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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초대. 성만찬 고전11:23-26 2001.10.28.
사람들이 가장 엄숙하고 심각할 때가 언제냐 하면 장지에서 드리는 하관예배 때입니다.
이때만큼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죽음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다가도 언젠가는 자기도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심각해지고 진지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때가 가장 복음을 전하기 좋을 때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영생이나 천국을 믿지 않지만 장지에서만큼은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때 복음을 전하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는 그 누구도 심각하지 않을 수 없고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어느 날, 예수님과 그의 열 두 제자가 한 조그만 다락방에 둘러 앉았습니다.
만약 그 다음 날이 예수님이 죽는 날이란 것을 알았다면
제자들은 아마도 모든 태도가 달라 졌을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의 발을 씻기시기 전에, 자기들이 먼저 예수님의 발을 씻었을 것이고
누구든 슬픔 속에 잠겨 있으면서.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을 정말 소중하게 들었을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밤,
제자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상당히 많은 말씀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 너희는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다.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조금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조금 있으면 다시 볼 것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등등 정말 생명같은 귀한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이 유언인 줄 몰랐습니다.
만약 유언인 줄 알았다면 어디다가 말씀을 베끼든가, 어떻게 할 텐데
제자들의 행동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장차 자기들에게 돌아올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관심사는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오늘 따라 왜 저런 얘기를 하시는 지 이해 못했을 겁니다.
인자가 나무에 달릴거라는 둥, 너희가 나를 다 떠날 거라는 둥,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배반할 거라는 둥, 뭐 이런 말씀을 왜 하시는지 이해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가슴아프셨을 겁니다.
이제 내일이면 자기가 이 세상에 온 진짜 목적을 위해 죽는 날인데도
제자들은 전혀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으니 무척 답답하셨을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십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떡을 가리켜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긴 내 몸이니 이 떡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포도주를 가리키면서는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흘린 피니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서야 제자들은 이 만찬의 깊은 뜻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셔서
본격적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되면서 또한 얼마되지 않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핍박을 받으면서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만찬의 깊은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셔도 언제나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베푸신 그 향연에 참여하는 그 자리가 바로 성만찬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자리입니다.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모진 시련과 핍박이 올 때라도
초대 교인들은 이 성만찬을 하면서 그때를 이겨 나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성만찬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의 그 엄숙함과 진지함까지야 재현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오늘, 성찬에 들어가면서 여태껏 나누지 못한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간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
지금은 사라졌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습니다.
저는 6.25를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그 전쟁의 언저리를 체험한 세대입니다.
미군들이 주는 초컬릿, 껌과 분유가루를 먹어 본 세대입니다.
초컬릿이나 껌을 달라고 지프차를 따라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어려웠습니다.
전쟁으로 나라는 페허가 되고, 여기저기 "재건"이라는 깃발이 나부끼는 때였습니다.
모두가 먹고 살기 너무 힘든 때였지만, 인정이 있었습니다.
조그만 거 하나라도 서로 나눠 먹으려고 했던 때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면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안돼서, 소풍을 안 오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저랑 아주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아주 성실하고 착한 친구였습니다.
소풍가는 날 도시락을 들고 나란히 줄을 서서 즐겁게 갔는데
막상 점심시간이 돼서 보니, 이 친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는데요.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보니까, 어느 숲 속에 혼자 있더라구요.
그래서 "너 왜 여기 있었니 얼마나 찾았다구. 우리 점심 먹자."
그런데도 얘는 도시락을 풀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제 도시락을 풀고, 그 친구의 도시락까지 제가 풀었는데,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니까, 속에 아무것도 없는 빈 도시락인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랑, 제 도시락 하나로 같이 울면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땐가 일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때가 생각이 나는 겁니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때.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죠.
분명히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잊혀져 가고 사라져 가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억 속에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그때를 생각해 보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아주 맑은 꿈이 솟는 그런 기억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성만찬입니다.
가장 엄숙하고 거룩하고, 은혜스러운 시간인데
이 시간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이 성만찬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드리듯이,
이 성만찬 역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베풀어주시는 초청의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성만찬의 뜻을 함께 나누면서 초대교회의 성만찬처럼
큰 위로와 감격과 은혜의 시간이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초대교회 때 예배의 중심은 설교나 찬양이나 기도가 아니고 성만찬이었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찬양과 말씀으로 시작이 되어서
예수님의 임재하심과 다시 나타나시는 시간이었던 성만찬에서
절정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모든 예배의 주제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성만찬이 있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이 현장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람이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스카 쿨만이란 사람은 이 성만찬을 가리켜 "새 계약의 재다짐"이요
"그리스도를 다시 뵙고 경험하는 예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시간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 중에 가장 고대해야 할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는 그 시간이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만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 중에서 쯔빙글리가 그 아름다운 예전을
일년에 4회정도만 할 것 국한해 버렸습니다.
물론 성만찬 속에 있는 그 정신이 중요한 것이고, 횟수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로 올수록 성만찬을 하는 시간과 준비 등 모든 것들이 번거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누구의 편의를 위한 것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성만찬은 예배의 핵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매 미사시간마다 영성체라고 해서
아직도 그 성만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의 성만찬은 전통과 형식에 치우쳐 의례적으로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만찬은 다시 매 예배시간마다
초대교회 때의 그 엄숙하면서도 은혜로운 시간으로 부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는. 그래서 사람이 베푸는 잔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는 잔치를 생략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성만찬을 해야할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은 분쟁이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성찬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첫째, 성찬은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합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십자가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체험한다면
우리는 성만찬을 할 때 눈물을 흘리지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 고난에 동참하고, 또한 그것을 우리 대신 홀로 담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의 의미를 많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만큼은 예수님은 저주를 받으신 겁니다.
사람의 한 일을 보면 갈 길은 지옥밖에 없습니다.
그 지옥의 문턱까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가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오직 자기 밖에 없는 그 고독의 시간을 홀로 견디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본체이면서도 이 땅에 오셔서 일생동안 가난한 자, 죄인들, 버림받은 사람들,
병자들 이런 사람들과 지내면서 머리 둘곳 없이,
안식을 누릴 따뜻한 둥지 하나 없이 몸으로 고생만 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에겐 배신당하고, 가족들에게까지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듣기에는 좋았지만 믿고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몸과 마음에 다 상처를 심하게 받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받은 상처 때문에 몸부림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으신 그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당신이 하신 말씀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어서 사형을 선고받고
가장 못된 흉악범들에게나 집행하는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사람이 만들어 내 가장 잔인한 처형방법입니다.
무엇보다 공개재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다 봅니다.
사형당하는 곳까지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갑니다.
자기가 묻힐 무덤을 자기가 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보다 비참한 게 어디 있을까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얼마나 절망스럽겠습니까?
죽이려면 바로나 죽이지 서서히,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하면서 죽이는 것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리고 수치스럽습니다.
옷은 다 벗기웁니다. 아무것도 걸치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겁니다.
사람이 죽이지 않고 자연사 할 때까지, 빠르면 사나흘 걸리고
때로는 더 걸리기도 합니다.
그때까지 죄수는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체처리는 독수리나 이런 새들이 파먹게 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얼마나 약하셨는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고통 중에서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 고통 중 어떤 고통이 더 클까요?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해서 한 삼일 동안만 육체의 고통을 느끼게 되면
거기엔 견딜 장사가 없습니다.
저는 가능한 대로 십자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도대체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에 대해서만큼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데까지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러분께도 말씀을 드렸지만 말씀을 드릴 때마다 번번이 느끼는 것은
도대체 말로 얼마나 설명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게 할까.. 그게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저부터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피상적으로밖엔 느낄 수 없습니다.
먼저 십자가형을 견뎌내려면 그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사전에 적당한 고통을 줘서 대비를 시켜야만 됐습니다. 그래서 처음 하는 일이 채찍질입니다.
로마인들이 쓰는 채찍은 특수하게 고안됐습니다.
길이는 3m 정도 되는 긴 채찍에다 마디마디마다 동물의 뼛조각을 달아놨고
채찍 끝엔 납덩이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한번 채찍을 날리면 그 채찍이 몸을 휘감아서 다시 나올 때는 살점이 묻어나왔습니다.
등짝을 한 번 치게 되면 등에는 금방 피의 이랑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런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머리엔 가시관을 쓰셨는데, 유대지방의 가시는 우리나라나 유럽의 가시와는 다릅니다
사막지대에서 서식하는 가시는 가시 하나의 크기가 큰 못이나 송곳 크기 입니다.
그것으로 가시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쓴다고 하면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는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통증이 옵니다.
그것은 둔기로 맞을 때보다 훨씬 강한 통증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통을 당하시면서 골고다까지 가셨습니다.
죄수를 십자가에 다는 방법은, 먼저 십자가를 바닥에 눕힙니다.
그리고 그 위에 죄수를 눕힙니다. 그리고 못으로 손과 발을 고정시킵니다.
그 손과 발에 못을 박을 때는, 살에다가 못을 박게 되면 살이 찢어지고 말기 때문에
못이 뼈를 뚫고 지나가게 합니다. 사람의 고통 가운데 가장 심한 고통은 뼈를 깎을 때,
뼈에 손상이 생기는 경우에 가장 심한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눕힌 십자가를 세우게 됩니다.
십자가를 세우게 되면 몸은 아래로 쏠리게 되는데
그 쏠리는 몸을 못이 고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뼈에 계속 자극이 옵니다.
이때의 고통이야말로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죄수들은 죽을 때까지 비명을 지른다고 하는데
그 비명소리는 짐승 소리처럼 높고 날카로운 소리라는 겁니다.
너무 통증이 심해지면 기절을 하게 되는데
그 기절한 것이 통증에 의해서 다시 깨어나게 되고
통증을 느끼면 다시 기절하고 또 다시 통증에 의해서 깨어나는
그런 고통의 순환을 죽을 때 까지 겪는 게 바로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죄수의 가장 큰 소망은,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친지들의 가장 큰 소망은
빨리 숨이 끊어지는 것, 그게 가장 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출혈이 계속되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는 십자가는
그저 붉은 핏기둥으로만 보인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이 십자가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성만찬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떡은 우리를 위해 찢기신 살이고,
그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인 것을 알며 먹고 마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대신 고통당하신 그 십자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의 끊겼던 관계는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숨어계시거나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승리요, 희망이요, 회복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지막 날에 주님처럼 다시 부활하리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다시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계를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과 다시 오심을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이해하면서 참여해야만 성만찬은 의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해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살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내게 찾아오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25의 말씀처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하신 것처럼
우리 육체의 질병도 다 나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둘째로 성찬의 의미는 하나됨에 있습니다.
주님과 연합하고 모든 형제 자매들이 하나로서 지체가 되는 예식이
바로 성만찬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만찬엔 누구든지 참여해야 합니다.
과거에 성만찬은, 둥그런 큰 빵을 돌아가면서 찢어서 떡을 뗍니다.
한 사람이 한 모퉁이를 떼서 먹고, 다음 사람에게 패스하는 식으로 떡을 뗐죠.
그 떡을 통해서 자연히 ‘우리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로 큰 대접에 한 그릇 떠 놓고, 돌아가면서 마셨다고 합니다.
그때는 그릇이 귀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어쨌든 성찬식 포도주를 나눌 때도,
한 그릇으로 돌려가면서 마셨던 것입니다.
그 의미는 '한 몸'에 참여한다는 뜻이었죠.
오늘날 우리가 성만찬 때,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우리가 다 한 몸, 한 지체 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성도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방인으로 믿음에 들게된 사람들과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노예가 있었고 사회의 하층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문벌 좋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린도는 성적으로 대단히 타락한 도시였는데
바울파, 그리스도파, 아볼로파, 게바파, 파벌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환경과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친한 분도 있지만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이 만찬에 초대하면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진정한 주안에서 하나가 연합입니다. 그 주님의 뜻을 우리는 오늘 이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주의 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우리도 이 성만찬을 통해서
진정한 교회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한 떡과 같은 포도주를 먹으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됨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분잔(粉盞)을 한 후에는
모든 형제 자매들이 서로 허깅을 해 주시면서 하나됨을 서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형제를, 자매를 사랑합니다" 하는 말로서 인사하고
서로 지체됨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 순서는 성찬식 전후에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모든 형제 자매들이 주안에서 하나로 묶인 것을 체험하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초대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귀한 자리 앞에 나왔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에서 우리를 취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생각하면서 성만찬에 임하오니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완악함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 성만찬을 통하여, 에수 그리스도를 다시 뵙게 해 주시고,
병이 치유받으며 위로받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우리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시고
서로하는 사랑의 고백을 통해서 진정한 연합됨과 지체됨을 확인하게 하옵소서.
이 시간 모든 형제 자매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은혜와 거듭남과 사랑의 만찬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성찬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