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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대속으로

LNCK 2024. 4. 12. 22:3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리빙

 

목숨을 대속으로          막10:45              고난주간 특새 ③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해서 죽으신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없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됩니다.

만약 내가 주님과 이웃을 위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저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셈입니다.  - 이 설교의 주제


막10: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멘 

"목숨을 대속으로"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우리의 입장에서 다양한 각도로 풀이를 하고 
또 그 의미를 우리가 되새기고, 
그 의미를 우리가 퇴색시키지 않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셨고, 어떻게 설명하셨는가요? 

그 부분이 오늘 이 본문 막10:45절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어요. 
한 단어가 주목이 되는데요. 
'대속물' 
'많은 사람의 대속물' 
'많은 사람을 대속하기 위해서 내가 죽는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성경에서 이 단어(대속물)는, 이곳 한 곳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막10:45절 말씀을, 많은 신학자들이 특별히 중시 하는 그런 본문이 됩니다. 

대속물은 영어 단어로는 랜섬 ransom 이라고 하는데요. 
이 단어는, 원래 이런 뜻입니다. 
노예가 있어요. 그 노예를 풀어주려면, 해방시키려면 
그 노예의 몸값에 해당되는 돈을, 대가(랜섬)를 지불하는 거예요. 

그리고 노예를 사서 풀어주는... 그런 의미를 '대속물, 랜섬'이란 단어가 담고 있습니다. 
'값을 지불하고 해방시키다!' 

▲우리에게 랜섬이 왜 필요한가요?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에게.. 랜섬, 대속물이 왜 필요한가요? 

에덴동산에서 온 인류를 향한 사망 선고가 내려졌어요. 
그래서 육체도 죽게 되고,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셔서 
육체의 생명은 살아있다 하지만, 그러나 성령이 떠나가 버린... 
영으로는 죽어 있는 상태로 살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죽음 이후에 세상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부터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으로 
또 다른 두 번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는, 이런 세상이 펼쳐지게 된 거예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망 선고로 인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 선고를 내리셨기 때문에, 
그 여파로, 그 결과로, 온 인류가 사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 거예요.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간 생활한 그것으로 상징 되는 것이죠.
'애굽의 노예 생활'이, 이 땅을 살고 있는 온 인류의 운명이고, 
또 우리가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걸 뚫고 지나가야 되는 광야의 길이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런 사단의 노예로부터 우리가 벗어나려면, 
하나님이 내리신 이 사망 선고로부터 우리가 무죄 선언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노예 상태로부터 풀리게 되는 것이에요. 순서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가 진 빚을 갚아야죠. 
온 인류가 여호와께 진 빚을 갚아야 돼요. 

그 진 빚이 뭡니까? 불순종이에요. 배반이에요. 

그건 아담이 불순종하고, 아담이 배반을 했지.. 언제 우리가 했으니까? 
그런데 우리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세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항상 순종하십니까, 우리는 불순종 안 합니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여파가, 우리 속에 고스란히 지금 살아 있잖아요. 

여호와 하나님께 아담과 하와가 배반했는데, 우리는 배관 안 했습니까? 
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또 신약에도 마찬가지고요. 
계속 반복돼서 우리에게 그 주지시켜 주는 바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뭔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항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목자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다 제 갈 길로 갔습니다. 
그것이 우리 공통의 고백이에요. 

말씀의 순종하지 않고, 다 양같이,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갈 길로 갔습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이미 박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 불순종과 배반의 대가를, 어떻게 우리가 치를 수 있는가요? 
그렇다면은 우리 스스로 목숨을 내놔야... 맞는 것이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불순종하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배반하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일들을 스스로 하면서도 
그런 줄 모르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것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이렇게 성경이 고발을 해주고 있어요.
이 불순종과 배반의 대가를 치러야.. 
그제서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신 그 사망 선고가 무죄로 선언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를, 우리가 어떻게 치릅니까? 
우리가 '이 목숨 거둬 가 주십시오. 제 목숨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런다고 그게 치러지는 그 정도가 아니죠. 

어쨌든 여호와 하나님께 진 빚을 갚아야 
우리가 사탄의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데,
인간은 그거를 갚을 능력이 없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내리신 사망 선고를, 
무죄로 뒤집을 뒤집어 엎을 능력도 없고요. 

또 더 나아가서 사탄의 노예 상태로부터 
우리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힘과 그런 능력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면 절망으로 끝납니까? 그게 아니죠. 
거기에서부터 예수님의 움직임(구원 사역)이 시작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늘 그런 표현을 쓰지만, 
캄캄한 밤에 섬광이 비치는 것처럼 
그 길이 우리에게 번뜩번뜩 하면서, 성경에서 그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세요. 

첫 번째 그 단서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보여주셨어요. 
불순종과 배반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야담과 하와를 위하여 
여호와께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은 동물의 가죽이잖아요? 동물의 스킨 인데요. 이게 어디서 납니까? 
누군가는 죽었으니까.. 어떤 동물이든지 죽었으니까.. 
그 동물의 가죽이 생긴 거 아니겠어요. 거기에 피 흘림이 있었던 거예요. 

어린 양을 잡아서, 그걸 가지고 가죽 옷을 만들어,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준 거예요. 
어린양이 뭔 죄가 있습니까? 뭔 잘못 했습니까? 그런데 대신 죽은 거예요. 

출애굽 할 때도, 어린 양을 죽였어요. 
유대인의 집집마다 각각 어린 양을 죽였는데요. 
그 어린 양들이 무슨 죄가 있냐고요? 

아무 죄도 없고 흠 없는 그런 어린 양들을, 
집집마다 한 마리씩 다 죽여서, 피를 흘려 가지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한 거예요. 대신 죽었어요. 

어린양이 대신 죽은 그 집의 장자는, 유월절이 시작되던 밤에 안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은 다 죽었어요. 

그 이후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양을 잡고, 소를 잡고, 비둘기를 잡는..
짐승이 피흘리고 대신 죽는 이런 역사가, 제사가 지속되었죠.
예수님 때까지 이어지게 된 거예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은 영단번의 제사로,
더 이상 소를 잡고, 양을 잡고, 비둘기를 잡고 하는 이런 제사가 이제 필요 없이, 
영 단번에, 예수님이 그 모든 대가를 다 치러 주신 거예요. 

'내가 그것을 위해서 왔노라' 그 말씀하시는 거예요. 막10:45
예수님의 목숨은, 피조 세계 전체하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죠. 
피조 세계 전체의 주인께서, 자기 피를 흘려 목숨을 내놓으셨는데,
이 몸값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그래서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는 그런 몸값이었죠.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셨어요.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우리 성도님들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누구를 위하여? 
에덴동산에서부터 죽임을 당한 그 수많은 어린 양들은.. 잘못한 거 없어요. 
누구를 대신해서 죽은 거예요.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어요. 누구를 위하여? 
예수님은 잘못하신 거 없으세요. 아무 잘못이 없으셔요. 그럼 누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저와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을 위하여, 
그렇게 고통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아 주신 거예요. 

'이것이 나를 위해서 그러셨구나..' 
하는 그 생각, 그리고 그 마음이 
우리에게서 이게 살아나야 되는 거예요. 회복되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 가슴을 찌르고, 
'정말 그 사랑과 그 희생이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 하는 
그 실감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돼요. 

'결국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
이 생각이 평생에, 우리 삶의 바탕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53장에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요. 
다른 여러가지 이유도 있지만,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에는,
이사야 1~52장까지 있고, 54~66장까지 다 있는데요. 
그 성경에는 이사야 53장만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교할 때는
'당신들은 왜 이사야 53장을 안 읽습니까?' 그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 여러분이 보는 성경에는, 이사야 53장이 없습니까?' 
그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그러면 다 뜨끔하죠. 일부러 뺐어요. 
'2000년 전에 자기들이 기다렸던 그 메시아는, 이런 (십자가에 죽는) 메시아일 수가 없다'
그런 세속적인 가치와 판단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사야 53장을 빼버렸어요. 

성경의 핵심 중에 핵심 내용이, 이사야 53:4~6절까지의 말씀이에요. 
긴 본문이지만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우리'라고 하는 말은,
이사야 시대의 '우리들' 뿐만 아니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인 '우리들' 뿐만 아니고, 
오늘날의 우리까지도 다 포함되는 것이다.. 라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묵상해 보겠습니다,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에, 이런 표현도 아마 부족할 것 같아요. 
'내 생명의 은인이시다' 

정말로 내 생명의 은인이시라면,
나를 위해서 희생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이분을 위해서 
'내가 평생 이분을 위하여 내가 살아야되겠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마음을 먹는게 지극히 정상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 생명의 은인이신데... 
그게 정말 내 마음에 느껴지신다면 
'그래 이제부터는 내가, 내 생명의 은인이신 이분을 위해서 살아 드려야지...

오늘 이 마가복음 10:45절을 말씀하신 그 맥락이 어떤 맥락인가요? 
예루살렘으로 맨 마지막으로 이제 올라가시는 그 길에서, 
제자들이 서로 다투었어요. '네가 크냐, 내가 크냐?'
'예수님이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그 날이 오면, 누가 오른편에 앉고, 누가 왼편에 앉을 것인가?'
이렇게 서로 그 자리 다툼을 했어요.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눅22: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그러시면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기까지! 

▲세상이 이제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올수록, 특징으로 말씀하신게 뭡니까? 
사람들이 각자 자기만 사랑하고... 담후3:2

'많은 사람'(막10:45)은 '개인'과 반대말이에요.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세요.

이 땅에 예수님의 희생과 죽으심을 
'내 생명의 은인이다.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이것이 정말 절실하게 깨달아지신 분이라면, 

앞으로의 우리의 삶은, 
나를 위한 삶을 앞세우기 전에, 
'내 주위에 있는 이웃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어떤 헌신을 하고, 어떤 희생을 하고, 어떤 수고를 해야 할까?' 
그 마음이 우리 속에서 올라와 주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정말 주님의 희생에 대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 정말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진정 감사하다고 여겨진다면 
우리는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 '우리도 주변에 있는 이웃들을 어떻게 하면 내가 섬길까?' 

하며 살게 되죠.

 

'섬긴다'는 것은 serve 하는 거예요. 
이 단어는,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이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뭔가를 하는, 
이런 사람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거죠. 

이런 변화가 구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의 자녀들의 가슴에, 또 우리 삶의 
그런 구체적인 눈에 뜨이는 그런 변화로 이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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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를 아시나요?
 (Maximiliano Kolbe 1894~1941 폴란드인)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서슬퍼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출한 1명의 수감자 때문에, 10명이 무작위 차출되어
아사감방(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감방)에 끌려가던 중

콜베 신부는,
10명의 수인 중에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한 명의 수인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었던 분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콜베 성인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되셨습니다. 요15:13

그렇다면, 콜베 성인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과 은총의 주인공인 그의 이름은 ‘가죠프니체크’였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게 되게 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의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엡1:7)

어떤 고귀한 사람이 나를 위하여 대신 죽음을 택하였다면,
우리는 남은 생애를, 그분 때문에 거저 얻어진 삶을 얼마나 더 잘 살아야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음을 택하셨는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더 잘 살아야 하겠습니까.

실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앞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지만,
미력하나마 우리의 전부인 사랑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분께서, 전부를 다하여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죄를 대속한 아버지 (감동글)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야기입니다.

공군 대위로 전역하고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여 
차장으로 고속 승진했습니다. 

당시 대졸 초임이 2만 원일 때 
자신은 15만 원을 받았습니다. 

좋은 직장을 퇴사하고 
아들 둘, 딸 셋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왔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인 
큰 아들이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잘 키우겠다고 이민 왔는데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미국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아들은 반격을 가했고, 
이 때문에 교장에게 여러 차례 
불려가 체벌을 받았습니다. 

불만이 쌓인 아들은 
어느 휴무일 이틀 동안 
다른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학교에 들어가 건물 이곳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지역신문 1 면에 났고 
온 가족은 좁은 응접실 
구석에 모여 앉아 통곡했습니다.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했다.”는 
비난은 기본이었고, 등하교 때 
“그 집을 피해 가라”는 한인들도 있었고, 

“같은 교육구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낼 수 없다.”며 
전학을 시키는 부모도 있었습니다.

나이 젊은 어떤 한인은 면전에서 
“당신 자식 교도소에 갔다며?” 
하고 빈정거리며 말했습니다. 

겨우겨우 섬기던 교회에서 조차도 
성도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 
출석을 끊었습니다.

교장은 “세상에 이렇게 학교 건물을 
때려 부순 사건은 처음입니다. 

카운티(County: 자치주) 내의 
어떤 학교에도 전학이 불가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들 죄가 바로 내 죄' 
라 생각하고 속죄를 위해 
매주 주말에 온 가족을 동원하여 
학교 청소를 하겠다고 했고, 
교장은 '별난 아버지'라는 
표정으로 허락했습니다. 

이 별난 행동은 나중에 다시 한 번 
플로리다 주 주류 사회를, 
아니 전 미국을 흔들었습니다.

교도소에 간 중2 아들의 속죄를 위해 
부부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와 함께 
주말마다 학교에 나와 청소하는 장면을, 
운동장을 청소하는 광경을 

AP통신 기자가 
“가족의 명예와 아들을 위해 
부모는 모른 채 하지 않았다.”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기사에는 “내 아들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내 아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변상은 물론 어떤 일이든 하겠다.” 
라는 그의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美 전역의 신문들이 
AP통신 기사를 받아쓰면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며칠 만에 수백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변호사비로 쓰라며 
5불, 10불 짜리 수표와 
현찰을 동봉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신문들은 아버지의 
'아들 죄가 바로 내 죄' 
라는 고백을 들어 

“미국인 부모들도 본받아야 한다.” 라거나 

“미국 교육계도 유교적 가족관계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교육 철학을 배워야 한다.” 
라는 논지의 기사와 논평을 내보냈습니다.

며칠 후에 반가운 소식이 가족에게 전달됐습니다. 
법정에서 아들을 방면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교육청에서는 다니던 학교로는 되돌아 갈 수 없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에는 갈 수 있다는 서한도 보내왔습니다.

그 후 말썽꾼 아들은 변하여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교(UCF) 학사와 
플로리다 텍(FIT)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 우주항공국(NASA) 산하 
방산업체에 근무하며 고위 
우주선 탑재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 
수십 명이 달라붙어 점검하는데 
그 가운데 최고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오는 'VVIP
(Very Very Important Person)' 들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유일한 한국계라고 합니다.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 이민 이야기'라는 
책을 쓴 송석춘 씨 이야기입니다.

큰아들 송시영 씨가 
사고를 쳤을 때만 해도 
“아이고 저놈이 자라서 뭐가 될까?” 
하고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시도 때도 없이 함께 가 준다고 합니다.

선트러스트 은행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큰딸도 명절 때마다 
제법 큰 용돈을 보내주고 있답니다.

한 아버지의 대속(代贖)으로 
사고뭉치 아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자녀들 모두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 
우뚝 일어선 아름다운 가정사 입니다.

세상은 누군가를 위해 
대속(代贖)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대속(代贖) 할 수 있습니다. 
내 몸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