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4] 이문장 목사 말씀 강해 -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King of Israel (youtube.com)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요12:12~15 2024.03.24. ▣종려주일 설교모음
오늘은 종려주일 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마지막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전국에서 몰려온 유대인들,
그리고 전 로마제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죠.
그분들이 다 거리를 쏟아져 나옵니다. 그들의 손에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어요.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맞으러 나가는 그 모습을
우리가 함께 먼저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나무가 아주 멋있게 생겼어요. 종려나무들이 군락으로 모여 있는 곳은
사막지대에서 오아시스가 있는 지역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이렇게 들고 나오는 때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을 맞이하는 영접하는 의미가 있어요.
승리를 축하하는 그런 의미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드는 거예요.
그런데 이 종려나무는,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
나라들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꽃들이 있잖아요. *국화
우리나라의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은 무궁화죠.
그런 것처럼,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군인들을 맞이하는 그런 의미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하는 소식을 듣고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모든 무리가
다 대로로 나와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개선 장군인 거죠.
승리를 가져다 주실 분인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염원을 대변하는 그런 분으로
온 유대인들의 큰 무리가 다 예수님을 맞이했어요.
◑왕을 기대하던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종려주일에 왕을 기대해야!
그 시대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었어요. 암흑의 시대였어요.
로마의 압제, 식민통치 하에서 고통을 당하던,
수백 년 동안에 이異민족의 압제와 지배를 당하던, 그 역사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가장 깊은 그 시대를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
그들에게 드디어 서광이 비치는 거예요.
'아 이분이, 우리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출해 주실 수 있는 그런 분이구나'
'분봉왕 헤롯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소망은 이제 (기적과 능력을 베푸시는) 예수 밖에 없다...'
절망의 시대에 그들에게 소망이 생긴 거예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설렘과 그 기대,
'이분에게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라는 그 마음을 가지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예수님의 맞으러 그 많은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어요.
특별히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쪽에서 오실 때, 나귀를 타셨어요.
'나귀를 탄다'고 하는 의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왕의 행차'를 의미했어요.
슥9:9절에, '왕은 나귀를 타신다'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죠.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도 당신 스스로 '왕이 되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죠.
그래서 나귀를 데려오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시고, 특별히 나귀를 타셨어요.
백성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올라오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한껏 기대가 부풀었던 거죠. '예수님이 왕이 되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나 보다...' 하고요.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겉옷을 길에 펴며 열광한 것입니다.
다만, '왕의 의미'가 달랐던 거죠.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는 왕, 부활하여 영원한 만왕의 왕'을 염두에 두셨고,
백성들은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세속적 왕'을 꿈꾸었던 거고요.
▲오늘 종려주일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 심정을, 그거를 우리가 느껴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본다고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도, 비록 유대 민족처럼 압제나 빈곤에 처하진 않지만,
여전히 다른 이유로, 절망 가운데 처해서 살고 있습니다.
마귀의 압제로 부터, 여러가지 죄와 나쁜 습관의 중독으로부터
영혼과 육체가 피폐한 가운데 살고 있는 거죠. 그런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심령 속에 그런 마음이, 기대가 있느냐?
그것을 우리가 확인하셔야 돼요.
오늘 예배를 마치고, 또 한 주간 우리가 생활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들을 경험하시면서 지내시는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어요.
육체의 질병으로 힘든 상황이 있을 수가 있어요.
또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분이 계실 수가 있어요.
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또 두려워하고...
또 그런 절망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여러 가지 상황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요.
그때에 우리 가슴속에 '그렇지, 예수님이 소망이시지!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러면 나에게도 이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일이 가능하지...'
하는 그런 설렘, 그런 기대감.. 그것이 우리 속에 있는가요?
한 주일 분주하게 생활하시다가 교회에 오셔서
본당에 들어오셔서 앉아서 주님을 생각할 때
그런 우리 마음에 설렘과 기대가, 그런 소망이 다시 회복되는 그런 일이
실제로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가요?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이에요.
그때 큰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갔을 때의 그 심정이
오늘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회복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시록에 보면, 아주 희한한 장면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계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거기에 전 세계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모여서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이거는 천상의 완성된 교회의 모습이죠.
물론 이 지상에서도, 교회는 이 모습을 향해 점점 지향해 나아갑니다.
흰 옷은,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갖춘 그 모습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손에 종류나무를 들었다' 이거는 무엇을 상징하는가요?
'예수님만이 온 우주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내 가슴에 설레임이 있고,
내 가슴에 기대감이 있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앞이 환해지는,
내 머릿속이 환해지는 그런 자세로, 그런 심정으로 예수님을 대하는,
그것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지금 여기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면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이렇게 주일날 예배드리러 교회에 오실 때마다
우리가 우리 가슴속에 그 정서가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볼 때 '그렇지, 예수님이 세상 삶의 유일한 나의 소망이시지! 그거를 내가 왜 몰랐을까?'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의 심령 속에 그 설레임이 되살아나고,
그 기대감이 되살아나고, 또 그런 소망으로 다시 회복되어지는...
그런 일이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절규하듯 하는 외침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간 큰 무리가 외쳤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만 들고 나간 것이 아니라 외쳤어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13
'호산나' ..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고 뜻으로 외친 거예요. 주1)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 말은 '로마가 임명한 왕'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임명하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한 거예요.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담아서 절규하듯이 외친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당시 현실 속에서 그들이 왕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헤롯왕이나 빌라도 총독. '이들은 우리의 진정한 통치자가 아니다.'
그들 밑에서 신음하고 고통 당하는.. 그런 울분들과 그런 절망을 토로 해내는,
그 한을 쏟아내는 그런 외침이었던 거죠.
로마가 인정한 헤롯 안디바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방을 통치하던 당시에 분봉왕이었죠. '그는 우리의 왕이 아니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총독 빌라도,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아니다' 라고 외치는 거예요.
우리의 통치자는 '여호와께서 임명하신 이스라엘 왕'
이분이 우리의 진정한 통치자이기를 원한다...
그런 외침을 그들이 큰 소리로 외친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가 이렇게 글로 읽으면, 그냥 '큰 소리를 외쳤겠구나'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겠지만,
실제 현장에서 우리가 그 함성 소리를 들었을 때는
아마 온 세상이 떠나갈듯한 그런 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고통으로 통치했던 이방 민족들의 압제, 그 오랜 세월,
그런데 '이제 이분 예수님을 통해서, 궁핍하고 척박한 시대, 압제의 시대가 이제 끝나겠구나'
하는 그런 소망으로, 목이 터져라 외쳤을 것입니다. *아마 31운동이나, 815해방보다 더 큰 함성으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여호와께서 임명하신 우리의 진짜 왕이신 예수님이여
당신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이것을 정말 젖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서 외치지 않았을까요?
제가 시범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냥 목이 터져라, 수십만 명이 나와 가지고, 천지가 진동하는 그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계속 반복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까지 얼마나 계속 외쳤을까요?
그 외침이 천지를 진동하였을 것입니다.
그들 속에 진짜 왕에 대한 갈망..
가짜 왕들 밑에서 고통당하는 그 현실 속에서
'진짜 왕이 오시면 다 해결될 건데...' 하는 그 갈망으로, 그 목마름으로 외친 그 함성을
우리가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여' 이렇게 외쳤는데요.
우리는 왕정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왕정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어요.
물론 TV 사극을 통해서, 왕정 시대 때 사람들의 정서가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 볼 뿐인데요.
사극이나 영화에 보면, 왕이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엎드려서 경배하잖아요.
오늘날에도 군주제가 남아있는 나라들도 있죠.
200년 전에 왕조시대 때 살았던 사람들이, 왕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지
그 정서를 우리가 알 길이 없어요.
저도 머리로는 알고, 이렇게 설명으로는 드리지만
제가 과거에 영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왕조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정서가 어떤 것이지, 약간 저희가 경험한 적은 있지만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우리의 왕이시여!'
이렇게 외칠 때, 그들이 어떤 정서로 이것을 외쳤는지는, 우리가 도무지 알 길이 없어요.
만약에 조금 설명한다 그러면, 북한의 김일성 왕조, 거기는 아직도 왕조시대입니다.
그래서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뭐 '제 정신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죠.
오늘날 우리 정서로 보면 다분히 비정상적인 방식이지만,
왕조시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저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죠.
2천년 전에 히브리 민족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왕, 특히 '여호와께서 임명하신 왕이 나타나신다' 하는 것은
이 세상 천지가 완전히 개벽하는.. 완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그들은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아셔야 돼요.
◑사람들의 오해, 기막힌 반전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사도요한은 확인해 주십니다. 요12: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당시에 유대인들이라면, 이 스가랴 선지자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거예요. 나귀 타심으로 그걸 성취하시는 거예요. 슥9:9
'이분이 선지자가 예언하신 그 메시아가 맞구나'
그러니 뭐 더 열광적으로 '우리 왕이시여!'하고 열광했던 거예요.
그러나 이분들이 잘못 알았어요.
당시 현장에 나와 있던 큰 무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의미의 왕이 아니셨는데,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헛다리 짚은' 거죠.
예수님의 제자들도 잘못 짚었고요.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잘못 짚었고요.
유대 백성들도 잘못 짚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잘못 짚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것은 맞는데,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 독립시켜줄
그런 왕으로 오신 것으로 잘못 알았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기 직전 상황에서도
'예수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시켜줄, 그런 왕으로 잘못 짚은 거예요.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왕으로 오셨어요.
예수님은 영적인 이스라엘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줄 그런 왕으로 오셨는데
당시에 아무도 그거를 알아채지 못했어요. 잘못 짚은 거예요.
나중에 그 내용을 제자들이 깨닫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출해 주시는 그 민족이
'당대에 지상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다' 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계11장에는 사도요한 통해서 이런 말씀을 주셨어요.
11:18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영적으로 하면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이상하지 않나요? 예수님이 언제 소돔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예수님이 언제 애굽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예루살렘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어요.
근데 왜 소돔에서 죽으셨다, 왜 애굽에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인가요?
소돔에서 여호와의 백성 롯과 그의 가족을 구출해 내셨어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가운데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출해 내셨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시는 일이 그와 같은 일이다... 라는 뜻이죠.
430년 동안 애굽의 압제로 포로로 잡혀서 노예 생활하던 히브리 민족을
모세를 통해서 해방시키셨어요. 구출해 내셨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영적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는데
이 세상의 왕 노릇하는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을, 영적인 하늘나라의 백성을 구출해내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 왕이시다...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어요.
빌라도가 그 십자가에 명패를 하나 달아 줬어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이렇게 명패를 달았습니다. 요19:19
요한복음에는 '자칭' 이라는 용어가 없습니다. 요19:21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자칭' 이란 용어를 빼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요?
그 장면을 해석할 때, 아주 역설적이게도
로마가 임명한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왕으로 즉위 시키는 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에서, 왕으로 즉위식을 하는 그런 장면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정말 무악무도한 처형의 현장으로 우리가 기억하는데요.
사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자기 민족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처럼, 잘못 짚은 것입니다.
사실은 십자가는, 예수님이 왕으로
온 우주의 왕으로 선포되어지는 즉위식을 한 것으로 우리가 보게 되는데요.
'이런 역설이 어디 있을까?' 싶은 반전이 일어나는데
예수님 당시 때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처형되는 형틀의 상징이었었어요.
십자가 그러면, 다들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들이 매달리는 곳이다' 이렇게들 생각하고
다 벌벌벌 떨었던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을 상징하고요.
그리고 그 안에서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죠.
십자가의 그 의미가 '승리'란 말이에요. 그 최초 의미가 갈보리에서 일어났던 거죠.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영적인 이스라엘에 속한, 하늘 아버지의 백성들, 자녀들을 구출해 내신
그 상징으로 바뀌어 버렸어요.
이런 반전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을 넘어서, 영적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즉위식을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그 행사를 진행하는 그런 실무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돼요.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한 가지 있어요.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주의 백성을 구출해 내셨는데
아직도 우리 삶 속에는, 사탄이 왕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고, 우리를 하여금 걱정하게 만들고, 염려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온갖 어려움과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힘들게 만드는 그런 일을
사탄이 우리 삶 속에서, 아직도 자기가 왕인 것처럼
우리를 부리고 다스리고 하는 이런 일을
지금도 우리 현실 속에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의 승리, 왕으로 등극하심을 모르고
우리가 사탄이 넣어주는 육신의 생각에 끌려가기도 하고,
또 사단에 붙들려서 어려움을 겪는 이런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걸 인정을 해 주셨어요.
사탄이 아직까지는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셨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짜 왕들 밑에서 고통 당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가짜 왕인 사탄의 현실 밑에서
고통당하는 그런 일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 가슴속에 갈망이 솟아나야 돼요.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다' 라고 생각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뛰쳐나와서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여호와께 임명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젖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서 외쳤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 이 사탄의 잔재들, 사탄의 흔적들을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면서 탄식하면서
예수님을 향한 갈망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시다.
예수님이 오셔야 우리 삶 속에서 왕노릇하는 사탄이 쫓겨가고
우리의 삶 속에, 나의 삶 속에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 라는 그런 소망과 그런 갈망이
우리 속에서 올라와 줘야 돼요.
그 갈망을 가지고 우리가 외치는 거예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소서(호산나)'
또 개인적으로도 '나의 왕이신 예수님이시여, 나에게 오시옵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이 외침이,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가슴속에서 터져나올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종려주일은 그런 거예요.
2천년 전에,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외치면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외쳤던 그 외침이
오늘 우리의 외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요? 예수님 외에는, 그런 사단적인 현실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주실 다른 권세가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나의 삶에 임하시면, 내가 힘들어하고, 고통을 당하고,
내가 어려워하는 이 모든 상황이, 다 해결될 것입니다.
이 척박하고 이 궁핍한 삶의 현장에, 새로운 생명의 움이 트고
소망과 생명으로 약동하는.. 그런 새로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질 수 있습니다.
나의 왕이신 예수님만 내 안에 오신다면,
나의 왕이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다면,
그러면 나는 마귀 사탄의 나라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갈망과, 이 소망과, 이 외침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외쳐보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한번 큰소리 한번 외쳐 보세요.
그러면 뭔가 아주 신령한 일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소동이 일어난 예루살렘
오늘 요한복음 12장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조본문인 마태복음에는 이런 내용을 덧붙여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2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온 성이 소동한 거예요.
근데 그 성 안에는, 이런 명절 때에는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도
예루살렘에 오는 거예요. *세례요한을 죽인 자 주2) 헤롯 가계도
그래서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재판할 때, 슬쩍 그쪽으로 넘겨주는 일이 있었어요.
왜 그러냐면 그 유월절 명절 때에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인지라,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관할권이 있었던 거죠.
그 헤롯 안디바가 소동했을 거예요. 마21:10
근데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왕은 헤롯 대왕이었었어요. Herod the great
헤롯 안디바의 아버지죠. 그때도 소동을 했어요.
온 예루살렘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소동을 했어요.
그때는 동방에서 오신 세 분의 현자들께서 외친 거예요.
'유대인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그를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고, 가장 소동한 사람은 헤롯 대왕이죠.
그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 무리의 함성소리를 듣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 거예요. 헤롯 안디바가, 총독 빌라도가 소동을 했고요.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이 소동한 거예요. 그 모든 기득권자들,
예루살렘 거민들이 모두가 다 소란이 일어난 거예요. 소동을 한 거예요.
그들은 잘못 짚었어요.
예수님이 분봉왕 헤롯 안디바, 빌라도를 폐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었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을 다 쫓아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시려고 오셨습니까? 그게 아니었죠.
그렇다면 그들이 소동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그들이 잘못 짚었어요.
우리는 압니다. 그날 그들의 선포하는 그 소리를 듣고 누가 소동했는지..
누가 경기를 일으키는 반응을 보였는지 우리는 압니다.
▲누가 소동했습니까? 사탄이 소동했습니다.
사탄의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됐어요.
성경을 통해서 사탄이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는 그 장면을
사탄이 적극적으로 방해하려고 나섰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 그 기간 동안에,
사탄이 얼마나 두렵고 벌벌벌 떨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했는지... 우리는 안다고요.
예수님이 사역 초기에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셨어요.
아무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못 알아볼 때,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누군 줄 압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하고 예수님을 알아봤어요.
사탄의 나라에서 대 소동이 일어난 거예요.
드디어 예수님이 공개 행보를 시작하신 거니까요.
이때부터 가장 긴장하고, 가장 벌벌 떨었던 것은 사탄이고, 사탄의 하수인들이에요.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 진행하시는 내내 그랬지만
또 한 장면을 우리가 살펴보자면,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 가졌을 때, 군대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 앞에 달려 나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우리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괴롭게 하지 마소서!'
정말 괴로움을 당하고, 정말 두려움에 떨고,
정말 예수님 때문에 소동이 일어난 것은 귀신들, 마귀들이고, 사탄의 세력이었습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들에게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런 설레임과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 우리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라는 예수님을 향한 그 갈망을 가지고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하고 외치는 순간, 선포하는 순간에
사단이 벌벌벌 떠는 거예요.
왜요? 마귀가 우리 삶에 들어와서, 그동안 왕노릇 잘 했는데
우리가 '그대가 나의 왕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다!' 라는 선포를 하는 순간,
가짜 왕은 도망가는 거예요. * <선포신앙>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 사탄이 왕노릇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당신은 가짜 왕이다. 나의 진짜 왕은 예수님이다!' 라고 선포하는 바람에
사탄이 놀라 도망가는...
진짜 왕이 우리 삶에 임하게 되면, 가짜 왕이 도망갈 수밖에 없는 그런 이유 때문에
사탄이 벌벌벌 떠는 거예요.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예수님이 저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저를 구원해 주시기 원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나의 왕이시여! 호산나 나의 왕이시여!' 라고 크게 외치면
그 소리에 사탄이 듣고 도망가는 겁니다.
진짜 왕이 우리의 가슴속에,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와, 좌정하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에
사탄이 있을 자리가 없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 순간에, 사탄의 권세는 도망갑니다.
사탄의 권세는 소동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어요.
(*떠나갈 때, 경우에 따라 해코지를 하고 떠나가기 때문에, 약간의 피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종려주일은, 그 의미를 우리가 기억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짜 왕이 나타나면, 그러면 소동하고...
분봉왕 헤롯 안디바, 총독 빌라도 같은 가짜 왕들은... 다 쫓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에요.
온 지구의 성도님들의 삶에, 심령 속에서
우리가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우리가 섬기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러면 그런 일이 기적과 같은 일이, 신령한 역사가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권세가,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권세가 나타나는 그런 통로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2024년 종려주의를 맞으면서,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
♣로마 역사에서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된 이후에
그의 양아들이었던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를 유배시키고 안토니우스 마저 제압을 하면서
명실상부한 제국의 최강자가 됩니다
그리고 원래는 원로원이 다스리던 로마를,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 로마 시대를 열어놓은 첫 번째 황제로 등극을 합니다
그리고 이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시대’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가 받은 아구수도라는이 칭호 자체가 존엄자라는 뜻입니다
한 단어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이걸 좀 풀어서 설명을 한다면
로마 제국의 모든 시민과 군인들에게 존경과 경배를 받게 합당한 자다
그래서 거의 뭐 황제를 경배를 받을 신의 수준까지 올려놓는 그런 이름을 받게 됩니다
근데 참 역설적인 것이죠.
이렇게 인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통치자가 황제로 등극을 했을 때,
세상의 진정한 만왕의 왕이신 진정한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의 모습으로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고, 왕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십니다. *비교해 보세요!
최근에도 연일 뉴스를 보면, 해외의 권력자들은
누가 주도권을 가지신 가질 것이냐 이걸로 힘겨루기 하는 얘기가 계속해서 나오잖아요
그러나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 진정한 세상의 통치자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꼭 아구스도 까지 안 가더라도,
헤롯 안디바, 빌라도 와는 너무도 대조되는 '통치자,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땅에 충만하라'
그러나 통치 방식은, '섬기는 겸손한 왕, 자기를 희생하는 십자가 지는 모습'입니다.
성도는 이런 '왕의 정체성, 자기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안 되겠습니다.
'왕같은 제사장 royal priesthood'이라 그랬는데, 우리가 다 예수님의 왕족 royal family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란, 왕과 제사장직을 겸직한다는 뜻이죠.
오늘 나의 '통치 영역'은 어디입니까?
우리 가정이요, 우리 각자의 일터요, 우리 각자의 사역지입니다.
한국어에 '잔잔바리'라는 말이 있는데, '잔잔하게 조용하게 일한다'는 뜻이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 나라의 왕족들인 성도들은,
자기가 처한 사명지에서 '잔잔바리'로 섬기는 것입니다.
크게 드러나고,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지만
그가 없으면, 그 공동체, 그 사역지가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삐걱대다가 결국 해체되는 거죠.
종려주일, 나귀타고 입성하신 왕이신 예수님을 본 받아,
우리 각자가, 하나님이 두신 나의 일터에서, '잔잔바리 왕'으로
귀한 섬김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
주1) 호산나 (그리스어 ὡσαννά, hōsanná)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호시아-나(הושיעה־נא, הושיעה נא)에서 왔으며 이는 save us 라는 뜻.
주2) 헤롯 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