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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신을 돌아보라

LNCK 2024. 4. 17. 05:0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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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신을 돌아보라       갈6:1~5             2008.01.20.

 

◑도입 주1)

 

◑본론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오늘 성경 말씀은 "네 자신을 돌아보라" 하는 말씀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 역시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남을 보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환경을 보다가 내 존재를 잃어버립니다.

역시 자기가 자기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특별히 공유된 자아 속에서 자의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볼 때, 다른 사람이 범죄한 것을 볼 때

이 사건 앞에서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오늘 가장 중요하고 분명한 진리의 핵심은 이겁니다.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라...

 

때때로 세상 돌아가는 일, 혹은 이웃에 대한 것, 사회의 이야기를

전혀 나와 관계없는 것처럼 비판하고 말하는 그런 잘못된 인간들을 봅니다.

여러분, 언제나 상대방과 나를 이질성에서 보지 말고, 동질성에서 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장례식에 가십니까? 사람이 죽었어요. 죽은 집에 가서 여러분 무얼 생각하십니까?

 

최소한 생각할 게 하나 있어요. 저가 죽었으면 나도 죽는 거예요.

언젠가는 저 죽음이 나에게도 찾아옵니다. 글쎄 남의 얘기가 아니에요.

나 자신의 얘기란 말입니다. 곧 내게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 더 미련한 말로, 안 죽을 사람이 죽은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랬으면 안 죽었을 건데, 저랬으면 안 죽었을 건데...’

 

그리고 또 누구 때문에 죽은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모두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연스러운 길이고, 내게는 동질적 상황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남의 실수나 범죄, 혹은 나약성을 볼 때마다 생각하십시다.

나와 다를 바가 없어요. 그 실수가 내게 없다고 한다면 그건 내게 기회가 없었던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어서, 그 은총 속에서 내가 이만큼 나를 지탱한 것뿐이지

저 사람의 처지에 있다면 나도 실수할 거예요.

 

저 사람이 당한 형편이라면, 나도 꼭 같은 일을 당할 수도 있고,

아니 그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자아의식을 가져라.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네 자신을 돌아보라.’

그런 차원에서 네 자신을 돌아보라. 그래서 온유한 심정으로 대하라. 교만하게 생각하지 마라.

 

▲여러분, 잘 아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알지 않습니까?

'네 자신을 알라' 유명한 말이죠.

 

사실 소크라테스보다 1세기 먼저 있었던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탈레스 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탈레스의 말에 벌써 이 말이 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옛날 탈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힘든 것은 간교한 폭군이 무사히 죽기를 기다리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

이것이 힘든 것이다."

 

도대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사람을 두고 보아야 되거든요. 그거 어찌 하겠어요?

조용히 늙어 죽기를 기다린다는 거 이것 참, 참기 힘든 것입니다. 옛날에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렵고, 남을 충고하는 것이 제일 쉬운 일이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500년 전에 말입니다.

 

우리는 남에 대해 말하기가 쉽습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하기 쉽습니다만

세상을 보면서 낙심하지도 말고, 심판하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고, 비판하지 맙시다.

'내가 바로 섰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인데,

내가 바른 본을 보여 줬다면 세상은 달라졌을 것인데, 아니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좀 더 깊은 가운데서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비판 이전에 반성이 있어야 됩니다. 비방하기 전에 좀 더 깊은 생각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은 "짐을 서로 지라." 짐을 지라. 무슨 말입니까?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세상에 대한 책임을 묻지 말고, 그 책임을 져라.

비판하지 말고 내가 책임을 지자.

 

여러분, 잘못된 자식을 책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옛날 어른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자식이 잘못했을 때 회초리를 들어 자식의 손에 주고

'나를 때려라. 내가 잘못해서 네가 그렇게 했느니라.' 옛날 부모들은 그랬어요.

 

자식을 자식의 일로만 보지 않았어요. 그건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옛날 어른들의 높은 덕성이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실수한 결과로 어쩌면 나 때문이기도 합니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내 역할을 내가 잘못했던 거예요.

 

▲여러분,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나갑니다. 아버지는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탕자가 잘못될 걸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꼭 돌아올 줄로 믿고 기다립니다.

 

생각해 봅시다.무슨 생각을 하며 기다렸겠습니까?

'제발 돌아만 와다오. 내가 조금 더 사랑을 베풀었더라면 집을 안 나갈 수 있었는데...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뭘 잘못했나?' 스스로 자기를 반성하며 기다린 거예요.

그리고 '만일에 저 놈이 나가서 저 객지에서 죽어버리면

나는 영영 큰 죄인이 되는데, 다시 돌아와야 내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제발 죽지 말고 돌아만 와다오.'

 

그래서 아버지는 돌아오는 자식을 보며 마치 면죄부를 받는 것처럼 기뻐했던 거예요.

여러분, 이거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집 나간 탕자를 보면서

'그래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네가 죽어라.' 이런 부모는 없어요.

 

대신에 자신을 살핍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 내가 좀 더 잘했으면 좋았는데...'

여러분, 나 때문일 거라고, 내 잘못은 없었는가 하고, 내 사랑은 충분했는가,

아니 내가 정말 지혜롭게 할 수 있었지 않았는가, 스스로 자기를 살피는 거예요.
굳이 부모와 자식뿐이겠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압살롬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다윗왕의 그 참으로 잘난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항합니다.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니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대항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피합니다. 왜? 아들을 아버지를 죽인 아들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살부자殺父者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이리저리 아버지는 피신합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깨닫고 바른 생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그 아이 죽습니다.

죽은 다음에 그 아버지가 목을 놓고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왜 울었습니까? 무엇을 생각하며 울고 있습니까?

 

바로 다윗왕 자신이 자기 자신을 아는 순간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알고,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아는 순간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잘못된 사람, 실수하는 사람, 범죄 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거든 자신을 돌아보라.'

짐을 져라. 그 책임이 내게 있다고,

이 책임이 저희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고, 책임을 함께 나누는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요, 인격자의 마음이기에 "네 자신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라" 고 합니다.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6:1

 

두려워하라. 무엇을 두려워할까요?

’내가 뿌린 씨를 저가 거두는 것이 아닌가?

내 깊은 곳에 있는 악이 저기에서 열매 맺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뿌린 악의 씨앗이 자식에게서 열매 맺고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두려워하라는 것이죠.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6:1

온유한 마음으로 참으라. 함께 회개하며 기다리라. 화를 내지 마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6:2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사랑의 법을 성취하라. 아가페의 법을 성취하라.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너무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리는 걸 많이 봅니다.

썩어도 이렇게 썩을 수가 없고, 이러고 서야 망하지 않을 수가 없지.

온 세계가 그냥 흔들립니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말입니다.

 

이래도 되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어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남의 일처럼 말하지 맙시다. 남의 일처럼 비판하지 맙시다. 책임을 함께 집시다.

나는 악을 생각했고, 저는 악을 말했고, 저 사람은 악을 행했습니다. 다 연계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깊이 반성하면서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남의 실수를 볼 때마다

신문지상에 이런 저러한 일을 볼 때마다 통회하십시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원로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원로목사님을 모시고 제가 11년 동안 당회장으로 목회를 했었습니다.

이기혁 목사님이신데, 그 분은 기도 많이 하시고, 아주 경건하시며,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아침에 사무실로 신문이 배달됩니다. '신문이요' 하고 탁 던지면

모두가 하나씩 신문을 들고 열심히 봅니다. 이것 보고, 저것도 보고.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신문에 뭐 좋은 얘기 몇 가지 있습니까?

다시는 신문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많을 정도입니다. 그런 이야기들만 가득합니다.

 

아, 끔찍한 이야기니 뭐니 이런 것 들이 기사로 났습니다.

그럼 목사님께서 신문을 딱 손에 들고 나가버려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늘 그러십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궁금히 여겨 몰래 뒤따라 가보았습니다.

어딜 가시나 했더니.. 이 신문을 들고 예배당 본당에 들어가서 강대상 앞자리의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신문을 탁 펴놓고 "하나님,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시면서 우는 걸 봤습니다. 그러면서 통회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기혁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여러분, 신문 읽으면서

'죽일 놈, 살릴 놈' 욕하지 말구요, 저주하지 말구요, 또 낙심하지도 말구요,

신문을 펴놓고 하나님 앞에서 통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짐을 서로 져라. 네 자신을 돌아보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2

여러분,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뭘 소망적으로 희망적으로 생각해봅니다만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미국 경제와 중국 경제가 흔들립니다.

뭐 우리 같은 작은 나라야 그 틈에서 숨이나 쉬겠습니까?

 

자, 이제 점점 더 어려운 사건만 앞에 옵니다. 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오늘 본문 2절에 있는 ’짐‘은 헬라어로 '바로스'라는 것이고,

5절의 ’짐‘은 '포리온' 이라는 것입니다. 단어가 다릅니다. 비슷한 말이긴 하죠.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 내가 메어야 할 작은 짐

 

2절에 있는 짐은 큰 짐을 말합니다.    주2)

5절에 있는 짐은 적당한 짐, 내가 멜 수 있는 그러한 내게 합당한 짐을 말합니다.

함께 메어야할 짐이 있고, 내가 메어야할 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11:3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 짐은 가볍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르티온

 

멍에를 함께 메자. 내 멍에를 함께 메자. 멍에 하나를 둘이 함께 메니까 가벼워집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멍에를 내가 멜 때 가벼워집니다.

 

또 멍에를 함께 멜 때, 그리스도와 함께 멜 때 내 짐은 가벼워집니다.

여러분, 새해는 좀 더 가벼운 짐을 질 수 있도록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 새로운 일들이 눈앞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만

그저 며칠 더 살아보니 점점 더 어려운 일만 많습니다.

무거운 짐에 눌리어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주여, 내 짐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더 마음이 무겁습니다.

원컨대 이 무거운 짐을 잘 지고 나갈 수 있도록 하옵소서.

내 짐을 내가 지고 남의 짐도 내가 지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같은 멍에를 메어

주의 주시는 능력과 힘을 따라서 가볍게, 그렇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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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반인륜적 사건이 터졌습니다. TV에서 보도하는 모습들을 보면,

유럽의 방송인들은, 표정과 목소리가 담담합니다. 자기 감정이 실려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방송인들은, 표정과 목소리에 자기 감정이 실려있습니다.

화가 난 표정이거나, 노기가 섞여 있는 음성입니다.

 

꼭 방송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다보면 비판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할 때, 감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안 됩니다.

 

정말 비판을 하려면 감정적인 언어보다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하려는 내용은 없어지고, 감정의 찌꺼기만 남게 됩니다.

 

남을 훈계할 때도, 부부싸움을 할 때도, 가급적 감정을 최대로 억제해야 됩니다.

사실 상대방을 자극하는 것은, 비판의 내용이나 팩트보다는,

거기에 실린 내 감정, 내 분노, 내 화 때문입니다.

내 화는 상대방의 화를 불러일으키거든요!

 

♣2010년 새해 저의 경구警句를

<이웃의 잘못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기!> 로 삼았습니다.

 

올해는 이웃의 잘못이나 결점을 보기보다는,

그의 고통을 보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이웃의 고통을 보는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보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보면.. 나도 같이 고통을 느끼며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강하게 압박을 합니다.

 

그렇게 새해에는 주님의 닮은 모습을

작년보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기를 소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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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도입

어느 날 그 유명한 인도의 간디 선생님에게

한 여인이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데리고 와서 간곡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선생님, 제 자식이 단 것을 너무 좋아해서 이가 다 빠졌습니다.

단 것을 먹지 않도록 좀 따끔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제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간디는 이 어린 소년을 가까이 불러서 뭐라고, 뭐라고 얘길 했어요. 뭐 별 얘긴 아니에요.

"단 거 많이 먹지 마라. 몸에 해로우니라."

그리고 보내면서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이 아이는 단 것을 먹어댑니다.

여인은 일주일 후, 다시 아이를 데리고 간디 선생님에게 갔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다고 그런데 효과가 없다고 했더니, 간디는 아이에게 다시 말합니다.

 

"얘야, 단 것을 많이 먹으면 해로우니까 먹지 마라." 그렇게 말하고서는 그 이상 말이 없어요.

어머니는 의아해졌습니다. 아니,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하고

오늘 또 그렇게 말하시니 이래가지고 무슨 효과가 있겠나 싶어서

"선생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했지만 얘는 달라진 게 없거든요."

 

간디 선생님이 말씀하기를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오늘은 효력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서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그 때는 나도 단 것을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일주일 동안 나도 단 것을 안 먹었습니다.

그러고서야 오늘 말했으니까 효력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내가 끊고서 끊으라고 말해야 되고, 내가 하지 않으면서 하지 말라 말해야 합니다.

내 실천이 앞서고 비로소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간디 선생님으로서 생각할 때, 자신이 단 것을 좋아하면서

이 아이에게 단 것은 나쁘다고 백 마디를 해봐도.. 그건 효력이 없는 거예요.

 

똑같은 말이지만 내가 단 것을 일주일 동안 끊고

그러고야 오늘 말했으니까 오늘 한 말은 분명 교육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간디 선생님의 깊은 뜻을 아시겠습니까? 생각할수록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회학자 메드 George Mead 는 「Mind, Self and Society」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사람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말합니다.

영어에 I 라는 말이 있고, Me라는 말이 있습니다.

I 도 Me도 다 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이것을 잘 분석을 해서

I 라는 말은 충동적이고 비조직적이고 예측불허한 자기 존재요, 자기 발산으로 이해합니다.

Me 라는 말은 ‘일반화된 타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타인과 공유된 자아를 말합니다. 타인과 공유된 자아,

나 혼자만의 자아가 아니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공유된 자아의 세계를 말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I 에서 시작해서 Me로 통제를 받는다.

그래서 자아라는 것은 I 와 Me의 혼합이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는 사람이 있어요.

항상 자기 입장에서 남을 보는 거예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를 봅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자기를 봅니다.

 

여러분, 좀 더 나아가서는 부모님 앞에서 동생을 봅니다. 부모님 앞에서 형님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이웃을 봅니다.

이렇게 공유된 자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주2)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바로스 : 큰 짐이라서 함께 메어야, heaviness, weight, burden, trouble 행15:28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 내가 메어야 할 작은 짐

*포르티온 : portion, 자기 몫의 짐, 또는 마음의 짐, 마11:30, 23:4, 눅11:46

  둘은 거의 비슷한 말이지만, 의미가 약간 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