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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한복판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라

LNCK 2024. 4. 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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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한복판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라!ㅣ주일설교 2024-03-31 - YouTube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라  고전15:17~22

 

※'부활신앙'의 원리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활했다고 여기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사망과 환난과 질병의 문제들도, 십자가에서 다 해결되었다고 여기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듯 현실도 점차적으로 점점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도입

오늘 부활의 주일에, 우리가 정말 주님을 온전히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어둠의 터널과도 같은 인생의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할 때죠. 
더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인간적으로 도와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니 마음도 분주하고 조급해집니다. 

그러나 그때가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며, 주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부활의 주일, 우리가 무엇을 믿고 살아왔는지,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정말 잘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세상 가운데, 우리가 너무나 분명하게 인간적으로 믿고 사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신앙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사실 압니다. 
이미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시고, 주님이심을 믿는다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법칙 따라, 방식 따라 다 살아가는 것을 보니까 
성도의 마음의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러다가 더 열심히 세상의 방법 붙잡고 살기도 합니다.  ↔부활신앙

여러분 오늘 부활의 주일, 우리가 어떤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부활의 믿음이란,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절망 앞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 앞에서, 
더 분명히 빛납니다. 

사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처해 보면, 우리 믿음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삶의 의미가 다 사라진 것 같은 하루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때가 있는 거죠. 

▲절망의 토요일을 연속해서 살면 안 돼요!

그렇게 사랑하던 예수님을 떠나보낸 제자들이 
맞이했던 바로 그 일상은 어땠을까요? 얼마나 허무하고 잔인했을까요? 

우리에게도 무엇인가 바뀔 것을 기대하며 열심을 다했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맞이하게 됐을 때 
얼마나 무기력한 하루를 보내게 됩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바로 그 다음 맞이하게 된 절망의 토요일, 그때가 꼭 그런 거죠. 
그런데 그 토요일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루 일상이 계속 평상시처럼 지루하게 이어질 때,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상상을 해 볼 수도 없지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구원의 언약을 정확하게 이루셨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이 절망의 자리 한 가운데, 우리를 찾아 오셨어요.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통해 보는 '부활 신앙'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품고, 꼭 기억하기 원하는 성경 속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절망 중의 절망' 앞에 놓였던 한 사람이 있었어요. 
어린 자녀의 죽음 앞에 놓인 회당장 야이로 입니다. 

주변에서는 절망 가운데 그저 '다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야이로를 둘러쌌어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니, 예수님을 모시고 그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미 딸은 죽었습니다'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뭐라고 이야기하죠? '다 끝났어, 포기해, 이젠 다 끝난 거야!' 
근데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세요. 
막5:36절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죽음의 현장, 그 아픔의 현장 가운데로 예수님이 나아가셨어요. 

이제 야이로의 딸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으로 예수님을 초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그곳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정의하셨어요. 
막5:39절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죽은 자가 뉘어져 있는 그곳에, 슬픔도 있었지만, 비웃음이 공존했어요. 

그 사건에 근원적 자리로, 주님이 더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셨어요. 

당시에 유대 문화에서는, 죽은 자, 그 주검을 만진다는 것은 부정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전혀 개의치 않으셨어요. 
사랑으로 손을 잡으시고, 그 죽은 아이에게 말을 거십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죽은 아이가 아닌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대하셨어요. 

여러분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생이죠. 
근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십자가의 은혜로 덮으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잡아 일으키셨잖아요. 은혜입니다. 

절망의 상황, 이제 다 끝났다고 사람들이 여길 때, 
주님은 그 가운데서 여전히 일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지금 오늘 예배 드리는 우리의 심령 가운데, 상하고 낙심한 마음이 있습니까? 
주님이 그 가운데 여전히 함께 하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죽은 자'라고 여겼어요. 
근데 예수님은 그 아이에게 말을 거시며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끝났다고 사람들이 여겼어요.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넌 이제 포기해!' 
근데 주님은 '일어나라!' 말씀하십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선포하셨어요. 
죽음의 권세를, 주님이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 세상의 철저한 규정과 (죽었다는) 낙인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풀어내셨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절망적 상황에 놓인다 하더라도

부활신앙을 가지고서, 거기서 부활의 희망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부활의 힘, 사랑의 힘

 

여러분, 이 말씀이 물론 전지전능한 힘이기도 하지만, 
꼭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픈 자녀를 품어내는 부모님의 간절한 사랑, 
자녀의 고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게 해결해 줄 수가 없어요. 

근데 그러면 옆에라도 있어 주고, 붙잡아주고, 
너무나 안타깝게 끝까지 붙잡아주는 그 사랑의 말씀으로 
예수님이 사실 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겁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허삼관>이라는 영화 보신 분 계신지 모르겠어요. 
(*하정우 감독, 주연. 2015.01.12일 개봉한 한국 영화)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봤는데요. 

이 영화는 '허삼관 매혈기>라는 중국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굉장히 유명한 중국 소설인데, 우리나라의 1960년대 초중반을 배경으로 영화를 각색해 냈어요. 

「어느 한 마을에 허삼관 이라는 청년이 사는데 
이 청년의 마음에는 그 마을의 한 처자가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을 셋이나 낳고, 아주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근데 어느 순간에 문제가 하나 등장하게 됐는데, 첫째 아이 이름이 일락 이에요. 

근데 이상하게 동네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면 될 걸, 수근거리기 시작합니다. 
영화에서는, 허삼관의 아내가 된 이 여인에게, 옛 연인이 있었던 걸로 나와요. 

근데 일락이가 크면서 '그 사람이랑 너무 닮았다' 
동네 사람들이 자꾸 그 얘기를 수군거리는 겁니다. 
허삼관의 마음이 자꾸 흔들려요. 

그러다가 결국 아이의 혈액 검사를 해봅니다. 
그때는 뭐 유전자 검사 이런게 없었던 거죠. 

근데 혈액형을 보니까, 부부 두 사람 사이에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인 거예요. 
그러니 친자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 허삼관의 마음이 너무나 흔들립니다. 

영화에서 보면, 이 여인이 옛 연인과 원치 않았던 어떤 하룻밤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냥 암시만 해요.

이 허삼관이 온통 찌질한 짓을 다 합니다. 
아마 마음 추스르기가 어려워서 그렇게 했겠죠. 

첫째 아이 일락이랑 정을 떼고, 그 친부에게 보내려고 
그냥 정을 떼려고 엄청나게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일락이 첫째 아이의 마음에는 
허삼관만 자기 아버지인 거예요.
그래서 그런 여러 일들이 일어납니다. 

허삼관은 일락이를 결국 진짜 아들로 받아들이기로, 결심이 서요. 
근데 일락이가 그때 병으로 쓰러집니다. 

급히 서울의 큰 병원으로, 엄마가 일락이를 데려가고 
그리고 아빠 허삼관이 해야 할 일은, 병원비를 마련해서 서울로 따라 상경해야 하는 거예요. 

근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빠 허삼관이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 매혈이에요. *피를 팜
그 당시에는 병원에서 피를 뽑고, 돈을 조금씩 받았던 모양입니다. 

근데 그 당시에 3개월에 한 번만 매혈이 허용됐어요. 
그러나 뭐 전산시스템이 있었던 게 아니니까 
허삼관이 할 수 있는 일은,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병원을 들리고, 
또 다른 마을과 도시에서 병원을 들러서 계속해서 매혈을 합니다. 

3개월에 한 번인데, 매일 매혈을 하다시피 하며 서울로 올라가는 거예요. 
화장실에서 쓰러지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온갖 수척해진 얼굴로 병원에 들어가 또 매혈을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서울까지 가는데, 서울까지 가는 길이, 그러니 얼마나 오래 걸렸겠어요. 
극적으로 아들 일락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 아빠 허삼관이 하는 말이 '아빠가 늦게 와서 미안하다. 늦게 와서 미안해!' 
이게 아빠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어요. 

근데 일락이가, 그렇게 아빠가 끝까지 자기를 위해 찾아온 거, 그걸로 회복을 얻습니다. 
몸도, 마음도, 영혼도... 그 아들이 회복을 얻게 돼요. 

여러분 그 이전에 허삼관이란 아빠는, 아들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그렇게 온갖 일을 다했던 아빠일 뿐입니다. 
돈도 없어서 매혈을 해야만 겨우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었던 아빠였고, 
시간 내에 병원에 도착도 못했던 아빠예요. 늘 부족했던 아빠입니다. 

그런데 이 허삼관이라는 아빠의 간절함이, 영화 전체의 후반부에 채워져요. 
그리고 그냥 아빠가 잘난 거 아무것도 없는데, 
가족을 향한 그 간절한 마음 하나로, 이 가족이 결국 회복된다는 것이 영화 속에 그려집니다.」 

영화의 내용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완벽하게 일치시킬 순 없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을 향한 그 간절한 마음, 그 애절한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셨기에, 
구원의 역사, 그 놀라운 사건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활의 능력은, 사실 사랑의 능력이라는 거죠!  

여러분, 여러분이 누군가의 아픔을 읽어내고 있다... 아픔의 관심을 가진다면,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을 때, 여러분이 그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여러분은 진짜 복 받은 사람이에요. 

 

'그 고통의 아픔의 원인을 없애는 일에 내가 함께 해야겠다. 
그 원인을 없애는 일을 위해 함께 고통을 당하는 중에, 받는 고난이 있다...'

평소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고 있기 때문에, 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난 야이로의 딸 아이에게 말씀하시며 
깊숙히 그의 삶에 관여하십니다. 

그냥 살리셨기에 기뻐하신게 아니에요. 
주변의 사람들은 '다 끝났어, 포기해!' 
그렇게 말하던 사람들에게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 사명을 주세요. 

여러분 이제 죽음에서 일어난 자, 살게 된 자, 그에게는 힘을 주고 
살려냈으니 그가 온전한 삶을 살도록 도라는 겁니다. 먹을 것을 주라는 거예요. 
앞으로 살아갈 그 길을 힘 있게 걸어가도록, 옆에서 도우라는 겁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마음, 이것이 부활 신앙과 연관있는데, (그 사람을 살리니까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명자가 됩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으로 붙잡은 사명,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이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 일어났을 때, 일어난 것에 멈추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 사명을 주십니다. 

여러분 한 가지 아시죠? 다 아실 거예요. 
사명이 있는 자는, 가야 할 길이 있는 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에  우리는 '사명이 버겁다. 내려놓고 싶다.' 그럴 때 많습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가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 사명 때문에 기도할 수 있었고, 
그 사명 때문에 버텨낸 거 아닙니까? 

사명의 자리가 때로 힘들기도 하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를 살리는 자리이기도 했다는 거예요. 
나도 살았고, 내 주변의 사람도 살았습니다. 

힘들지만 기도했기에, 영적 근육이 붙었고 
내가 정말 사명 붙잡았으니, 주의 살아계심을 경험했고, 
주님은 나와 늘 함께 하시며 인도하셨다는 것도 깨닫게 된 거 아닙니까. 

내가 넘어졌어요. 믿음의 동역자가 함께 사역하며, 함께 마음을 나눴던 동료가 
날 일으켜 주는 것도, 사실 경험하며 산 거 아닙니까. 

살려야 하는 사명을 가진 자는, 딴 곳을 쳐다볼 시간 없습니다. 
자기가 가야할 길이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부활 신앙의 원리

 

여러분 오늘 부활의 주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다... 
그 사건의 증인으로 이미 부름 받았습니다. 

부활의 소식.. 
'1년에 한번 부활주일이니까 그렇지' 
'과거에 부활의 사건이 있었지...'
이 정도의 믿음의 삶이 아니라 

바울의 고백처럼 '이제 나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나의 소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믿음으로, 그 믿음을 붙잡고 사는 겁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의 새 생명, 그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완전히 뒤바뀐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어야 하는데 
죽음의 절망에 매여 사는 사람들을 풀어내도록 하는
그 일에 우리가 부름 받은 거예요. 

사도 바울이 너무나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 없었다면, 이 땅에서 우리 삶은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고전15:17~19

고전15:17~19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 없었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여러분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어요.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불쌍한 자가 아니에요. 이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이 믿음을 취하고 사는 거예요. '부활했다'고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취하여 산다'는 건 뭘 말하는 걸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제 내 삶에 주인이 되셨다'는 거예요. 이끄신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순종하며 살면 되는 겁니다. 

내 안에 부활의 주님이 살아 역사하시니, 
내 삶을 주님께 맡기고, 신뢰하고 내어드리면 되는 겁니다. 

부활 이후에, 우리는 전혀 다른 삶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라면, 아마 1년 동안 너무나 많이 들었던 말씀 구절일 거예요. 

롬6:4~6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가 죄의 재미를 알아서, 죄를 놓지 않습니다. 
나 중심적인 삶, 거기서 헤어나지를 못하며 살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죄의 종노릇하던 나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놨어요. 
그리고 세상 권세 매여사는 사는 사람들을 풀어내는 사명으로 부름 받았어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정말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기억하세요. 
우리는 본질상 죄의 노예이고, 죄의 종이었어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이 죄의 나무와도 같은 삶을 삽니다. 
죄의 열매가 맺혀요. 
죄의 열매만 그냥 이렇게 보기 좋게 다 땄어요. 죄가 없는 거 같잖아요. 
시간이 흐르면 또 죄의 열매가 맺힙니다. 나무니까요.

그러면 계속 죄의 열매 따서 없애기만 하다가 끝나나요? 
죄의 나무가 죽으면 되는 거예요. 
죄의 나무가 죽어버리면, 열매가 못맺혀요.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을 때, (법적으로) 이미 장사 되었어요. 
죄의 몸이 죽었어요. 죄의 나무가 죽어버린 거예요. 이 믿음으로, 이렇게 여기며 살아야 됩니다.
이제는 부활의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걸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을 받았는데, 
여전히 죽음과 같은 세상에 매여 살기도 한다는게, 너무나 안타까운 거예요. 

◑적용

 

여전히 가난의 영에 묶여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탐욕의 영에 묶여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질의 축복을 아무리 받아도, 마음의 인색함이 너무 많아서 베풀고 나누지를 못해요.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불안해요. 
여러분 그게 바로 '가난의 영'인 거예요. 

예수님은 이미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나누고 베푸는 삶이 얼마나 풍성한 생명으로 역사하는지를 알려 주셨어요. 보여 주셨어요. 
여전히 관계에 묶여 그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분노한 마음으로 관계 가운데 마음 상해서 분노한 마음으로 삽니다. 

근데 그 상대방은 어떻게 살까요? 그 사람들은 대부분 잘 삽니다. 
그런데 나만 독기를 품고 사니, 내 마음만 썩어가요.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며, 막힌 담을 다 허무셨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다 허무셨습니다. 
'세상을 품고 화해자로 살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화목 제물로 살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럼에도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또한 우리는 만족 없이 살 때 많아요. 
사도 바울은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주 안에서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풍부에 처해도 겸손할 줄 알고, 
비천에 처해도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산다... 
그는 주와 함께 부유한 삶을 사는 사람인 것이죠.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우리는 이러한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경험한 사람의 삶은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잖아요. 
그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유대에서 존경받고 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인들 잡아 결박하고 박해하려 했어요. 

그러나 부활의 주님, 생명의 빛을 만난 다음에 
그는 아무것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에 이끌려야지만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되었고, 그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먹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사흘 동안 꼼짝을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의 기도를 받고,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을 때 
그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고, 증인의 삶을 삽니다.

그가 부활의 생명을 경험했어요. 
예수의 생명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늘 자신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선포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고전15: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가 늘 고백한 것은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그게 그의 자랑이었어요.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이미 찾아오셨어요. 
절망 한 복판에 찾아오셨어요. 우리 안에 살고 계시죠. 

그러니 여러분,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의 삶을 인정하는 것,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붙잡는 것,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절망에 빠져 살았던.. 세상 붙잡았던 나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부활의 새 생명으로, 우리는 새 사람이 된 것이에요. 

여러분, 이런 마음 가지시는 분 있으세요? 
오늘 말씀 들으시고, '내가 죽어야 되지.. 내가 노력해야겠다...' 
아니에요.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일을 이루셨어요.  
여러분이 믿음으로 붙잡는 거예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게 믿음으로 여기며 살겠다는 겁니다. 
거기서 우리의 기쁨이 솟아나고, 소망이 생겨나는 거예요. 

존 오트버그 목사님이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부활의 사건에 대하여 기록한 한 부분이 있는데,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 주일을 기적의 날로 기억합니다. 
그날은 인간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하지만 천국의 관점에서, 정작 위대한 날은 토요일이 아닐까요? 
무덤 속에 계신 하나님, 일요일의 기적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 일이지만, 
토요일의 기적은,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 죽어서 누워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적을 무찌르신 것이 아니라, 친히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무덤과 사망과 지옥에서도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진데, 
어디에선들 예수님을 못 찾겠습니까.」 

여러분 '어디에선들 예수님을 못 만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고난 가운데,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을 왜 못 만나겠습니까? 

절망과도 같은 토요일의 메시지는 
우리의 고난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거예요. 
죽음 가운데도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메시지가 놀라운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새롭게 하실 것이 아니라, 이미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망이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넘어져도, 우리에게는 기쁨이 회복되는 것이죠. 

오늘 정말 예배 가운데, 너무나 어렵고 힘든 마음이 있고, 어려운 상황이 있음에도 
부활주일이라서 그래도 마음 추스려 예배에 나오신 분이 계실 거예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주님이 이미 여러분과 함께 일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지금도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믿음이, 우리 안에 너무나 실제가 되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의 소망이 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