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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당하다 요13:1-11, 빌2:5-11 2006.08.20.
꽤 지난 이야기입니다만, 한국의 어느 국회의원이 쌀 개방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던 중에
던진 한 마디가 명문장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명문장은 이렇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들으면 알고, 똑똑한 사람은 보면 알지만, 미련한 사람은 당해야만 안다."
쌀 개방을 통해 국민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아야만, 그것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알겠다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모두 미련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공감이 가는 명문장입니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당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니, 아무리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당해 보아야만 그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한자로 ‘체득’(體得)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몸으로 깨달아 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몸으로 깨닫는 것입니까? 당해 보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은 모두 당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거나,
당해 보아야만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하기 전에 다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실수도 없고, 실패도 없이, 탄탄대로를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탄탄대로를 걷는 것은 고통이 적은 만큼 재미도 적습니다.
재미로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만, 알지 못해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며,
그 교훈을 잘 소화하면 인생은 한 단계 도약하게 됩니다.
사랑이 특히 그렇습니다. 사랑은 당해보지 않고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사랑 받아보지 않고는’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 당해보지 않고는’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물건이 아니므로, 줄 수 있는 것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고, 따라서 ‘받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겁니다. 체득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자신감을 보입니다.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만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 자신감은 착각일 뿐입니다.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사랑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실은 자신의 욕심임을 외면하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사랑의 자만심’은
인간 관계가 점차 넓어지고 복잡하게 되면서 꺾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남편이니 남편 입장에서만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욕망과 고집과 이기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내가 그 한계를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어느새 증발되어 버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내가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고 감정을 흔들지 않는 한, 자신은 사랑을 잘 하고 있으며,
때로 ‘나 같은 남편이 있으면 나오라고 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자식들을 생각해서 혹은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어서 참고 비위를 맞춰주고 있는 아내에게
자신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의 폭군인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착각 속에서 삽니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도 그들에 대한 기대와 욕심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아이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져 버립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아이가 한계를 넘어갈 때 더 필요한 것이건만,
종종 우리 부모들은 그 한계를 넘어설 때, 사랑을 철회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아이가 잘 할 때 그 대가로 줄만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고분고분하여 부모가 설정해 놓은 기준을 넘지 않으면,
그 부모는 제법 사랑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기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부모의 눈치를 살피는 자식의 마음에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폭력으로 느껴지고, 한겨울 밤에 눈이 쌓이듯 분노가 마음에 쌓여갑니다.
▲‘사랑의 자만심’은 사회 생활 속에서 더 무참하게 깨집니다.
어릴 때는 가까이 하기 싫은 사람들은 피하고,
좋아 보이는 사람들을 찾아 친구 삼아 지냅니다.
그 친구들에게 잘 해 주고 그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우리는 사랑에 자신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원수와 함께 춤을 추어야 할 때가 옵니다.
끊임없이 심사를 자극하는 동료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을 험담하고 다니는 사람들과 한솥 밥을 먹어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변덕스러운 기분대로 수시로 괴롭히는 상사 밑에서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준에 미달하는 부하 직원을 견뎌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의 한계를 직면하게 됩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과정을 거쳐 가면서 자신의 사랑의 한계에 절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수없이 당하고 나서야,
자신이 사랑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내 기분이 좋을 때에만 너그러워지는 것은 '사랑'이라고 불려질 자격이 없습니다.
하물며, 그런 행동을 두고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의 신성 모독에 가까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기분 좋으면 너그럽고 기분 나쁘면 냉정해지는
그런 속 좁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사랑에 무능하다!"고 인정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에 무능한 상태로 그대로 머물러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랑 없이 사는 것은 진실로 사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삶의 참된 원동력이고, 사랑만이 삶의 참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을 알지 못하고 내 기분대로, 내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이 한 번의 고귀한 인생을 허비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을 찾습니다. 제게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제가 사랑에 무능력한 사람임을 알기 때문에,
제가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괴로움만을 더해 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제게 없는, 진실한 사랑을 찾습니다.
그 희망을 저는 제게서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그 사랑을 전 생애로써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저는 그 희망을 봅니다.
◑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워낙 의미심장한 이야기이므로 다른 각도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발 씻김을 당하는 제자들의 심정을
한 번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심정을 생각하여 이 사건을 이름 짓자면,
‘제자들, 사랑 당하다!’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제자들은 엉겁결에 예수님으로부터 발 씻김을 당했습니다.
베드로만이 잠시 주저하고 거부했을뿐,
결국은 열 두 제자 모두가 몇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발 씻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느꼈을 그 당혹감을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 당혹감은, 당시에 제자들이 스승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이 얼마나 모욕스러운 일인지를 모르고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옛날에 우리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 고 배웠습니다.
그만큼 스승은 높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 스승이, 노예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자신들에게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상상해 봅니다.
이 때 제자들은, 경황이 없어 발을 씻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내가 주님의 발을 씻어 드릴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그럴 용기는 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동료들의 발을 씻어 줄까?’라고 생각했던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아니, 이 집에는 노예도 없나? 발 씻지 않고 식사를 하려니,
영 개운치 않네?’라고 생각하며 두리번 거린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들, 먼지와 땀으로 범벅되어 가렵고 갑갑한 발가락을 마주 비벼가면서
불편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일어나 대야를 가져다가 물을 붓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 양심이 문들어지지 않고야, 어찌 당혹감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말 그대로, ‘당했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엉겁결에 그들은 예수님에게 발 씻김을 당했습니다.
발 씻김을 당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에 당했습니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놀라운 사랑에, 그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필시 ‘선생님이 왜 이러시나!’ 생각하면서
구석에서 눈물짓는 제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그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이후로, 그들은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이 장면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감동적이었으며, 압도적이었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사랑에 당하고 나서야 사랑이 뭔지 깨닫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 동안 사랑이라고 이름 지었던 것들이 사랑이 아님을 깨달았고,
사랑에 자신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자만심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기분 좋을 때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욕망과 기분과 기대를 내려놓고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라면, 자신들의 의지와 감정으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발을 씻어 주시던 예수님의
그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은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것 같았을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의 발을 씻은 사건은 예수님의 일생 중에 돌출되어 나온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 읽은 요한복음 13:1~11절의 본문과
빌립보서 2:5~11절까지 본문은 흥미롭게도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 사도는 당시 초대 교인들이 지어 부르던 찬송가를 인용합니다.
이 찬송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으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 찬송가는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6절)고 말합니다.
여기에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번역은 아주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오히려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개역 성경의 번역이 좋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인 존재이셨으나,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을 탈취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는 도둑질 혹은 강도짓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라가는 것을 꿈꾸고 도둑질해서라도
그것을 이뤄 보려했던 많은 영웅들과 예수님은 달랐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그 찬송가는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7-8절)라고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리로 낮아지되 가장 비천한 사람의 자리로 낮아지는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왜 낮아졌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한계까지 섬겼습니까?
죽기까지 섬겼습니다. 그분의 섬김에는 한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분에게는 '사랑의 한계'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것은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신"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은 "자기를 낮추신" 행동입니다.
그렇게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있어 한계가 없었습니다.
내 감정이 상하기 전까지만 섬기겠다는 우리, 내 권리가 손상되지 않을 정도까지만 섬기겠다는 우리,
내 이익이 손상되지 않을 때까지만 섬기겠다는 우리,
내 체면에 손상되지 않을 때까지만 섬기겠다는 우리,
내 재산에 손실이 생기기 전까지만 섬기겠다는 우리,
내 신상에 피해가 생기기 전까지만 섬기겠다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 모든 한계를 초월하여 목숨을 다 내놓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것이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빌2장에 대한 묵상은 우리의 생각을 또 다른 매우 의미 심장한 본문으로 이끌어갑니다.
▲창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입니다.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두 사람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유가 창3:5절에 나오는데,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어서’ 였습니다.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훔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몰래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결과, 원래 창조된 그 인간의 상태보다도 더 낮은 자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 아담과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 아담은 낮아지기는 커녕 한없이 높아지기를 힘썼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높아져서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었습니다.
그 욕망에는 한계가 없어서, 결국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를 훔쳐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타락한 본성은 첫 인간 아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본성이 되었습니다.
높아지고, 커지고, 강해지고, 부해지고, 유명해지려는 욕구가 인간 존재 안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더 많이 섬김을 받으려 하고, 더 많이 부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낮아지고, 작아지고, 약해지고, 가난해지고, 잊혀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일관되게 걸어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장면 즉 제자들의 발을 씻긴 사건은
그분의 삶의 철학, 삶의 원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 아담의, 혹은 ‘모든’ 아담의 삶의 방향을 뒤집어 살아가신 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을 훔치거나 탈취할 것을 꿈꾸다가
인간 이하의 상태로 전락했는데,
이제 둘째 아담은 반대로 자신을 완전히 비워 가장 낮은 모습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립보서의 찬송가는 계속하여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9-11절)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당하여’ 쓰러질(knocked out) 때까지,
그분을 찾고 사모하고 배우고 따르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마음을 압도할 때까지 우리 자신을 그분께 열고 겸손히 기다리십시다.
미국의 저명한 저술가였던 프레데릭 뷰크너는 Frederick Buechner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모든 능력 가운데 사랑은 가장 강력하면서 동시에 가장 무력하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최후, 최고의 난공불락의 요새를 정복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강력하다. 그러나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므로
사랑은 가장 무력하기도 하다.」 ('통쾌한 희망사전' Wishful Thinking).
사랑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우리가 그 사랑을 원치 않는 한 혹은 우리 안에 있는
거짓 사랑을 진짜 사랑으로 여기고 만족하는 한, 우리는 사랑과 상관없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과 상관이 없으면, 그것은 껍데기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해도, 진실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참된 사랑이 없는 인생은 오뉴월에 나무줄기에 붙어있는 매미의 껍질같은 것입니다.
반면, 그 사랑에 당하여 참된 사랑을 경험하면,
우리는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생의 엔진을 소유한 셈이며,
그 어떤 질병도 치료할 수 있는 영약을 소유한 셈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비로소 우리는 ‘사랑의 흉내’라도 낼 수 있게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에 당하도록, 사랑에 당할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장 해제하고 서십시다.
그분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고 그분의 처분을 기다리십시다.
그것 아니고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의 의미 rfcdrfcd.tistory.com/1598159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제의 설교 (추천)
♥2010년 새해 저의 경구警句를
<이웃의 잘못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기!> 로 삼았습니다. (이하 펀 글)
올해는 이웃의 잘못을 보기보다는,
그의 고통을 보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이웃의 고통을 보는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보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보면.. 나도 같이 고통을 느끼며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강하게 압박을 합니다.
그렇게 새해에는 주님의 닮은 모습을
작년보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기를 소원해 봅니다.
▲과거에 청년 시절,
성탄 3개월 전부터, 성탄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자신이 뽑은 종이에 적힌 한 사람의 수호천사가 되어
그를 마음에 담고 기도하며 말없이 도와주다가
성탄 때 “내가 바로 너의 수호천사였다.”고 고백하며
그동안의 기도와 작은 선물을 나누는 게임이 있었다.
그래도 더 정이 가는 동료가 있었기에, 그의 수호천사가 되고 싶었지만
제가 뽑은 종이 위에 적힌 이름은 다른 사람의 이름이었다.
조금 실망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기도를 하며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 지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그것은 ‘그를 전보다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3개월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관심을 갖고 기도하면서 알게 된 것은
어찌 보면 괴팍하게 보이기도 하는 상대의 행동에서 조차도
그 안에는 ‘그 사람의 사랑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조금은 보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무섭고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무관심”이다.
매 예배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우리는 ‘자신’ 혹은 ‘자신의 관심’만을 쳐다보고 있고,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수호천사처럼 행동해야겠다!
오 주님, 주님 앞에서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저희는 사랑을 모릅니다.
저희는 사랑에 무력합니다.
오, 주님
주님의 사랑에 당하기를 원합니다.
다시는 잊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을만큼
주님의 사랑에 압도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그렇게 되도록
저희를 무장 해제시키시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소서.
주님의 사랑에 당할 때까지
주님을 찾는 일에 지치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주님의 사랑에 먼저 당한 가슴이 되어
그 사랑 또한 전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