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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도 믿지 않았다

LNCK 2024. 4. 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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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3월31 ’듣고도 믿지 않았다’ (youtube.com)

듣고도 믿지 않았다              막16:11~15 

 

◑예수님의 부활을 계속해서 믿지 못하는 제자들

 

▲막16:9 '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안식의 첫날'은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이죠. 
즉 주일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에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참 이상하죠. 막달라 마리아 말고도
자식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들도 있었고, 
또 33년의 생애 속에 함께했던, 애정을 담은 인물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부활의 첫 장면과, 첫 소식을 증거할 
첫 증인으로 택한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분의 전력을 성경 전체에서 조명해보면, 먼저 '여자'입니다. 
당시 시대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보면, 
여자는 증인으로 채택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숫자에도 쳐 주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남자들만 사람 수에 헤아림을 받았죠. 

그런데 성경은, 이 위대한 인류 역사의 놀라운 부활의 소식을 
여성이 목격자가 됩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의 전력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예요. 
예수님은 왜 이 여인에게 부활의 모습을 처음으로 나타내 보여주셨을까요? 

근데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늘 이렇습니다. 
항상 '약한 자들을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역설을 갖고 있어요. 
또 '작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일, 위대하신 일을 드러내는' 경영의 섭리를 갖고 계십니다.

막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누구에게 찾아갔는가 하면, 
늘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의 말씀 함께 듣고 했던 제자들을 찾아갔어요. 

근데 지금 그 제자들의 상태는 어떤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깊은 애통에 빠져 있는 중입니다.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냥 지금 설교하는 저처럼, 평이하게 얘기를 했겠어요? No 
뭐 허겁지겁 너무 경황도 없고, 놀래서 얘기를 했을 겁니다. 놀래서! 

근데 그렇게 얘기하는게 정상 아니에요? 
지금 처처럼, 이렇게 부활의 놀라운 이야기를, 이렇게 편안하게 설교하는 것, 
이게 비정상이란 말이에요...  (회중들 하하하)

게다가 첫 목격자예요. 얼마나 본인 스스로 놀랐겠습니까? 
경이롭다는 말밖에는 표현이 안 되죠. 
그런데 그 사람들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다. 

막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제자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어요. 1st
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현장을 본 사람이에요. 실제를 겪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자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다' 라고 돼 있어요. 

근데  '믿지 않았다' 이게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본문에 연이어 2번 더, 모두 3번이나 나옵니다.  

16:13절 끝을 보면 '(엠마오 길의)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한지라' 2nd

14절 끝에 보니까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3rd

제자들이 얼마나 부활을 믿지 않았으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같은 말을 3번이나 반복하면서

마치 나무라듯이 본문 막16장에, 모두 세 차례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아주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아요. 
그만큼 부활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는 거죠. 
당시까지 역사에 아무도 부활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면 이 믿지 않는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막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이건 엠마오 도상으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기술한 겁니다.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까, 못 알아보는 건 당연하죠. 
다른 모양으로 나타났으니까,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게 이상한게 아니고, 
이건 불신의 문제가 아니에요. 당연히 못 알아봤겠죠.

 

막달라 마리아도 무덤에서 처음에는 '동산지기'인줄 착각했어요.

부활하신 부활체는 '변형'이 되셨나 봐요. 더욱 영광스러워지셨겠죠. 

자 그런데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함일러라' :14  

여러분, 엠마오 도상에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과,
이 엠마오 도상의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아시죠? 

이사야의 글들을, 구약의 글들을, 예수님이 하나씩 풀어 주셨어요. 
'이건 그런 뜻이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세상에 왔고.. 
얼마 전에 죽었다가.. 내가 사흘만에 부활한 그 메시아다..' 

그리고 예수님은 홀연히 떠나셨습니다. 다른 곳으로! 
근데 그들이 서로 주고 받으면서 
'그분이 말씀을 풀어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이 고백을 합니다. 눅24:32

그 두 제자가, 엠마오 길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눅24:33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우리가 이런 경험을 했고, 이런 일들을 길로에 겪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근데도 '믿지 아니함일러라' :14

자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 이어,

이제 마지막 그룹으로,   *마가복음에서 볼 때

예수님은 친히 열한 제자가 다 모인 자리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먼저 그들의 불신과, 그들의 완악함을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아니함을 꾸짖으셨어요. 

▲자 그러면 우리가, 이제 성경을 따라서 참고 구절을 몇 군데 볼 텐데 
'이들이 정말 부활을 안 믿었을까요?' 
아뇨, 그들은 부활을 믿었어요. 

요11:2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요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믿었어요! 
근데 이들이 믿었던 부활은, '그래 먼훗날 우리가 다시 살지...' 
이렇게 '시간적인 개념의 부활'을 믿었어요. 물론 그것도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제자들과 함께 이해하고, 인지하고, 알고 있었던 부활은 
반쪽짜리 부활이었어요. 온전한 지식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다시 사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 믿었어요.  
반쪽짜리 부활 신앙이에요. 

근데 여러분, 이 의미를 성경을 통해 연구하다가, 제가 깜짝 놀랬어요. 
'이건 제자들이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구나

우리는 부활을.. '먼 훗날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이 다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어요.

물론 그것도 맞겠죠. 
그런데 '오늘'이라는 현실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정말 부활의 권세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가요? 

 

▲제자들은 왜 그 참혹한 십자가의 현장을 앞두고, 다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는가요? 
왜 도망갔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이 좌절했기 때문이고, 절망했기 때문만이 아니에요. 
잘못된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망도 무섭고, 좌절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잘못된 희망이에요. 

막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부활)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막9: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부활에 대한 예고를 듣긴 들었는데, 말씀의 진의까지 못 내려갔어요.

깨닫지 못했어요. 뭔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말씀을 깨닫지 못하니까, 이때부터 잘못된 희망을 갖고 사는 거예요. 

막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 (부활)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니까 계속 일관되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모든 것들을 보여주시고 겪게 하시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과 부활을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9:32

대신에 제자들이 한 것은 무엇입니까?

막9: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막9: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그러니까 말씀을 못 알아들으니까, 잘못된 희망을 갖기 시작했어요. *오늘날 우리와 같죠
여기 '누가 크냐' 라는 논쟁은, 정확히는 이런 뜻입니다. 

'자 (수난과 부활 예고가) 뭔 소린지 도무지 잘 못 알아듣겠는데,

어쨌든 느낌상 이 분의 나라가 곧 임박한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러면 일단 우리가 조각(내각 구성)을 해야 될 거 아니냐?  
그래도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넘버원인데, 내가 총리 하는게 맞겠지?' 

'뭔 소리야? 넌 맨날 실수나 하고, 엉뚱한 소리나 하고 
나서기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 국무총리 됐다가 다시 나라 말아먹어? 
너보다는 안정감이 있는 내가 되는게 맞지 않아?' 

이거 뭘 꿈꾸었던 거죠? 물리적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꿈꾸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물리적인 나라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들은 잘못된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 논쟁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막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질서와 가치와 원리와는 전혀 다른 전선인데, 
이들은 깨닫지 못했어요. 자 성경을 한 군데만 더 보십시다. 

막14장 띄워 주실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막14:27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시죠.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막14:28

자 여기서도 바로 직전까지도 (14장이니까) 계속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말씀하셨고,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어요. 

근데 지금 오늘 본문에서는, 일관되게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아니하니라        막16:11
-(엠마오 두 제자의 말을) 믿지 아니하니라       16:13  
-(여전히) 믿지 아니함일러라                          16:14  
이렇게 돼 있어요. 

그들이 부활을 안 믿었느냐? 그게 아니라니까요. 
부활 자체에 대해서 믿었는데, 그 부활이 오늘의 현실이 되질 못했습니다. *주제 

그러니까 그 지식은, 반쪽짜리 지식인데 
반쪽짜리 지식은 완전한 지식이 아닙니다. 그건 지식이 아니에요. 
그냥 겉으로만 알고 있는 겁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적용

오늘날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우리 성도들이 주목할 것은
이 시대가 정말 지식을 구하는 시대가 아니라, 이제는 정보를 구하는 시대가 됐어요. 

그러니까 시대의 가치 철학이나 모든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부 참된 지혜, 참된 지식이 아니라, 피상증에 걸려 있어요. 
겉만 긁적긁적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죠. 

그러니까 모든 지식이나 글들을 보면 
여기서 찔끔, 저기서 찔끔... 거의 편집 수준의 지식들! 
그건 참된 지식이 될 수가 없죠. 

더구나 요즘은 AI에다가 자료를 넣으면
여러분보다 훨씬 더 논리적이고,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글들을 정리해서 뽑아내 주어요. 

예를 들면, 들판에 핀 꽃의 사진을 찍어서 
AI한테 딱 밀어 넣어주고 '시 한편 써 봐!' 하면, 
기가 막히게 써 냅니다. 제가 그 시를 실제로 읽어 봤어요. 

신학적인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료하고, 저 자료하고 비교해서, 
아주 개혁주의 입장에서 견해를 풀어봐' 
그러면 3초도 안 걸려요. 결과가 쫙 나와요. 

이런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앞으로 사람들은 더 고민할 필요가 없고, 고뇌할 이유가 없어요. 
앞으로 세상은 점점 더 이런 피상성에 빠지게 될 겁니다. 

이때 정말 필요한게 뭘까요? 성품이에요. 
이제는 성품이 능력이에요. Virtue is power!
근데 복음은 사실 그 지점(성품이 능력)을 설명하는 거거든요. 

우리는 세상이 그럴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과 깊이 대면해서 묵상하는 세계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믿습니까? 

AI가 득세하는 세상이 이제는 대세가 돼 있어요. 
이미 변화가 시작된 게 아니라, 이제 대세로 굳어졌습니다. 세상이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사랑을 흘려보내고,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 순종해야 되겠는가? 
기도하며 고민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번 부활절 헌금은, 당회에서 의논하기를 
자립하지 못하고 여전히 코로나 이후에 힘겨워하는 현장을 위해서 쓰여지는데 

우리 교회가 매년 신년 초에 제주 선교를 가는데, 
제주도에 딸린 비양도라는 섬이 있어요. 

우리 장년부 몇 분이 매년 제주 선교에 동참해서 
그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비양도로 들어갑니다. 
거기에 보면 비양도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가 이제 워낙 오래되고 낡아서.. 건축을 하다가 지금 중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부활절 헌금 중에 일부를, 그 교회에 좀 함께 흘려보내려고 합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신 후에 홀로되신 사모님들.. 이렇게 저렇게 쓰여질 일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힘써 나눔이, 부활을 현실로 사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세상 물질을 쌓는데 있지 않고,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둔 하늘 성도들이고, 
부활을 오늘로 살아내는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을 천국에 쌓는 거예요.
 
하늘 소망이 있는 자, 참된 영생의 소망을 가진 자만이, 
하늘에 물질을 쌓을 수 있고, 더 중요한 얘기가 있죠. 

'네 보물(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마6:21
정말 내 물질이 가는 곳에, 내 마음이 따라가요. 

근데 우리가 부활의 바른 소망을 가진 자라면 
이 땅에 돈을 버는 목적과 이유가 달라야 됩니다. 

▲자 성경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막16: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게 참 성경이 어려운 지점입니다.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 왜 어려울까요? 

앞에 제자들의 모습을 확인했잖아요. 
저(설교자)만 같아도 
어떻게 이런 사람들에게 인류 구원의 경영을 맡긴단 말입니까? 

'믿지 아니함이로라.. 믿지 아니하니라.. 믿지 않았다' 

'아 이거 제자들을 재교육을 해야 되겠다' 그래도 맡길 둥 말둥 한데 
그런 제자들에게 바로 어떤 여과장치도 없이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의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랬어요.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런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지금 하고 계신 거예요.

이 역설, 이 아이러니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여러분, 제가 근래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죠. 

우주와 관련된 제반 분야를 연구하는 나사 NASA 본부에는 
한 연구원이 프로젝트를 하나 맡아서 운영하면, 
보통 한 연구원이 감당하는 그 예산의 액수가 10~20억이 아니에요. 
800~ 900억 정도의.. 거의 1천억에 가까운 재정의 규모를, 
한 연구원이 프로젝트로 진행합니다. 

그럼 그 프로젝트가 다 성공할까요? 
분명히 실패자도 더 많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한 연구원이, 거의 1천억에 가까운 재정 규모를 실패해서, 
쉽게 얘기하면 말아먹은 겁니다. 

만약 일반 직장의 생리 같으면, 그 직장에서 바로 해고죠.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그런데 나사본부는 절대 해고를 안 한대요. 

'네가 그 문제에 실패를 해 봤으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 너만큼 제일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네가 그 프로젝트를 끝까지 책임을 완수해라' 
그래서 결국은 성공을 해내는 거죠. 

실패한 자만이, 그 실패의 원인을 알고 있잖아요. 
그럼 그걸 다시 반복하지 않겠지요.

이 제자들은 이미 실패했어요. (부활을) 믿지 않는 것만큼 큰 실패가 어디 있어요? 
그런데 이들에게, 주님은, 위대한 인류 구원의 경영을 맡기십니다. 

이유는, 더 근본적인 동력이 있기 때문이에요. 
16:20절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제자들은 순종했고, 거기 사실 누가 함께 하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죠. 
그렇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허물 많고, 실패하고, 약한 제자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을 떠밀어 인류 구원의 역사를 맡기시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리라'는 의미를 가진 
임마누엘로 오셨어요. 

그리고 그 임마누엘은 마태복음 28장에서도,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부활의 주님이, 오늘 부활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하시고 있는 약속입니다. 
믿습니까? 

'이걸 내가 어떻게 하나?
이 엄청난 걸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해야 되나?'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는 사람들은 놀라셔야 돼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제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에요. 
그러면 그것을 문자로만 이해하고 계십니까? 실제로 현실로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현실로 믿어야죠. 믿습니까?         

이것이 실패한 제자들을 향해서, 다시 사명의 길로 내보내시는 예수님의 진짜 이유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우리가 한 가지 정리할게 있어요. 
첫째 지금까지 이 패턴과 흐름을 종합해 보면, 
증인에게 문제가 있었습니까, or 듣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습니까?

그렇죠. 듣는 사람들의 문제예요. 
증인에게는 문제가 없었어요. 

증인 자체는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은 전했어요. 증거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듣는 귀들이 열리질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확인해 보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신명기에 보면 이렇게 소개하죠.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10:16
'목을 곧게 하다'라는 말은, 교만을 얘기합니다.
'마음의 할례'는, 사실상 신약에 넘어와서 십자가 사건을 얘기합니다. 

옛 말에 '인생은 60부터다' 라는 말이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이 말을 많이 듣고 자랐어요. 

구라 치지 마세요. 
'인생은 60부터가 아니라, 십자가부터 입니다.' 
70 아니라 80을 먹어도, 십자가 못 만나면 그건 아니에요. 철이 들지 않아요. 

인생은 이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냥 제 잘난 맛에 사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돈 버는 것도, 다 그것 때문에 버는 거예요. 
십자가 만나지 못하면, '인생은 60부터다?' 아니에요. 
인생은 십자가를 만나야 돼요. '인생은 십자가부터다' 입니다.

그래야 '내가 얼마나 유한한 존재이며, 내가 얼마나 절망스러운 존재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완악하고, 교만하고, 굳은 마음을 꾸짖으셨어요.  눅24:25참조

그 말은 아직 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몰랐던 거죠.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마음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그렇게 우리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새 날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십자가로 시작된 주님의 부활이 
오늘을 살아내는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고, 삶의 동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