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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기초체력

LNCK 2024. 4. 9. 16:2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로잔 운동>

 

https://www.youtube.com/watch?v=P8OR2hW03nU

◈신앙의 기초체력              행6:1~15                2024.04.07.  

◑도입

 

성경 전체의 주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몇 단어가 후보가 될 수 있는데, 그 중에 '회복'이라는 말이 아주 유력합니다. 
성경은 전체가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세상, 
'심히 좋았다. very good' 하신 인간, 
그러나 지금 모습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습니다. 

세상도 그렇고, 인간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 세상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회복'하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회복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시작되는 '회복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역사는, 세상 만물의 회복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보아야 됩니다. 
세상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    
새로워진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사도행전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도 위기가 왔습니다. 
첫째, 외부로부터의 박해입니다. 왜 박해했을까요? 
세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새롭게 되었습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기에' 이제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회복된 성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중에는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움을 거부하는 사람들, 변화가 싫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도들을 박해했습니다. 협박하고 옥에 가두고 심하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살펴본 대로
외부의 박해가, 교회의 회복과 부흥의 불길을 끄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힘차게 타올랐습니다.

채찍에 맞으면서도 그들은 기뻐 찬송했고
협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열심히 전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

멋있는 말이죠. 니체가 한 말입니다. 
니체는 무신론 철학자인데 '신은 죽었다' 하는 말을 했죠.

'어떻게 그의 말을 설교 시간에 인용할 수 있습니까?' 하는 분도 간혹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니체의 말이라도요. 맞는 말은 맞는 말이에요. 배울 거는 배워야 됩니다. 
그게 폭넓은 사람이죠. 

문제는 니체가 이 멋진 말을, 자기 삶으로 살아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No
니체의 삶에는 시련이 많았습니다. 
그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몸도 약해지고 정신도 쇠약해졌습니다. 
56세로 죽었는데, 그의 생의 마지막 10년, 그 젊은 시절을 정신병원에 있었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참 멋진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고도요. 니체가 경험했던 고통은, 그를 바로 죽이지도 않고, 한없이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니체는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멋진 말들은
대개 인간 안에 있는 감추어진 열망을, 찾아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그것을 찾아내는 데는 천재였지만, 그 말대로 살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이 말을 실제로 실현한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였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초대교회 나사렛 무리들을, 어리석은 대중들이라고 비웃었지만 
그 사람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자신의 철학적 이상을 살아 내었습니다. 
'고통은 나를 죽이지 못하고 더 강하게 한다!' 하는 이상!

◑1. 문제가 없어서 좋은 게 아니라, 문제를 극복해가면서 성장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외부의 압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는데, 
내부로부터의 위기는 사실 더 심각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바로 죽었잖아요. 그때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낡은 옛 사람이 남아 있다' 라는 거죠. 

오늘 본문에는 '원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행6:1절에 '그때의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6:7절에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이 이야기 자체는 교회가 성장의 이야기, 잘 부흥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 
처음과 끝을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 중간에는 위기가 있어요. 

우리가 '성공한다. 성장한다' 하면, 주로 이렇게 그냥 쭉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 중에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다. 전도 유망한 젊은이다.' 이런 말을 하지만

 

근데 실제 성장은, 일직선이 상향선을 그리며 쭈욱 탄탄대로로 성장하는게 아니라
인생은 up and down 하면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결국은 올라가는 거예요. 

잘 사는 사람들, 성공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습니다. 
죽을 고생도 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고, 
'정말 힘들어 죽겠다' 싶은 위기를 겪어가면서, 그걸 극복하면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지역(포항)에도 위대한 기업으로 소문난 기업이 있는데, 
여러분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깨어질 뻔한 위기, 그대로 주저앉고 포기하고 싶었던 그런 순간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그 위기를 이기고 통과하면서, 위대한 기업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위기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 와 삽비라 사건, 그리고 오늘 본문 행6장에 대표적으로 '원망'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공동체의 하나됨에 깨어지는 순간이 나옵니다. 

'원망'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굉장히 심각하게 다루는 주제예요. 
고전10:10~11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구약 성경을 왜 기록했는가요? 
그 중요한 이유는, 본보기를 삼기 위해서죠. 

대표적인 예가 '원망하다가 멸망했다. 원망하지 말라'죠.

예수님 동생 야고보도 이렇게 말합니다. 
약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여러분 그래서 '원망'이라는 말을 들으면, 경각심을 가져야 됩니다. 
불이 내려 심판할 것 같은... 

그런데 오늘 말씀은 원망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헬, '고구스모스'  murmuring 
'공개적인 비판, 불평이 토로'가 아니라, '조용하게 은밀하게 말하는 불평불만'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들은 대안을 찾습니다. 
물론 교회 구성원들이 원망 자체를 아예 안 했으면 좋았을 거예요. 
좀 더 성숙한 자세로 부드럽게 문제를 제기했으면 좋았을 법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원망을 귀담아 듣습니다. 
미성숙한 의사 표현 가운데도 새겨들어야 할 말이 있을 수 있죠.  

교회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버릇없이 거칠게 의견을 표현하더라도 
'야, 너 어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라고 꾸짖어야 될 때도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 말은, 그 말을 하는 심정은, 주의 깊게 헤아리고 들어야 할 때가 있는 거예요. 

 

'원망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도자들이 입장에서, 가장의 입장에서, 부모의 입장에서 
언제 원망하는 사람들을 타이르고 꾸짖어야 될지, 
언제 그것을 새겨듣고 대책을 마련해야 될지.. 분별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모든 위기는요. 먼저 진단이 필요합니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먼저 치료하지 않고 진단부터 하잖아요. 
이것이 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 일인지, 수술을 해야 될 것인지, 
그냥 잘 먹고 쉬면 해결될 문제인지... 분별(진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모든 일에 그렇습니다. 우리 개인 일, 가정 일, 교회 일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회의하잖아요. 당회 하잖아요. 
여러분 각 부서에서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회의 하잖아요. 

그것은 인간의 경험과 지혜와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이런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가정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가정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분별력이 신앙의 기초 체력입니다. 

의사 선생님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암 세포를 자기 몸에 가지고 있대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암에 걸리진 않습니다. 여러분 암에 걸리는 것은,
몸의 면역력이 약해질 때에 암 세포가 병으로 발전하는 거죠.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교회에 갈등의 소지가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죠.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니라,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면역력, 기초 체력이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여러분 몸에 어떤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아픈 데를 발견할 수 있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몸이 아픈데, 몸이 안 좋은데... 증상이 없는게 골치 아픈 거예요. 
그게 나중에 자라서 큰 병이 되는 거죠.

그래서 공동체의 위기는, 공동체의 우선순위를 점검할 기회입니다. 
사도들은 변하지 않는 본질에 충실하고, 변하는 상황에 맞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상황은 늘 변합니다. 보세요. 
행6:1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교회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좋은 변화가 생겼어요. 

근데 이 좋은 변화가, 여러분 그 다음에 원망으로 갑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1

'매일' 이라는 말을 봤을 때, 돈이 아니라, 음식을 나누어줬던 것 같아요. 
급식을 했던 것 같아요.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잘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안 돌아가니까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여러분 좋은 일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좋은 일이 생겨도,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거예요. 

6:2 '12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 마땅하지 아니하니'

여러분 이것이 진단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사도들이 교회 내의 행정적인 문제에 몰두하다 보니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고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사역이 약해진 거예요.

사실은 이것이 근본 문제였다 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공평하게 분배 못하니까, 원망이 생기면서 '좀 공평하게 하자' 그게 아니고요. 
말씀이 약해지는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의 일꾼을 뽑습니다. 뽑는 기준이 뭡니까? 

6:3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지금 구제할 사람, 행정적인 일을 다룰 사람을 뽑습니다. 그런데 기준이 뭡니까? 
장부 계산 잘 하는 사람, 음식 잘 만들고 잘 나누어 줄 사람, 
그런 기능적인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죠. 

그러나 훨씬 더 우선순위, 중요한 가치는 뭐예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찬양대 지휘자를 청빙합니다. 누가 해야 됩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이게 먼저예요. 그 다음이 음악 실력입니다. 
음악과 찬양은 다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재정부를 섬기는 건 누가 해야 됩니까? 
계산 잘하는 사람? 은행 지점장 출신? 셈이 뛰어나서 뭐 탁탁 집어내는 사람.. 
다 좋지만,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교회 재정부를 섬기려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 이게 우선입니다. 

제가 과거에 청년부 사역을 오래 했습니다. 청년들을 사역하다 보면,   
연말에 임원을 뽑을 때면, 많은 청년들, 최소한 소그룹 리더하는 친구들은
누가 임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누구를 회장 시켜도 다 괜찮을 것 같아요. 
그만큼 잘 훈련되어 있어요. 

교회의 장년부도 그런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누가 장로님을 해도, 누가 권사님 해도 다 괜찮은 교회...

즉 전 교인이 성숙되어 있는 교회... 대단히 드뭅니다. 
그게 장로, 권사의 무게가 무겁기도 하거니와, 여러분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집사님, 그냥 뭐 평교인들도, 웬만한 다른 교회의 장로님보다 수준이 더 나아요. 
여러분 그런 교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표는 그렇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를 닮아서 
누가 그냥 아무나, 웬만한 교회의 장로님 이상의 수준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처음 예수 믿은 사람들은 시간이 걸리겠죠. 
그게 뭔가 하면, 신앙의 기초체력이 튼튼한 교회입니다.   *설교제목

그러지 않고, 뭐 장로 선거할 때마다 '저 사람 되면 안 되는데..' 
막 긴장하는 그런 교회가 있으면... 참 슬프죠. 

아나니아, 삽비라 같은 사람, 
교회 안에서 명예를 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교회 지도자가 되면 참 슬프죠.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집사'라는 직분이 안 나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명예를 탐하지 않습니다. 
본문 행6장은 '일곱 집사의 선출'로 아주 유명한 장chapter 인데요.

 

6장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곱 집사를 뽑았다. 스데반 집사, 빌립 집사'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사실은 원어 성경, 영어성경을 보면 '집사' 라는 말이 안 나와요.  
개역성경에도 '집사'라는 단어가 안 나옵니다. 행6장에는요.

 

옛날부터 '일곱 집사, 스데반 집사, 빌립 집사' 이런 말이 내려와서,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데,

사도행전에는 그런 '집사'라는 직분이 나오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안 나와요!

 

'집사' 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집사 뽑습니다' 해서 뽑은 게 아니에요. 
그냥 이런 일이 필요하니까, 그냥 책임자, 담당자를 뽑은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냥 쉽게 '스데반 집사', '빌립 집사'라고 부르는데,
사실상 사도행전 성경에 명시된 호칭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직분 없이 그냥 '스데반, 빌립' 이렇게 이름만 나와요.
 
사도행전에 '집사'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은
행21:7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전도자 빌립'
이것도 영어 성경을 보면, 'one of the seven 일곱 사람 중에 한 명'이라고 나와요. 
헬라어나 영어성경에 안 나오는 '집사'라는 말을, 한글 성경에 만들어 넣은 거죠.

최소한 이 사도행전이 쓰여질 시기까지는 '집사'라는 타이틀이 없었다는 거예요. 
집사는 나중에 디모데전서 3장에 나오죠. 빌1:1절에도 나옵니다. 사도행전에는 안 나와요!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집사' 없음

여기에 '집사'를 세웠다는 말이 안 나오고, 그저 일곱 사람의 이름만 나와요.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빌립은, 스데반은 
정말 자기가 집사인 줄도 모르고 죽었어요. 

타이틀이 없이, 직분도 없이 일을 맡기면 하겠습니까? 대단히 힘든 겁니다. 
선한 일을 사모하지는 않고, 직분만 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교회가 약해지는 거예요. 본질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한국의 문화가 너무 타이틀 중심의 문화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장관 한 달만 해도, 평생 장관이라고 불러요. 

그게 너무 심해서 심지어 성경을 번역할 때도, '집사'란 말이 원전에 없는데 
일부러 '집사'를 넣어서 번역했어요. 행21:7

여러분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됩니다. 
제대로 알고,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고,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기준은 성경인 거예요. 

여러분 그들은 아무 직함이 없이, 아무 직분이 없이 헌신했고요, 말씀을 전했고요, 
스데반은 돌아가시기까지 했잖아요. 
오늘날 교회는 너무 무슨 타이틀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 하나 번역에 약간 유감인 것은 '히브리파' '헬라파'라는 말입니다.
6:1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파'라는 말을 들으면, 사실 좀 부정적인 느낌이에요. 
'파벌'이 생겨 가지고 막 치고받고 싸우는 듯한 느낌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새번역에 보면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 
NLT 성경도 'The Greek-speaking believer complained the Hebrew-speaking believers'
*헬레니스테스, 헤브라이오스,  '파'라는 말이 원전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름을 봐도 이게 명확하게 보입니다. 
12 사도들의 대부분, 그 중에 10명은 이름이 히브리 전통적인 이름입니다. 
야고보, 시몬, 유다 ... 이런 이름들. 

우리에게는 전부 다 외국 이름이라서, 그게 그거인 것 같지만,
유대인들이 보면 완전히 확연하게 구분되는 이름이에요. 

우리말로 하면 이를테면, 김정식 박순희 이런 이름이 쭈욱 나오다가 
갑자기 제임스, 줄리엣 이런 이름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어를 쓰는 신자들은, 히브리어(아람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주1) 
유대인인데 외국으로 이민을 갔거나, 
아니면 부모나 조상이 전쟁 포로로 잡혀가 가지고 거기서 노예로 살다가 해방되어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 이런 저런 이유로 다시 유턴했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히브리어를 알아도, 그리스가 훨씬 더 편한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바나나'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바나나는 겉이 노랗잖아요. 그런데 속을 벗겨 보면 하얗잖아요. 
겉으로 보면 중국 사람은 황인종인데, 그 속은 완전히 백인하고 똑같다 라는 뜻이죠.
영어로 아메리칸 본 차이니스, ABC 라고도 합니다. American born Chinese
그러니까 중국말을 잘 못하고, 영어는 잘하니까요. 

스데반, 빌립 등이 (일곱 일꾼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거죠. 
여기에 약간의 경멸적인 뉘앙스가 있습니다.
옛날에 유대인들은 특별히 그랬습니다. 
우리도 그러잖아요. '아니 한국 사람인데, 한국말을 몰라?' 

그래서 아마도 예배를 드려도요. 편한 사람들끼리 따로 모인 것 같아요. 
아랍어-히브리어를 쓰는 그룹과, 그리스어를 쓰는 그룹! 

그래서 뭐 일부러 그렇게 차별하려고 한게 아니어도 
편한 사람들끼리 모이다 보면, 오해가 쌓이고, 갈등이 있을 수가 있죠. 

그래서 대표를 뽑습니다. 
5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이 일곱 명은 모두가 그리스어 이름입니다. 
스테파노스, 필리포스, 프라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니콜라오스

본래 교회가,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들이 다 주류였잖아요. 
지금 새로운 사람 뽑는 이유는, 일손이 필요하니까,

자기들, 히브리 언어를 쓰는 사람들 중심으로 뽑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반반씩, 히브리어 절반. 그리스어 절반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전부 7명을 다, 다른 그룹에 내어줬다는 것은 
그 당시 교회의 지도자, 또는 핵심 계층의 사람들이 
얼마만큼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는지, 균형감각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죠.

한국에도 여러분 그런 교회들 많습니다. 
전통적인 마을에, 옆에 아파트가 계발이 되어서 들어왔어요. 
이사 온 사람들이 막 교회에 나오기 시작합니다. 교회 인원이 늘어나고 크게 성장해요. 
좋아요. 감사해요. 그런데 조금 있으면 문제가 생기는 교회들이 많아요.
이 양쪽이 문화적으로, 신앙적으로 너무 서로 다른 거예요. 

본래 마을 사람들과, 이사 온 아파트 주민들, 젊은 사람들... 
이 두 그룹은, 좋아하는 찬양도 다르고요. 좋아하는 프로그램도 달라요. 

한쪽은 조용하고 품위있게 기도하는 거 좋아하고, 
다른 쪽은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거 좋아할 수 있죠. 

친교의 시간를 가져도, 이쪽은 된장찌개 좋아하고, 
저쪽은 파스타 좋아하고... 그래서 '다음에는 우리 좀 다른 거 먹어요.' 하는 말이 나오죠.

제가 미국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아는데, 
-미국에는 한국말이 편한 1세대와, 
-그 자녀들 세대, 젊은 사람들 세대와 잘 섞이는 교회도 많지만 

이게 뭐 매사에 달라 가지고, 힘든 교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결국 어떻게 해요?
갈라 섭니다. 

찬송가에 그런 찬송했잖아요.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그게 복음이고 교회인데, 그 조금 다르다고... 
예배 후 점심을 먹을 때도 '파스타냐 청국장이냐?' 하다가, 교회가 깨지고... 그래서 되겠습니까? 

그런 포용력, 균형감각이 초대교회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하죠.

◑사도와 평신도의 엄격한 구분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또 하나, '집사'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오늘날 우리들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는 목회자들이 전담해서 맡아야 되고 
행정은 평신도들이 맡아야 된다" 라는 식으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보세요. 6장 이전에는 사도들이 행정을 맡았어요. 잘못된 겁니까? 아니죠. 

여기서도 행정을 하라고 7명을 뽑아 놨는데, 
보면 스데반과 빌립이 가서 설교하고 전도해요. 잘못된 겁니까? No
심지어 빌립은 간다게에게 세례까지 주었습니다.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8:38

여러분, 이 일에 엄격한 구분이 없어요. 
물론 목회자는 말씀사역자는 따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되고, 소명받아야 되고,
헌신되어야 해서, 전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거는 필요합니다. 

특별히 목회자가 먹고 사는 일에 얽매이거나, 교회 일에도 너무 세부적인 행정에 얽매이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일에 소홀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일곱 일꾼을 선출한 것은 
사도들의 기도와 말씀에 전념할 시간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들로하여금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하게 한 거예요. 

여러분, 행정을 도우라고 해서 사람들을 뽑았지만 
교회가 워낙 급하게 성장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들어야 될 필요들이 많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빌립이 나가서 전도하고, 스데반도 설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스데반과 빌립, 이 분들을 
오늘날 우리의 개념으로 한다면, 굳이 말한다면, '집사'보다는 '전도사'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의 교회는, 성직자 평신도 구분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교회가 필요에 의해서 구분을 했습니다마는,
성경적인 원리는 그렇다는 거죠.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그냥 평교인도 
목양사역할 수 있고, 말씀사역 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평신도도, 적절한 훈련을 거쳐서, 설교할 수 있고, 말씀 가르칠 수 있습니다. 
'누구는 말씀, 누구는 행정' 그렇게 딱 잘라서 부분하는 것은, 성경적 원리가 아닌 거예요. 
교회가 빨리 성장하니까,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제도를 만들어서 
따라가는 것일 뿐이에요. 

행6장에 나오는 이 상황은, 마치 스냅 사진을 찍은 것과 같습니다. 
교회 성장은 뭡니까? 동영상 같이 쭉 흘러가는 겁니다.
이 순간에는 이게 맞지만, 다음 순간에는 또 다른게 필요한 거예요. 

어떤 제도도, 살아있는 운동을 다 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어떤 제도가 성경적인 제도인가요? 그런 거 없어요. 
'제도'라고 하는 것은, 오늘 만들어 놓으면 내일 또 낡아집니다. 

아이들을 입힐 좋은 옷을 샀어요. 근데 아이들이 크면, 이제 맞는 옷을 입혀야 되잖아요. 
제도는 그런 거예요. 갈아입을 수 있는 거예요. 

요즘 학교에 가보세요. '내가 교장으로 은퇴했다. 나는 10년 전에는 이랬어' 
'그러니 내 말을 듣고, 이렇게 해야 돼!' 그렇게 말해 보세요.

그러면 현직 교사들은 '교장선생님, 요즘은 다릅니다.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는 거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전, 20년 전 경험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초대교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옛날에 좋은 전통, 그 정신은 잘 지켜야 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제도를 존중하지만 절대시하지는 않습니다. 
제도를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첫째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안주, 무사안일.. 그런 거죠. 
혹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가 막 빨리 변하니까 '이러면 안 돼, 왜 이 사회가 이렇게 나가지?' 
그 제도 안에 자꾸 숨는 거예요. 고집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변화가, 주님 손 안에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예루살렘이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잖아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 일이, 하나님의 손 밖으로 역사가 벗어난 일입니까? 
아니에요. 
바벨론 포로 생활은, 내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바벨론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거예요. 

우리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만날지 모르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끼리, 말 잘 통하는 사람끼리, 
그냥 이심전심 맞는 사람들끼리 오손도손 교회생활 할 때는 좋았는데, 

'이제 말도 잘 안 통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조인하고,
옷도 나하고 다르게 입는 사람들이 막 들어와 가지고 불편해졌어요. 
교회가 옛날 같지 않아요...' 이러면 그게 정상이에요. 그게 건강한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그 변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좋은 리더들이 세워진 거예요. 

 

◑그리스어 쓰는 지도자들을 세워서, 그 뻗어나가게 된 초대교회

 

5절을 다시 보시면, 7명이 전부 다 그리스 이름이라 그랬잖아요. 
그리스어를 잘하던 사람들이 세계로 뻗어가면서 전도합니다. 

7명 중 맨 마지막에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
이 한 명은 유대인도 아니에요. 
아예 핏줄이 외국인인데, 유대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증거는 '유대교에 입교했던' 입니다. *원어나 영어성경엔 그냥 proselyte (개종자)
유대인이었다면, 유대교에 입교할 필요 없이, 출생 때부터 유대교인이 됩니다만,
특별히 '유대교에 입교했다'는 말을 성경에 기록한 이유는,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일곱 사람들은 전부 다 그리스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약 성경도 전부 다 그리스어로 씌어졌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이런 세계선교의 먼 미래를 내다보고 
선교 전략을 짜고,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구나' 그래서
그들을 리더십에 넣은 게 아니에요. 

그냥 교회 안에 갈등이 생겨서, 임기응변 식으로 해결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미래를 멋지게 대비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세계로 복음이 뻗어 나갈 준비가, 복음이 담장을 넘어갈 준비가 
여기서부터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한국인인데, 영어 잘하는 2세들이 있으면, 세계로 나가서 전도할 거 아닙니까 
'유대교에 입교했던 니골라' 그 외국인이 예루살렘에 와서 살았어요. 
지금 우리 한국에도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이 와서 사는지 모릅니다. *250만명

그런데 그 니골라가, 유대교에 들어왔다가 복음을 듣고 성도가 되어서 
일곱 명의 중요한 리더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당시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폐쇄적인 사람이었는데 
교회 내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들이 모여서 예배하면서, 영어가 편한 사람들끼리 영어로 예배 드려요.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 필리핀 사람도 나오고, 미국 사람도 나오고, 
인도 사람도 오고, 중국인 2세들도 와서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세계선교회 씨앗이 되어 가는 거예요. 

우리 교회도, 외국에서 온 분들이, 같이 신앙생활하면서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따로 교구를 만들었으나 
지금은 공동체에 함께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게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중에 집사님도 있고요. 목자로 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기도합니다. '이 외국인들 중에서, 외국에서 오신 분들 중에서, 
좀 빠른 시간 내에 교회 권사님도 생기고, 안수집사님도 생기고, 장로님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우리 교회 안에 필리핀 출신 장로님, 중국인 출신 권사님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는 거죠

물론 처음에는 불편하죠. 어색하겠죠. 
그것을 넘어서면서,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올해 9월에 인천에서 로잔 대회를 하는데 
우리가 왜 자꾸 '로잔 로잔' 이렇게 말하는 가 하면,
우리가 이런 계기가 없으면, 우리의 신앙과 기독교 문화가 
자꾸 안으로만 이렇게 접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교회가 모여서 선교대회 하고 회의합니다. 
여러분 '서로 말도 안 통하는데 왜 그래야 돼요?'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번에 로잔 대회에서 이런 결정을 했습니다. 
한 교회가 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이번에 한국에 234개 나라의 대표들이 한국에 올 텐데,
이 일에 관심있는 국내 234개 교회들이, 한나라씩 맡아서 기도로 준비하는 거예요. 

로잔 대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게 
로잔대회를 통해서 '세계인들을 위해서,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맡았습니다. 
계속해서 남아공을 위한 기도제목을 나눌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한나라씩 맡아서 기도하는데, 
우리의 기도의 몫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이구나... 기억하고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전체 결론이 7절에 나옵니다. 

6: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아멘 

1절에 교인 수가 많아졌는데, 문제가 생기고, 위기가 왔어요. 
그 문제를 잘 해결하니까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처음에는 요만큼도 감당이 안 돼서 어려웠는데, 
이제는 훨씬 더 많아져도, 넉넉하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마련된 겁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교회를 성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마련해야 되는 줄 믿습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신앙적으로, 문화적으로 제사장들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세요. 교회가 있으면 
훨씬 더 개방적이고 리버럴 한 사람들, 스데반, 빌립 등 외국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교회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훨씬 더 저쪽(리버럴)으로 가겠네' 

아니에요. 이쪽에서 보면요.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사람들도 교회에 함께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이게 여러분 교회가 폭이 넓어지는 거에요. 
한쪽으로만 가는게 아니라! 
좌로나 우러나 치우치지 않고, 좌로 우로 넓어지는 아주 폭넓은 멋진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위기가 왔는데, 위기를 극복하니 이런 은혜가 생깁니다. 
숫자가 많아지는 것보다, 교회가 폭이 넓어지고, 다양해지는게 그릇을 만드는 거거든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요? 
원망이 생겼습니다. 왜 원망이 생겼어요? 
'우리에게 음식 나누어지는 구제가 공평하지 않다...' 
그래서 음식을 공평하게, 정확하게 잘 나누니까, 교회가 부흥했다 그랬습니까? 아니죠. 

교회 행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시행하니 교회가 부흥했다? 아니죠.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부흥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이에요. 말씀! 

회의를 잘 진행하니 부흥한 게 아니에요. 
교회가 행정과, 회의를 잘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자체에는 생명이 없어요. 
그것이 은혜를 주지는 못해요. 

물론 회의 잘못하면, 받은 은혜와 복을 쏟을 수는 있습니다. 
행정 잘못하면 하나됨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잘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행정하고, 회의하고... 이게 교회를 세우지는 못 합니다. 
생명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것은, 생명 주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교회에 기초 체력인 거예요. 기초체력! 
뭘 하든지 여러분 운동을 하려면, 축구를 하던, 농구를 하든, 테니스를 하든, 
기초 체력이 중요해요. 
체력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나도 전반에 조금 반짝하다가, 후반에 가면 그냥 다 무인지경이에요.
그러면 못 이깁니다. 기초 체력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사회가, 더욱 급변하는 사회가 될 거라 그럽니다. 
여러분 자녀들 손자들 어떻게 키우겠습니까?
'지금 이 직업이 유망하다' 하지만, 미래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이제 앞으로 사회는 정말로 기초체력이 중요해요 기초 체력!
즉 신앙인격, 관계의 능력, 의사소통 능력, 영성, 자신을 아는 능력... 이게 기초체력입니다. 

그렇죠. 그거 없으면, 무슨 스킬을 배워서 결코 잘 살 수 없습니다.
사회는 점점 더 변화무쌍한 사회가 될 겁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총선하는데, 4년 후에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AI가 뭐 눈부시게 발전할 거고요. 
직업 뭐 이런 거, 지금하고는 엄청나게 정말 달라질 거예요. 더 편리한 세상이 되겠죠.

여러분 선거를 한다면, 그 이후를 대비하는 사회에 비전을 제시해야 되는 거예요. 
교회는 그래야 됩니다. 더욱이 그 비전이 어디서 나오는가요?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그렇죠. 기초체력이에요. 
어디서 왕성했는가요? 교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교회 공동체가 말씀이 충만하면, 말씀이 왕성하면 
예루살렘에, 우리가 사는 도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의 말씀이 뻗어 나갈 줄 믿습니다. 
교회와 공동체와 예루살렘에서!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게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적인 주제예요.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 막 복잡한 문제가 생겨서 원망이 많았어요. 어떻게 풀까? 그거 이전에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먼저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7명을 뽑은 것도, '이걸 뭐 잘해서 완벽하게 배분해보자' 그런 거 절대 아니었어요. 
'할 수 있는 만큼은 하자...' 
이런 교회에는, 아무리 잘 해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어요. 완벽한 행적은 없습니다. 

 

잘하면 좋겠지만.. 정말 이 사도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제쳐 놓으면 안 되겠다' 
'더욱 말씀에 붙들려 살아야 되겠다...'  사도들 안에 먼저 말씀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 말씀이 충만했고요, 예루살렘의 말씀이 충만한 거예요. 

더 깊이 복음 안으로, 더 멀리 세상 속으로 나아갈 힘이 
여기서 생긴 겁니다. 

말씀과 기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만 붙들고 사는 이 삶,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이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려는 이 가치를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교회 위에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가정의 부모들에게 
먼저 말씀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먼저 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잘 모르는 미래까지 준비시켜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위기 가운데서도 더욱더 날아오르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는.. 
복된 가정, 복된 교회, 
나아가서 우리 때문에 그러한 미래를 대비하는 한국 사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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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아람어는 좁은 의미로는 다메섹을 수도로 하며 
북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아람'이라는 나라에서 사용한 언어를 가리키지만, 
일반적으로 아람어라고 할 때는 셈어 계통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수리아 지역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한 고대 근동의 대표적 언어를 뜻한다.

따라서 아람어는 지역에 따라 크게 갈대아 아람어와 수리아 아람어로 나누는데, 
성경에 사용되고 히브리어에 영향을 많이 준 아람어는 그 중에서 갈대아어로 불리는 아람어이다.

아람어가 히브리어에 영향을 끼친 역사를 살펴보려면 먼저 히브리어의 역사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최초의 히브리어는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해 오는 시기인 
BC 21-20 세기경에 사용된 셈어 인데, 이때 그들이 사용한 히브리어는 
그들의 본향이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어와 악카드어와 관련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그들이 가나안에 거주하면서부터는 가나안어에 동화되어 발전한 것이 
최초의 히브리어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