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모든 문제의 해답 시42:1~11 ☞ ▣부활
◑서론
여러분 기독교 신앙이 다른 모든 종류의 신념이나 종교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요?
'예수 믿으라 믿으세요!' 그러는데, 예수 믿는 것이 다른 종교들, 다른 신앙체계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세상의 위대하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무덤이 있습니다.
무함마드, 나폴레옹, 링컨, 진시황, 다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집'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 위에, 부활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집입니다.
그 기초가 무너지면, 집은 무너집니다.
부활이 만약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외에, 세상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일종의 '신념'이에요.
특별히 강한 신념!
'인간은 이런 존재이어야 한다. 사회는 이렇게 돼야 한다' 하는 신념입니다.
그렇죠.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신념은, 훌륭한 사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상은, 현실에 대한, 사실에 대한 해석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었습니다.
저는 유교나 불교 등이 좋은 사상, 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 대한 의미있는 통찰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유교, 불교)은.. 그 중에 어떤 한 두개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 하더라도
전체에 큰 상관이 없습니다. 웬만큼 유지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종교는, 사실 스스로 자신을 갈고 닦는 법이에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법, 수양, 참선이라 그러지요...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는 사상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해 있습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라고 하는
이 단순한 사실의 주장인데, 만약 이 (부활) 주장이 무너진다면,
기독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상 기독교를 싫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부인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사람들이 집단 환각에 빠져서 헛것을 본 게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수차례에 걸쳐서 환상을 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만에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착각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그 (부활을 본 것의) 영향이
자기 삶에 평생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예수의 죽음으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 제자들이 목숨을 바쳐서 그리스도께 헌신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가지고 은닉하고,
거짓말을 지어내서 부활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래서 무엇 이익이 남겠습니까?
부활을 증거하는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살면서, 고생하고 옥에 갇히고 순교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누가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말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부활이 사실이니까 목숨을 바쳤습니다.)
▲찰스 콜슨이란 사람이 있어요. 닉슨 대통령의 법률보좌관이었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의 법학박사였던 굉장히 스마트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국민에게 거짓말 해서 궁지에 몰렸을 때,
탑 top 참모들이 모여 가지고, 거짓말을 유지하기로 각본을 짰습니다.
완벽한 시나리오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이렇게 발표하자.' 그 중에 한 사람이 찰스 콜슨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그 거짓 시나리오를 유지할 정보력과, 권력, 자금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닉슨의 팀들은, 명석한 두뇌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짜놓은 거짓말이 얼마 동안이나 유지됐는지 아십니까?
딱 두 주간입니다.
나중에 찰스 콜슨은, 이 일을 통해서
'사람들이 관심이 많이 쏠리는 일에, 거짓말을 지어내서 속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서 그리스도께 회심합니다.
찰스 콜슨은 이런 말을 했어요.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기는 너무 힘들다.
무엇이 예수의 제자들을, 예수 때문에 매 맞고, 고문 당하고, 돌에 맞아 죽게 했는지...
그러면서 찬송하고 감사하게 했는지...(부활이 아니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적어도 몇 명은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아니다. 우리가 거짓말했다. 혹은 우리가 잘못 본 것 같다' 그런 사람이 나왔어야 되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만약 그런 사림이 하나라도 나왔다면, 지금의 기독교는 불가능했습니다.
찰스 콜슨은 감옥생활을 하고는, 그 후에 남은 평생을 교도소에 있는 수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사역을 하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 가셨지만
지금도 프리즌 펠로우쉽 이라는 단체로, 이 사역이 아주 건강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미국 최고의 두뇌 집단과, 권력, 정보력을 가지고도
그 거짓말이 2주밖에 안 갔습니다. 부활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누군가를 설득만 할 만한 지성도, 압도할 만한 타이틀도 없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기 스승을 위해서,
뭔가 조그만 일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해보겠다' ...
그렇게 시도할 용기도, 배짱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반드시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 배경을 헤아려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물이, 배경 색깔에 따라서 달라 보이듯이,
부활의 배경 색깔, 예수님 당시에 경건한 이스라엘 신앙인들은
어떤 상황에서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세상을 기대했는지...
어떤 고민과 소망이 있었는지... 그 배경 색깔을 잘 보여주는 글이 오늘 본문 시42편입니다.
◑본문 해설
시42:1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여러분, 아주 아름다운 찬송이잖아요. 간절한 갈망이고, 멋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갈망이 어떤 빛깔이었나요?
42:3절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여러분, 대단히 슬픈 비애의 빛깔입니다. 왜 슬펐을까요?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는데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힘든 형편이라는 거죠. 그래서 생기는 목마름입니다.
여러분, 목말라 보셨습니까? 타는 목마름을 경험해 보셨나요?
사람이 목마르면, 물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지금 목말라 죽겠는데, 아주 재밌는 TV 프로그램을 보여주면서
'앉아서 이거 봐라' 그러면 앉아 있겠습니까?
컴퓨터 게임을 아무리 좋아하는 아이라도, 목마르면 그거 못합니다.
먹는 것도 필요 없습니다. 답답해요. 목이 매여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아!' 세상 사람들이 그러는데
이 사람에게 문제가 뭡니까?
목마르다는 건, 다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배고픈게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분, 경제가, 먹고 사는 문제가 무척 중요해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도 아니고, 궁극적인 인간의 문제도 아닙니다.
여러분 경제보다. 좀 더 중요한게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건강이죠. 돈보다 건강입니다.
만약 건강을 잃어 보세요. 여러분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 많습니다.
정말 평생 쓰고도 다 못 쓸 정도의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도,
몸이 아파서 밥 한 숟가락 목으로 못 넘깁니다. 그 재물이 아무 소용없어요. 건강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건강도, 궁극적인 가치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잠깐이잖아요.
여러분 주위에서 많이 보시잖아요. '아 그 어른 정말 건강하셨는데, 언제 그렇게 됐나?'
그렇죠. 잠깐이에요.
그런데 몸이 아파도 잘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하면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건강으로 망할 짓, 수치스러운 일만 골라서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슬픔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42: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이상하는도다.'
시42편의 저작 시기가 언제인가?
학자들은 아마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성전이 무너지고
성전을 멀리 떠나 있는 상황을 말한다고 추정합니다. 뭐 맞는 것 같아요.
고향을 떠나서 멀리 바벨론에 와 있지만, 바벨론 자체가 눈물의 이유는 아니에요.
보시면 '성일를 지키는 무리와 동행했다' ... 예배 드리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함께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전 건물보다) 그것이 그립다는 거예요. 그것이 없어서 아프다는 거죠.
다시 말하면, 바벨론에 가 있어도, 예배가 있고 공동체가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영광이 없으면 아니라는 거죠.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거죠)
성전 자체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는 것' 기쁨으로 왁자지껄하는 것, 42:4
여러분 조용한 거 좋아하십니까? 조용한 건 좋은데,
사람 사는 데는, 사람 소리가 나야 됩니다.
은혜받는 공동체는, 은혜받는 소리가 나야 됩니다.
우리가 조용히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도 참 좋지만..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에서, 정말 기쁨의 환호성과, 웃으며 대화하는 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림, 그게 살아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예요.
정말 조용한 것만 좋아하시면, 절간에 가셔야 됩니다.
막 기쁨으로 함께 나누는 소리들... 시인은 그게 너무너무 그리운 거예요.
그리고 '내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했다.' 42:4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복음을 전하고요.
사람들이 하나님 믿고, 교회 나오는게 얼마나 즐겁고 행복합니까?
그 사람도 은혜받고, 그 사람도 예수 알게 되고 삶이 바뀌고,
막 그 인생이 변하고, 가정이 회복되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들... 말로 다 못합니다.
물론 시간이 걸릴 때가 많아요. 뭐 어떻게 사정사정해서 억지로 교회에 데리고 왔는데
교회 와서도 뚱하고 앉아있고, 그냥 찬양도 안 하고,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사람들 많잖아요.
아주 속이 터지죠.
그런데 어느 날 보면, 나보다 더 열심히 찬양해요.
나보다 더 열심히, 더 간절히 기도하고, 막 자원해서 섬기려고 그래요.
여러분 그것이 전도하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그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시인은 그 기쁨을 아는 사람인데,
오늘이 시편에서는,. 지금은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그런 상황이 되었어요. 여러분 주위의 상황을 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고, 악인이 득세하는 것 같고,
하나님을 붙잡고 의롭게 살아보려고 하는 그 노력이
헛수고 같이 느껴지는 그런 상황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 하면 이 아픔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42:4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여러분, 그 은혜를 아니까, 그 기쁨을 아니까
그거를 기억하니까 마음이 상해요.
그러면 마음이 아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궁극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됩니다)
쉽습니다. 기억을 포기하면 되잖아요. 기억 안 하면 되잖아요.
마음에서 지우면 되잖아요. 그러나 이 시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힘든 거예요.
여러분 '희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슨 느낌이 드십니까?
이 단어 자체는 굉장히 멋있고 아름다운 말로 들리는데,
현실에서 우리가 희망을 갖고 산다는 것은, 무거운 짐일 때가 많습니다.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희망을 가져보세요.
그때부터 곧 고달파요. 친구들이 놀 때, 함께 놀지 못하잖아요.
자기가 선하게 살겠다는 희망이 있으면.. 손해를 감수해야 됩니다.
일제시대 때 많은 사람들이, 조국 독립의 희망을 버렸지만
그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은요. 고생을 감수하면서 살았어요.
우리가 살 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아'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 뭐 안 계신 걸로 하지 뭐, 그냥 살지 뭐...' 그러면 마음 편할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의를 나타낼 날이 오실 거라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희망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 거예요. 어떤 대가입니까? 10절 읽습니다.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 붙들며 살려고 하니까,
여러분, 도전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들어올 때가 있다는 거예요.
◑삶을 쉽게 타협해 버리지 마십시오. 신앙과 인생은 끊임없이 탐구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내 인생의 모든 질문과 탐구가 다 답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 예수님께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
그러다가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얼마나 마음이 깨어졌겠습니까?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예수를 따라다녔겠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활 예수를 만나고 나서요.
눅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바로 바로 이 말이, 이들의 간절한 기대가,
시42편에서 말하는, 목마른 사슴 같은 그런 기대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일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여, 어찌해야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이 깊은 고민의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가 연구해보자, 우리가 열심히 해보자!' 그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타나셔야 해결되는 깊은 고민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야 되고, 내가 그 분을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제
▲우리 삶에 어떤 고민이 있습니까?
재작년에 <나의 해방 일지>라는 드라마가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30대 여주인공이 이런 말을 해요.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 제목 적어내는게 있었는데
친구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거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 해요? 나 여기 왜 있어요?
1991년 이전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이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그러나 그 이전에도 존재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한 것 같은 느낌...'」
여러분 인간이 자기에게 정직하게 직면하면, 이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느낌의 시달리면서도,
내 마음이 어디 한 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 질문이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안착합니다)
▲여러분 요즘에 뭐 '인문학, 인문학' 말들 하는데
인문학이 뭐 점수 잘 받고, 똑똑한 척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인문학은, 묻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물을 줄 아는 겁니다.
진짜 인문학은요, 질문하며 살자는 겁니다.
쉬운 대답에 만족하지 말자는 겁니다.
남이 해 놓은 대답, 어떤 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는 거 외워서 아는 척 하는...
그게 인문학이 아니에요.
자신의 질문을 진지하게 할 줄 아는 그게 '인문학'의 정신입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길, 이렇게 하면 유망하다 그러더라..
이렇게 하는게 잘 사는 것 같아..
여기에 투자해야 돼, 여기에 인생을 걸어야 돼..' 이게 아닙니다.
'대학은 무슨 과를 가야 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바대로 하면 '이게 잘 사는 길이야'
그냥 그렇게 미래 계획을 짜고 따라가는 것,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진지한 질문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기는 어디 있어? 그냥 그런 질문 없이 살아가는 거야!
다 자기 이익을 챙기고 살아.. 주위를 쳐다 봐!'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 하나님을 붙들고 놓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으면, 막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신데, 어떻게 막 삽니까?
그것이 쉬운 대답을 거부하는 삶이에요.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위 연속극 대사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은 잠재워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 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여러분, 질문하는 투지와, 합의를 거부하는 결기가 있어야
'자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가 뭡니까?
우리가 너무 쉽게 합의해 (타협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가치가 있어요.
오늘날 교회의 타락은,
'세상이 이런 거야!' 하는데, 교인들이 너무 많이 쉽게 따라가 버렸어요.
세상 드라마에서도요. '합의하면 안 된다' 그러잖아요. '쉽게 합의하지 말라' 그러잖아요.
드라마에서도 이런 말을 하고, 사람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데
오늘의 많은 교회들이, 이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에 합의, 타협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데,
사업할 때에, 우리가 자녀를 기르는 원칙에,
젊은 사람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가정의 계획을 할 때,
그리스도인 다운 가치 기준 Biblical standard 이 살아 있습니까?
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 갈망,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
부활절 아침에 여인들의 향품을 준비해서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왜 갔을까요? 사랑하니까 갔죠.
갈망이 있으니까, 억누를 수 없는 목마름이 있으니까 간 겁니다.
여인들은 '그냥 그래..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저 예수를 괜히 따라다녔다... 괜히 헛짓거리 했다...'
라는 사람들의 그 목소리에, 세상에 의견에 합의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42:5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우리의 삶을 도우신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시인이 그랬잖아요.
'칼이 내 뼈를 찌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잊어버리셨습니까'
라고 항변하는 이 시인에게, 오늘날의 이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고, 잊어버리지 않으셨음'을 보여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모든 문제가,
개인적이고, 사회적이고, 국가적이고, 영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 받았음을 믿는 거예요.
▲이어령 교수 간증
故 이어령 교수 아시죠. 한 때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존경받았던 인물입니다.
동시에 대표적인 아주 지독한 안티 크리스찬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독교를 많이 폄하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분 딸이 예수님을 믿었어요.
딸을 사랑하니까, 딸이 하도 좋아하니까
'여기 뭐가 있나?' 그래서 딸을 따라 할 수 없이 교회에 가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조금씩 듣는 거예요. 그 마음에 말씀이 들어갑니다.
오랜 고뇌의 시간을 거친 다음에, 그가 예수 믿고요.
교회 와서 꿇어앉아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평생 한국에서 '내가 최고로 잘났다' 그러던 사람이고요.
'기독교는 말이 안 된다' 그랬는데요.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 분의 딸이 목사가 되어서 사역하다가, 먼저 천국으로 갔습니다.
얼마 후에 본인도 암에 걸려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했던 인터뷰가 있습니다.
「내가 꼭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이제 낫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약도 쓰지 않고, 지금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암과 함께 지내고 있는 거예요.
약도 하나도 안 먹어요. 왜요?
제게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은,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다가오고, 어떤 발자국 소리로 오는가?'
때문에 그게 종교가 가지는 의미죠.
종교는 죽음에 관한 거예요.
백 마디 말을 해도 소용 없습니다.
유일하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종교입니다.
죽음을 과학이 생각해줘요? 정치가 생각해줘요? 경제가 생각해줘요? No!
인생에 단 한 번 밖에 없는 가장 큰 사건이 탄생과, 죽음입니다.
탄생할 땐 예정된 거예요.
어떤 사건이 죽음 이상으로 크겠어요? 죽음은 모든게 다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종교는, 이제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 시작하는 거예요. (죽음과) 맞딱뜨리는 거예요.
우리 딸은 훌륭히 그걸 해냈어요.
정말 암이 있었더라도 (암이) 숨었을 거예요. 왜?
암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
딸이 죽기 직전까지 1시간, 2시간씩 교회에서 일하고...
그랬기 때문에, 암이 우리 딸을 정복하지 못했죠. 죽음이 정복 못 했죠.
죽음은 딸의 신앙에 있어서, 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오늘도 내 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처참하게 처절하게 말라서 끝까지 고사해서 처량하게 죽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부'로, 그 빛나는 얼굴로... 그게 마지막 딸의 얼굴이었어요.
암도 딸을 못 부쉰 거예요.
아무 것도 딸의 사랑과 신앙을 부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용감하게..
저도 닥쳐봐야 알지만, 아직은 초연하게 내가 글 쓰고, 할 거 다 하고...
마치 영원히 사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고요.」
▲예, 우리가 영생의 소망이 있다면, 부활의 신앙이 있다면,
죽음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합니다.
책 한 페이지 넘기면 또 다른 페이지가 나오듯이, 삶은 계속 될 겁니다.
사라 코글리 라는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삶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꽤 많은 사람이, 죽음보다 살아가는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부활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대해 대답이 되어 있어야, 삶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이날 곧 안식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19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았다'고 했는데,
잡혀갈까 봐 두려워한 거잖아요.
근데 여러분,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는 아무도 손 안 댔습니다.
아무도 신경 안 썼습니다. 왜요? 위협이 안 됐으니까요.
예수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볼 때, 가만히 놔 둬도, 뭘 할 사람들이 못 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냥 자기 두려움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문을 닫고 있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찾아오셨어요. 문도 안 열고 그냥 들어오셨어요.
이것은 1차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몸을 가지고 계셨지만, 만질 수 있는 몸, 상처도 있는 몸,
그리고 음식을 드시기도 했지만, 벽을 필요에 따라서 그냥 통과하시는 그런 몸이었습니다.
부활체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런 의미도 있죠. 우리가 두려워 숨어 있는 인생살이,
겹겹이 벽을 쌓고 갇혀 있는 그 자리,
우리 외로움의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새 생명의 예수님이신 줄 믿습니다.
시편 42편에서는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눈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문을 다 닫아놔도,
'나 혼자 살래' 하면서 고립되어 있어요. 거기에도 찾아오시는 겁니다.
우리 두려움의 자리, 외로움의 자리에, 실패의 자리에 찾아오시는 거예요.
누가복음에 보면, 구운 생선을 같이 드시죠. 눅24:42
요한복음에 보면, 아예 조반을 차려서 '와서 조반을 먹어라'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반했어요.
다시 환영해 주시는 거예요. 다시 회복해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정을 표현할 때,
가장 아름다워지는 정의 표현이, 밥 차려 주는 거잖아요.
미운 사람 있으면, 밥 차려 주겠습니까?
꼴보기 싫은 사람이면, 겨우 인사 정도 하지, 대충 인사하고 빨리 헤어지지,
밥 차려 주겠습니까?
예수님이 밥을 차려 주시는 거는, 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시는 거예요.
비록 도망갔지만, 비록 배신했지만, 비록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신 줄 믿습니다. 여전히 존귀하게 여겨 주시는 거예요.
◑적용
그래서 여러분 부활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입니다.
우리 가운데 편찮으신 분들을 많습니다. 몸이 아프면 삶이 힘들죠.
근데 실제로 아파 보면요, 몸이 아픈 것보다 훨씬 더 힘든게
내 속에 있는 불안과 싸우는 거예요. 그 싸움이 얼마나 힘듭니까?
최근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으신 분들이 있습니까? 이별이 두렵습니까?
결국에는 다시 만날 줄 믿습니다.
부활은, 우리 세상의 이별이, 잠시 잠깐일 뿐임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살 그 긴 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그래도 남은 것은, 힘든 것은
혼자 살아가야 될 날들이 힘든 거죠.
죽어서 주님 품에 안길 줄 알지만, 혼자 남아서 외롭게 살아가야 될 날들이 힘든 거죠.
그게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삶의 두려움도 이길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힘겨운 날들이 있겠지만 능히 감당할 힘, 찬송하며 살 힘을 하나님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두려움과 불안이 심해지면, 그 끝에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문제 역시 부활의 복음이 궁극적인 해답입니다.
우리 교회는 '생명의 전화' 와 함께 '자살 방지 운동'을 열심히 합니다.
해마다 9월이면 '생명사랑 걷기 대회'에 참여하면서
포항시내 전체를 대상으로 열심히 합니다. 작년에도 많은 분들이 참여했고요,
여러분 이런 사회 캠페인이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궁극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진정한 의지는... 신앙 안에서 가능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자살이 늘어나는 것은, 물질주의 세계의 폐해입니다.
돈이 최고의 목표가 된 세계, 돈이 유일한 가치가 된 세상,
'성공한 인생이라야 가치가 있다. 남보다 좀 잘나야 존중받을 만하다'라는
요즘 사회 문화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폄하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인생에 그냥 조그만 실패가, 인간성 전체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진정한 소중함,
'모든 사람이 그 자체로 존귀하다'는 믿음이, 복음 안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의 삶도 존중하고, 자신의 생명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힘든 시기를 이겨 나갈 힘을 주시는 거예요.
옛날처럼 뭐 '자살은 죄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 그렇게 위협하고 교리를 들이대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할 때에,
누구든지 자기 인생에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한국 사회가 '저출산률'이 가장 심각한 문제인데,
이게 경제적인 문제니까, 경제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들 말합니다.
돈 얼마 주면 출생률이 높아질까요?
생각해 보세요. 옛날에는 정말 어렵고 힘들 때도 아이들을 낳았잖아요.
어쨌거나 낳고 길렀잖아요.
그걸 돈을 얼마를 더 줘야 사람들이 애를 많이 낳겠습니까? No
여러분 지금의 문제는요,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너무 경제적인 문제에만 꽂혀 있는 거예요. 너무 물질적이 됐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물질에만 꽂혀 있으면, 삶의 전망이 어둡게 됩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해져요.
그 불안을 부추기는 문화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오래 살은 편인데, 그런 가정들을 주위에 많이 봤습니다.
정말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평균적으로 결혼을 일찍 하고, 자녀를 많이 낳습니다.
제 주위에 서너명, 너댓명 자녀를 둔 가정이 많았습니다.
통계를 찾아보니까요. 이런 그래프가 있어요.
노란 선은 매주일 교회 가는 사람들
빨간 선은 가끔씩 교회 가는 사람들
파란 선은 아예 신앙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평균 한 명 정도 차이납니다.
여러분 출생률 한 명이 엄청난 차이죠. 이게 통계로도 증명이 됩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미혼자들에게, 향후 몇 명의 자녀를 갖고 싶은지를 질문한 결과,
개신교가 1.5 명으로 가장 많았고,
불교 1.49 명
종교 없음 1.43 명
가톨릭 1.38명입니다.
'자신의 종교에서 결혼과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는 응답이
개신교인이 65%로 가장 많았고
가톨릭, 불교순으로 조사됐습니다.
여러분, 뭐 한국이 기독교 문화의 햇수가 짧기 때문에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이런 통계를 가만히 보면, 방향이 보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해야 될 일들,
이 사회를 위해서 잘 할 수 있는 일들,
생명의 존귀함, 결혼과 가정의 중요성... 어디서 배우겠습니까?
학교에서 배우겠습니까? 부모가 이런 걸 가르칠 능력이 있습니까?
지금 정부가 '기독교 학교에서 예배드리지 말라. 종교 교육하지 말라'
이게 너무 강하게 옥죄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요,
한국에 있는 기독교 학교들에서만이라도
신앙과 생명의 소중함,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제대로 교육하기 시작하면,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건강한 가치를 만들어 가야 됩니다.
지금 이 세상의 교육 방법은, 시험 점수 조금 더 얻는 것은 가르치는데,
가치관을 가르치는데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친구는 없고 경쟁자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을 몰아내는 세상이잖아요.
교육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문화의 현장에서, 사회의 담론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 하는
이 사회가 다다른 막다른 골목, 그 절망의 쓸쓸한 모습을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개인적일뿐 아니라, 이 사회의 문제에 해결도
부활의 복음 안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여러분, 이 한국 사회 한국 교회는요, 부활절과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한국 최초의 선교사 장로교회 언더우드와 감리교회 아펜젤러가 동시에
인천 제물포 항에 내렸습니다. 1885년이에요.
한 해 전인 1884년은 갑신정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근대화 시도도 최고로 늦었잖아요.
다른 나라들은 다 앞서 나갔는데, 우리나라도 뭘 좀 해볼까? 하며
막 꿈틀거리는 것 같더니, 더 혼란으로 돌아가던 시절입니다. *갑신정변 등
그래서 당시 상황으로 보면, 세계인들이 보기에
한국은 정말 골치 아픈 나라, 소망이 없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땅으로 생각되던 지역이었습니다.
순교의 각오가 아니면, 올 수 없는 땅에
두 젊은이가 도착을 했고, 그날이 부활절 아침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한국 교회가 큰 복을 받았습니까!
아펜절러 선교사가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철장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제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한국 교회이고, 한국 사회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그 두 청년을 이 멀리 지구 반대편까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까지 오게 했겠습니까?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들의 외로운 외침이,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씨앗이 되어서,
오늘의 우리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생명입니다.
그 힘이, 그 생명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여러분 자녀들의 앞날에도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생명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기를,
그 평화의 복음을 증거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