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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

LNCK 2024. 4. 3. 22:10

2024년 고난주간특새(03)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 - YouTube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                막14:53~72          

 

◑도입 / 보배를 담은 질그릇

이번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 주제가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근데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서, 이미지가 매끈한 그릇이 아니에요. 
교회 특새 홍보 포스트에 나와 있는 질그릇은 너무 예쁘게 그려졌는데, 그림이니까 그렇지,
원래 실물의 질그릇의 이미지는 굉장히 투박하고, 모양새도 울퉁불퉁한 그런 그릇입니다. 

근데 질그릇 안에 뭐가 담아졌어요? 보배가 담아졌습니다. 그 의미가 뭘까요?
우리 신앙인들의 깊은 오해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정도 세월 흘러 오면서 오래 예수를 믿었으면, 
이제 좀 질그릇이 좀 은그릇이 되고, 
은그릇이 조금 더 지나면 좀 금그릇으로 바뀌어지고... 
보배를 담았는데, 금 그릇을 지나서 다이아가 박힌 그릇이 되어야 되는데...' 
이렇게 기독교 신앙 자체를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보배를 담은 질그릇'인데, 주된 목적이 질그릇입니까, 보배입니까? 
보배가 드러나야 되는 거죠. 
우리의 인생에서, 그 보배 Jesus 가 온전히 드러나려면 
질그릇이 어떻게 해야 보배가 드러날까요? 

막 은으로 치장하고, 금칠을 하고, 다이아 박아야, 보배가 잘 드러나는 걸까요? 
우리 가운데 그런 식의 표현이 있죠. 
'네가 사회에서도 돈 잘 벌고, 잘 돼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또 좋은 대학 들어가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거 아니냐?' 
그래서 그런 비슷한 간증들이 한때 유행이었습니다. 

'아 내가 예수 믿었더니 이렇게 잘 되었고.. 
교회에서 집사 직분도 받았더니 집도 사게 되었다...' 
뭐 이런 간증들이 유행처럼 번졌던 때가 있었어요. 그건 잘못된 거죠. 

질그릇 안에 보배, 그 보배만 드러나려면 
그 질그릇이 계속 깨어져 나가야 됩니다. 

자기 좌절과, 자기 실패와, 자기 절망을 통해서 
그 질그릇이 흔적도 없이 깨어져야, 
결국 그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이 일찍이 간파했던 예고가 하나 있었습니다. 
'네가 넘어진 후에야 돌이킬 것이고, 돌이킨 후에야 네 형제를 굳게 하리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2
 이 말씀은, 네가 정확하게 가던 길에서 회개하고 방향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훗날 그렇게 정말 자기 존재에 대해서 완전히 무너진 베드로를 향해서 
디베랴 바닷가까지 찾아가신 그를 예수님은, 여러 가지를 묻지 않았어요. 

베드로에게 딱 하나만 질문했어요. '너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니?' 
'그럼요. 주님이 아시잖아요.' 
같은 질문과 대답을 세 번이나 연거푸 주고 받으면서, '사랑'만 확인했어요.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예고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젊을 때는 자기 힘이 충천하고, 
아직 손에 땀이 있을 때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의 의지와, 열심과, 그 혈기로 살았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띄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8
이것은 장차 베드로가, 자기 존재에 대한 모든 것들이 무너진 후에 
어떤 죽음으로,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오롯이 따르겠는가를 예고하는 내용이에요. 

▲어제 우리 교회 출신 어느 후배 목사님을 만났어요. 
이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저하고 같이 있으면서 
자기가 지금 담임이 되어서 목회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송목사님이 가르쳐 주신 세 마디인데, 지금도 기억하고 있대요.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대요.  

첫째, '절대 인간적인 기특한(성공해서 영광돌리는) 생각하지 마라.' 이거 기억가고 있대요. 

두 번째, '모든 걸 할 수 있을 때 조심해라!'  
사탄도 예수님께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탄이 그 시험을 만약 제게 던졌다면, 저는 그게 시험거리가 안 돼요. 어차피 못 하니까요.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게 시험이었다고요.

예수님은 돌을 떡덩이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뭘 할 수 있을 때가 위험해요. 

세 번째, '잘 될 때 조심해라' 
잘 될 때, 자기의 경험치가 앞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우리 귀에 잘 안 들어와요.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제자들이 '질그릇'임을 아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호언장담과, 베드로의 배반 사이에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죽음을 향해 들어가고 계시는 장면이 계속 반복된다는 
패턴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주제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양쪽에,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얼마 가지 못해서 완전히 통곡하며 무너지는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가 만나지 않습니까. 
그 한복판에 주님의 십자가의 걸음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소개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한게, 그다지 제자들의 무너짐에 대해서 야단치거나 꾸짖는 장면이 
그렇게 없어요. 
그것은 그들의 실패와 그들의 배반이, 대수롭지 않아서가 아니죠.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실패, 우리의 그 배반을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그걸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일어나라. 때가 되었다. 함께 가자'  14:41~42
스승은 죽음의 길로.. 걸어 들어가시고, 
제자들은 배반의 걸음으로.. 딴 길을 갑니다. 

근데 끝까지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기어코 찾아가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위대한 사도로 다시 부르셔서, 
사도행전이라는 새 지평을, 새 시대를 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 툭툭툭 던지신 예수님의 말씀,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조차 몰랐고, 무슨 암호 같고, 기호 같았던 말씀들이 
부활 후에는 하나씩 하나씩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 의미가 열려지면서 

주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그들도 죽음으로 함께 동역하는 모습이..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장면을 조금 조밀하게 들여다 보겠습니다.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걸음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철저하게 밀착되어서 
호흡 하나, 숨결 하나까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려는 행보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이 처절한 공포와 위협과 겁박 앞에서도 
예수님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고, 걸음 하나, 호흡 하나 마저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걸어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그 반면에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제자 무리들은, 격하게 흔들리고 있어요. 
이들의 그 걸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심에,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단히 기초되어 있는 인생은, 
어떤 비바람과 폭풍우 속에서도 미동하지 않습니다. 

소망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되는 거죠. 그게 히브리 기자의 고백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십자가에 내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를 바라보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12:2

요즘 시대가, AI 시대가 등장하고, 뭐 주가가 급등/ 폭락을 하고 
온 세상이 뒤집어 엎어질 것 마냥 재난의 연속일지라도 
저와 여러분들은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소망이신 예수가 우리의 소망의 근거이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의 변곡점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 시간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고, 만물의 경영의 주권이 그분 손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제 일상에서, 강력하게 제 의식을 붙들고 있는 말씀이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눅12:7

그 간단한 말씀 속에서, 철저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사정을 살피시고 
우리의 슬픔과 연약함과 고독을 아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직장에 출근하시면 '내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 
책상 앞에 써 붙여놓으시고,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낳은 어머니도 내 머리털 숫자를 몰라요. 
몇십 년을 같이 살아도, 남편이나 아내가, 배우자의 머리털 숫자 세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철저히 내 인생의 주도권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절대 흔들려서는 안 돼요. 

근데 제자들이 그 말씀에 기초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갑자기 밀어닥친 체포와 이 격랑의 시간 속에서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은 왜 미동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는가요? 
그 이유가 금방 드러나는데, 막14:53절을 보세요.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했어요' 14:55
여러분 지금이 시간은, 야밤입니다. 근데 야밤에 지금 공회가 모였어요.
산헤드린 공회는 밤에 소집될 수가 없습니다. 이 자체가 불법이에요.

그리고 이 야심한 밤에, 이들이 나중에 예수님을 사형으로 결정합니다. :64

그것도 불법이에요. 
'사형'에 해당하는 판결을 하려면, 재판을 두 번 해야 됩니다. 

한번 모여서, 그 당일 날 사형을 언도할 수가 없어요. 이게 유대법입니다. 
'이것(사형)은 다시 한번 다루자' 
왜요? 사람의 목숨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이미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정을 하고, 긴급히 밤에, 
불법의 시간에, 불법의 과정을 통해서 모여서 결정한 겁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주목해 보면 
14:57~58절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완벽한 거짓말은 밝히기가 쉬워요. 제일 어려운 거짓말이 절반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한 적이 있지요. 근데 원문을 잘 한번 보세요.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여기서부터 그들의 거짓말이 드러나죠.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들.
예수님이 '내가 헐겠다' 그랬나요? No. 

근데 이 말귀를 영적으로 아둔하고 무지한 그들이 못 알아먹었어요. 
예수님은 '내가 헐겠다'고 한 적이 없어요. 

근데 본문의 재판석에서는 위증을 하죠. 
사탄이 전혀 엉뚱한 것 가지고, 성도들을 속이고 넘어뜨리는게 아니라 
살짝 말을 바꿔요. 절반 진실이 섞인, 절반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을 넘어뜨릴 때도, 사탄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로 치고 들어온게 아니라 
'먹지도 말고, 손대지도 말고..' 이런 비본질적인 수식어를 갖다 붙입니다. 

성경을 계속 다시 보시면 
요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성전된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건데, 
이들은 46년 동안 지어진 그 예루살렘 성전을 말씀하시는 줄 알고, 말귀를 못 알아들었어요.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영적인 것을 모르게 돼 있습니다. 

근데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으로 
물리적인 성전 밖에는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 성전의 진짜 실체였던 참된 성전, 즉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시대가 대체될 것이다.' 
이걸 사실상 이 선언 속에 말씀하신 거예요. 

그런데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면 
이들의 위증 속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번 보십시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막14:58

이 말 자체가, 요2장과 비교해 보니까 거짓이죠. 

14:59~61절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계속되는 의도된 침묵에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말 없음' 속에도, 예수님은 거대한 웅장한 메시지를 토해내고 계신 거예요.
이게 역설이죠.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지금 예수님의 침묵은 뭘 말하고 있는 겁니까? 
'나의 이 길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오고 외쳐오던 내용이다.' 
침묵함으로써, 하나님의 경영을 오히려 드러내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침묵마저도, 지금 성경대로, 
질서 있게 흐트러뜨리지 않고, 겁박에 흔들리지 않고, 이 격랑의 시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확증하신 바, 
하나님과의 동역에 대해서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태도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에 
매우 회복해야 될 태도이어야 하고, 자세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뭐 뉴스에 조금 이상하게 나오면 
'어떡하나.. 저거 어떡하나..' 하며 불안해 합니다. 
뉴스를 보실 때 그냥 가만히 보세요. 별일 일어나지 않아요. 그거 연습하셔야 돼요. 

'뭐 어디에 큰일 났대.. 저거 어떡하려고 그래?'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세요. 

만물의 주인이 되시고, 만유의 주권자가 여러분들이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현실'이 되셔야 돼요. 

돈이 현실이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현실이 돼야 돼요. 믿습니까? 
말로라도 우리가 넘어져서는 안 돼요. 

근데 우리는 언어로 얼마나 쉽게 넘어집니까? 
우리 언어로 '다 망했다' 그러고... 
말로 다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서, 주위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곤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모든 진상은 드러납니다. 믿으십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이 계획된 성경의 뜻을 이루려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경영을 선언하고 외치고 있는 거예요. 할렐루야! 

자 다시 성경을 보십시다. 
14:61~62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 말씀도 사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이미 이 예고와 예언이 다니엘서를 통해서 선언된 내용입니다. 

단7: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다니엘서 말씀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고, 이 내용은 왕의 즉위식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대관식은 놀랍게도, 수모와 치욕과 고난과 조롱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의 가시관을 쓰심으로써, 만주의 주의 대관식이 
이런 역설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제 그 마지막 대관식이 임박했다' 그 뜻입니다. 

14:63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근데 원래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이렇게 찢고 감정을 격하게 노출 안하도록 돼 있어요. 
지도자이기도 하고, 대제사장이 더구나 옷을 찢고 막 성질내고 부르르 떨고 
이렇게 안 하도록 돼 있어요. 

원래 지도자는 제일 공동체에 보여야 할 덕목이.. 안정감이에요.
차분함, 고요함입니다. 
온 세상이 막 난리가 난 것처럼 그래도, 
리더는 그 상황 속에서 공동체를 안정시키고, 고요하게 진정시킬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뭐 뀐 사람이 더 난리를 친다고... 
지금 거짓 음모와, 거짓 불법의 시간에, 거짓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잡으려는 이들이 
더 흥분해 가지고 난리 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래요. 여기 지금 예수님을 걸긴 걸어야 되겠는데, 자기네들끼리도 말이 안 맞아요. 
그러니까 서로 틀리죠. 그래서 증거를 못 잡는 거예요. 

저는 우리나라 방송이나 인터넷 이런 걸 들여다 보면 
'좋아요' 누르라는 거 있죠? 그거 누르지 마세요. 
그걸로 시대가 막 끌려다녀요. 

요즘은 팩트가 중요한게 아니라, '좋아요'가 몇 차례 눌러졌는가?
그걸 팩트보다 더 따지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게 좋으면 마음속으로 '좋아요' 하면 되지, 
그걸 꼭 숫자로 표시해야 됩니까? (그래서 그걸 조작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 시대가 은근히, 그런 정서로 몰아가고, 감정적으로 몰아가서 
팩트를 완전히 오도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삐뚤어지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여론몰이가 오늘 본문에서도 지금 일어나고 있어요. 

이 시대에서도 일어나고, 교회 안에서도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몰라요.
자기가 확인도 안 하고, 보지도 않은 얘기를 퍼옮기고 다니면 안 됩니다.
그 자체가 그 신앙인의 질서도 아니고, 태도도 아닙니다. 

자기가 눈으로 확인했더라도, 이것이 입밖으로 나가기까지 세 번을 생각해야 돼요. 
'꼭 필요한 말인가, 해야 되는 말인가?'
'이 말을 통해서 누가 해를 입지는 않을까?'
적어도 세 번을 생각하라 그러잖아요. 

근데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사형을 선언해 버리고 맙니다. 
64절 '그 신성 모독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신성모독 유대인들에게 법정 최고의 형이에요. 
:64b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신성모독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이건 팩트가 중요한게 아니고 '어떻게 생각하냐?' 이에요. 
지금 요즘 인터넷에서 하는 방식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자기 주관적인 방향이고, 주관적인 생각이지요. 

마지막 65절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온갖 인격 모독에 린치 방법이 다 동원됩니다. 
그런데 이 한복판에 지금 베드로가 멀찍이 지켜보고 있어요. 

베드로의 이야기는 한 덩어리를 생각을 해보면 
그는 대제사장의 여종의 지적에 극렬하게 거짓말을 하고 예수님을 배반하면서 
72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러니까 베드로가 닭소리 때문에 회개했다는 얼토당토 않는 얘기를 하지 마시고 
그 시간에 닭이 그냥 운 거예요. 뭔 회개를 닭 소리 때문에 해요?  No

베드로의 회개의 본질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회개나 돌이키는 것도, 내가 의지적으로 회개할 수 없고 
의지적으로 돌이켜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해 봤잖아요. 

무엇이 그 회개를 가능하게 하죠? 
주님의 끈질긴 사랑의 추적과, 그분의 말씀이에요. 

그 말씀만이 나를 바꾸고, 나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남은 고난 주간 마지막 날까지, 

'주님, 저는 비록 연약하지만,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일지라도 
주님은 나를 끝까지 추적하셔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어 주시고 
내 인생이 언제나 약속과 언약의 기초에 걸어가는 은혜를 입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걱정하지 말 것은, 우리 주님이 여러분들을 버리지 않으세요. 여러분들은 끝까지 붙들 겁니다. 
거기에 우리가 감격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 돌아와야 될 이유가 있는 거예요. 

이 주님의 끈질긴 사랑 앞에 오늘도 설득되어 
남은 시간을 주님과 깊이 호흡하고 동행할 수 있는 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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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교회'라는 벙커 C유에 불붙인 심지 같은 청년들 (펀 글)

지난 3~40년 사이에, 중국 교회에 놀라운 부흥이 있었다.

수 십 만 명이던 기독교인들이.. 1억 가까이로 늘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그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어째서 중국에 이런 일이..?’

간단한 대답으로 성령의 역사다라고 말한다.

 

지난 3~40년 사이에, 중국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기사와 표적이 그대로 중국에 재현되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도, 심지가 있어야 타오른다.

이것은 비유로 설명하면, 마치 벙커C유와 같다.

 

벙커C유는 원유를 정제할 때, 가장 나중에 나오는, 가장 뻑뻑한 기름이다.

그래서 휘발유와 달리, 성냥불을 벙커C유에 갖다 대도, 오히려 성냥이 꺼져버린다.

 

벙커C유에 불이 붙으려면.. 심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단 불이 붙기만 하면, 벙커C유는 어마어마한 화력을 갖고 타오른다.

 

설교자가 성령의 역사를 벙커C유에 비유하는 이유는,

성령의 역사가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곳에는, 누군가 심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 인생을 심지처럼, 희생/고난/십자가의 길을 간 것이다.

그 심지를 통해서, 전체에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 것이다.

 

중국에 큰 부흥이 일어난 이유도

수많은 성도(젊은이)들이, 그간 3~40년 사이에, 자기 인생을 심지처럼 내어드렸다.

 

십자가를 지고서, 고난의 대가를 치렀다.

그 심지들을 통해, 중국 전역에서 성령의 불이 폭발적으로 타올랐다.

 

여러분, 이것은 중국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지난 2천 년간 교회역사를 살펴보면,

<성령의 역사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났다.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특별히 귀하게 사용하신 사람들의 공통점도 한 가지다.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서, 자기 길을 꿋꿋이 걸어갔던 사람들이다.

 

마치 심지처럼, 자기 삶을 불태워 드렸고,

그 심지를 통해서, 그 시대 전체에 불이 붙는 큰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