18. 나는(I am)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으나 보라,
나는(I am) 영원토록 살아있는 자니 나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볼 때 죽은 사람처럼 거꾸러졌어요.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을 보는 우리들의 태도여야 합니다.
왕 중의 왕이시요, 주님 중의 주님이신 그분 앞에 엎드러지고,
그분 앞에 마치 죽은 것처럼 되는 것. 그것이 주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죽은 것처럼 엎드려져 있을 때
주님께서 사도요한에게 하신 것이
‘그분이 자기의 오른손을 내게 얹고 말씀하셨다’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랑의 손, 그 능력의 손, 자비의 손, 따뜻하신 그의 손,
그의 손을 우리의 어깨에 갖다 대신다는 말씀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는(I am)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으나 보라, 나는(I am) 영원토록 살아있는 자니
나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셨어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죽은 듯이 엎드려졌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깨에 그의 사랑의 손으로 만지시면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를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I AM 때문이에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다.’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주님이 내 곁에 살아계시기 때문에’
‘오늘 이 현실 상황에, 내 곁에서 나를 터치하시고, 말씀해주시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두려움에 직면해라. 그래야 이긴다. 두려움에 맞서라.’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래서 이겨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두려움에 직면하지 말고, 두려워질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직면하십시오.
주님을 만나서 주님 앞에 고꾸라질 때,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주님의 터치를 느낄 때,
신기하게도 나를 짓누르던 모든 두려움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축구 경기나 구기 종목 운동하는 사람들은 공에 항상 집중합니다.
공에 집중하지 않으면, 경기를 잘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사명자가 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주2)
▲3. (귀)를 크게 열고 들으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 번째 귀를 크게 열고 들으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2장과 3장에 걸쳐서, 일곱 교회에 7번이나 말씀하셨어요.
성경에 이렇게 7번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글쎄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 칭찬하신 것,
그리고 권면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주로 무엇이었습니까?
첫사랑을 회복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회개하라,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굳게 붙잡으라,
미지근하지 말고, 뜨거운 열정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어요.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를 옮긴다는 말씀은 너의 구원을 빼앗아 버리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며, 교회가 그 영향력을 상실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영향력이 상실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7교회에 주신 메시지가 각자 다르듯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와, 교우들에게 주시는 것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그 메시지, 그 경고의 말씀을 ‘듣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했잖아요.
그저 소리를 듣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순종한다는 뜻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이키고, 그 경고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지는 결과가 있다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경고했는데도, 말을 안 들으면, 그럼 좋지 않은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부모가 있습니다.
좋지 않은 부모는, 평소에 경고를 한 번도 안 하다가
갑자기 어느 날 자녀에게 화를 내고 역정을 냅니다.
또 어떤 부모는 매일 경고를 남발하는 겁니다.
아주 잔소리를 지겹도록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좋으신 주님께서는,
꼭 필요한 경고만 때맞춰 우리 각자에게 해 주십니다.
경고가 없다는 것은, 롬1장 말씀처럼, 포기하고 내버려두셨다는 거죠.
여러분들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각자를 돌이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음성에, 우리 주님의 이 경고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경고를 무시했던 타이타닉호 (1912년 4월 15일 02:20)
타이타닉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였는데 침몰되었죠.
타이타닉호가 침몰되기 직전까지 경고가 수없이 날아들었으나 이를 무시했고
결국 빙산과 충돌하여 안타깝게 침몰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그 경고들은 이렇습니다.
① 12시(정오) : (무선 경고) “빙산과 수많은 빙원(운동장만큼이나 큰 빙산 덩어리)이
지금 떠다니고 있습니다.”
② 17시 30분 : (다른 배로부터) “세 개의 큰 빙산이 남쪽으로 8km 지점에 떨어져 있습니다.”
③ 17시 38분 : (또 다른 배로부터) “큰 두 개의 빙산, 우리가 그 빙산을 지나왔습니다.
그 빙산이 위치해 있는 곳은 이곳입니다”
그런데도 타이타닉 호는, 이 경고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당시 세계에서 제일 컸으니, 자만했던 것일까요?
④ 21시 5분경 : (또 다른 배에서부터) “우리는 지금 멈춰 서 있고
우리는 빙산에 갇혀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⑤ 그 무전이 온 후에 곧이어 (마지막 경고) “얼음은 너무너무 무겁고 큰 덩어리입니다.
거대한 빙산이 있음을 당신들에게 보고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무전 경고에 이 타이타닉호의 무전 기사가 보낸 대답은
“Shut up Shut up I’m busy 시끄러워 시끄러워 나 지금 바쁘단 말이야”
그리고 곧 부딪혀서 침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경고를 보내실 때가 있습니다.
그 경고는, 침몰하지 말라는 것이요,
그 경고를 무시하다가는.. 결국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타이타닉 호가 그 증거죠.
그래서 계시록은 이렇게 7번이나, 각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의 눈은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하고,
우리의 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
주1) ‘라오디게아’ 이름의 유래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에 속한 도시다.
안티오쿠스 2세(Antiochus 2 B.C 261-246)가 주전 261년 과 253년 사이에
이 도시를 재건한다.
디오스포리스(Didspolis)로 불리웠던 이 도시는
안티오쿠스 2세가 자기 아내인 라오디케(Laodike)의 이름을 따라
라오디게아(Laodicea)로 명명했다.
라오디게아는 부르기아(Phryghia)의 수도였다.
그리고 리커스(Lycus) 계곡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로서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알려져 있다.
남쪽으로는 히에라폴리스가, 서쪽으로 골로새가, 그리고 동쪽으로는 에베소가 위치해 있다.
큰 도시들 사이에서 상업도시로 자리매김 한것이다.
주2)
요한계시록을 읽거나 또는 공부할 때 어려운 점은 여러 가지 많은 이론 때문이죠.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환란 면제설, 환란 통과설,
과거주의적 해석, 미래주의적 해석,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 ‘음녀’, ‘666표’ ‘일곱 뿔’ 이런 것들이 무엇인가?
그런데 그런 것들에 너무 초점을 맞추다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점을 놓쳐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그들의 해석과 그들이 발견한 진리와
그들의 사상과 그들의 종말론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어떤 것(something)이 아니라, 어떤 분(someone)에게 있다는 그 사실을 잊지 맙시다.
사람들으 해석이나, 어떤 사람의 종말론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용어나 상징적인 그 단어들 모르시죠?
짐승, 뿔, 666... 자세히 몰라도 돼요.
왜냐면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희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과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라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