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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의 변화

LNCK 2024. 3. 28. 15:58

https://www.youtube.com/watch?v=lVNDgr3to_Q

중심의 변화          갈2:20       2024.03.25              ☞ <자아 관련글>

"십자가와 함께하는 일상"이라는 주제로, 이번 고난주간 특새 동안에 살펴보겠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내 삶과 별로 관계없는 교리로만 남아 있으면 안 되죠.
요즘은 십자가가 악세사리가 돼 버렸죠. 목에다 걸고 다니고... 혹은 집안 장식품이 된 거죠. 

십자가를 믿지만, 십자가로 사는 것.. 이게 중요한 거죠.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진짜 믿는다면 십자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 영성" 입니다. 
그래서 이번 고난주간 특새 동안, 우리가 십자가를 좀 다루려고 합니다. 

◑도입 / 십자가 신앙으로 살지 않고, 자아 중심적으로 사는 신자들

여러분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그냥 만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요? 십자가를 모르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최대 프로젝트, 인류를 향한 최대 프로젝트는 "십자가"죠.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시는 사건, 이거보다. 더 큰 사건이 어디 있겠어요? 

신앙은 십자가로 시작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신자가 되었다... 
아니, 될 수가 없습니다. 

종교인은 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종교인이 될 수는 있지만, 
교인이 될 수는 있지만, 성도는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신앙의 길에 접어든 사람도, 십자가를 놓치면, 신앙의 길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십자가를 놓치는 순간, 신앙의 길을 잃어버려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우리가 바라보야 할 신앙의 핵심이죠. 
그리고 성도를 살아가게 만드는 본질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인가? 대답은 분명합니다.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삶의 중심부에 올려놓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십자가는 리트먼스 시험지와 같다' 
우리 신앙의 건강성, 신앙이 제대로 가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려고 하면, 
십자가 앞에 딱 비추어 보면 아는 거죠.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검증된다는 것입니다. 

▲자 어린아이들이 블록을 가지고 노는 걸 보면, 아주 어린아이들은 높이 잘 못 쌓아요. 
몇 개만 쌓으면 툭 넘어지고 하죠.
어린아이들이 왜 블록을 잘 못 쌓아 올립니까? 중심을 잘 못 잡아서 그렇죠. 
삐뚤삐뚤하게 블록을 쌓다보니까, 중심이 흔들려서 곧장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이가 조금씩 크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아주 높게 블록을 쌓죠.
중심을 잘 잡는 거죠. 

건물을 지을 때도 중심을 잘 잡아야 되죠. 여러분 중심이 참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중심 center 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이 지구인 줄 알았습니다. 
바울도, 서바나 즉 스페인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는 그렇게 생각했던 거죠. 

그러나 이제 코페르노니쿠스의 지동설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아가고 있다는 걸 발견한 거죠. 
굉장히 위대한 발견이었어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죠.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 인생도 중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치 시계의 중심에 의해서 바늘이 돌듯이, 
내 인생도 어떤 중심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왜 흔들리느냐? 인간관계가 왜 자꾸 무너지느냐? 
삶이 흔들리는 이유가 뭐냐? 상황 때문이냐? 
조건이 안 좋아서 그러냐? 그런게 아니에요. 우리의 중심의 문제라는 거죠. 
중심을 잘 살펴보아야 됩니다. 내 삶의 센터에 뭐가 있느냐? 

▲자 오늘의 주제는 '중심  center' 입니다. 
중심이 안 잡힌 사람은, 매사에 오락가락 하는 것입니다. 
늘 오락가락하고 뭐가 정함이 없어요. 불안정한 거예요. 
그래서 늘 위험하게 보여요. 그 사람을 바라보면 항상 위태위태 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위기 가운데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얼마나 열심입니까? 

주님을 잘 섬기는 것 같은데, 복음서의 베드로를 보면 불안하잖아요.
바다 물결 같아서 정함이 없는 거죠. 중심이 안 잡혀요. 늘 춤을 추는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럭비공 같은 인생! 

자 우리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자아 Ego 가 있죠.

그런데 내 자아는, 타락한 죄성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 자아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나의 모든 걸 움직이는 조종간 역할을 하는 거예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합니다.

우리 옛 자아는, 자기 중심적인 자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항상 방해되는 게, 내 자아 입니다. 

우리가 삶의 충돌이 일어나는 이유도, 그 주체가 이거예요. 
내 자아,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이 자아는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죠. '자기 중심적인 자아!'

자기중심적인 자아는, 우주가 자기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는 거예요. 
모든 사건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고 체계가, 자기 중심적으로 딱 셋업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장도, 가정도, 교회도.. 나를 중심적으로 해서 돌아 줘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 기분이 상해지죠.

가족들도 나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요즘은 하나만 낳아서 키우니까, 이제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자아 중심적인 게 강화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부모가 주는대로 그냥 먹었어요. 
요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해서 먹습니다.
내가 먹기 싫으면 안 먹는 거죠.
집안의 모든게 나 중심적으로 돌아가는 데에, 길들여져 있어요. 

여러분 세상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죠.
내 중심적으로 세상이 돌아가나요? No
직장에 갔는데 나 중심으로 돌아가나요? No
그렇지 않으니까 미치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과 부딪히는 거예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살려고 하고,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도 괴롭고, 주위의 사람들도 다 괴롭히며 사는 거죠.
십자가 신앙이란.. 이런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신앙입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베이직, ABC 입니다.
 
▲왜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입니까? 나 중심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그런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잖아요. 
원망하고 불평하는게,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굉장히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혹독하게 다루셨어요.
그들이 죽어 나갔어요. 
그들이 불평, 원망한 것은 '세상이 내 중심적으로 안 돈다'는 거예요... 

근데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해서 가면, 그냥 열흘 길이에요. 
근데 자아 중심이에요. 끊임없이 자기들의 생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종 모세를 향하여 반기를 들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이게, 홍해를 건넜지만, 자기 중심적인 기질이 안 죽는 거예요. 

왜 절망하죠? 내 계획대로 안 돌아가니까.
왜 내 계획대로 돌아가야 돼요? 내 계획보다 더 중요한게 하나님의 계획인데 말이죠.

그러니까 심지어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기독교를 믿어도,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생활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도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 주셔야 돼요. 
기도할 때도 나 중심적으로 해요.

▲기도에 가장 중요한게 뭔지 아세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서 주기도문을 보세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거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거고요... 
만약 그게 빠지면, 기도를 해도, 기도가 아닌 거예요. 

우리는 이기적인 기도를 배워서 하고 있는 거거든요. 
끊임없이 우리는 기도가 이기적으로, 탐욕적으로 흘러요. 

그래서 기도해놓고, 응답해 주지 않으시면, 또 시험에 들잖아요. 
하나님이 내 기도의 마땅히 응답을 하셔야 되는 것처럼,
자아 중심적인 사람은 '내 말을 잘 듣는 하나님'을 원하는 겁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하나님, 내가 조종할 수 있는 하나님,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 나에게 길들여진 하나님... 

그러나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은 성도는, 
내 생각대로 안 되고, 내 삶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돼도.. 할렐루야! 하는 겁니다.
병석에 누워 있어도 할렐루야! 
근데 이게 쉽지 않아요... 

성경을 읽어도 계속 자기중심적으로 읽고,
에고(자아)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도 Ego-centric 자아중심적으로 읽고 적용하죠.

'자아의 죽음' 이게 해결이 안 되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자기 생각을 강화하는데 성경을 이용할 뿐이죠.

성경을 통해 내 삶이 변화되는게 아니라, 
성경에 열심히 밑줄을 긋는데, 그걸 다 모아놓으면 "내가복음"이 된다 그러잖아요. 

▲여러분, 상처를 잘 입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아가 강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딪히는 거예요. 어디든지 가서 부딪쳐요. 사람만 만나면 부딪혀요. 

상처는 남이 준게 아닙니다. 자기가 혼자 스스로 받는 거지... 
여러분 흔히 '왕자병, 공주병' .. 이것도 다 자아중심적인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죠.
집이 어디냐 물으면 '경복궁'이라고 그러죠. 하하하

자기 중심적 사고, 자아 중심성.. 이거는 인류가 갖고 있는 고질병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집착을 하게 되고, 자기 도취에 빠지게 되고, 자아 만족을 추구하고...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이 그런 병에 걸렸던 사람이죠.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 
성공주의, 승리주의에 도체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안하무인이에요. 

근데 나중에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51세 경에 병으로 비참하게 죽죠.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랬는데, 불가능이 있었어요. 
허약하게 병들어서 죽은 거죠.  *공식적으로 위암, 그 외 비소중독설 있음
그러니까 허세를 부린 거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여러분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이전에 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그 내면에 불안함이 있는 거예요. 
자기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죠.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옳고 정당한가'를 증명하는데, 과도한 열심을 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모습이 바로 그런 겁니다. 
시장 입구에서 기도하고... '나는 저 세리와 같이 않음을 감사하나니다' 
계속해서 남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을 평가절하하고, 자기는 우월주의에 빠져 있고... 

그러니까 율법에 열심을 내는데 
'나는 너와 다르다' 하는 것을 자랑하는 쪽으로 흘러가 버린 거죠.
이게 자아가 살아있는 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죠.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상하게 갈수록 더 완악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아 때문이죠.
부모님은 교회에서 너무 인정을 받는 신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집에서는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자녀들이 어떤 때는 헷갈리는 거에요. 부모가 너무 독선적이니까요.

그리고 말씀에 대해서도 편식이 심한 거죠. 
말씀을 취사선택해서 받습니다. 
내가 받고 싶은 것만 받고, 내가 안 받고 싶으면 안 맞는 거죠. 
그리고 자기 죄를 덮어주고, 정당화합니다.

열심으로 하는데, 그 열심은 오래 못 가요. 
중간에 나가 떨어지죠. 자기 힘으로 했기 때문에!  
자기 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어요

그런 신앙생활은 한계가 있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뒷걸음질 치는 겁니다. 
기쁨도 없고, 활력도 없고, 자기 내면에 '자기 의'로 받치고 있는 것인데 
그게 부실하기 때문에, 자기를 받쳐주지 못하게 되죠. 

 이런 자아 중심적 삶은 결국 어떻게 돼죠? 
삶이 행복하지가 않아요. 갈수록 불안하고, 스트레스가 있고... 
혈압이 높아지고, 긴장도도 높아지고... 

이런 삶은 중심이 불안정하고, 그 중심의 불안함 속에서 
평안함과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건강하지 못한 기초 위에 신앙이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곧 자아의 죽음   갈2:20

이런 불행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길이 무엇입니까? 
자아가 죽는 십자가 신앙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얘기하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못 박혔나니' 갈2:20 

이것은 고백이라기 보다는 선포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의 옛사람, 자아 Ego 가 죽었다는 거예요.

살기등등했던 바울이, 율법적으로 자기 의를 추구했던 그가 
'이제 나의 옛 사람이 죽었다' 이렇게 선언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곧 자기 죽음 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는 죽음의 원리를 깨닫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완료시제를 사용합니다. 
이게 뭐냐면, 과거에 어떤 동작이 완료되었을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얘기할 때, 완료시제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난게 아니라 
오늘 내 삶 속에 매일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십자가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그것이 신자가 계속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2:20절을 통해서, 이전의 (자아 중심적) 삶의 방식과 
결별을 계속 선언을 해야 돼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내 자아가 죽은 자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 선포를 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으로 순간순간 혈기가 올라옵니다. 
그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이 말씀을 선포해야 돼요.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나는 죽노라'고 선포했죠. 고전15:31

이건 뭐냐면, 속도 없고 오장육부도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항변할 수 있어요. 그러나 가능해요. 

우리의 싸움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부를 거는 사람이 아니에요.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막 턱밑까지 올라올 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말씀을 암송, 선포하는 것입니다. 갈2:20

혈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문화나 환경은, 우리의 죄된 모습을 자꾸 부추깁니다. 
'네가 못난게 뭐냐?' 
'사람들이 너를 깔보지 않도록 너 자신을 최대한 부풀려라' 

그래서 자기를 과대하게 포장을 하죠.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비난하고, 정죄를 합니다.
 
여러분, 마귀가 예수님에게도 시험을 걸었습니다.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뛰어내려 보라'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도 
그 아래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힘없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가 자아의 죽음이란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도 사단은 끊임없이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속삭입니다. 
'네가 가진 힘을 한껏 뽐내라'고 말합니다. 자아를 오히려 강화시키라는 거죠!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고 소리를 치는 문화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갈5: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러분, 자랑하고 싶은게 많죠? 
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나를 좀 알아 달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가 많죠. 

인정 받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거예요.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합니까? 

여러분 '인정 욕구' 이것도 정말 병이에요.  rfcdrfcd.tistory.com/12077099
나를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너무 힘들어 하는 거죠.

교회에서도, 누가 조금만 인정을 더 받으면,
상대적으로 나 자신이 비참해지죠.
그런 자신을, 자아를 쳐서 복종을 시켜야 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마치 없는 사람처럼 낮아지겠다는 결심이죠. 
그 지점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죽는 것이구나' 라는 체험을 해야 돼요. '아 이게 죽는 거구나' 
진짜 죽어야 돼요. 그러면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중심에는 십자가(여기선 자아의 죽음의 의미)가 있다는 걸 놓치지 말아야 돼요.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원리 principle 입니다.

'원리'라는 것은.. 그것을 붙들고 지켜야 사는 거예요. 
그 원리를 우리가 이길 수 없어요. 
결국 일은 원리대로 돌아가게 되는 거니까요. 

신앙은 십자가로 돌아가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빗겨나면, 신앙은 깨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어도 잡아야 돼요.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그대로 받아들이셨어요. 
연약한 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셨어요. 
십자가에서 강한 자로 예수님은 서 있지 않으셨어요. 

기독교는 승리주의가 아니에요. 
철저히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완전히 망가지시고 죽으신 거예요. 그게 십자가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죄 없으신 분이 
그 백주대낮에 그 골고다 언덕 높은 언덕에 벌거벗겨진 채 
온 만신창이가 되셔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셔서 매달려 계셨어요. 

그분은 하나님이세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에요. 
밑에서는 조롱하고, 구 옷을 가지고 재비를 뽑고  *옷이 귀하던 시절
침을 뱉고... 

여러분, 하나님이신 분이에요. 
잠시 십자가에서 내려가셔서, 한대 치고 다시 달리시고 싶지는 않으셨을까요?
아뇨, 주님은 그대로 죽으셨어요. 연약한 자로서요. 전능하신 분인데...

여러분, 우리가 가끔 '자존심 상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 앞에 가면, 우리는 자존심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자존심을 다 버리신 예수님을 뵈올 때, 무슨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겠나요?

여러분, 우리 가운데 '나는 정말 억울하다' 하는 분도 가끔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 가 보세요.
예수님은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온몸이 벗겨지신 채로 수치를 당하셨어요.

그런 예수님 앞에서, 내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뭐가 억울해요? 
예수님과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됩니다. 내가 억울할 일이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으셨습니다. 죽은 척 하신게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죽은 척하면 안 됩니다. 죽어야 삽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만 살려내십니다. 안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려요? 
내가 온전히 죽어야 주님이 살려주시지요. 

내가 죽은 곳에, 부활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내가 죽은 곳에 향기가 나요. 죽어야! 
사도행전에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은 가끔 죽는게 아니에요. 가능한 죽으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매 순간,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 바울은 여기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자 나는 죽고 내 대신 새로운 주인이 내 안에 들어오셨어요. 
내 안에 새로운 주인이 찾아오셨어요. 주인이 바뀐 거예요. 

그러니까 에고 센트릭 Ego-centric 자아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는...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근본적은 다르게 표현하면 이게 중심 이동이요. 중심의 변화에요. 
이렇게 돼야 진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내 자아가 아닌, 그리스도가 나의 중심의 좌정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이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는 삶, 
요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게 이루어지는 거죠.
(이때는 주님의 뜻대로만 구하게 됩니다. 내 자아가 죽었으므로)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인격으로 와 계신다는 거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찾아오시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이거는 어마어마한 얘기입니다. 
'내 안에 예수가 살고 계신다!' 
엄청난 얘기입니다. 

◑적용

여러분, 내가 죽은 것으로 끝나면 안 돼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야 돼요.

내가 죽기만 하면.. 자연히 살아납니다. 이게 신앙의 핵심입니다. 

내 주인이 바뀐 거예요. 이제는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거예요. 
에고가 아니에요. 나는 죽었어요. 

이제는 내 안에 예수가 사시고, 그분이 인격으로 우리 안에 중심에 좌정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이걸 항상 인식하고 사는 겁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이때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자아로 살지 않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면서, 자기를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만약 내 속에 내가 살면, 또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고 
그 엉망진창의 삶, 그 무질서한 삶, 그 파탄 난 삶을 또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또 내가 살아서 펄펄 뛰어다니겠어요? 나는 죽어야 돼요. 

옛 삶, 자기중심적 삶은 죽어야 된다니까요. 
여러분, 이번 고난주간에 그것을 훈련하시고, 남은 평생을 가지고 가야 됩니다. 

고난주간이 끝나고 나면, 또 다시 내 자아가 살아나면 안 되고, 
이 '자아의 죽음,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이 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거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게 '신앙 성숙'이죠. '영적 성장'이고요!

이게 되지 않으면, 교인인데 세상 사람하고 다를 게 없게 되죠.
세상 친구들이, 교인들을 보면서 가장 힘들어하는게, 교인들은 '위선'한다는 거죠.
속사람이 변하지 않고, 옛 자아가 깨어지지 않고, 
무늬만 기독교인이니까, 겉모습만 교회다니는 교인이니까... 교인들을 힘들어하는 거죠. 

이 내 속에 있는 옛 자아는 '견고한 진'이 되어서, 
수 십년 동안, 내 속에 견고히 자리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견고한 진'이 한 개가 아니고, 여러 개가 내 속에 자리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대부분, 기독교 가치관으로, 성경적 가치관으로 살지 않고,
과거 수 천 년동안 한국에 내려오던 샤머니즘적 가치관, 불교나 유교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우리 현실입니다.
왜냐면 '자아의 깨어짐'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십자가 신앙으로 살지 않기 때문인거죠.

이제 나의 옛 자아에서, 그리스도로 중심 이동이 된 사람, 
즉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더 이상 잘난 자존심 싸움으로, 자기 남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아니라, 주존심을 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존재를 높여 드리는 주존심!'
내가 망신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주님은 망신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결단을 하고 살아가는 거죠. 

▲이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은혜'라는 단어도, 다르게 다가오는 거예요. 
다 똑같은 은혜가 아니에요. 
여러분 십자가를 진짜 깨달아야, '은혜'라는 단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 끼치듯이 내 영혼을 완전히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가장 안정감 있고, 가장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비결이 
여기에 있어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니라' 갈2:20b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산다고, 당장 대단한 변화가 나타나는 거 아니에요.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면 
세월이 흐를수록 이제는 전혀 다른 인생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여러분의 삶으로 증명하세요. 그것이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에서 십자가를 경험하고, 
매일매일 순간에 우리는 십자가 못박혀 죽는 죽음이 매일 있어야 돼요. 

내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을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고 싶을 때, 
분노가 막 일어날 때, 혈기가 왕성할 때... 그때 죽으라는 거예요. 
그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외우시라는 거예요.

여러분 작은 죽음을 많이 한 사람이, 나중에 큰 순교도 해요. 
매일 내 자아가 죽는 순교를 하셔야 돼요. 

내가 죽고 또 죽고 죽고 나면, 죽어본 사람만 누리는 은혜가 있어요. 
희한한 기쁨이 있어요. 희한한 평강이 있어요. 
난 죽었는데.... 하나님이 살리시는 거예요. 

 

매일매일 죽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삶을 날마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부산물들이 있어요. 
평화가 있어요. 내가 완전히 죽고 나면.. 평화가 있어요. 자유함이 있어요. 열매가 맺혀요.

여러분 열매는 우리가 맺는게 아니에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맺으십니다. 

그래서 이런 성도는, 죽음이 찾아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매일 자아가 죽는 체험을 하면서, 그때 찾아오는 그리스도의 동행하심을 경험하니까,
실제로 육신의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동행하심을 경험하니까
마음에 평화가 있는 것이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뭐가 두려울까요.. No

갈2:20절을 붙잡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고 선포하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부활을 매일 경험하며
어나더 레벨 another level 의 삶을 사시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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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귀용이라고 하는 영성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잔인하게 대하실 때가, 우리를 가장 자비롭게 대하시는 때다.”

이 말을 이해하시면 천국이 눈에 보이시구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면 천국이 눈에 안보이실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잔인하게 대할 때, 가장 고난의 풀무 속에 집어넣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자아를 완전히 죽여 버리고,
우리의 자기연민과 우리의 자존심을 하나님의 발로 밟아버릴 때,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섭리하셔서
완전한 새로운 생명으로 당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봉이가 행복한 이유 - 자아가 죽어서 기대치가 높지 않음

몇 년 전 개봉된 영화 <맨발의 기봉이> 기억나시나요?
호수처럼 잔잔한 남쪽바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기봉이란 노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실제 나이는 마흔이지만,
어려서 얻은 열병으로 인해 정신연령은 8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기봉이는 효심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기봉이는 이집 저집 불려 다니면서 동네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습니다.

일당으로 양식거리를 받았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에게 가져다주고 싶었던 기봉이었기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집으로 뛰어가곤 했습니다.

이러한 그를 보고 동네사람들은 ‘맨발의 기봉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려운 생활 형편이었지만 기봉이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면서 사는 기봉이의 얼굴은 항상 밝고 환합니다.
동네사람들이 궂은 일을 시켜도 늘 싱글벙글합니다.

일한 대가가 소홀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좋습니다.
그런 기봉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한편으로 속이 무척 상합니다.

어느 저녁, 뭐가 그리도 좋은지 뭔가를 만들며 싱글벙글하고 있는 기봉이를 향해
어머니가 묻습니다.
“아그야, 너는 인생이 그렇게 행복하냐?”

그 순간 기봉이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크게 대답합니다. 환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응, 행복해. 엄마!”

객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행복할 구석이란 조금도 없는 기봉이었는데,
지체 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을 바라보며,
저는 도대체 왜 그렇게 행복할까 생각해봤습니다. 하루 온 종일.

제 결론은 이랬습니다.
기봉이가 행복했던 이유는 삶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삶의 기대치가 높지 않습니다. 허영 끼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 이웃에 대한 기대치,
공동체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기봉이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큰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너무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단순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상대방 위에 놓기보다, 상대방 밑으로 두었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가질 것 안 가질 것 다 가진 우리들이건만
이토록 불행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기봉이처럼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큰 것만 바랐기 때문에,
삶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웃들과 너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워왔기 때문에,
남과 싸워 늘 이기려고만 했기에 그토록 불행했던 것입니다.

이 기봉이 이야기를 읽고서, 실제로 그렇게 한 번 살아보았습니다.
우리가 늘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가는데, 상대방에게 어떤 기대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를 행복하게 해 줄거야, 나를 높여줄 거야..
나에게 밥을 사 줄거야, 나를 부유하게 해 줄 거야..
나의 존재가치를 높여줄 거야, 나를 심심하지 않게 해 줄거야..’ 하는
그런 육신적인 기대감을 전혀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을 대하니.. 기봉이처럼, 먼저 내가 행복해졌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싱글벙글 하며 그를 대하게 됩니다.
내 자아가 죽어서... 그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니, 아무 것도 실망하지 않게 되죠.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내가 가진 사랑과 관심과 온정과 기도를 나눠주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