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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LNCK 2024. 4. 9. 19:4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십자가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요1:29, 계7:9~10      2024.03.28.  
고난주간 전교인 새벽기도회 ④

◑'어린 양'에 대한 의미가 남달랐던 유대인들

 

하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를 사망으로 선고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 이 두 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망 선고를 무죄로 하려면, 누군가가는 (대신) 죽어야 되잖아요. 처벌을 받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를,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지고 가기 위해서 오신 것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시고, 처벌(처형)을 당하시러 오셨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정체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아멘 

▲오늘날 우리한테는 '어린 양'이라는 단어가 들려올 때, 뭐 특별하게 감흥이나 
우리 안에서의 어떤 뜨거운 반응.. 이런 거는 별로 일어나지 않죠

물론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어린양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또 설명을 많이 들었고, 
그 의미도 알고,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이렇게 반응은 하지만, 

 

우리 가슴 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그 조상 대대로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어린 양의 존재의 의미, 그거는 우리에게 거의 없다 말이에요. 

그러나 2000년 전에 세례요한이 

'어린 양'이란 용어로 예수님의 정체를 선포하고 밝혔을 때,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어린 양을 잡아서 제사 지내오던 유대 문화속에서 살던 분들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요1:29
그런 문화적인 배경에서 '어린 양' 소리를 들으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유대인들은 그냥 온몸으로 느껴지게 되지요.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어린 양'의 존재의 의미는, 에덴동산에까지 소급됩니다. 
창4:4절에 보면,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어요. 
'양의 첫 새끼'는 .. '어린 양'이에요. 

이것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거예요. 
아벨은 '어린 양을 잡아서 죽이라' 하는 명령을 순종한 것이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곡물로 제사를 지낸 거예요.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을 불순종한 거예요. 

그렇게 가인의 심령 속에.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DNA가 
그 속에 들어가서 작동하는 일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창2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죽여라. 번제로 드려라!' 이렇게 명령을 내리셨어요. 
가는 길에 이삭이 말합니다. '아버지, 다른 거는 다 있는데 
여호와께 드릴 제물,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해요. 창22:7

그거는 어린 이삭조차도, 제사 드릴 때, 
당연히 어린 양으로 제물을 삼아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서 이삭을 내리치려고 하는 그 순간에, 
천사가 나타나서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뒤돌아보니까 
숫양 ram 이 뒤에 가시덤불에 잡혀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그 양을 
여호와께서 준비해 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낸 거예요. 

출애굽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각 가정에게 주시는 명령이에요. 
'이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각 가정에서 어린 양을 잡을지니...'  출12:3

'어린 양을 잡아라' 어린양이 거기서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월절마다 온 이스라엘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어린 양을 잡는.. 피흘리는 그 현장을 
태어나서부터 목격하고 자랍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을' 했을 때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그들은 그 복음의 깊은 뜻은 다 이해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어린 양'에 담겨 있는 의미를, 그 유대 전통과 문화 속에서 그들은 대번에 이해했죠. 
그거는 마치 반사신경처럼, 즉각적인 반응으로 일어나는 이해였죠. 

▲이사야 53장 안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또 이런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에요. 

이런 종교적인, 역사적인, 문화적인, 또는 민족적인 배경 안에서 
세례 요한이 자기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래서 이 내용을 선포하실 때, 세례 요한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매우 매우 궁금한데요. 

그 심정은 성경에 자세히 적어놓지는 않으셨어요. 
'그때 내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뭐 이런 표현이라도 슬쩍 해 주셨으면, 
우리가 그때 그 장면에서 세례요한이 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 
그 장엄함, 그 무게감.. 그것을 우리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겠죠.

'아 그렇겠구나.. 우리도 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구나..' 
하고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기록하지 않고 있어요. 

모든 것에 초점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그러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유추를 하고도 남죠.

이 선언을 하던 세례요한의 가슴은, 
이건 뭐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수천 년 동안 붙잡아 왔던 '어린 양'의 그 모든 예언의 역사를, 
이제는 종지부를 찍고, 
실제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제 나타나신 이 분을 
자기 눈앞에서 목격하는 그 영광은, 
이건 뭐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신약의) 우리는, 이미 그 의미를 다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달리신 죽임을 당하신 그 어린 양을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우리를 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린 양'에 대한 성경 구절들과, 또 그 의미를 
듣고, 깨닫고, 이해하고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알았던 것보다 몇 배로 더 크게요!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고 또 특권인지..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 양' 속에 담긴 복음의 깊은 뜻을 내가 깨달아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요1:29
'하나님의 어린 양'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이 말씀 안에는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해 제물이 되셨다.' 그런 의미가 들어 있어요. 

다른 어린 양들, 역사상 제물로 바쳐진 그 수억 마리의 어린양들은,  
그것은 다 사람들이 준비해서,

자기들의 죄를 위하여, 자기들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한 대속물로 다 잡아서 죽였어요. 

그런데 이 제물(어린양 예수)은, 사람들이 준비해서 바친 어린 양이 아니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직접 준비해서 바치신 제물이에요. 

여호와께서 뭔 잘못이 있으세요?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뭘 해결해야 될 그런 죄,  잘못, 허물이 있습니까? No
그런데도 하나님이 직접 어린 양을 준비해서, 번제물로 바쳐지도록 하신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에요. 하나님의 공의가 뭐냐? 
여호와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그냥 룰이 없이, 원칙이 없이, 
법칙이 없이, 질서가 없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에요. 

'여호와께서는 질서에 하나님이시다.'  고전14:33참조
우주 만물이 운행하는 원리가 있어요. 질서가 있어요. 
그거를 아버지께서 정하신 거예요. 

근데 그거를 아담과 하와가 어겼어요. 
여호와께서 직접 정하신 그 질서를, 뭐 그런 일은 없지만
'만약에 여호와께서 어기셨다' 그러면
그 질서에 정해진 질서에 따라 여호와께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여호와도 그걸 지키시는 거예요. 그거는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지켜지는 거예요. 

그것을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다.. 라고 이해합니다.  
'공적으로 모두가 다, 창조주께서 정해 주신 이 질서를 따라야 된다' 
우리도 그걸 따라서 살아야 돼요. 

그것을 따라서 생각하고, 그것을 따라서 말하고, 그것을 따라서 행동하고, 
그것을 따라서 살아야 되는 것이, 모든 피조물들의 의무예요. 

그건 창조주께서 (룰로) 정해 놓으셨어요. 
그거를 아담과 하와가 어겼어요. 그러면 해결을 지어야죠.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직접 나서셔서 그것을 해결하는.. 
스스로 정하신 그 원리, 스스로 정하신 질서를 아들이 대신 해결했어요. 

그거는 공의 차원에서, 이거는 누구라도 이 원리와 질서를 만든 자라도 
지켜야 된다는 것을 시범을 보여 주신 것이에요. 

사도요한이 요한복음 서두에서 뭐라고 합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지어진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 창조주셨다.
이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셨고, 이 성자 하나님께서 창조의 주체이셨다'.. 라고 선포했어요. 

그런데 바로 뒤이어서 세례요한이 선포하는 거예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말씀으로 태초에 존재하셨고, 온 우주를 창조하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 양으로 제물이 되셨다... 

이건 뭐 세상의 역사, 학문이 아무리 연구해도 
이건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신령한 세계가 열려서, 
세례 요한이 그걸 깨닫고, 지금 본문에서 선포를 하는 것이죠.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서 제물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이건 뭐 어마어마한 거죠. 
아마 그 의미가,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정말 평생 반복해서 들어도
이 선포, 선언에 담겨 있는 그 의미를, 우리가 다 알 수 없을 거에요. 

제가 보기에는 거기에 만분지 일이라도 좀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그 의미를 좀 느낄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 삶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런 위대한 말씀이 아닐 수가 없어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그 어마무시한 그 능력과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복음의 진리는... 이건 가늠할 수 없는...
 
우리가 용어로는 '한없는 사랑' 이렇게 표현하지만,
이 '한없는 사랑'에 그냥 한 귀퉁이만이라도 우리가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말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평생 살고도 남을 그런 성도님들이 되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제가 바라기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사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느꼈던 그 감흥,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 또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이 강렬하게 내 가슴에, 우리 가슴에 전달되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귀로 듣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그것을 느껴볼 수 있는 그런 경지로 
우리 성도님들이 들어가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요. 

그런 가슴이 뻥 뚫리는 그런 체험을 하셔야,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상황에서도 
우리가 웃음을 잃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혹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 할지라도, 
또는 다녀야 한다 할지라도 
'나는 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요? 

 

'하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데, 내가 왜 두려워하고, 내가 왜 걱정근심 하겠느냐?' 
이런 마음으로, 이런 평안으로, 이런 자유함으로 우리 가슴이 가득 채워지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 영역으로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이 찬양하는 '어린 양'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을!'  
사도요한은 계시록에서 어린 양에 대한 언급을 계속 반복해서 하세요. 5:8, 7:9, 13:11 등

구약의 역사에서, 에덴동산에서부터, 어린 양이 등장해요. 
그리고 예수님 오실 때까지, 이 땅에 셀 수 없는 어린 양들이 피를 흘려 죽어갔어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단번에, 
뭐 수억 마리의 어린양이 죽었다 하더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을, 

 

예수님 한 분이, 메시아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서, 창조주께서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갈보리 언덕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그것을 다 상쇄하고도 더 값진 피를 흘리셨어요. 

아마 그 수억만 마리의 어린 양의 피도, 시중 표현으로 '세 발에 피'죠. 
그건 뭐 비교대상이 되질 않죠. 그거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 일이 
하나님의 어린 양의 보혈의 피로, 다 이루어 주신 거죠. 

▲어린 양의 이미지는,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에요.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때, 그때 모습을 보니까 하나님의 어린 양이 거기 나타나는 거예요.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물론 우리 성도님들도 장차 그 자리에 있으시겠지만, 
'어 양이시네?' 그런 어떤 물리적인 어린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아니겠죠. 

물론 그 이미지는, 어떤 방식으로 중복이 돼서 나타나실지 
그건 우리가 신령한 영역이라서 지금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나타나시는데 
예수님이 하신 그 많은 사역들 가운데에서 
뭐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시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했지만 

그 모든 사역 가운데 가장 핵심인,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그 이미지가 
거기에 딱 등장하는 거죠. 
그거는 하늘의 영상 기법으로 표현이 될 것 같아요. 사도 요한이 그걸 봤어요. *계4, 5장

 

▲그거를 미리 사도 바울도 봤습니다. 
바울은 3층천에도 올라가 보신 분이고, 
미리 살아있는 동안에 하늘을 방문하셔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또 같이 시간도 보내시고 다 했겠죠. 

그리고 나서 이런 말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어요. 
빌2:9~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사도바울은 천국에 가 본 거예요. 
지극히 높은 자리가 어딘지, 어느 곳에 계시는지를 가서 본 거예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9~10

사도요한도 미리 가서 예수님을 봤는데요. 
그 본 장면을 계시록 전체에서 
'어린양, 어린양, 어린양' 계속 반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요. 

'그 어린 양을 보면서 살아가라' 
'그 어린 양을 보라' 라고 우리에게 호통을 치고, 또 우리를 초청해 주고 계세요. 요1:29  

▲계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우리가 종려주일에도 본문으로 읽고 묵상한 내용이죠. 
'큰 무리가'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 '큰 무리'는
우리하고 다른 어떤 큰 무리.. 그게 아니고요. 저와 우리 성도님들 얘기입니다. 
우리가 그 '큰 무리'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우리가 그렇게 할 거예요. 

다 흰 옷을 입고 나와서,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 거예요. 
이것도 어떤 영상 기법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의 정체성이 예수님의 사람이고, 
나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갖고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 
그들이 '흰 옷 입은 사람들'이에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님께서 보실 때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대부분 다 까만색 옷을 입고 계시지만,
영의 눈으로 볼 때는 흰옷을 입고 계신 분인 거죠.

우리 손에 정말 종려나무 가지를 하나씩 들고... 그건 아닐 거예요.
그거는 그 설렘, 그 소망,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시다' 라는 그 확고한 그 마음, 
그 마음을 이제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우리가 다 그 자리에 쓸 거예요. 누구 앞에 선다고요?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계7:9

'아 저 어린 양이, 그 어린 양이구나!'

사람들이 키우는 진짜 양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예수님인데, 예수님의 모든 사역 가운데 핵심이,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그것이 핵심이라서, 그렇게 표현한 거죠.
그것을 우리가 새삼스럽게 깨닫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2000년 전에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할 때 
수천 년 동안의 어린 양의 그 피흘린 역사가, 한꺼번에 다 참 어린 양의 등 뒤로 숨는 것처럼,  

우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흰 옷을 입고 주님을 영접할 때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그 가운데 갈보리산 위 십자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신 그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의 가슴에 확 올라오는.. 이제 그런 현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우주에 모든 성도들이 다 큰 소리를 외치는 거예요.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계7:10 

어떤 물리적인 어린양이 아니라고 앞서 말씀을 드렸어요.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모여서 
우리의 구원을 이렇게 영광스럽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이제 찬양하는 거예요. 

계시록 7장에 보면, 마지막 때 사람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않고,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심이요. 
그가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7:16~17

아니 어린 양이 어떻게 목자입니까? 
이건 세상에 문법으로는, 어법으로는 말이 안 되는 얘기죠.
양은 양이고, 목자는 목자잖아요. 
그런데 어린 양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다시는 목마를 일이 없고, 다시는 굶주릴 일이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계시록 17장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이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계속 반복해서 어린양의 존재를 계속 부각시켜요.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언급하세요. 
우리가 찬송도 종종 부르지만,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모든 성도들이 하늘에서 이렇게 외치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그 어린 양이 그 성전이라'  21:22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이 내려오는데요. 
그 성전을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바로 그 성전이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신령한 말씀을 주세요. 
근데 그 성 한 가운데에 또 '여호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있도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22:3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라야 그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 이렇게 말씀하세요.  13:8, 21:27

그 성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성 전체를 밝히는 등불입니다. 21:23
이렇게 '어린양'에 대한 언급이 계속 나와요. 

어린 양으로, 나를 살려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갈보리 언덕에서 돌아가신 그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계2~3장, 일곱 교회에 보내신 예수님의 편지를 보면,
모든 교회에 보내시는 편지에요. 

그 메시지의 핵심은 '죽임 당한 어린 양을 잊지 말라.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라' 
그런 얘기에요. 

히브리서에서 사도 바울께서, 아주 그 메시지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우리에게 일러 주셨어요. 

히10:15~16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내 법'이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세워두신 그 질서예요. 그 원리에요.
이 원리이 질서를 어기면, 여호와께서도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나님을 직접 보내셔서,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 거예요.

즉 공의를 만족시키실 그런 일을 하실 정도로 
이것은 온 우주가, 삼라만상이 다 지켜야 되는 창조의 원리이자, 창조의 질서예요. 

'이것을 내가 나의 자녀들의 가슴에 두겠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 놓겠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모든 생각이, 하늘 아버지의 창조 질서에 맞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겠다'
그것이 안 된 것이, 노아시대였죠.
그들의 생각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생각으로 계획하는 모든 것이 다 
여호와 없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누군가요?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그 예수님을 기억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하늘 아버지의 창조의 질서를, 내가 집어넣어 줄 것이고, 
그들의 생각 속에, 하늘 아버지의 생각과, 하늘 아버지의 마음과, 
하늘 아버지의 길을, 아버지의 뜻을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 주겠다...

이 질서를 따라가는... 그 질서를 따라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아버지의 질서에 순종하여서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갈보리 언덕까지 올라가신 그 예수님이 가진 그 길을, 너희도 따라 가거라.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늘어나게 될 때 
하늘 아버지의 여호와의 창조 질서의 세계가 다시 회복되어지는 일이 
이제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에덴으로 되돌아가는, 
원래 여호와께서 세워두신 에덴의 질서로 되돌아가는, 
그 길을 우리가 함께 걸어가게 될 것이고,
 
그 길의 맨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시는데, 
그 예수님의 걸음이 (그 이미지죠, 영상이죠) 그것은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마치는 말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어린 양 예수'는 바라보지 않습니다.

대신에 승리하신 예수, 백마 타신 예수, 원수를 짓밟으시는 예수, 성공하는 예수를 바라보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강조하는 예수, 특히 계시록이 반복해서 설명하는 예수는 '어린 양 예수'입니다. 

 

그 어린 양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된다는 거죠. 우리는 그 분을 따라가는 이들이니까요!
우리도이 세상 것에 대해서, 육신에 대해서 
우리가 십자가에 죽는 그런 걸음을 우리 삶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나를 따라오려고 하느냐? 내가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했는데, 이 길을 따라 오려느냐? 
그러면 너도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고 따라오라!' 
그 말씀이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지고 나를 따르라' 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곳에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고 
그 능력을 힘입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길이 이제는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너의 왕으로 너의 삶에 모시고 섬기고 살아가는 그 삶을 살아라! 
너의 삶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라!' 
그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에요. 

정말 나를 위해서 죽임 당한 그 어린 양, 그 모습을 우리가 바라본다면, 
'그 하나님이 어린 양'을 세례요한이 '보라' 라는 이 음성이, 
우리 시선이 자꾸 세상으로 향할 때 
이 음성 '어린 양을 보라, 어딜 보고 있느냐? 

선악과를 바라보고 쓸데없이 하나님처럼 내가 되겠다.. 
자기 생각을 끌려가는 그런 걸 바라보지 말고, 

죽임 당하신.. 나를 위해 갈보리에 올라가신.. 그 어린 양, 그분을 바라보라. 
우리 성도님들의 일생이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시는 
그런 일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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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없으신 어린양을 바라보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죄와의 투쟁은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애씀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열정은 필요하지만

그 열정은 바른 방향으로 향해져야 합니다.

 

죄를 이기기 위하여

하루 종일 죄를 생각하고

 

죄와의 투쟁에 집중하고

자신을 치는 것에 몰두한다면

 

그는 잠시 승리하겠지만

곧 피곤하고 지치게 될 것이며

 

진정한 승리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의 애씀과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이루심을 바라보고 의뢰함에서 옵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자신과 세상을 벗어나

그 영광의 주..은혜의 주를 바라볼 때

그 은혜가 승리의 열매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까만 강아지를 생각하지 마세요..

까만 강아지는 눈도 까맣고 온몸의 털도 까맣고..

다리도 다 까맣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까만 강아지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런 의식의 습관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까만 강아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방향을 바꿔 보십시오.

하얀 강아지를 생각하세요..

 

온 몸이 새하얀 강아지가 뛰어다니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곧 까만 강아지를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즉, 주님의 순결함

주의 자비..그 영광과 거룩하심..

 

그 한없는 긍휼과 은총을 바라보고 감사하십시오..

곧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가득히 누리게 됩니다.

 

영적인 사람에게.. 주님이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임하셨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없이 순결한 사람에게.. 주님이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임하셨기 때문에.. 죄에서의 승리와 삶의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죄를 다 버려야 주님이 오신다면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도 삭개오도..

어느 누구도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노력함으로 자기 의를 세우고

은혜의 조건을 만들기에 힘쓰지 말고

 

그저 단순히 죄인으로서, 환자로서

최고의 의사에게 나아가십시오.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고 그 은혜에 잠기십시오.

 

거기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이 필요할 뿐

아무 자격조건이 없습니다.

 

시선을 자기와 세상에 두지 말고

흠 없는 어린양

영광의 주를 바라보십시오. (2초가 아니라, 3~10분 깊이 묵상하십시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감사하고 기뻐하며 높이십시오.

그분의 은혜가 가까이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천국의 기쁨과 평화가 무엇인지

 

자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누리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