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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타고 입성하신 왕 막11:1-10, 15:13 ☞종려, 부활 설교모음
*종려주일의 시대적 배경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스크랩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모든 것은 시장”이라는 표어입니다.
시장중심의 경영, 시장 중심 정치, 시장 중심 교육, 시장 중심 종교 등
시장권력이 인간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소비자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어떤 분야든 살아남기 힘든 세상입니다.
시장에 자신을 팔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상품화 시킵니다.
인간의 욕망 속에 새로운 시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던 당시 유대 사람들
예수님이 지상 생애를 살 당시의 유대인의 시대정신은 <자주 독립>이었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총독은 빌라도였습니다. 그는 AD 26~36년까지
총독자리에 있으면서 최고의 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세제 개혁을 통해, 주민의 수와 재산 상태를 조사하여
2년 동안 소출의 1/4을 내게 했답니다. 세금이 유대 주민 수입의 25%입니다.
로마가 유다 지방에 책정한 농지 증세액이 6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낭비를 일삼은 헤롯 1세의 수입은 1,0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1달란트는 1만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한 가족의 하루 생활비이니까
6백만 명의 금액입니다. 헤롯은 더욱 심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과도한 세금 징수는, 경제적 절대 빈곤을 초래하였습니다.
극심한 기근에 고통당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수치스러운 것은 로마 황제에게 납세하는 것이었습니다.
무거운 세금은, 극도의 反로마 감정을 일으켰습니다.
세금 징수는 유대의 독립 주권을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로마에 대한 혐오감을 극에 달했고, 그 하수인인 세리들까지 경멸하였습니다.
▲로마의 앞잡이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에서 39년까지 통치했는데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고, 이것을 비난하는 세례 요한을 처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눅13:32
정치적으로 긴장의 연속이었으며 민심은 쉽게 동요되었습니다.
▲‘로마의 식민 지배’와, ‘유대사회 지배 계급’의 착취와 억압으로 인해
서민들은 이중적인 고통에 신음하고 극도의 빈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에서는 성전세를 거두었는데
A.D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성전에 얼마나 금이 많았는지
함락 이후에 시리아의 모든 지방의 금의 가치는
이전의 절반으로 평가절하 되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배계급은 성전에 축적된 부를 독점하고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로마의 식민 통치에 굴복하며
자신들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한 것입니다.
이럴 때 당시 사람들의 시대정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 같은 왕이 나타나 민족을 구원해 주길 원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한 로마를 무너뜨리고
사악한 헤롯 왕가와 로마의 앞잡이들을 제거하고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이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대했습니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 23:5-6)”
당시 사람들은, 이런 예레미야의 예언을 묵상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주며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결국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병을 고치시며,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민중들은 어쩌면 예수님이 메시야 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청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바다를 잠잠하게 했데.”
“귀신을 쫓아냈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였데.”
“죽은 자를 살리셨대.”
“문둥병 환자를 고쳐 주었데.”
“바리새인들을 묵사발 만들었데.”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녀도, 당국자들이 그 집회를 해산시키지 못했데.” 등
각종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어쩌면 그분이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일 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이때 (종려주일)는, 유월절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있었습니다.
토요일이 유월절이니, 종려주일은 유월절을 6일 가량 앞두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 축제일입니다.
유월절은, 우리나라의 광복절처럼,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민족을 생각하는 절기이고, 해방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절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당시 유대 인구가 100만~125만이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도성의 인구는 적게는 2만5천명 ~ 많게는 1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되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모이기 때문에
적어도 2십만 정도의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합니다.
유대 백성들은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이번 유월절에는 대단한 사건이 벌어질 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유월절은.. 독립을 생각게 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독립)하면서, 유월절이 제정되었기 때문이죠.
제자들도 그런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좌의정 우의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막10:37
로마를 물리치고 불의한 정권에 철퇴를 가해
민족을 해방시킬 메시아 일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이제 예수님께서 유월절 맞이하여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벳바게는 예루살렘 남쪽 1.6KM까지 온 것입니다.
감람산은 해발 800M로,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보이는 곳입니다.
감람산은..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의 도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슥9:9; 14:4).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슥 14:4)”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유대에 계실 때 대체로 예수님의 숙소로 제공되었던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또한 베다니에는 문둥이 시몬의 집도 있었습니다. 이미 기적을 일으킨 곳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불렀습니다.
제자들은 혹시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선택받은 설레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의 압제를 제거하고 왕이 될 터인데
선발대로 뽑혔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왕이 될 터인 데 “내가 측근 중의 측근으로 뽑혔구나”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혁명을 위한 특별한 지침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거 그들은 마카비 혁명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안티오쿠스 4세가 할례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긴 어머니는 아기와 함께 처형했습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게 했고
성경책(당시는 구약 낱권)을 소지하는 것조차 금지하였습니다.
더욱 그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희랍의 최고신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을 세우게 하고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주전 167년 유다지역의 작은 마을 모디인(Modiin)에서 ‘마타디아’라는 제사장이
이방제사를 거부하고. 그의 다섯 아들이 주동하여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마카비 혁명’입니다.
게릴라식 기습공격으로 결국 3년간의 투쟁 끝에 ‘유다 마카비’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성전 안의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제거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권력을 물리친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도 이런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그 때 마타디아는 다섯 아들과 혁명을 시작했는데
지금 예수님에게는 12명의 제자가 있고, 따르는 수많은 군중이 있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카펫으로 깔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나온 무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다니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와 권력자들의 폭정에서 구해낼 메시아로 생각하고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왕의 행차를 위해서입니다.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어떤 사람들은 밭에서 베어낸 잎사귀 많이 달리 나무 가지를,
어떤 사람들은 들에 있는 나무 순을 깔았습니다.
왕의 입성을 환영하는 카펫을 깔아 놓은 것입니다.
일부 군중들이 왕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흥분하였습니다.
뒤에서 따르는 자들은 소리 지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구하소서”라는 말입니다. 10절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장차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메시아’를 기다리며 빨리 임하기를 기원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외세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제2의 다윗 왕으로 환대하고 그 나라가 번영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침으로 그들의 간절성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땅에 다윗왕국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이 나타나게 하소서.”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상 생애에서 마지막 받는 환대입니다.
환호하는 이런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은 감정이 무척 상승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로마 정권을 물리쳐 버리고 헤롯 왕가를 제거하고
진정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해 보겠다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누가 이 정도 환호해 주면, 얼마나 살맛나게 신나게 일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비위가 상한다는 것입니다. 꼴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원수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은 날이 올 것을 보고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을 보며 환호하지만
예수님은 멸망될 세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면,
살기 좋은 새로운 세상이 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앞으로 디도 장군에게 망해 버릴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애통해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예수님의 결말
세상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고 환호했던 군중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환호하던 입술이 바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막으라!” 외쳤습니다(막15:13).
인간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며, 눈물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옷을 벗어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며 환호했던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다 배반하고 도망을 가버립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찾아가 용서해 주시고 사명을 부여해 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제자들을 다 모아 놓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이들이 변화되어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하여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쉽게 변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고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우리를 초청해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1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찬449장)
(후렴)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2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 일어도 / 예수 나의 힘 되니 겁낼 것 없네.
3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 말아라 /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무엇일까요?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가정,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직장이 무엇일까요?
모든 부정부패가 살아지고 힘으로 통치하여
정의와 공정한 분배가 실현되는 나라일까요? 아닙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모시고
죄 용서함 받고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일에 나를 쓰시길 원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순종함으로 이루어드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적용
▲신조어로 어플루엔자(affluenza)라는 말이 있다.
‘풍요’를 뜻하는 affluence 와 ‘유행성감기’를 뜻하는 influenza의 합성어 입니다.
이른 바 ‘풍요병’입니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회는 전환기,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2005년 경
지금 사탄이 덧뿌린 풍요병이란 독초(가라지)를 제거하지 못하면
구미 서구의 기독교가 갔던 그 길을 우리도 그대로 답습할 것입니다.
지금 정부와 농가는 조류독감 (Avian Influenza)을 예방하거나
잡으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풍요독감 Affluence Influenza=Affluenza 을 예방하고 잡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주의, 풍요병'를 경계하고, 배격해야 될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주의'와 정반대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반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15년 동안,
그렇게 성장을 부르짖고 풍요를 강조했지만
반대로 교회는 성장하지 못했고, 성도들의 정신적 빈곤감은 더 커져 왔습니다.
마13장에 하나님의 나라 비유는 그것이 저절로 성장한다고 했는데,
한국 개신교는 지난 10년간 저절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풍요병에 걸린 신자들은, 종려주일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호하며,
예수님이 자기들을 풍요롭게 잘 살게 해 줄 메시야로 기대한 군중들과 똑 같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언제나 ‘부자로 만들어줄 대통령’을 기대하며 뽑습니다.
그건 불신자라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과거에 한 번 호되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성도들마저, 예수님을 ‘나를 부자로 만들어줄 구세주’로 기대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외치며 환호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의 절반 정도는
자기가 진정으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퇴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임상보고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감정도, 그리고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가 죄가 됩니다.
이런 죄책감과 억울함과 분노와 원망과 원한은 갖가지 질병을 초래합니다.
분노의 감정이 계속되면 인체는 서서히 산성화되어서
효소의 활성도를 떨어뜨리고 각종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감소되어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사회도 죄용서의 선언들이 없으면, 해결할 수 없는 갈등들이 계속될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내 죄를 사하시고, 나를 자유케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정말 무리들을 규합해서, 이스라엘 독립을 이뤄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무리들이 진정 자유함을 얻게 되었을까요?
아니죠. 그들은 로마에서 독립을 얻었는지 몰라도,
여전히 죄책감과 억울함과 분노와 원망과 원한에 속박이 되어서,
정신적으로 또한 육체적으로 여러 가지 질병과 묶임과 노예로 살았을 것입니다.
과거에 중국과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조선족, 고려인들은
일생에 소원이 단 한 가지 있었는데, (*당시 비자받기 어려웠음)
그것은 ‘죽기 전에 고국 대한민국 땅을 한 번 밟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주민등록증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20년 전 당시에,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소원했던 한국 땅,
그 땅에 이미 살고 있었던 국민들,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었던 5천만 국민들은
정말 천국을 누리고 있었나요? No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북한 땅에서 목숨 걸고 탈북한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서 살지 않고, 더 나아보이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또 이민을 가는 것입니다. 거기 가면 뭐가 달라질까요?
계속 그렇게 하다보면 ‘국제 미아’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종려가지를 들고 환호하는 무리들에게
그들이 오매불망 소원하는 ‘이스라엘 독립’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죄에서 자유함 받고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나는 오늘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천국이 다른 데 있을 것 같아서, 샹그릴라나 무릉도원에 가면
거기가 천국일 것 같아서... 여전히 헤매고 다니는 ‘국제 미아’는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이 있었던 윌리엄 케리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케리는 구두수선공으로 일하면서 독학을 했습니다.
독학을 하면서도 그는 여러 나라의 언어를 꾸준히 공부하여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까지 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케리의 친척 동생이, 자신이 들어가기로 한 옥스퍼드의 단과대학에
케리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은 단과대학의 한 유명한 어학교수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 교수는 케리의 어학실력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독학으로 한 나라도 아닌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케리를 보면서
그 교수는 “당신이 이 학교 옥스퍼드에 들어오면, 이 나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요.
그리고 이 나라의 여왕께서도 당신을 기뻐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말에 케리는 이렇게 거절하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말씀하셨는데
제게는 이미 저의 전 생애를 건 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는 여왕보다 더 높으신 분의 부름을 받았고 그분을 향한 저의 충성은 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케리는 그 교수의 제의를 거절하고 세계 선교를 위해서 인도로 떠났습니다.
사적인 세속적 욕망보다 또는 개인적인 명성과 성공의 필요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택하는 능력 이것이 위대함입니다.
포기함이 있기에 위대함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최고의 결과가 산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욕을 넘어 사명만을 보시고
거기에 헌신하셨기에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