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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LNCK 2024. 4. 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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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4월07일/계시록2:18-29/’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 YouTube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계2:18~29              

▲두아디라.. 지리적, 역사적 배경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80여 킬로 떨어진 지역인데요.
이 지역은 넓고 편평한, 비옥한 평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도시의 성격은, 직물 옷감이 발달했고,
그러다보니까 자연히 염색업이 굉장히 발달했는데, 
염색 중에 제일 내기가 어려운 빛깔이 어떤 빛깔인지 아세요? 자주색이에요. 

과거에 저도 잠깐 염색 공장에서 일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염색 약품들이 건강에 해로울 정도로 독해요. 

코를 찌르는 그 냄새가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굉장히 독한 약품들을 쓰죠. 

그중에 이제 가장 내기 어려운 빛깔이 자주색입니다. 
그래서 자주색 옷감이 제일 비쌌고, 그래서 왕족들이 그 색깔의 옷을 입었죠.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태양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제우스가 있고, 그의 아들이 아폴로인데, 
이 도시는 아폴로를 신으로 숭상하는 도시입니다. 

근데 그 시대에, 모든 지역이 로마제국의 통치권 아래에 있다 보니까 
로마의 황제도 당시에 신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의 아들'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던 시대입니다. 
황제도 신의 아들로 그렇게 불리워지고 했습니다. 이런 도시적 배경을 안고 있었어요. 

두아디라 출신의 옷감장수 중에 성경에 유명한 인물로 루디아가 있죠. 행16:14 
'루디아'는 사실 이름이 아니에요. 
우리나라의 '안성댁, 수원댁' 부르듯이, 
'루디아'는 '리디아 출신 여인'이란 뜻입니다.  *옛 터키 지역의 왕국 이름

두아디라는 도시 이름이고, 리디아는 두아디라가 속한 지방 이름이죠.  
그러니 두아디라가 직물 및 염색업이 발달한 게 맞는 것이
루디아가 두아디라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지고 가서, 빌립보로 건너가서 비즈니스를 했던 거죠.

두아디라에, 이런 여러 직종의 상업들이 발달되다 보니까, 
그 직종마다 길드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조합'이라고도 불리우죠. 

근데 그 당시 길드는, 단순한 조합이 아니에요. 
그 길드에 가입이 되면,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유익과 혜택이 주어지는데 
특별히 길드는 반드시 그곳 신전 안에서의 식탁 교제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제사 순서의 일환으로 신전 창기들과 음행이 이루어지게 돼요. 

그러다 보니까 성도들이 입장에서는 갈등이 있게 되었죠. 
'길드에 가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실 이런 현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교회 장로인데, 부정한 거래가 배경이 되는 회식에 참석해야 되나?' 
그런 현실적 갈등이 생기게 되죠.

당연히 두아디라 지역의 성도들에게도 그런 갈등이 있었죠.
그래서 기꺼이 그 길드에, 경제적인 현실적 손실을 각오하고, 
안 들어가는 성도들이 많았어요. 그런 도시입니다. 그런 시대입니다. 


◑2:18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그 눈이 불꽃 같고'
우리가 계2~3장의 7교회를 순례하면서 살펴보니,
각 교회마다 예수님이 표현을 다르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각 교회마다 표현을 다르게 하신 것은,
그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눈이 불꽃 같다'는 표현도, 두아디라 교회에 적합한 표현인데,
뒤에 23절에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이죠. 

 

성도들 가운데 이세벨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는 거죠.
그렇지만 주님은 다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 눈이 불꽃 같고' 

지금이 두아디라 성도들에게는, 그 은밀한 동기를 숨기고 있었는데,
교묘히 감춰져 있는 어떤 불순한 동기가 있는데,
예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그걸 드러내시겠다는 뜻이에요.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주석(놋)은 재질이 아주 단단한 금속입니다. 번쩍 번쩍 빛도 나죠.
'발이 주석 같다'는 얘기는, 그 단단한 발로 밟으면... 심판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불순한 동기들을 드러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석 같은 (단단한) 발로 
그것을 반드시 심판하겠다...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죠. 
뭐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이렇게 두아디라 교회에 특별히 거론할 필요가 있는가요?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지만, 두아디라 도시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를 신으로 숭상했던 도시예요. 
거기에다 더해서 로마의 황제가 '신의 아들'로 호칭되던 시대였어요. 그런 시대였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른 교회에 안 쓰는 표현을 쓰셨는데 '하나님의 아들'
이것은 바로 아폴로나, 로마 황제(가짜 '하나님의 아들')에 대비되는 표현이죠.
예수님 당신이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시2:7~8참조

이 시대도 마찬가지예요. 
예수 그리스도만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교회를 향한 자기 모습을, 의미를 담아 설명했다면 
이제부터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네 사업'
'사업'이라니까 우리는 비즈니스로 이해하기 쉬운데, 
헬라어 '에르곤' 이라는 말은, 행위 work 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네 사업(행위)'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뒤에 그 행위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무슨 실적을 내고, 비즈니스에 결과를 내는 그런 '행위'를 얘기하는게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행위입니다.
즉 우리 성품과 신앙인으로서 갖춰야 내면의 가치를 얘기하는 거예요.

이건 뜻밖이죠.

우리는 '행위' 하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행위를 생각하는데 
본래 뜻은 '성품'을 얘기하는 거예요. 신앙인으로서의 성품!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가 뭡니까? '푯대를 향하여!' 
근데 그 '푯대' 라는 것은, 어떤 외적 성취나 결과물을 얘기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되어 가는 자기 정체성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부분은, 설립 70주년을 맞는 저희 교회의 표어와 굉장히 유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
이 말씀이 칭찬일까요/ 책망일까요?
칭찬이죠. 

두아디라 교회가, 처음에는 교회가 사랑도 그저 그랬고, 믿음도 시원치 않았고, 
섬김과 인내에도 굉장히 인색했어요. 
그런데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라는 말은.. 나중에 성숙했다는 뜻입니다. 

항상 개인이든지, 교회 공동체든지 
처음 출발은 지지부진하고, 또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왜 저 모양이지?' 이렇게 평가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갈수록 그의 신앙 인격이 성숙해지고, 윤택해지는 거예요.
갈수록 좋아지는 거예요. 그게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는 뜻이에요.
 your deeds of late are greater than at first

독일 속담에도 그런 속담이 있더라고요. '끝이 좋아야 모든게 좋다!'
그 인생이 갈수록 윤택해져야 되는데, 갈수록 이상하게 사람이 패악스러워지고 
고집불통이 되고, 화만 자꾸 내면 어떡하겠어요? 저도 그렇게 될까봐 제일 겁나요. 

항상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도 처음에는 연약하니까 뭐 분쟁도 있고, 어려움도 생기고,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갈수록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치를 좇고, 하나님의 사랑이 부요해지고... 
그런 교회가 성숙한 교회입니다. 
지금 두아디라교회는, 먼저는 그런 칭찬을 받고 있어요. :18~19

우리 삼일교회에서 창립 70주년을 맞으면서, 
앞으로 새로운 날들은, 이제 성장에서 성숙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옛날에 화 10번 내던 것을, 이제는 아홉 번만 내고... 
한꺼번에 좋아지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 공동체도 없고...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뭐든지 갑작스러운 것은, 문제를 잠복시키게 돼 있어요. 
천천히, 부드럽게... 성숙해가야 합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처음보다는 나중이 낮다'는 칭찬을 받았어요. 
우리도 그런 칭찬을 받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20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그런데 뭐든지 본론을 얘기하려면, 앞에 좋은 말을 하게 돼 있어요. 
왜 드라마라 영화도 뒤에 새드 무비로 끝나는 건, 
꼭 처음에 막 꽃가루가 떠다니고, 좋은 스토리가 막 나오죠. 

'당시 두아디라 교회 안에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있다'는 그 말이 아니에요. 
구약의 인물 이세벨을 뜻하는 겁니다. 

왕상21:25~26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그러니까 이세벨은 아합의 왕비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에 빠뜨리고 
행음케 하는데 앞잡이 노릇을 했어요. 아합 왕을 충동키셔서 그랬죠.
아합 왕이 그래서 한 시대를 놀아났습니다. 나라 전체에 해악을 끼쳤죠. 

그래서 학자들의 글들을 보면, '이세벨'이라고 지칭된 여인은 
'아마도 두아디라 교회에 강력한 지도자의 아내 위치쯤 되지 않았겠나?' 추측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담임목사나 교회지도자의 사모 정도 되는 거죠. 
그런데 목사가 문제가 많아서 시끄러운 교회도 많지만, 
또 사모들이 문제가 돼서 시끄러운 교회가 굉장히 많아요. 

어느 교회의 사모님은 그렇게 부동산의 귀재에요. 
투자가 아니라 투기에 열을 내가지고, 거기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교인들을 꼬드겨 가지고, 막 단체로 제주도에 땅 사러 다니고... 
그러다가 이게 문제가 돼 가지고, 결국은 교회에서 끝이 좋지 않았어요. 참 씁쓸하죠. 

또 사모님이 목사 안수를 받아 가지고, 또 이상한 신학 이론을 접목시켜서 
온 교회에 잘못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도 간혹 있습니다.

근데 우리 교회는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가 누군지도 몰라요. 
사모라는 위치가 참 어렵습니다. 사실은 이게 보일 듯 말 듯 해야 문제가 안 돼요. 
'보일듯이 보일듯이 보이지 않는... 따오기' 라는 노래가 있는데,
사모는 정말 따오기 같이 행해야 됩니다. 보일듯이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근데 이세벨은 어떻게 성도들을 음행에 빠뜨리고, 우상숭배에 넘어지게 만들었는가요? 
참 교묘합니다. 

자기는 '사탄의 깊은 것까지 안다'고 성도들을 호도했던 것 같습니다. 2:24

당시 배경을 보면, 길드에 가입이 돼야 경제활동을 통해서 먹고 살 수가 있어요. 
근데 그 모든 과정이 신전 안에서의 식탁 교재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 끝에는 언제나 순서와 절차에 따라서, 그 신전 창기들과 행음이 이루어져야 돼요. 

그리고 거기에서 벌써 우상숭배와 행음이 동시에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이 시대는, 그리스 철학이 지배되던 시대라 
이분법적 사고가 굉장히 사람들에게는 익숙했고, 
이것이 잘못된 영지주의라는 이단들에 의해서 
신앙의 교묘한 색깔로 교회 속으로 자신을 감추고 들어왔습니다. 

'어차피 육은 썩고 부패해. 그러니까 육이 요구하는 건, 그냥 요구하는 대로 그대로 둬도 돼. 
그건 악이 아니야. 우리는 영적으로만 깨끗하고, 깨달아 구원을 얻으면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되는 거야!' 
해서 극단적인 방임주의와, 극단적인 금욕주의.. 이렇게 딱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이세벨 같은 영향력이 있는 부인이 
'거봐 이거는 그냥 몸이 하는 거니까 괜찮아. 
그리고 우리가 알잖아? 우상 자체가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걸 알잖아.. 
그리고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해. 그렇다고 당신이 하나님을 안 믿는 건 아니잖아... 

길드에 가입해.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괜찮아. 
그리고 이건 제사 순서의 일환이니까, 육체를 던져 두어도 상관이 없어... (방임주의)' 

이런 속임수로 온 성도들을 꼬드긴 거예요. 
자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왜 예수님이 '불꽃 같은 눈'이라는 통찰의 의미를 담아서  2:18
자기를 그렇게 소개했고 묘사했을까요? 이런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들한테도 한번 그 질문을 해 볼게요. 

(질문) '이세벨이 속여서 백성들을 우상숭배와 음행에 넘어뜨린 것만 문제일까요? 
속은 사람은 정말 문제가 없을까요?'  

여러분, 속은 사람은 왜 속았어요? 모르고 속은 거예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 마음속 동기를 지적하는 거예요. 

그 속에 뭐가 있었기 때문에 이세벨을 따라간 걸까요?

탐욕, 세상의 물질에 대한 욕망, 
이런 것이 자기 안에서, 마치 화산이 터지기 전에 이글거림처럼 솟구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유혹의 미끼가 던져질 때, 바로 그 덫에 딱 걸리게 되는 거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주변에서 보면, 그렇게 젊은이들이 사기를 많이 당해요. 
뭐 어른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런 사기에 많이 걸려드는 경우를 보면, 
대체적으로 그 안에 욕망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인의 상식으로 그 스토리를 들으면 말도 안 되는데, 
왜 그런 사기성 스토리에 넘어간 거예요. 왜 넘어가요?
벌써 자기 안에 물질에 대한 욕구가 너무 커서, 
벌써 자기 눈을 가리워 버리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어둠의 권세 잡은 자의 덫에, 턱 걸려드는 겁니다. 
자기 마음속 욕망이, 사기를 불러들였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조심해야 될게 뭐냐면, 자꾸 환경 탓하지 말고 
여러분 가짜가 많을수록, 가짜를 연구하는게 아니라, 진짜를 연구해야 되는 거예요.

요즘 신학도 제대로 안 한 사람들이, 유명한 연예인에서부터 
그 이상한 가르침을 막 유튜브에 쏟아내고,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가고 추종하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사람은 항상 보편상식적인 건강한 사고를 늘 유지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게 잘 안 되니까.. 자기 안에 비틀어진 욕망, 잘못된 희망 때문에, 기대와 욕구 때문에 
그런 이세벨의 유혹의 덫에 맥없이 넘어가는 거예요. 당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이 바위처럼 우뚝하게 서 있으면, 
옆에서 비바람 불어도 끄떡없이 버티는... 그런 심지가 굳은 신앙을 갖고 있어서,  
누가 뭔 소리를 해도, 정통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귀에 안 들어오는 인생이 돼야 돼요. 

그러니까 두아디라 성도들이 이세벨에게 많이 넘어갔어요. 결과를 보십시다. 

21절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놀랍게도 주님은, 이런 이세벨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어요. 
이세벨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니까, 당연히 그 추종자들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줬겠죠. 

그런데 '자기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 하는도다'
이미 탐욕이 자기를 덮어버렸기 때문에.. 회개 안 합니다. 
마음을 굳게 해서, 자기 식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이거를 '맹아적 고집쟁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22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침상'은 중의적 의미를 갖고 있어요.
병들게 하는 심판을 하시겠거나 
아니면 주로 음행이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침상에서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의미가, 이 표현 속에는 같이 녹아져 있어요. 

23절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이세벨의 속임수에 넘어져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뜻하죠.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사람의 뜻, 마음 ... 이거는 속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겉이 아니라요.

주님은 속을 얘기하시면서 동시에 
'나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만 살피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그 동기를 보겠다' 
그 불순한 동기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성도들이, 왜 멀쩡한 사람들이 그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간 줄 아느냐? 
이세벨이 워낙 잘 꼬드겨서 넘어간게 아니라, 그 불순한 동기 때문이다. 
불순한 동기, 욕망이라는 동기, 탐욕이라는 동기 때문에 넘어간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의 뜻'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콩팥'으로 돼 있어요. 
그리고 '마음'은 '심장'으로 돼 있어요. 

근데 에베소서 같은 경우에도 보면, 우리의 감정선,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장기로 표현한 경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근데 사실은 이거는 우리말에도 그런 표현들이 많잖아요. '애간장이 끓는다. 속이 아프다'
이런 표현들이 다 장기를 묘사해서, 내면의 고통을 설명하는 표현 방식이란 말이죠.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여기서 말하는 행위(에르곤)는 2:18절의 말씀처럼 섬김, 사랑, 믿음, 인내
이런 덕목들을 얘기하는 거예요. 

◑24절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이 교훈'은 이세벨의 꼬드김을 뜻하죠.

놀랍게도 이런 대세를 대세를 좇아가서 넘어진 이세벨의 추종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 가운데에도,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오실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넘어지지 않았던 성도들이 있었어요.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즉 이세벨이 뭘로 꼬들겠다는 얘기입니까? 
'내가 깊은 것, 영흠한 것을 알고 있다' .. 영지주의를 뜻하는 거죠.
내게는 신비한 영적인 지식이 있다.. 하면서 꼬드겼다는 것입니다.

25절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굳게 잡으라'
버티라는 거죠. 버티는 힘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그렇고, 일상에서도 그렇고, 정말 실력 있는 자가 누구냐 하면, 
화려한 면모를 갖춘 자가 아니라, 버티는 자입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자가 승자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굳건히 세워지고 버티는 마지막 자리까지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혀 있기를 축복합니다. 

26~27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이기는 자'와 '지키는 그에게'라는 언급은 

일곱 교회에 보내진 서신의 공통적인 형식으로 
진리를 굳게 붙잡으며, 그리스도의 권면을 듣고 순종하는 승리자를 가리키는 표현이죠. 

'내 일'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과 연관된 것으로(23절) 
이세벨주의자들의 교훈과 가르침에 정반대되며(22절) 
이미 두아디라 교회가 시행하여 칭찬받는 것의 내용을 의미합니다(19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이 구절은 시2편을 반영하며, 그 의미 역시 시2편과 상통합니다. 
승리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심으로 어두움에 대한 온전한 승리를 획득할 것입니다.

'내 일' 
바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얘기하는 거예요.  :19
그것이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28절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새벽벌을 준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권세를 줄 것이라는 약속을 
최종적으로 끝까지 버티는 자, 이기는 자에게 하시는데,

이 새벽별의 정체가 뭐냐? 
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예수님이 새벽별이세요. 
어둠을 끝내고 아침을 맞이하는.. 가장 밝게 정확하게 떠오르는 별이 새벽별입니다.

그 새벽별이 여러분들과 함께, 만국의 권세와 통치의 권세를 가지고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진리를 끝까지 붙들고 승리하는 
여러분 인생의 시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