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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멈추면 썩는다

LNCK 2024. 4. 12.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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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멈추면 썩는다      눅3:7-18      2009.12.13.

 

‘세례 요한 콤플렉스’(the Baptizer Complex)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만든 말인데, 아직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알아주거나 말거나, 이 말은 일단의 광신적이고 극단적인 전도자들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입니다.

 

이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들은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분노가 폭발 직전에 있으며,

따라서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회개시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물 불 가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을 꾸짖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 모습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의 모습을 연상시켜 줍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그와 비슷하게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그만한 영성이 뒷받침하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모든 증거로 볼 때, 세례 요한은 어린 시절에 노부모를 여의고

광야에 있는 수도 공동체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깊었고 또한 예민했을 것입니다.

 

그는 서른 살쯤 되어 유대 광야에 나가 전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대중의 환영을 받을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번영의 복음’도, ‘긍정의 힘’도 아니라, ‘회개의 복음’을 설교했습니다.

철저히 돌아서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세례요한 자신도 자신의 메시지가 전혀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웬 걸? 무슨 일인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유대 광야를 거쳐 요단강까지 몰려 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예상하지 못한 그 사태에 대해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 요한은 자신에게 몰려오는 무리들을 보고 이렇게 일갈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7절)

 

자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이같이 막말로 꾸짖는 세례 요한이

참 대단해 보입니다. 더 대단해 보이는 것은 그 심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겠다고 그에게 머리를 숙이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기 때문에, 그의 영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그의 영성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영성은 깡그리 없으면서, 고함만 지르는 사람은 ‘세례요한 콤플렉스’라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 세례 요한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들은 그의 영성을 닮으려는 노력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의 겉모습만 닮으려 합니다.

세례 요한도 아니면서 세례 요한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지하철 프랫폼에서, 지하철 객차 안에서, 시장통에서 혹은 지하도에서

이같은 ‘무늬만 세례 요한’인 사람들이 요즈음도 연일 불을 뿜고 있습니다.

 

전도자들이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실하고 겸손하게,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풍기며 전도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 요한입니다. 누구도 그 사람을 흉내낼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비록 요한이 막말로 그들을 꾸짖고 이상하게 행동했지만

그의 눈빛과 행동과 말씀 안에서 뭔가 ‘진짜’를 느꼈을 것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헛된 영적 자만심을 사정없이 허물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자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자신들은 그 약속의 덕을 자동적으로 입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 희망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립니다.

8절에 기록된 그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한 말은 아주 심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보거나, 그들의 종교적인 신념으로 보거나,

세례 요한은 용서받을 수 없는 망발을 한 것입니다. 눅3:8

 

수 천 년 동안 유대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겨 온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자격이

무효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목숨을 내놓고 설교를 하고있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볼 때, 희망은 회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고, 하나님께 전향한 사람다운 열매를 맺는 것만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들립니다만,

선민에 속했으므로 당연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

 

회개하라는 말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도, 무슨 뜻인지 감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10절)

이 질문에 대해 세례 요한은 아주 구체적으로 답변을 하십니다.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실례를 들어 설명해 줍니다.

 

첫째, 회개한 증거는 직업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했다고 해서 직업을 버리고 모두 전도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직업 현장에 그냥 머물러 있되, 마음과 태도를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12절부터 14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세리와 군인이라는 두 가지의 직업을 예로 듭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악명 높았습니다. 로마 정부의 권력을 등에 지고,

로마 정부가 정해 준 세금 액수에 자신의 몫을 더하여 동족을 착취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강점되었을 동안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로마의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세리의 직업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무방하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세리라는 직책을 사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13절).

 

군인이라 하면, 유대인으로서 로마 군대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유대인 자치 군부에 소속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식민지 치하에 있는 나라에서 군인의 위력은 실로 막강합니다.

군인의 협박은 민간인에게는 매우 두렵습니다. 아무 근거 없는 고소를 당해도

빽 없고 줄 없는 민간인으로서는 꼼짝 달짝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군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작은 권력을 휘둘러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세례 요한에 의하면, 식민지 치하에서 정복군의 군인으로 일하는 것은 문제될 것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14절).

 

이 두 가지 예를 통해 보듯, 하나님에게로 방향 전환을 했다는 말은

삶의 태도가 구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직업을 바꾸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종사하고 있는 직업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꼭 직업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했다면,

배우자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생겨야 하고,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와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하며, 직장에서 동료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회개의 열매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 만약 세례 요한이 다시 나타난다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너희가 목사라고 해서 혹은 직분자라고 해서 혹은 신앙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 받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너희 삶에 열리게 하라. 그것 없이는 희망도 없다.”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면 세례 요한께서는 우리의 직업을 하나 하나 물어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정치인: 재선을 목적으로 삼지 말고 공익을 위해 봉사하라.

당신의 지위를 사용하여 부정한 이익을 얻으려 하지 말고, 뇌물을 거절하라.

 

공무원: 시간 때우기를 목적으로 삼지 말고, 당신이 받는 혜택에 상응하도록 성심껏 일하라.

근무 시간에 사무실에서 업무 외에 다른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교사: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라. 지식 전달을 넘어서 영감을 주는 교사가 되라.

선물을 탐하지 말라.

 

식당 주인: 내 가족의 식탁을 차리듯,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정갈하게 조리하라.

종업원들을 선대하라.

 

종업원: 눈가림으로 일하지 말라. 성심껏 당신의 소임을 다하라.

부정한 방법으로 수입을 올리려 하지 말고, 주어진 급료에 만족하라.

 

목사: 네 설교 앞에 네 자신이 먼저 무릎 꿇라. 숫자 놀음에 현혹되지 말고

영혼을 위해 일하라. 정해진 사례비에 만족하고 사적 이익을 탐하지 말라.

 

선교사: 선교 보고에 정직하라. 선교를 이익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현지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라.

 

과학자: 연구비를 유용하지 말라. 연구 결과를 조작하지 말라. 인류의 공익에 유익한 연구를 하라.

 

회계사: 셈하는 일에 있어서 정직하고,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말라.

 

자영업자: 손님들에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라. 합리적인 이익 이상을 취하지 말고,

세금 보고에 정직하라.

 

변호사: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위해서 일하라. 억울한 눈물의 대가로 부를 얻지 말라.

 

의사: 환자를 마음으로 진료하고 보살피라. 돈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라.

 

은퇴한 사람: 노후의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사랑하고 섬기고 베푸는 일에 힘쓰라.

 

예술가: 명성을 위해 일하지 말고, 작품을 통해 영혼을 순화시키는 일을 위해 헌신하라.

 

작가: 대박을 터뜨릴 욕심을 버리고, 진리를 위해 글을 쓰라.

 

운동선수: 최고가 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라. 성공한 다음에도 한 사람의 배우자에게

만족하고 충실하라.

 

어떻습니까? 이 요청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아, 그쯤이야 벌써부터 해 오고 있습니다. 저는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분이 계시다면, 축하드립니다. 또한 존경합니다.

그 마음, 그 태도 변치 않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분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아, 아픈 곳을 찌르십니다.

저보고 어쩌라구요? 저도 그래야 하는 줄 알지만, 그럴 사정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하게 우리의 부족함을 고발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11절에서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명령을 하십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우리에게 오늘 먹고 입고 살 것만 남기고

나머지가 있으면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세례 요한의 요청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는 없음이 분명합니다.

 

저만 해도, 집 냉장고에 그래도 며칠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루치 음식만 남기고 다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제 옷장에는 때를 따라 갈아 입을 옷이 몇 벌 걸려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한 벌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돈이든, 음식이든, 옷이든, 무엇이든지 오늘 나의 필요를 넘어가는 것이면

없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아주 설득력 있는 여러 가지의 이유를 끌어대면서

세례 요한의 요청이 가당치도 않은 이상론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내 자신의 앞날을 나 외에는 책임져 줄 사람이 없는, 살벌한 세상입니다.

경제적인 곤란을 당하고 있는 어느 교우께서 울상을 지으면서 하소연을 하십니다.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가족 조차도 내몰라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누구를 탓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회 구조, 경제 구조가 그렇게 냉정하게 자기 잇속만 챙기도록 몰아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오늘 먹고 입고 마실 것만 가지고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벌고 많이 남겨서 미래를 위해 비축해 놓아야 합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축으로만도 부족합니다. 각종의 보험을 들어 놓아야 안심입니다.

은퇴 후에 적어도 20년이상 살 것이므로 든든하게 노후 준비도 해 두어야 합니다.

적어도 집은 한 채 있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한 두 채 정도 더 마련해 두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야만 ‘황금색 은퇴’(golden retirement)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 남는 돈이 있다면 나누어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그 이전까지는 다른 사람을 돌아 볼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다시 오신다면, 이 사정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아, 시대가 많이 바뀌었군요. 제가 양보하지요”라고 말하면서 당신의 말씀을 수정하실까요?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을,

“너무 많은 옷을 사들이지 말고, 안 입는 옷은 구호 기관에 donation하시오”라고 고치시겠습니까?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을,

“능력껏 양식을 비축해 두되,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가끔 저장식품을 donation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라고 고치겠습니까? “불안한 미래를 위해 충분히 저축해 두되, 그래도 가끔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부스러기 돈이라도 donation 하시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살 당시에는

하루 끼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한 벌 옷만 있으면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도 오늘날 우리처럼 엄청난 양의 곡식을 저장해 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노후를 위해 많은 재산을 비축해 놓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살던 당시에도 사회의 비정함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미래가 불안하다는 점은 지금보다 그 당시가 더 심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 말씀이 ‘말도 안 되는 말’로 들리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말, 현실을 모르는 말, 너무도 세상 물정 모르는 말로 들린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나 당시 유대인들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 해도 여전히 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진리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대에 따라 그 진리를 따르는 것이 좀 더 용이하고

좀 더 어려운 차이는 있지만, 진리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할까요?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참, 고민스럽습니다. 도대체 우리보고 어쩌라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이 제게도 없습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이 질문을 두고 기도하며 고민하는 가운데 얻은 깨달음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세례 요한의 설교는 우리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는 우리에게 절대치의 이상향을 제시하심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형편에 대해 고민하게 만듭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 현장에서, 이미 관행이 되다 시피한 것조차도

거부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당황할 것입니다.

 

밥 한 끼라도, 옷 한 벌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없는 사람에게 주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고민, 여기에 뜻이 있다 싶습니다.

 

이 고민이 우리 마음에 살아 있으면, 그리고 그 고민을 기도에 담아 씨름하다 보면,

우리의 무한한 욕심을 절제할 수 있으며, 먹고 입고 자는 일에 대한 소비를

줄여가기 시작할 것이고, 노후 준비를 빌미로 한 없이 쌓아 두는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친 소비나 비축을 할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분들은

이 거룩한 고민을 통해 자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것입니다.

 

이 고민이 우리 마음 안에 살아있는 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없거나,

어려운 이웃을 살피며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자라가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유일한 대안일 것입니다.

 

(*중동 아프리카의 어느 선교사가,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법에 따라서

실제로 한 번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려서 먹는’ 법을 스스로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구약의 율법이라서 신약시대에, 더욱이 현대에 꼭 지킬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법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자기 스스로 1년인가 한 번 그대로 지켜보았대요.

 

그러고 나서 배운 것은 ‘음식을 가려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음식을, 마구 다 먹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가 ‘정결한 음식, 부정한 음식’을 구별해서 먹는 습관이 생겼다는 겁니다.

사실 오늘날 시중에 파는 모든 음식이 다 깨끗한 것은 아니잖아요.

 

과거에는 아무 고민 없이 다 먹었는데, 이제는 먹는 것도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먹는 것이 주님의 뜻일까?’ 하고요. 뭔가 건강한 고민을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은 귀찮습니다. 마음에 부담을 줍니다.

타락한 우리의 욕심은 이 고민을 떨쳐 버리고 싶어합니다.

 

이 고민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마음 놓고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마음껏 우리 자신을 위해 쌓아놓고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여유돈과 여벌의 옷과 남은 음식에 대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를 까맣게 망각하고 살게 됩니다.

 

온갖 이유를 주어 섬기며 오로지 긁어 모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불안한 미래를 위해 단단히 준비하려 하지만,

실은 그것이 그 사람의 미래를 더 위태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절대 거룩’(absolute holiness)의 높은 경지를 바라보며,

지금 나의 죄스러운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경제적으로 ‘절대 나눔’(absolute sharing)의 높은 경지를 바라보며,

지금 나의 손에 있는 물질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음식을 차리면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먹어도 되나?”라고 묻기를 귀찮아 하지 않습니다.

 

쇼핑을 하면서 입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얼마나 써야 하나?”라고 묻기를 성가시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절대 정직’(absolute integrity)이라는 높은 경지를 바라보며,

지금 나의 부정직함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직장에서 일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두고

고민하기를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세례 요한이 전한 말씀은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듣는 사람들을 고민에 빠지게 하는 설교가 무슨 복음입니까?

 

여러분 중에도 여기까지 설교를 들으시고 마음에 적잖이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위로나 받을까 하여 교회에 왔더니,

혹을 하나 더 얻고 가네’라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더, 이제 드리는 마지막 결론의 말씀에 경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그 밖에도, 많은 일로 권면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이 복음서를 쓴 누가는, 세례 요한이 전한 말씀이 ‘기쁜 소식’이었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어째서 그의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 눅3:15~17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자신은 회개의 표시로써 ‘물세례’를 주지만,

장차 오실 메시야는 ‘성령의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가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보다 더 큰 분이 오시며,

세례 요한의 세례보다 더 완전한 세례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거룩’에 이르기 위해, ‘절대 나눔’에 이르기 위해,

‘절대 정직’에 이르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과제입니다.

 

하지만 고민만으로는 그 이상향에 한 발짝도 다가가기 어렵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의 타락한 욕심을 치유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이상향을 향해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때로, 아씨시의 성자 프랜시스에게 일어났던 일처럼,

성령에 사로잡혀 한 순간에 그 이상을 이루기도 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령의 세례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민하되 그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맴도는 ‘고행의 수도승’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줄 능력자가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거룩, 절대 나눔, 절대 정직의 높은 이상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고민하되, 늘 성령 안에 살도록 힘쓰십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고민하되 기뻐할 이유가 있을 것이며,

우리의 고민은 더 높은 거룩성과 더 많은 나눔과 더 높은 정직성으로 인도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숨이 다할 때까지 그 고민은 늘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 머물러 사는 한,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고민할 것입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기뻐할”(427장) 것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갈”(513장)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 앞에 정직하고 용감하게 대면하십시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영적 고민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다.

가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외면하지 마십시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자만하지도 마십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삶으로써 보여 주신 그 절대치를 마음에 품고,

그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고민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구하십시다.

그리고 성령께서 능력 주시는만큼 누리며, 나누며 살아가십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불행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주님, 오늘도 어려운 말씀을 주십니다.

날이 선 말씀으로 저희를 고민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아십니다.

성령으로 저희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이 고민을 기꺼이 끌어 안게 하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저희를 치유하시어

주님의 뒤를 따라

좁은 길을 기뻐 뛰며 걸어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물질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