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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이끌리어

LNCK 2024. 4. 15. 19:3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사랑

사랑에 이끌리어 | 롬 5:8  목고난주간특새 | 24.3.28 (youtube.com)

 

◈사랑에 이끌리어         롬5:24      ▣고난주간 특새 모음

우리가 고난 주간에 특별히 해야 될 것은 '묵상과 기도'입니다.  
많이 묵상하고, 또 말씀을 곰곰히 되새기고, 또 되새긴 말씀을 붙들고 기도로 나아가면 
1년 동안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데, 큰 중심이 잡히는 그런 복된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자 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가요? 그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한 번 더 물어야 돼요. 
왜? 왜 인간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셨는가요? 

그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롬5:8절 말씀이에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해 주셨느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또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어떤가를 보여주시고, 입증하셨고, 확정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가를, 우리가 일평생 알아가는 거죠. 

알아갈수록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십자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봐야 되고 
그 십자가가 있는 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오락가락 하지 않아요. 십자가를 보면 알아요. 
죄인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붙들어야 되는 것은 
우리의 죄와, 우리의 실수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다는 것입니다. 더 강합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긴다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랑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 그 사랑이 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초에서, 우리의 신앙이 그 위에 서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계속 바라봐야 됩니다.

▲여러분, 사랑은 머리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경험해 보지 않고 이해하려고 하면 어려워요

사랑을 얘기할 때 '사랑이 참 멋지다. 아름답다. 따뜻하다. 스윗하다.' 
말로 아무리 들어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알 수가 없어요. 

'사랑이 스윗하다고? 그게 뭐지?' 경험해 봐야 됩니다. 말만으로는 알 수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근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됐죠? 

그래서 요일3:16절을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이로써 사랑을 알았다.'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서 사랑을 배운 사람은 없어요. 
'나 혼자 어느 날 사랑을 배웠다' 그런 건 없어요. 사랑을 보고 배우는 거잖아요.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을 알게 되는 거지,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사랑을 알아요?

우리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배웠어요. 
이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은 세상에 널려 있죠. 

근데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을 설명하신 분이 아닙니다. 
사랑의 교리를 가르치신 분이 아니에요.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랑을 알게 된 거고, 
그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됐다는 거죠. 

▲자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 가능한가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하늘의 하나님이시고, 지존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인간인데 피조물인데... 어떻게 사랑이 가능한가요?

하늘과 땅의 간격이 너무 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어요. 
하나님이 시공간 안으로 들어오셨어요.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스스로 내려오신 겁니다. 
그게 인카네이션, 성육신 입니다. 

여러분 이 성육신 안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있습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가 없었다면, 
속죄의 죽음, 육체의 부활은 불가능하죠. 

육신의 몸으로 친히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셨어요. 그분은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셨어요. 어떻게요? 

우리가 두려움 없이 그분에게 다가가도록, 동정녀의 몸에서 아기로 나셨습니다.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분으로 오셨다는 거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분으로 다가오신 거죠.

인카네이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 하나님을 우리가 묵상하면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게 다가오시기 위해서 얼마나 맹렬한 사랑을 행하셨는지 알게 돼요.

여러분, 사랑은 거리가 좁혀져야 돼요. 멀리 있어서는 사랑이 안 돼요. 
공간이 좁아져야 돼요. 

어떤 연인 둘이 넓은 운동장에서, 멀찍이 덜어져서 '서로 사랑해' 말만 하고 
안 만나는게... 그런 사랑이 가능해요? 좁혀져야 돼요. 

그래서 연인들이 좁은 카페 구석에서 속닥속닥할 때는 얼마나 가까워요. 
그래서 막 붙어 있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셨어요. 
하나님으로만 계신다면 우리는 교제하기 어렵죠. 

육체를 입으신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작아질대로 작아지신 거예요.
우리 곁에 오시기 위하여, 당신이 축소될 대로 축소되신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린 아기를 안아 주려고 하면, 어린아이들하고 허깅하려고 하면 
내가 무릎을 꿇든지, 자세를 낮춰야 사랑할 수 있잖아요. 
아이 수준으로 내가 내려가야 되잖아요. 

가끔 대통령이나 유명한 사람이 쪽방촌을 찾으면 뉴스거리가 돼요. 
'우와 대통령이 저기 쪽방촌에 찾아갔다' 
온 카메라와 기자들이 막 몰려들어서 보도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그것과 게임이 안 됩니다. 

▲여러분, 주님이 육신의 몸을 입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한계를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의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발견한 것은 
그분은 주리셨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시고, 때로는 지쳐서 배에서 고물을 베고 주무시고 
십자가상에서는 목이 마르다고 절규하시고...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이셨어요. 

그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전능자이십니다. 
성난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그분이 팔을 내밀면 세상 끝에도 다 닿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이라는 한계에 갇히신 그 답답함을 감수하셨습니다. 
영광으로 가득한 창조주가 천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몸소 겪으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아니 우리를 너무도 이해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시죠. 

히4: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러분, 사랑하는 자녀가 아프면, 엄마가 곁에서 잠을 자지 못해요.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어요. 우리의 삶의 모든 애환을 다 겪으셨습니다.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가 너를 안다. 너의 아픔을 안다. 너의 외로움을 안다. 너의 억울함을 안다'
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피상적인 얘기가 아니에요. 
왜? 주님이 당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연한 순 같이 연약한 분이셨어요. 육체적으로 연약한 분이셨어요. 
배신이 무엇인지도 아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애환과, 
배고픔도 아시고, 절망도 아시고, 죄의 유혹도 받아보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산다는게 얼마나 힘든가... 주님이 다 아시는 분이에요. 
주님은 목수 일을 일찍부터 하셨어요. 못도 많이 박아 보셨어요. 
먹고 사는 생계가 무엇인지도 아시는 분이에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셔야 하는지를 알고 계시는 분이에요. 
여러분, 사랑이란 '나와 같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육신입니다. 

그래서 이 성육신, 인카네이션의 교리를 모르면 사랑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삼위일체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를 이해를 못하면, 
그 십자가상의 하나님의 고통도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육체로 사신 예수는 죄의 실체를 보셨습니다. 
죄 아래에 살아가는 인간의 적나라함을 그는 보셨습니다.

이 괴로워하는 인간의 심연의 죄가, 인간을 관통하고 있는 걸 보았어요. 
온 인류의 고통은, 죄로 인한 고통입니다. 
그 고통으로 절규하는 인간...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 죄의 실체를 주님이 보시고,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도 온 몸으로 느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저주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육체의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요. 
가장 인류의 처참한 사형틀이었죠.

당시에 누가 십자가 얘기를 꺼내면, 식탁에서는 십자가 얘기를 못하게 했어요. 
로마의 황제가 식사를 할 때, 갑자기 누군가 십자가 얘기를 꺼냈다면, 
그런 당장 끌려가서 처벌을 받았습니다. 식탁에서 끔찍한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죠. 

십자가는 한마디로 사람들이 입에 오르기조차도 싫어하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고통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기도가, 그렇게 절규에 찬 기도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지옥의 경험임을 알고 계셨어요. 
창세로부터 종말까지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십자가에 쏟아 부어질 때, 그 무게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죄인이 아니신데 죄인처럼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왜요? 자신이 인류의 그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쓰시기로 한 거죠. 
무죄를 항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단한 능력도 전혀 쓰지 않으셨습니다. 입을 깨무신 거죠. 

6시간 가까이 피를 흘리신 상태에서 '목마르다' 절규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해 이렇게 하셨습니까? 
문제는, 사랑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나를 위해서! 
어떻게 보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어 보이는 나,
아니 하루도 아닌, 1시간도 죄짓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거예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하여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건이 없는/ 무한한/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아가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700여 년 전에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한 예언이, 이사야 예언이 
십자가의 사랑을 생생하게 전하는 거죠.

이사야 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왜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셔야 했는가요?
왜 아들이 그 고통 당하시는 가운데도, 아들을 그 고통에서 꺼집어내 주지 않으셨는가요? 
여러분 본래 '하나님'과 '고통'은 서로 어울리는 조합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고통이 어떻게 어울립니까? 

근데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왜요? 
나를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압도를 당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만 하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을 내가 받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죠. 무지해서 받지 못할 뿐이에요. 

여러분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최고의 표현이 십자가예요.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시죠. 사랑의 본질이시죠. 
하나님의 모든 성품의 정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핵심적 속성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가지신 여러 요소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사랑을 빼면, 하나님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교제하시고,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사랑으로 그를 구원해 내시고, 
끊어진 교제를 다시 회복시키시고, 다시 사랑을 나누고자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사도요한은 특별히 사랑의 사도를 알려져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많이 사랑을 받은 사도였어요.

요한복음에서 자기 자신을 일컬어서 '주님의 사랑 받는 제자'라고 했어요.
스스로 자신을 내세울 수 없으니, 겸손하게 표현한 거죠.

요일4: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이 십자가의 사랑' 
사랑은 여기 있다는 거죠. 십자가가 사랑의 절정을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십자가에 있어요. 
사랑의 정수가 여기 십자가에 있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참 사랑을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뭐예요? 
방황하는 이유가 뭘까요? 사랑이 여기 있기 때문이에요. 

이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고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빈 가슴을 채울 수가 없다는 거죠.
세상에서 사람들은 신기루처럼 사랑을 찾고 다닙니다. 
모두가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사람도 사랑을 찾고 있고,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사랑을 찾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권력으로, 돈으로, 세상의 것들로 나를 채우려고 하는데 
안 채워지는 거예요. 신기루같이 도망가는 거죠.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에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거죠.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에 우리는 놀랄 뿐이에요.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 사랑!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느냐는 거죠. 

근데 여러분,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였는가요?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였는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로마서 5장에 반복되는 표현이잖아요.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아 이상하다. 내가 만약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나는 이 세상을 벌써 박살 내버렸을 텐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다니...' 

여러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은지 꽤 오래 되었어도 
여전히 미스테리에요. 
왜 나를 사랑하시는지, 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지... 
그래서 어메이징 그레이스 라고 하죠. 놀라운 은혜라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집요하게 나를 파고들어요. 내가 거부할 수 없도록! 
그래서 그 사랑에 이끌려 그 앞에 무릎 꿇게 만드셨던 그 하나님은 
지금 내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죠. 

▲내가 사랑을 하면 뭔가 이유가 있잖아요. 이유가 있고, 조건이 있어요. 
세상에 이유 없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경우는 없어요.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는데,  되게 사랑하는 거는 이상한 거예요. 
무엇인가 주고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늘 경험하는 일상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으려면, 나도 무엇인가를 주워야 돼요. 

세상에서 누군가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노력을 합니까. 
공을 들이잖아요. 조건이 있고 이유를 충족시켜야 돼요. 약간이라도 삐끗하면 끝나는 거죠. 
그래서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근데 하나님은 전혀 달라요. 세상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약점과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의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제거할 수 없으니까 
그 죄의 짐까지 다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한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값싼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에요! 

여러분 왜 세상에서 사랑이 잘 깨어집니까? 
죄가 끼어들면 깨집니다.

상대방의 치명적인 죄가 드러나면, 사랑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죄를 지은 인간을, 우리 인간은 그를 끌어안고 사랑하기는 어려워요. 

상대편의 죄가 드러나면, 그의 뻔뻔스런 죄를 내가 발견했다면 
어떻게 그를 계속 사랑할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하나님 편에서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죠.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드리셨어요. 자신의 몸을 바쳐서 우리를 사랑하셨죠. 
이런 사랑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연약해지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이것은 감상적인 사랑과 달라요. 그냥 가벼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한계를 넘고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신 사랑입니다.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어요. 

 

◑적용

여러분,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은 뭐냐? 그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쳐요. 

여러분 힘들고 어려우면요... 딴 거 할거 안 하나도 없어요. 
사람 찾아다닐 것도 없고, 뭐 누구를 만나 어찌할 것도 없고... 
십자가 앞에 가보세요. 틀림없어요.   

그 십자가를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이 봇물처럼 터져서 
강둑이 터진 것처럼 흘러 넘쳐요. 
너무도 가까이 다가오신 그 분과 사랑에 빠져야 돼요. 

우리의 일상에서 그 사랑을 경험해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껴야 돼요. 

여러분이 피조의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주위 환경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제가 자주 그러잖아요. 
과일을 먹을 때도 '어쩜 이렇게 하나님이 모양을 내시고, 무늬도 넣으시고 
향기도 넣으시고, 맛도 넣으시고, 사각사각하게 하시고... 

꽃을 보아도, 여러분 그 꽃들이 그냥 핀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핀 거예요. 
동물들이 살아가고, 새들이 살아가는데.. 그냥 자라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짐승들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오늘도 우리가 먹고 사는게,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예요. 모든게! 

그래서 저는 생선 한 마리를 먹을 때도 너무 감동해요. 어머머 어쩜!
모든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게, 이 위치에 있는 게..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으시려고, 
그동안 하나님의 사랑의 수고와 열심이 얼마나 큰지.. 여러분은 아세요?

우리 아이들은 그렇죠. 어릴 때는 내가 막 스스로 큰 것 같고..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된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요. 부모의 은혜를 그제야 깨닫죠.

여러분 인간에게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있습니다.
그 갈증은 무엇으로 채울 수가 없죠.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아요. 왜 채워지지 않아요? 너무 큰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이죠.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에게는, 어떤 장난감도 해결이 안 돼요. 
뭐 장난감 갖다 주면 잠깐이에요. 다시 울어요. 

또 다른 장난감 갖다줘도 또 울어요.
엄마가 와야 돼요. 

뭐 바닷가에 큰 저택을 지어놓고, 궁궐 같은 집에 살아도 허전해요. 공허해요. 안 채워져요. 
그래서 영국의 다이애나 비가 비운의 죽음을 겪었잖아요. 
젊은 날에 그 아름답고, 모든 걸 다 가지고 있고, 막 그냥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환호하고... 

근데 사랑을 못 받았어요. 그 왕실에서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느 잡지와 인터뷰를 할 때 
'세상에서의 최대의 질병은 사랑받지 못하는 병이다' 라고 말했죠. 

그건 큰 병이죠. 온 인류가 시름시름 앓는 병이에요. 언제 해결돼요? 
진짜 사랑을 만날 때! 

진짜 사랑이 어디에 있어요? 세상에는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이세요.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이처럼 너를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계시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작아지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무력해지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견뎌내셨던 주님! 

여러분,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는 겁니다.

그래서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순종의 제사를 드리게 되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자신을 내어 주신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인 우리는, 
기꺼이 우리는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사랑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나눠요. 
하나님과의 사랑은 일대일의 사랑이에요.

2000년 전의 그 사건이, 오늘날 나의 사건으로 될 때 
'나와 너의 사랑, 일대일의 사랑'이 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끊임없이 하나님과 일대일로, 연인을 만나듯이 읽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사랑하는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생각하면서 읽는 거죠.

기도를 해도 마찬가지죠. 기도는 독백이 아니에요. 
묵상이 나홀로의 사색으로만 끝나면 안 되는 거죠. 
기도도 대화잖아요. 감정이 오고 가야 돼요.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매 순간에 느끼면서, 하나님과 교감이 일어나고, 
그분의 사랑에 공감하고, 느끼고, 함께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다가오신 그 사랑은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일에 지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멈춰 서 보세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십자가가 있는 한,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이 없어요.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측정하려고 합니다. 

아니에요. 여러분, 내 삶이 때로는 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때로는 실패가 오고, 좌절이 오고, 질병이 찾아오고,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식은게 아니에요.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정해 주셨어요. 

그 사랑이 변함이 없다고요.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요. 
내 삶이 지금 힘들다고 해서, 그 사랑이 식은 게 아니에요. 
그 사랑은 너무도 뜨겁게..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진짜 만나면요. 한 마디만 나와요. Its enough! 그것으로 충분해요!

여러분,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일생을 살아가게 만드는 에너지에요.

여러분, 사랑이 뭐예요?
그 사랑을 통하여 우리에게 삶에 에너지가 생기는 거예요.  
Energizer 가 되는 거예요.
그 사랑이 활력을 일으키는 거에요. 그 사랑이 생기를 돋게 하는 거예요. 

그 사랑이 흘러 넘치니까.. 그냥 고난도 이기는 거예요.
바울이 그 사랑으로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 사랑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사랑을 나만 끌어안고 있기에는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 사랑이 자꾸 속에서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을 받은만큼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일4:12절을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어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리라'

이건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재현될 때, 
그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표현되어지는 거죠.  

여러분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할 수밖에 없어요.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 사랑이 표현될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거죠. 사랑이 완성된다는 거죠. 

여러분 사랑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어려워하는 사람들, 뭔가 사랑을 나타냄을 힘들어하는 사람은 
충분히 사랑할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어린 시절이 참 중요해요. 
이렇게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고 자라는게 너무너무 중요해요.
그런 사람이 나중에 커서, 사랑을 베풀 수 있으니까요.

사랑을 받아 봐야, 내가 어떻게 남을 사랑하는지를 알게 돼요. 
내가 사랑을 받은 적이 없으면, 나눠줄 사랑, 베풀어줄 사랑도 없어요. 
받아야 주지요... 받은게 있어야 주지요... 

내가 사랑의 결핍증세에 시달리는데, 누구를 사랑할 수가 있겠어요? 
신경질만 나는 거죠.

아무리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이 안 돼요.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 사랑이 흘러넘치는데요, 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 그게 가능한 거죠.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땅하니라' 
사랑이 뭐 어려운게 아니라는 거예요. 당연한 거라는 거예요. 
왜요? 내가 사랑을 받았으니까, 내가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까! 

충만한 사랑이 내게 흘러 들어왔으니까! 
여러분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풉니다. 이건 공식입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흘려보내는게 어렵지가 않아요. 
근데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요. 

그리고 사랑할 능력이 나에게 없어요. 
여러분, 십자가의 사랑은 흘러넘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거짓 사랑을 하는 거죠. 진정한 사랑을 하는데 속임수가 있어요. 
사랑하는 척 하는 가짜 사랑이 많은 거예요. 

말로만 하는 사랑, 사랑을 하더라도 
진심을 담아도, 아무리 진심을 담아도.. 그 사랑은 함량이 부족해요. 
그래서 금방 목이 마른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세상이 병들어 있고, 뒤틀려 있는 이유는 뭘까요? 
하나밖에 없어요. 사랑이 없기 때뭔이죠.

누 가 사랑을 베풉니까? 
사랑을 경험한 사람, 진짜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죠. 
바로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 외에는, 진정한 사랑을 베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됩니다. 

몸으로 입고 이 땅에 오신, 
축소되시고, 우리와 거리를 좁히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처럼 
오늘 우리도 성육신의 정신으로, 우리 이웃에게 사랑하기 위해서 다가가야 하는 거죠. 

그렇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내 몸을 낮추고, 축소시키고...
그와 같이 되는 거죠. 인카네이션!

▲우리 교회에 노숙하시는 분들을 진짜 정성으로 돌보시는 분이 몇 분 계세요. 
진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계십니다. 제가 그걸 보면서 얼마나 감격하는지 모릅니다.
'보배 같은 분들이 우리 교회에 이렇게 많구나..' 
그렇게 다가가서, 그 노숙하는 분하고 같이 그냥 살듯이 하면서 돌보아 드립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몸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몸으로 드러낸 사랑이에요. 

십자가를 이론화하고 끝내버리면 안 됩니다. 
십자가 신앙이 자꾸 사변화되어져 버리는 것은 비극입니다. 
몸으로 옮기는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오늘 우리의 약점입니다.

사랑은, 구체화하는 거잖아요. 몸으로! 
여러분 사랑하면 보이는게 있어요. 여러분 사랑하면 자꾸 보여요. 
상대의 필요가 보여요. 상대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요.
주의깊게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에 대한 관심이 너무 커요. 
그래서 우리 머리털까지도 세신바 되신 분이세요. 

사랑은 관심이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크신지요!

스캇팩은 '사랑이 취하는 주된 행위는 관심이다.'라고 말했어요.
사랑은 관심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내 혼자 산다고 정신없이 살다 보면, 내 옆에서 누가 죽는지도 몰라요. 

오늘 우리는 비인간화된 세상을 살고 있잖아요.
이 삭막한 도시의 한 가운데, 아파트로, 콘크리트로 
옆집과 앞집이 다 그냥 둘러쌓여져 있지만,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누가 고통을 당하는지, 누가 외로운지... 아무도 관심 없잖아요. 

하나님은 우주의 끝에 계신 분이 아니시고, 하늘 위에서 팔장끼고 계신 분이 아니고,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정황에 뛰어 들어오신 하나님!

여러분, 사랑은 관심이에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누구에겐가 옮겨야 합니다. 
내가 조금만 관심을 가져줘도 살아날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우리 교회가 이렇게 주일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너무 감격스러워요. 
저는 이 수많은 청중속에, 한 사람이 고독을 경험하며 
아무의 관심도 없이 예배에 나왔다가 그냥 떠나버릴 때... 

정말 돌봐 주어야 할 영혼, 그 한 영혼을 돌볼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 사랑은 관심입니다. 여러분 가족끼리도 깊은 관심이 필요해요. 

아내가 미용실 갔다왔으면, 남편이 금방 알아봐야 돼요. 
근데 아무리 지지고 볶고 와도.. 관심이 없으면.. 못 알아봅니다. 

여러분 사랑하면요, 기억력도 좋아져요. 안 잊어요. 
그가 지나치듯이 말 한마디 했는데, 그걸 캐치를 해요. 메모를 해요.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기억하는 거죠. 

사랑하면 사명감이 생겨요. 사랑하면 에너지가 생겨요. 피곤할 줄 몰라요. 생기가 돋으니까! 
여러분 우리가 주님과 사랑을 나누면 힘이 납니다. 충전이 됩니다. 
함께 할수록 활력이 넘칩니다. 사랑 할수록/받을 수록 에너지가 충만하죠. 

그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으로 나누고 싶은 거죠. 사랑하면 나누는 거죠.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거죠...

여러분 돈을 벌어도, 사랑을 하는 사람은 즐거워요. 
그 돈을 버는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돈을 벌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사람은 
돈 때문에 타락하지 않아요. 

사명이 없이 돈을 벌면, 돈 버는게 즐겁지도 않아요. 
자기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서 사는 삶은, 행복도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가장 큰 계명이에요. 
사랑하라는 말씀은 가볍게 듣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수없이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극적일 때가 많아요. 

우리는 살인이나, 간음, 동성애가 끔찍한 죄라고 규정하고 정죄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죄가 있어요. 사랑하지 않는 죄예요. 

가장 으뜸 되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잖아요. 
사랑하지 않는 죄는, 가장 으뜸으로 짓는 죄예요. 

우리는 무엇을 어기는 것을 죄로 여기입니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고,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요. 즉 사랑하지 않는 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본질이시기 때문에, 

아니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어두운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빛 가운데 사는 삶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안다면,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 사랑을 만났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이끌리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그 사랑을 받을 때만, 사랑의 나눔과 베풂이 가능합니다. 
그 사랑의 힘이 나를 살게 하고, 이기게 하지요. 

십자가에서 흘러 넘치는 그 사랑은, 지금도 마르지 않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여전히 십자가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결국은 뭐예요? 사랑이에요. 
여러분 사랑을 하는 것, 사랑을 받는 것!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과, 그리고 받은 사랑을 누구에겐가 나누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는 강력한 사랑의 발전소이에요. 
우리만큼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경험한 이 사랑을, 사랑 없는 세상에 나누어 주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