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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은 그분께 있다

LNCK 2024. 3. 25. 20:54

https://www.youtube.com/watch?v=DU-BdscFG4I

나의 자랑은 그분께 있다               창29:31~35, 렘9:23~24         2023.06.26.

◑'능력주의 세상'이 기독교적인가요?

우리가 사는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를 '능력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한 사람의 가치가,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능력주의의 문제'를 지적해 왔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들이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이 The Tyranny of Merit 이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우리말로는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에서, 

마이클 샌들은 "능력에 따라 대우 받는 사회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능력을 키워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좋은 사람들 중 대다수가, 좋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좋지 않은 조건에서 자랐기 때문에 
능력을 키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능력대로 대우하는 것은 처음부터 공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이클 샌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사회에서 능력이 부족해서, 덜 가지고 덜 누리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배려를 하고 정책을 펴서, 좀 더 공정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주장을 합니다.

마이클 샌들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어보면, 센들이 유대-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어떠해야 된다'하는 그의 이상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개인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대해서 가장 불편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왜냐면 기독교 신앙은, 자기 능력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셨고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그 '절대적 가치'에 따라서 대우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고에 물들면, 자신의 어떤 능력을 키워서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접 받기를 원합니다.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으면, 그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선망하게 되고 
그들과 어떻게든 줄을 대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열등감을 안고 패배자로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떤 점에서 능력이 탁월하면, 그는 정도 이상의 대접을 받게 되지요. 
그것이 우리 사회를 고도경쟁사회로 만들고, 양극화 현상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능력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능력치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대우 하는 것은 
우리의 죄성에서 나온 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1등이 되기 위한 숨가쁜 경쟁의 대열에서 벗어나서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얻고, 
경쟁에서 뒤쳐진 이들을 따돌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절대적인 가치를 회복하도록 돕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꼽히는 요소 중의 하나는 '외모'입니다. 
과거에 한국에서 여성사원을 뽑을 때, 신문광고 채용공고에 항상 붙어 다니는 조건이 있었지요. 
"용모 단정"이라는 조건입니다. 

지금은 외모 차별을 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이런 미국적 사고방식의 눈으로 보면, 
당시 '용모단정' 광고는, 얼마나 후진국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남성들이 배우자를 찾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외모지요. 
여자들도 좀 그런 경향이 있어서 잘 생긴 남자를 찾습니다.

좀 더 나은 외모를 가지고 싶은 욕망은, 성별과 나이를 초월합니다. 
그로 인해서 미용산업과 성형산업은 끊임없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레아의 이야기 인데요. 
야곱의 아내 레아의 이야기는, 능력주의에 매몰되면 
그로 인해서 얼마나 큰 불행을 겪을 수 있는지...
그리고 능력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본문 설명 

중략

창29: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우리말 성경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의 강세를 그대로 담아서 번역하면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시고' 입니다.
 
야곱이 적극적으로 레아를 미워한 것은 아닙니다만, 
레아의 편에서 보면 미움받는 것 같은 감정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이 보셨다'는 뜻입니다. 29:31
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알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슬피 울고 있던 하갈을 보시고, 그 아픔을 알아주셨던 하나님이 
레아가 버림받은 것 같은 상실감 속에서 살고 있던 것을 보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보시면, 반드시 행동을 하십니다. 
레아의 그 아픔과 외로움을 보신 하나님은, 그의 태를 열어 주시지요. 

아이가 들어선 것을 알자, 레아는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잡은 것 같았습니다. 
'아이로 인해서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동생 라헬은 아직 아이를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들을 낳을 때마다, '이번에는 혹시, 이번에는 혹시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기대했습니다. 
첫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레아는 르우벤이라는 이름을 지으면서  *르우벤 : 보라 아들이다
'보라, 아들이다! 주님께서 나의 고통을 살피시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이제는 남편도 나를 사랑하겠지' 라고 말합니다. 
그 아들을 통해서 남편의 사랑을 얻기 원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 둘째 아들이 태어나자, 레아는 시므온이라는 이름을 짓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렇게 또 아들을 주셨구나'   *시므론 : 하나님이 들으심
그러나 이번에도 야곱은 여전히 레아에게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셋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는 레위라고 이름을 지으면서 
'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 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연합)'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레아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레위 : 연합

세월이 또 흘러서 레아에게 넷째 아들이 들어섭니다. 
날이 차서 아이를 낳고 레아는 이름을 유다 라고 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 

개역성경은 '이제는' 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제야말로' 번역이 더 좋아 보입니다. 

'이제는' 이라는 말은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에는 아들을 낳을 때마다 '혹시나 남편의 사랑을 얻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소망했던 레아는, 
넷째 아들 유다를 낳고는 '이제는 내가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유다가 태어나기 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성서 학자들은, 남편의 사랑을 얻을 희망이 완전히 깨어진 자리에서 
레아가 하나님을 새롭게 체험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유다를 낳기 전에도, 레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도구로 믿었을 뿐입니다.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죠. 

레아는, 아들 셋을 낳아주어도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대해서 회의를 가졌을 겁니다. 

'이렇게 해도 되지 않으면 나는 어쩌면 좋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나를 이렇게 못 생기게 만들어서 이렇게 살게 했느냐?'고 울며 불며 기도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면, 하나님을 나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섬기면 
필경 이런 순간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요구를 따라 행하는 요술방망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었던 우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찬스가 옵니다. 

그제야 레아는, 가설로만 알았던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계시고 
자기를 사랑으로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고 보니, 
그분으로 인해서 충분하고, 따로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 레아는 야곱에 대한 집착에서 풀려나서 
무한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했기에, 넷째 아들 유다가 태어났을 때 
레아는 '이제는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유다'

이 고백을 뒤집으면 무슨 뜻입니까? 
'이제는 내가 남편의 사랑에 목매고 살지 않겠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한 만족을 얻었으니 
인간의 사랑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제대로 만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상대화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회심의 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첫 번째 회심이라면 
두 번째 회심은,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내 중심적으로 믿던 하나님 신앙이 깨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사건입니다. 


◑기독교와 능력주의

'능력주의'는 인간의 죄의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언제든 어디서든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과 모든 생명을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각자는, 각자의 모습대로 아름답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집니다. 

그런데 죄악된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해서 
'누구는 예쁘다. 누구는 못났다. 누구는 가치 있다. 누구는 가치 없다'고 판정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절대적인 가치를 부정당하고, 
어떤 사람은 분수 없이 높임을 받습니다. 

그로 인해서 어떤 사람은, 열등감과 패배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근거 없는 우월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사회를, 이토록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일당 100달러도 받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하루에 1억씩 벌고 있다는 이 현실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주인공 레아는,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열등감과 패배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고, 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변해 줍니다. 

레아 자신도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가 유다를 낳기 전까지, 지독한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살아야 했던 이유는 
그 스스로 '미모'라는 능력에 있어서,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망각하게 만들고, 없는 것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9가지의 장점이 있는데도, 한 가지의 부족한 것에 매달려서, 자신을 정죄하게 되는 것이지요. 

한 인간으로서 레아에게 좋은 점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외모가 부족하다는 그 한 가지 사실이, 그의 전체를 규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기준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이런 경향은,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서 
더 심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SNS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서 발버둥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주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하고요, 
그런 반응 때문에, 해서는 안 될 불행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레아의 소셜 네트워크는 가족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사랑을 받는 것에, 레아는 자기 목숨을 걸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불행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레아가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것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 후에 일입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을 목말라 하던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에서 만족을 얻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나자 
그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갈망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에게 야곱의 사랑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없는 것으로 자신을 규정해서, 불행을 곱씹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했겠지요. 

▲야곱은 끝까지 레아를 외면하고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젊은 시절에는 야곱도,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매몰되어서, 라헬만 싸고돌았지만,
라헬과 일찍 사별한 후, 점차 레아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추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야곱이 나중에 이집트에서 죽음을 맞게 되지요. 
임종의 자리에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고향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날, 에브론의 밭에 있는 가족묘실에 매장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창49:29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과 그분의 아내 사라, 이 두 분이 묻혀 있고 
이삭과 그분의 아내 리브가, 이 두 분도 거기에 묻혀 있다. 
나도 너희 어머니 레아를 거기에 묻었다.' 창49:31 

죽어서 누구와 묻히기를 원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렇게도 아꼈던 라헬이 죽자, 베들레헴에 매장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나, 레아가 세상을 떠나자, 헤브론에 있는 가족묘실에 레아를 매장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가 되자, '나를 레아 곁에 묻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야곱은, 레아의 진심을 알아주고, 그를 사랑하고 아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랫동안 레아가 소외와 차별 속에 살았던 것을 생각해서 
사라와 리브가를 있는 여족장으로 레아를 높여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주의가 생활 원리가 된 이 시대를 살면서 
여러분이 그동안 중요하게 여겨 온 능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의 자존심을 세워 주었던 그 능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외모였습니까, 똑똑한 두뇌였습니까? 
운동 능력이었습니까, 가정 배경이었습니까? 
돈을 버는 능력이었습니까, 학벌이었습니까? 
잘 나가는 자식들이었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런 것이 있어서, 라헬처럼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살아오셨습니까? 
혹은 그런 것이 없어서, 레아처럼 열등감과 패배감 속에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이 중요하게 여겨온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것이 있어서 만족하고 살았든지, 그것이 없어서 열패감으로 살았든지, 
우리 모두가 할 일이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능력을 보시지 않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우리의 절대값을 보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분의 사랑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만족을 하나님에게서 얻을 것이고 
그 사랑을 얼마나 진하게 맛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능력주의'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세상과 사람을 어떤 눈으로 보아 왔습니까? 
야곱처럼 혹은 라반처럼 '능력주의' 사고방식의 함몰되어서 
능력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고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외모도 능력 중 하나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 죄인지를 알지 못하고 
당연한 듯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 온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에 잠깐 귀 기울여 봅시다. 
렘9:23~24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을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어떤 능력도 자랑 삼아서는 안 됩니다. 

나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없다고 해서, 나를 한계 지어서도 안 됩니다.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고, 나의 존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타고난 조건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약자로 살아가야 할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이 나를 보시고 알아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께만 두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은, 능력주의적인 시각으로 사람들을 보고 판단하고 차별하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회적 약자들을 돌아보는 부드러운 시선을 가질 수 있고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은 사람은, 그 누구도, 어떤 것도 흔들지 못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는 믿음에 서서
이 세상 어떤 사람을 만나든 동일한 가치로 대하고 존중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잠시 눈을 감고 오늘 말씀을 묵상하십시다. 
그동안 여러분을 붙들어 어떤 자랑은 무엇이었습니까? 
혹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열등감을 가지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를 가치있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 그것, 
혹은 여러분 스스로를 깎아내리게 만들었던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눈을 돌려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존재가 그분 안에 안겨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우리를 우쭐하게 했던, 혹은 우리를 비참하게 했던 것들이 
그분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자랑거리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안겨준 십자가 뿐임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능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값을 매기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사십시다. 
누구를 만날 때, 그의 능력 있음/ 혹은 능력 없음으로 보지 않고 
그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절대값을 보도록 힘쓰십시다. 

교회로 모여서는 더욱 그렇게 하고, 교회 바깥에서도 그렇게 하도록 힘쓰십시다.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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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 사람의 가치를 본 사람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어네스트 고든(Ernest Gorden) 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콰이 계곡을 통해」라는 책을 영화한 것입니다.

 

저자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수백 명의 포로들과 함께 미얀마의 콰이라는 계곡에서

일본군을 위해 기차선로 작업에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굶주림, 가혹한 노동에 포로들은 파리 목숨처럼 죽어져 갔습니다.

 

포로들에게는 극단적인 생존 본능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남을 돕는다는 생각 따위는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저자는 거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난생 처음으로 생명의 애착을 느끼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그토록 생명에의 애착을 강렬하게 느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포기가 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강제노동에 시달림도 있었지만

배고픈 창자를 진정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또 부상당한 상처에서 오는 고통은 도저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가 정성을 다하여 자기를 간호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같은 처지의 동료였습니다.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 그리고 돌봄을 통해, 그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놀라운 변화와 사랑의 파도와 물결이

<어네스트 고든>의 가슴에 밀려와 전달되었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하였고,

수용소는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도와주고 도움 받는, 그리고 섬기고 돌보는

새로운 하나님의 사회(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갔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천하를 구하는 것이다.

- 쉰들러 리스트 이야기

 

그 나치에게서 많은 사람을 구원한 쉰들러!

그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 더구나 독일군 쪽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세상이 지금 정말 강하고 이 세상 임금이 승리하는 것 같은데

그 자리에서 이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까?

하나하나 내려놓으면서 무엇을 구원합니까?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들이 역사에서 감동을 주는 것 아닙니까?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큰 영광을 받겠습니까?

 

그가 나중에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놓고서

유태인들이 나중에 너무나 고마워서 자기 금이빨들을 다 뽑아서

그것을 녹여서 반지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반지에다 글을 새겨 넣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천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쉰들러가 반지를 받아보고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천하를 구하는 것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넥타이핀이 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팔아서

열 명을 구원할 수 있는데, 내 차도 팔 것을, 내 반지도 팔 것을 하면서

통곡을 하면서 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