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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승리

LNCK 2024. 3. 29. 19:47

2024 03 29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 고난 받는 종 (5)영원한 승리 (youtube.com)

영원한 승리            사53:10~12          2024.03.29.

본문은 이사야서 53장 마지막 내용입니다. 
고난받는 종에 대한 마지막 예언인데요. 해석이 쉽지가 않습니다. 

짧은 3구절인데, 어려운 표현들이 여기저기 나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가장 어려웠던 본문 중의 하나인데요. 

하나의 요지로 요약이 안 됩니다. 
여러 내용이 쫙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대지> 
1 여호와의 종, 그분의 고난은 성부 하나님의 원하심이었다.
2 여호와의 종, 그분의 고난은 성자 하나님의 순종이었다. 
3 그 순종의 결과

이 세 가지 대지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왜 오실 여호와의 종은 고난을 받아야 했는가요? 
성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53:10a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에게'..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위 구절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의 상함 받는 것을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두 단어가 있습니다. 

'상함' .. 단순히 다친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으깨다, 집을 깨다, 박살 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성경이 크러쉬 crush 라고 번역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의 으깨어짐, 뭉개짐을 원하셨다는 뜻입니다. 

'원하사'
이 단어의 본래 뜻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기쁨이 아니라, 큰 기쁨, 환희와 같은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상함'이라는 단어는, '으깨다'가 더 맞습니다. 
'원하사'라는 단어는, '기쁨'이라는 뜻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으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으깨지심을 기뻐하셨다'는 거죠. 

(그렇죠. 예수님은 심한 채찍에 맞으시고, 손과 발에 못, 허리에 창.. 으깨지신 것이 맞죠.
단순히 멍이 들거나, 약간 외상이 있었던 게 아니었죠) 

어느 정도로 기뻐하셨습니까? 
큰 기쁨, 환희와 같은 기쁨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으깨어지신 사건이 
인류를 창조한 이래로,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에 순간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이유,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 
그것이 십자가에서, 아들 하나님을 내어주는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이 하게 됩니다. 
'왜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을 이토록 기뻐하셨는가요?' 

여러분,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기뻐할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오히려 자기가 죽으면 죽었지, 누가 아들의 고난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일을 너무나도 기뻐하셨기에 
그 아들을 질고를 당케 하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10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의 고난을 기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바로 이어서 10b절에 나옵니다. 

53:10b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씨를 보게 되며'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고난을 원하시고, 기뻐하신 이유는 
'씨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드려질 때, 
성부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성자 예수님의 고통이 아니라, '씨'였다는 것입니다. 
그 씨를 보게 될 기쁨으로 인해서, 성자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씨'는 무엇입니까? 
성경의 각주에 보면, '후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씨를 보게 된다'는 말은, '후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후손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씨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얻게 될 영적인 후손을 의미합니다. 
즉 신약교회의 하나님의 자녀들, 그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말합니다

그 '씨'를 얻게 될 기쁨 때문에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장차 구원받은 우리를 보는 기쁨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의 죽으심까지도
이 세상 최고의 기쁨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랑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은 아들 예수님을 덜 사랑하고, 우리를 더 사랑한다는 뜻이 물론 아닙니다. 
아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우리를 보는 기쁨 때문에 
성부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의 죽으심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의 경건한 설교자 옥타비우스 윈슬로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 주었는가?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겨준 것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준 것도 아니다.
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성부께서 넘겨주신 것이다.'

즉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원하심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보게 됩니다. 

◑2. 성부 하나님의 원하심에, 예수님도 순종하셨습니다. 

53:10b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성자 하나님은 속건제물로, 또 자신을 자원하여 드리셨습니다. 

구약 레위기에 보면 5가지 제사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속건제입니다. 
속건제는, 죄에 대해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배상하셨다는 거죠)

단순히 죄에 대한 제사뿐만 아니라, 
죄가 가져온 피해에 대해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속건제를 '배상제'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는, 하나님께 막대한 피해를 입힙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권위가 훼손됩니다. 

그 죄에 대한 배상의 제물, 즉 속건 제물로, 예수님이 자기를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의 메시아의 고난은, 성부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종, 예수님도 
그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일입니다. 

◑3. 순종의 결과
10c절 ~ 12절에 걸쳐서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총 7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앞서 살펴본 대로, 그가 씨를 보게 될 것입니다. :10 
즉 믿는 백성의 출현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2) '그의 날은 길 것이요' :10
이 말은 어쩌면 모순이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그의 날은 일찍 끝난 것 아닙니까? 

여기서 '그의 날이 길 것'이라는 말은, 
그분의 부활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에서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히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날은 길 것입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3) 세 번째 결과는,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0c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가지시는 구원의 계획입니다. 

고난받는 종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요19:30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고난받는 종, 그분은 죽기까지 감당하신 순종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다 이루셨습니다.

4)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10 

'자기 영혼의 수고'는, 그저 작은 땀흘리는 정도의 수고가 아니라,
큰 고통을 말합니다.   *아말, toil, trouble, labour
즉 십자가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큰 고통을 말합니다.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그 수고의 고통을 통해 얻게 될 결과(구원사역의 완성)를 보고, 
여호와의 종 그분이 '만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땅을 치고 후회하는게 아니라, 그가 수고한 결과물을 보고, 
그는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족'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 때문에 느끼는 만족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위에 무엇인가를 더해야 한다면, 
그 대속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여호와의 종 예수님은, 만족을 느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속죄는,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모든 죄인들을 의롭다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의 이 만족은, 
'나의 십자가 고난이, 나의 사람들을,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완전한 다리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만족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느끼는 또 다른 만족이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시면서 느끼는 만족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백성들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으로 인해 만족해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주님의 마음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한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과 화목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공로를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을 
바라보시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가장 커다란 만족입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만족은, 
우리들이 그렇게 구원의 십자가로 인하여 감사하고 
거기서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으며,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고난을 돌아보며,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 그분의 대속은 완전했기 때문입니다. 

6) 여섯번째 순종의 결과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1b

'나의 의로운 종'은 여호와의 종, 고난 받는 종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전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전하셨습니다. 
참된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바르게 하나님께 인도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 일어난 일이죠.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으로 일어난 결과'를 살피는 중인데요.
예수님이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은, 십자가 죽음 그 이전 사건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공생애는, 십자가의 연장선상으로 보면 됩니다.)

7) 마지막 일곱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의 결과가 나오는데요.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 말은, 전쟁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표현입니다. 
그 당시에 전쟁이 끝나면, 승리한 군대가 패전한 군대의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의 빗대어,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받는 종이 받게 될 승리의 영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비록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부활을 통하여서 승리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탄을 정복하셨습니다. 

창3:15절의 예언처럼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부수고, 
사탄의 통치를 완벽하게 종식시키시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승리는, 그분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성령이 오시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본문에서 그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승리와 그 승리의 영광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 7가지가, 오실 메시아 그분의 순종으로 얻게 될 결과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시는 예수님

그런데 우리가 끝으로 살펴볼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12b 

 

여러분 12절 중반절을 한번 다.시 한번 보십시오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
여기 보면, 4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자기 영혼을 버려 
-헤아림을 받았느니라 
-죄를 담당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그런데 앞의 3개 동사는 완료시제 입니다. 
그러나 4번째 '기도하였느니라'는 미완료 시제입니다. '끝나지 않은(미완료)' 시제인 거죠. 

사실 오늘 본문은, 모두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동사들은 완료 시제가 아니라, 미완료 시제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3개 동사를 완료 시제로 사용하는 이유는,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날 일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문법, 예언적 완료시제
실제로 복음서에 보면, 이 세 가지 동사가 다 예언대로 확실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하였느니라'만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범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못 박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눅23: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주님의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본문 12절에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 예언도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시제가, 완료가 아니라, 미완료 시제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사역은,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보좌우편에서 계속되고 있죠.

십자가에서만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위하여, 세상 끝날까지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그래서 롬8: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연약하여,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심하게 요동치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롬8:34

우리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도록,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지금도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7: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구원받은 우리는,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우리의 구원이 결코 취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요?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신실해서가 아니라, 
'이는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이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 증거가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의 시제가 미완료 시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하여 늘 죄를 범하지만 
그래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그리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중보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범할지라도, 하나님을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고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회개하며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생명의 교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는 날마다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쉼 없는 생명의 교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확인해야 할게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어떻게 끝납니까? 
고난받는 종, 그분이 얻게될 승리로 끝납니다. 

이사야서 53장의 주제는 '고난받는 종'입니다. 
그러나 고난받는 종의 마지막은 승리로 끝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고난도, 고난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영원한 승리로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가 맞이하는 마지막 모습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난은 성도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과 슬픔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성경은 우리의 마지막 말(간증)은 '승리와 감격과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사53장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다 성취가 되었습니다. 

주님 오시기 전 700년 전의 이사야의 예언이 
놀랍도록 하나하나 다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어느 하나 틀린 것이 없습니다. 
다 그대로 빼곡히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오리라' 하신 주님의 약속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 뒤에 주어진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서는 그날까지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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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침묵 (십자가를 지는 자세) 

 

제가 몽고에 갔을 때 양을 잡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펀 글)

몽고 인이 양을 잡기 위해 양을 끌고 오는 동안,

그 모습을 본 개는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듯 요란하게 짖어대는데,

막상 끌려오는 양은 너무나도 잠잠하고 평화스러웠습니다.

 

양을 마당 한 가운데 거꾸로 눕힐 때에도 양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다른 가축의 경우처럼 정수리를 찍거나 혹은 목을 따서 죽이지 않았습니다.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해

양의 배를 하늘로 향하게 눕히고, 배 가죽만을 칼로 조금 갈랐습니다.

그러자 속에 있던 밥통의 윗부분이 잘라진 틈으로 불거져 오르면서

피가 밖으로 흐르지 못하도록 자동마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몽고인은 양의 밥통 옆으로 손을 넣어

양의 숨통을 눌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무지막지한 사람의 손이 양의 배를 가르고

그 내장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숨통을 틀어쥐는데도

양이 신음소리를 한번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숨이 너머 가는 마지막 순간 허공을 향해 치켜든 네 다리를

파르르 떨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조리가 끝난 양고기를 시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양고기를 씹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53:7절의 의미를 되씹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도다." (53:7)

 

너무나 적절한 표현입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동물들 가운데

왜 구약의 사람들이 유독 양을 속죄의 제물로 즐겨 사용하였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는지,

왜 성경이 하필이면 주님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그날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양은 자기 생명을 남을 위하여 잠잠히, 그리고 기꺼이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넣어 숨통을 눌러도

반항 한번 없이 자기 생명을 내어줍니다. 놀랍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비유되었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지는 자의 자세를 엿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내어놓으실 때, 잠잠하셨습니다.

묵묵히 그 길을 가셨습니다.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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