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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십자가는 없다

LNCK 2024. 4. 8. 20:1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십자가

  

쉬운 십자가는 없다 | 막 16:9-14  금요철야 | 24.4.5 (youtube.com)

 

◈쉬운 십자가는 없다       막16:9~14        

 

*아래 ◑신앙은 현실도피가 아닙니다 단락이 하이라이트입니다.

 

◑서론 : 십자가, 부활을 어렵게 받아들이는 제자들

 

※이런 어렵게 받아들이는 면도 일면 필요합니다.

왜냐면 오늘날 신자들은 너무 쉽게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니까요..

그래서 그 깊은 의미를, 피상적으로 느끼며 삽니다... '쉬운 십자가'(설교제목)는 없는데 말이죠.

 

본문 막16장은 부활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에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사건을, 마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으로 옮겨졌죠.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서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찾아왔습니다. 
남자들은 안 보이고, 여자들만 나타났어요. 막16:1

예수님의 몸에 향을 바르기 위해서, 향품을 들고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안식후 첫날인데, 아마 아주 이른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른 시간에 무덤으로 가면서 '돌문을 누가 굴려줄 것인가?' 
동굴 무덤인데, 그 입구에 큰 돌로 막아 놓은 거죠. 
그러니까 '이 돌문을 누가 옮겨줄 것인가?' 그런 걱정을 한 거죠. 

근데 이제 가까이 갔더니, 돌문이 이미 열려 있는 겁니다. 
근데 '그 돌이 심히 컸다'고 했어요.  16:4
한두 사람이 옮길 수 없는 그런 큰 돌문이라는 거죠. 

보니까 무덤 돌 문이 옮겨져 있는 거예요. 무덤이 열려져 있는 겁니다. 
8절에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을 오늘 우리가 좀 살펴볼 텐데요.
'몹시 놀라 떨며' 
그리고 이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은 너무 놀라서, 무덤에서 도망을 쳐 나왔습니다. 

이것을 볼 떄, 예수님의 부활을 그들은 전혀 예측을 못한 겁니다. 그죠. 
자기들이 예측한 건 뭐냐? 
무덤에 시신으로 누워계신, 죽은 예수를 보러 온 거잖아요. 
그것 때문에 향품을 준비해 간 거고... 

그리고 죽었으면 죽은 거잖아요. 시신으로 다 안치를 했는데 
그러면 그때부터 썩어져 가는게 자연적인 법칙인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가는, 마리아와 여인들의 반응을 굉장히 자세하게 묘사 하고 있습니다. 

10절에도 보면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은 제자들이죠.  
'가 보니, 무덤 문이 열려있고, 아무도 아무것도 없더이다.' 

11절에 보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리라'

12절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얘기가 아주 짧게 묘사되어 있어요.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가까이 있던 제자들도 
너무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역시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는데도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뭘 통해서 알 수 있느냐? 
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심히 놀라 들었다"는 게 그 증거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믿었다면, 사실은 빈무덤을 보고 반가워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무덤 문이 열려져 있으면 '아 그럴 줄 알았어요. 부활하실 줄 알았어요.' 
내가 기대한 것을 당연한 걸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계속해서 십자가 와 부활에 대해서 얘기를 계속 하셨어요. 
근데 그 제자들이나 어떤 누구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상황이 끝난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로 모든게 끝난 줄 알았습니다. 
부활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거죠. 

▲여기서 여러분 우리가 뭘 붙잡아야 되느냐? 
그들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예수님이 죽은 순간 끝이 나 버렸어요. 
그리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죠.
 
무덤을 찾아간 것은, 그냥 인간적인 정 때문이었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인들이 
그 인간적인 정에 향품을 들고 간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을 확신하고 기다렸다면 놀라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부활로 가버려요.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한 분들이라면, 십자가는 부활이라고 하는 등식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당연히 부활이지.. 부활은 당근이지...' 

그러나 처음 부활를 맞이했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우리는 고난주간을 지킬 때는, 부활절이 당연히 오는 걸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과하면 부활이야' 
이건 굉장히 간단한 도식과 등식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근데 1세기 처음 일어났던 그 부활의 사건 때에 
예수님의 여인들은 그 부활로 가는게 쉽지 않았어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었고, 기대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끝난 거예요. 모든 상황이 끝난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이나 여인들이 모두 절망 속에 빠져 있었던 거예요. 
완전한 절망 속에 빠져 있었던 거죠. 
'믿지 않았더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오죠. 막16:11, 13, 14

그러니까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고, 십자가 사건으로 그들은 완전한 절망에 빠져 있었던 거죠. 
부활은 당연한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부활은, 당시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그야말로 그 자체가 절망이었어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모든게 다. 끝나버린 사건이에요. 

그 당시에 그 여인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상황으로 들어가 보세요. 완전히 끝난 거예요.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의 처절하게 못 박혀 죽으시고, 그리고 무덤에 장사를 지내 버렸어요. 
그리고 땅에 묻혀 계신 거죠. 

그 상황 속에서는 '부활'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없었던,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한 상태까지 이른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였다는 거죠. 

그래서 이 십자가는 완전히 인간적 소망이 사라진 곳이며, 
그곳이 바로 십자가 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이 여인들은 
여기에서부터 신앙이 이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완전 절망 상태에서 시작 

우리의 삶 가운데 자주 경험하는게 그렇습니다. 
현재의 삶이 아주 안 좋을수록, 최악의 상황이 될수록 
우리는 미래의 어떤 기대를 가져요. *부활의 기대

현재가 어려워도, 미래에 좋은 일이 닥칠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있으면, 오늘을 참아내요. 
왜요? 희망의 보이니까! 

왜 어렵습니까? 가장 어려울 때가 언제죠? 희망이 안 보일 때예요. 
희망이 안 보이는 거예요. 희망의 보장되어 있으면, 현재가 힘들어도 이겨냅니다. 

그리고 미래의 소망이 있으면, 현재가 어려워도 긍정적으로 현재를 해석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으면, 
미래 소망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현재의 지금 어려움은 극대화 되는 거예요. 어려운 현재만 있으니까요. 

그러나 미래의 소망의 보이면, 현재가 어려워도 
현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미래를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는 거예요. 

◑신앙은 현실도피가 아닙니다    *이 설교의 하이라이트 단락

 

사람들을 보면, 현재가 어려울수록, 미래를 미래를 많이 얘기하고 싶어 해요. *몽상가
'지금 현재는 어렵지만 좋은 미래가 올 거야' 
근데 대부분의 경우, 그 장밋빛 미래 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 거예요. 
미래가 완전히 보장된 건 하나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 미래를 얘기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빨리 여기서 도피하고 싶고, 빨리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어떤 미래를 자꾸 얘기하고 꿈꾸는 거예요. 
근데 그 미래가 보장된 미래는 아니에요. 

자 여러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것은 좋아요. 
그러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생기는 거죠.  *희망고문과 비슷하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불투명한 미래만 있고, 현재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심각해진다는 거예요. 
미래도 확실하지 않고, 현재 삶도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불완전한 현실만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도 조심해야 되는 부분이에요. 
제가 늘 조심하려고 하고, 설교를 합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고, 너무 쉽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하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는 거죠.    *십자가 고난을 빼버리는 설교

그냥 막연히 '잘 될 거예요!' 라고 하는... 최면요법과 비슷한... 
'조금만 이겨내면 잘 될 거예요.' 이런 말을 남발하죠. 

이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로마서 8장 28절이잖아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참 좋아요. 

근데 이거를 너무 생각 없이, 쉽게 이런 구절을 막 가져오면 위험해요. 
막연한 희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목사님의 설교가, 막연한 희망을 심어주는게 메시지가 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면 자칫하면, 신앙을 하나의 도피처 처럼 만들어 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 어려운 현실에 부딪히는 그 어떤 노력 없이,  *고난의 십자가 건너 뜀
너무 쉽게 신앙으로 도피하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특히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주로 그런 사람들이요. 
극단적 종말론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에요. 

미래의 희망을 말하긴 하는데, 현실의 삶이 없는 거예요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 오신다'는 그 미래의 희망은 얘기하는데, 
문제는 현실에 삶이 없는 거에요. 그리고 늘 모여서 예배만 드리는 거예요. 
'속히 주님 오시옵소서' 하면서, 직장도 안 다니고, 현실을 도피해 버리기 쉽습니다.

'현실의 삶'에 대한 신앙과 강조가 없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신앙에 빠질 가능성이 높죠. 

그래서 현실이 어려울수록, 거짓 희망에 넘어가기 쉬워요. 
그래서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자주자주 출현을 해요. 지금 신천지도 마찬가지예요. 
거짓 희망을 파는 거죠. 거짓 희망을 팔아서 거기에 속박을 당하게 만드는 거예요. 
일종의 종교적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거에요.

근데 거기에 특징이 뭐에요? 현실에 적응력이 없어져요. 
점점 현실이 적응력이 없어져요. 
소위 '희망 장사'를 하고 사는 거짓된 메시아들이 계속 세상에 나오는 거예요.  
희망을 팔아먹는 거죠. 근데 가짜 희망이에요. 

여러분 이런 곳에 빠지는 사람들은 항상 있어요. 
누가 빠져요? 현실의 삶이 너무 힘든 거예요.
이 현실에서 좀 빨리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정치인들도 이런 걸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어요. 
정치인들도, 투표하는 시민들에게 거짓 희망을 파는 거예요. 표를 얻으려고. 
관심을 사는데, 거짓 희망을 심어주는 거죠. 공약을 막 뻥뻥뻥 남발하죠.

개울도 없고 강도 없는데, 다리 놓아 주겠다.. 
거짓말을 막 하는 거에요. 

'왜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열광하지?' 
사람에게 열광하는 경우가 늘 있습니다.
메시아 신드롬이라고 하죠.

자기가 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그 사람에게 기대어서 
자기의 꿈을 실현해 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예요. 그게 이제 서로 맞아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팬덤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모든 팬덤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요.

사람들은 판타지를 막 좇아가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 특징이 뭐냐면, 현실에 부적응자 들이에요. 
현실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 현실이 없어요. 

(가짜 메시아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거죠.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 따라가는 거에요. 
사람들이 지지하고 막 열광하고... 

평소에 늘 판타지만 좇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현실'은 없고, 그렇다고 보장된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종교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 중에 하나가 종말론이에요. 
이건 항상 흥행이 잘 돼요. 극단적인 종말론. 

그래서 세상이 힘들수록, 이런 거짓된 사이비, 그런 종말론 자들이 일어나는 거죠.
근데 여러분, 이것은 극단적 종말론자들만이 아니에요. 어디에서나 만날 수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엄청난 얘기를 해요. 너무 거창한 얘기예요. 
뭐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얘기를 해요. 과대망상증이에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대망상 증이에요.

뭔가 거대한 것이 이루어질 것처럼 말하는데, 
그 사람의 현재의 삶을 보면, 현재의 삶이 없어요. 

신앙 공동체 안에, 이런 정신 질환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조인할 수 있어요.
바깥에 있는게 아니고, 바깥 세상보다 교회 안에 
정신질환자들이 더 많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도구화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삶이 공중에 붕 떠 있어요. 
막 비전, 꿈을 얘기하는데.. 붕 떠 있어요. 구름 위에 있는 거예요. 
문제는 현실이 없어요. 아니 현실에 적응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뭔가로 도피해요. 미래로! 그 미래의 희망으로! 
근데 그 미래의 희망은 불확실한 거예요. 거짓된 것으로 포장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믿음 생활과 이런 환각 세계가 혼재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믿음인지/ 환각인지... 구분이 잘 안 될 수 있어요.

현실을 부정하고 막연한 미래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붙드는 미래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요. 

여러분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이에요. 
문제는 이 현재의 삶이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근데 그걸 통과해야 되는데, 통과하려고 하지 않고, 도피를 하려고 하는 거죠.
힘들기 때문에, 자꾸 막연한 미래로 도망을 치는 거예요. 
그 미래는, 허구에 찬 미래이에요. 확실한 미래가 아니에요. 

여러분, 신앙은 현실에 주어지는 힘든 상황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치열함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오늘 이 밤에 원색적으로 묵상을 해보겠는데요. 

십자가에서 멈추어 서서, 시간을 좀 보내야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갑자기 부활로 간 게 아니에요. 

부활로 가기 전에, 부활이라는 그 미래의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에 
십자가 있었는데
이 십자가가 간단하게 넘어간게 아니라는 거예요. 

십자가를 충분히 거치지 않고, 그냥 부활로 가버리면 안 돼요. 
부활로 가기 전에, 십자가 라는 무서운 현실이 있었어요.
이 십자가는 현실이에요. 리얼리티! 
가상이 아니고, 꾸며진게 아니고, 십자가는 처절한 현실이에요. 

가벼운 시간이 아니에요. 십자가로 가는 과장 자체는 험하디 험한 거예요. 
쉽게 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쉬운 십자가는 없어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치르신 십자가는 환각 상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묵상할 때, 
이게 가볍게 고난주간을 지나거나, 포장된 십자가를 생각하면 안 돼요.

영지주의자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이단이에요. 
육체적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신' 그게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없는 거예요. 미화하는 거죠. 

하나님이 그런 고통을 당하실 리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건너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를 사변화하는 거예요. 추상화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리얼리티에요. 십자가는 건너뛸 수가 없어요. 

십자가는 현실이에요. 오늘날 신앙이 자꾸 사변화 되어가고 있어요. 
머리로 하려고 해요. 그건 위험한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를 인정해야 돼요. 십자가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이니까 그냥 십자가를 요령 있게 잘 지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럴 수 없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시는 동안에 예수님은 어떤 신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은, 당신이 겪으신 그 고통을 지나치려고 하지 않았어요. 
이 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이신 거예요. 그게 십자가예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랬어요. 
주님에게도 찾아온 유혹이에요. 이 고통의 현실을 얼른 피해서 지나가고 싶은 거예요.
이 고통 없이 통과하고 싶은 거예요. 건너뛰고 싶은 거예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거예요. 

너무 고통스러우면, 건너 뛰어서 통과하고 싶어요. 
'내가 그거 꼭 겪어야 되냐고?' 
근데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다른 출구를 만들어 놓지 않았어요. 
십자가로 몰아가신 거예요.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현실 reality 이었어요. 
허구가 아니고, 가상이 아니었어요.

오늘날 여러분 현실을 부정하려는 이들이 많아요. 
현실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이죠. 
치열한 삶의 현실을 뚫고 지나가려고 해야 되는데 
건너뛰고 싶어하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현실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현실은 그럴 수가 없거든요. 
현실은 현실이에요. 
어려움이 별게 다 일어날 수 있는게 현실이에요. 겪어 내야 돼요. 

여러분 쉽게 고통을 통과하려고 하면, 뭐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아세요?
몰핀이 기다리고 있어요. 환각제가 기다리고 있어요. 
진통제가 기다리고 있어요. 한방 맞으면 돼요. 근데 그게 해결책이 아니죠.

여러분 우리가 예배하고 모이는 것, 
이것도 자칫하면 여러분 환각제로 사용을 하면 안 돼요. 

여러분, 고통을 가볍게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돼요. 
고통을 받아들이는 그 훈련을 하기 위해서 은혜를 받는 거지 
고통을 가볍게 통과하겠다고 해서, 이런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하는게 아니에요. 

마귀는, 고통을 겪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의 세 가지 시험이었죠.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유혹이, 세상에는 널려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건강한가 아닌가를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한가를 알 수 있는게 뭐냐면 
지금 현실의 삶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는 거예요.
현실에 대한 태도!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이 되어 있느냐는 거예요.  

현실을 왜곡시키면 안 돼요.
 그래서 여러분, 정신의학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here and now 예요. '지금 여기' 이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에요.
지금 여기 현실, 그것을 그대로 느끼고 깨닫는게 중요해요. 

환각이나 피상성이 아니라, 환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here and now!
근데 이 개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정신과에서 정상인과 비정상인, 정신질환자를 구분할 때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면 현실 긍정력이라는 거예요. 

정신질환자들은 현실에 대한 왜곡이 매우 심해요. 
다르게 쉽게 표현하면, 현실 감각이 없어요.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곧 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왜곡된 생각(망상, 환상 등)을 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 살아가다 보면, 현실의 삶은 언제나 어려워요. 인생은 원래 어려운 거예요. 
제가 젊은 목사님들 만나면 '목회가 어렵다'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간단하게 대답을 해드렸어요. 
'목회는 원래 어려운 거예요. (그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목회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인간이 대리로 하는 건데,
그게 쉽겠어요? 

다니엘을 보십시오 바벨론에서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험에 처했어요.
그가 사자굴에 들어갈 때 
뭐 자기가 뭐 살아나올 줄로 생각하고 들어갔겠어요? 죽는 줄 알고 들어갔겠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에 던져질 때, 살아난다는 보장이 없었어요. 
그게 현실이에요. 그게 믿음의 길이고... 

그리고 그 터널을 통과할 때는, 이 터널이 언제 끝날지 안 보이는 거예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터널을 지나가는 거죠. 그때는 미래가 안 보이는 거예요. 
그게 지금 마리아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맞이한 현실이에요. 
 
우리는 대가를 지불하면, 그 지불한만큼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런가요? 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 현실을 인정해야 되고,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되고, 
그 현실의 과정을 통과해야 됩니다.

◑고난주간에도,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지 않는 신자들

 

여러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보십시오. 그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 봐야 돼요. 
간단히 '십자가니까!' 하고 끝내 버리면 안 돼요. 시간을 오래 두고 머물러 있어 보세요.
슬로우 비디오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과정을 쫙 묵상해 보십시오. 그 조롱과 멸시... 

여러분, 예수님의 그 십자가 언덕으로 올라가서, 우리가 상상을 동원하면요. 
그분이 당하셨던 그 고통의 모든 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모든 거예요.  
아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고통을 훨씬 넘어서는 고통을 예수님이 당하셨어요.

여러분 로마의 병정들에 의해서 옷이 벗겨지는 장면 하나하나를 
슬로우 비디오로 한번 보자고요. 
그때의 모욕감, 그 수치심! 
겉옷에서부터 속옷까지 벗겨지는 그 상황들을 한번 슬로우 비디오로 묵상해 보세요. 

로마의 병정들에 의해서 그 채찍이 한 대 한 대 내리칠 때마다
그 당했던 고통의 그 현실, 리얼리티! 
이 십자가를 그냥 쉽게 우리가 생각하고 통과해 버리면... 아무런 은혜도 없죠.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몰라요. 
그 모욕들.. 침을 뱉을 때의 그 모욕감.. 
핏방울이 뚝뚝 떨어질 때, 그 흘러들이는 피의 리얼리티... 

십자가, 그 고뇌와 신음과 탄식과 절규... 이런 것들을 
우리는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충분히 십자가를 묵상해야 돼요. 

그러니까 십자가라는 현실을 목도 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지 않고 그 십자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 하고, 
충분히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부활의 의미도 깊이 와닿지 않아요. 

부활이라는게 그렇게 환희처럼 다가오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고난주간도, 부활절도 그냥 요식적으로 지나쳐버리고 마는 거죠.

우리가 십자가 부활을 정확하게 100% 알 수는 없지만 
그 십자가와 부활을 제대로 우리가 깨닫고 들여다보면요. 
진짜 모든 답이 거기에 다 있어요. 
거기서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요. 완전히 바뀌게 돼 있어요. 

십자가-부활의 복음이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지 않는다면, 
어디가, 무엇이 복음이겠어요?
 
여러분 그러니까 십자가를 간단히 묵상하면, 십자가를 알 수가 없어요. 
근데 우리는 십자가를 가볍게 건너뛰어 버려요. 

우리의 십자가 신앙이, 그 깊이가 너무 얕아요. 
우리 신앙생활 할 때 십자가가 보이지도 않아요. 잊어버려요. 

그저 1년에 고난주간이나 한번 묵상할 정도로... 
아니주간 마저도 십자가를 얼마나 깊이 
우리가 들여다보려고 노력을 하는지 점검해 봐야 되죠.  

그래서 요즘 우리 시대의 약점이 피상성이에요. 너무 가볍다는 거죠.
진지함이 없어져 버린 거죠. 요즘 장례식도 그래요. 

여러분 요즘 장례식도 너무 간단하게 해치워 버려요. 상업화 돼 버렸죠. 
상업화 되고, 도구화 되고, 편리주의에 다 휩쓸려버려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애도 기간도 너무 짧아져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잃어버린게 너무 많아요. 
우리의 부모님, 우리가 존경했던 그분에 대한 애도도 
그냥 생략해 버리고, 편리주의화 되고, 그냥 요식으로 치워 버리고 
그 부모의 일생에 대한 깊은 그런 되새김질이나 이런게 없어져 버렸어요. 
너무 가볍게 다뤄 버려요. 

여러분 그게 우리에게 가져다 줄 마이너스가 엄청나요. 
여러분 언제나 속도는 위험합니다. 
신앙의 여정에 빠른 속도를 원하면.. 사고가 나요. 
신앙에 효능을 추구하면 사고가 난다고요. 

빠르고 좋은 결과를 원하면 
십자가야말로 미련하게 짝이 없는.. 쓸데없는 과정인 거죠. 

우리가 섬기는 크신 하나님이 그 정도 밖에 안 되시나요? 
오늘날 이 편리주의와 현대 문명화되어 있는,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 이런 테크니컬한 시대에 
'하나님이 왜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십자가라고 하는 그 끔찍한 그런 과정을 왜 거쳐가게 하시는 거지?' 우리는 고민해봐야 됩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모든게 멈춰 서 버린 거예요. 스탑이에요. 
완전히 죽으신 거예요. 
십자가는 여러분 철저히 실패의 자리고요. 
연약해질대로 연약해지신 거고요.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왜 나를 이렇게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는... 
대개는 여러분 이런 것은 감추고 싶은 거죠. 

근데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약함을 완전히 다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신성을 완전히 지워 버리시고 
혹독하게 고통으로 몰아가시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그래서 신포도주 마저도 거절하신 것은, 그 고통에 조금이라도 감하지 않으려고 하는..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고통과 씨름을 하시는 모습! 
이건 기독교 외에는 볼 수 없어요. 기독교만 볼 수 있어요.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이라는 흔적 자체가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은 이런 연약한 모습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here and now 라는 거예요. 
여기 지금! 십자가는 현실이에요. 가상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환상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미화될 수가 없고, 포장될 수 없고 
가장 고통의 적나라한 사건이었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인카네이션의 과정부터 쉬운게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너무 가볍게 받아들이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신앙이 가벼워지는 거고, 너무 쉽게 변질되어 버리는 거죠. 
복음에 푹 담금질되는 경험이 없으니까요. 

십자가는 땀과 핏방울이 엉켜져 있는 리얼리티에요. 
불법적인 재판을 받았잖아요. 진실이 가리워지고 거짓이 판을 치고 
억울함으로 그 모든 불법을 끌어안고 침묵하시는 그리스도! 

그 모든 과정에 보면, 제자들이 보기에는 희망이 다 꺾여 지나가는 거예요. 
그를 따랐는데.. 그를 바라보고, 그가 메시아인 줄 알았는데... 
그들 기대치에서 점점 벗어나면서, 그들의 기대는 무너지고 
최악의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는 모습이 십자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일상에서도 경험하는 것들이 이런 거예요. 
신앙생활을 하면, 모든게 나이스하게 잘 풀리고 
모든게 형통하고 잘 돌아간다고...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뭐예요? '모든게 이상하게 돌아간다.' 
제자들이 경험했던 거예요. 참혹하고 끔찍하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두루마리 휴지처럼 술술 풀리는게 아니에요. 그게 제자들이 경험한 거예요. 

여러분 인간 예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시죠. 
기독교의 진면목이에요.
그가 받아들이셔야 하는 '현실'을, 제거, 도피, 회피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에서 머물러 있어야 돼요. 문제 해결이 안 된 상태예요. 
우리는 모든 문제들이 빨리 시원하게 해결되는 걸 원합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십자가는 그냥 답이 없는 상태로,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억울한 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망하면 망한 대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예요. 나이스 한 게 아니예요.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신 아들을 멋지게 보장하지 않으셨어요. 

여러분들의 삶을 멋있게 포장하려고 하지 마세요. 실패했으면, 그냥 실패했다고 하세요. 
망했으면 그냥 망했다고 하십시오. 그걸 포장하려고 하지 마세요. 
망한 자로 있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예요. 
저주 받은 자로 서 있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예요. 
여러분 십자가에서 무슨 영광스러운 모습이 있어요? 

여러분 우리는 쉽게 반전, 인생역전을 기대해서는 안 돼요. 
너무 문제를 빨리 해결을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도피잖아요. 기도 응답이 늦으면 사람들이 시험에 들어요. 

빠른 응답을 원하는 순간,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로부터 멀어져요. 
빠른 응답이 필요했다면, 하나님이 십자가의 그 고통에 매달아 두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왜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시죠? 
고통을 경감시켜 주거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곳을 찾아가는 사람들, 
내가 부르기만 하면 당장 나타나 주는 신을.. 사람들은 찾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일을 머물러 있는 동안에 
그 순간도 못 참고,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버리죠. 

늘상 인간이 하는 일이 뭐예요? 
우상을 만들어 내요.

존 칼빈은 '인간은 우상 만드는 공장이다'라고 말했어요. 
우리의 마음은 우상을 만드는 공장이에요.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요. 

팀 켈러 목사님의 <내가 만든 신> 그 책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우리에게 와닿는 메시지인지 몰라요. 왜 우상을 만들죠? 
내가 원하는 신을 찾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에요.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내가 다루기 쉬운 하나님을 만들어서, '그걸 하나님이라고 하자' 하고 믿는 거예요...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