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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스데반

LNCK 2024. 4. 17. 11:3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핍박 과 순교


그 사람, 스데반 - YouTube
그 사람 스데반             행7:1~60

 

◑도입            

우리는 많은 설교를 들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많은 설교가를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훌륭한 설교자들이 참 많았는데, 
그 중에 가장 흠모하는, 가장 제게 영향을 많이 끼친 설교자를 한 명 뽑으라고 하면 
저는 스데반을 꼽겠습니다. 

물론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스데반은 참 특별한 설교자입니다. 
제가 그런 관심을 갖고 인터넷에, '월드 베스트 프리처스 인 히스토리' 찾아보니까 
한 10명 꼽는데, 스데반을 꼽은 사람도 있더라고요. 이거 대단한 겁니다. 

왜냐면 다른 설교자들, 조나단의 에드워즈, 존 크리소스톰 이런 분들은 남긴 설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단 한 편 뿐입니다. 딱 단 한 번 설교한 것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최고의 설교자로 꼽힐 수 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딱 한 번 설교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정말 최고의 설교자의 자질을 갖춘 분인데 
'딱 한 번 설교하고 죽었다?' 이거 너무하지 않은가요?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싶습니다. 

▲신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라는 분 아시죠? 
그가 지은 '선한 능력으로' 라는 찬양을 우리가 잘 알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히틀러의 나치에 저항했다가, 2차 대전 끝나던 1945년 봄에 처형당합니다. 
만 39세. 여러분, 학자가.. 특별히 인문학, 철학, 신학 분야에서 39세면,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영글지 못한 시기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39세 때까지 했던 저작만으로도 
현대신학 전체에 큰 획을 그었고, 후세에 엄청난 통찰을 준 대단한 신학자였습니다. 
천재 중에 천재였습니다. 

'오 하나님, 왜 이런 분들을 빨리 데려가시지?' 참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잘 사는 게 뭔가?' 
무병장수, 그냥 오래 사는 것도 복이겠지만, 
짧게 살아도 정말 불꽃같이 산 분들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이렇게 살고 싶다. 설교를 단 한 번을 해도 이렇게 하고 싶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럽기도 합니다. 

공자가 그랬죠. '조문도면 석사가의 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 
이 진리에 대한 갈망! 저는 이해는 가지만, 썩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도를 깨닫고 그날 바로 죽으면 아깝잖아요.

 

▲복음의 도를 전하다 죽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도가 뭡니까? 
행9:1절에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살기가 등등하여' 
2절에 '다메색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주의 제자들을 '그 도,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대로 말하자면, '도를 안다, 도를 깨닫는다'는 표현보다도 
'도를 따른다' 라는 말을 씁니다. 

도는 원어로 길 way 이죠. 걷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도를 안다, 도를 깨우친다'는 것은 상당히 관념적일 수 있는데, 
기독교 복음은, 그 도를 살아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 안타깝긴 하지만 
아침에 깨닫고, 저녁에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말해줄 수 있다면, 
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말한다고 그 도를 다 알아듣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깨달은 그 진리를, 
세상에 전하고, 씨앗으로 심겨질 가능성을 남기고 죽는다면, 
일말의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방인의 선교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스데반의 설교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행7장에 나오는 이 스데반의 설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도행진에 많은 설교들이 나오잖아요.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입니다. 

두 분 다 훌륭한 설교자고요. 성령 충만한 분들이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 가면, 양쪽에 한쪽에는 베드로, 한쪽에는 바울 상이 있습니다. 
명실상부 교회의 두 대표이고요, 사도행진도 그렇습니다. 

전반부에는 베드로가 주역이고, 후반부에는 바울을 중심으로 행적이 이어져갑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스데반의 설교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 많은 설교들 중에, 가장 길게 가장 자세히 기록된 설교가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굉장히 특이하죠. 그리고 특별히 중요합니다. 

직전 상황을 보면, 6:12절에, 사람들이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서 스데반을 잡아오게 합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6:15

그죠. 얼굴만 봐도 일단 최고의 설교자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것 같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7: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영광으로 나타나셨는데, 그 지역이 메소포타미아다. 이방 땅이다...
라는 것에 굉장히 중요한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라나섰는데 어떻게 살았나요? 
7:5절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이 발붙일 만한 땅도 없는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무일푼으로 살아가는 게 
여러분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발붙일 땅도 주지 않으셨다' 라는 말은
스데반의 입으로서 말했기 때문에, 훨씬 더 의미가 깊습니다. 

스데반 자신이 디아스포라 출신이잖아요. 외국에 살다가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디아스포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이 이민 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2000년 전 시대에, 유대인으로서 이국당에서 살아가는 것, 
그들 중 상당수가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스데반도 노예로 태어나서, 중간에 어떻게 해방이 되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자유인 6:9, 로마 군대의 포로가 되어 부역 負役으로 끌려갔다가 해방된 유대인들의 후손)

그러면 이국당에서 정말 냉대받으며 무시받으며 살다가, 고향이라고 돌아왔는데 
고향에서도 나그네 완전히 내 땅 같지 않은... 
본래 본토를 계속 지키던 사람들에게 차별받는... 그런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디아스포라들이 고백한 하나님, 
성경을 다시 보니까 아브라함도 디아스포라 였습니다. 
그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이 영광으로 나타나셨다는 거예요.  

여기 예루살렘에서만, 성전이 있기 때문에만 하나님이 나타나 보이신 게 아니고 
이방 땅에서도 보이셨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이 스데반의 설교는 사실 긴데, 읽어보시면, 
'이방 땅'이라고 하는 상황, 디아스포라 라는 신세, '나그네 됨'이 대단히 강조됩니다. 

7: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노예로 삼아서 400년 동안 괴롭게 하리니' 

나그네 삶, 그래서 요셉 이야기를 꽤 길게 하는데 
이집트, 애굽 땅이란 말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당시 이방이라는 현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죠? 

그리고 모세가 낳는데, 이어서 모세 이야기를 아주 길게 해요. 이것도 굉장히 특이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뭔가 하면,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구도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스데반 설교 이전에는, 전부 다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이야기입니다. 
스데반 설교가 지나고 나면, 8장부터 이제서야 사마리아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스데반의 설교는, 사마리아 선교를 신학적으로 준비하는 설교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도 구약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모세 오경만 인정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모세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이전에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구약을 인용했지만, 
주로 다윗을 인용했고, 다윗 이야기가 굉장히 길게 나오죠. 

지금도 여러분이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가보시면 '다윗의 성' 지역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성입니다. 

그런데 요4장의 사마리아 여인 아시죠? '예배할 곳이 그리심 산인가, 예루살렘 산인가요?' 물었죠.
사마리아 사람들은 다윗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전통은, 모세가 그들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예루살렘에서는 다윗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사마리아로 담을 넘어가는 복음에서는, 모세를 중심으로 접근했다는 겁니다. 

어차피 여러분, 결론은 예수예요. 예수를 이야기하는데,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서 하든지, 다윗을 통해서 하든지 
그 청중에 맞게 접근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설교는, 신학적으로 '예루살렘 중심주의'에서 
사마리아와 그 너머로 넘어가기 위한, 세계선교를 준비하는 설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에, 다윗 이야기도 나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비중은 적습니다)  
7: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성막을)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 자체가 독립적인 중요성을 갖고 다루어지는 게 아니고, 간단하게만 이야기합니다. 
초점은 뭡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호수아가 이 땅에 오고 나서 다윗 때까지 
상당히 긴 시간 동안에,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이 지냈다 라는 거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정말 성전이라는 건물을 짓는 게 그만큼 중요했으면, 
들어오자마자 하나님이 계시를 주셨겠죠. 
'야 이제 성막 걷어 치우고 빨리 성전을 지어라!' 하나님 그렇게 서두르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7:46절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다윗이 성견을 짓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좋다, 그러나 너 말고 네 아들이 지을 것이다.' 하나님이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었는데, 
그런데 '48절에 그러나'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48 

여러분 성진이라는 건물 자체가 참 귀한 장소이지만, 하나님 만나는 자리지만, 
하나님은 그 안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이 내 보좌이고, 땅이 내 발등상이다.'  :49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십니까? 그 엄청나게 크고 높으신 분을 
인간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에 한정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성전을 굉장히 귀하게 여기고, 
거의 우상 숭배에 가까운.. '성전교'라고 할 만큼.. 성전을 우상화했습니다.

왜냐면 여러분,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힘듭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잖아요. 
하나님을 배반하려고 한 게 아니고,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다' 그랬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가 힘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핵심은.. 성전을 믿었습니다. 
성전이 건재하고, 성전에서 우리가 제사를 잘 드리는 한,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실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 생각에, 스데반이 지금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중심-성전 중심>의 당시 유대교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방 땅-성전 바깥에도 계시고 역사하신다>라고 설교함으로써,

행8장부터 이어지는 사마리아 선교, 이방 지역 선교에, 

스데반의 설교는 신학적 기초를 놓았고,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도전했고 죄를 책망했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유대교의 신앙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스데반이 건드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참을 수가 없었죠.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스데반은 죽어도 싼, 너무도 과격한 말을 한 것입니다. 

근데 이거는 앞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들고, 성전에 가서 퍼포먼스를 하셨잖아요. 
그 성전의 멸망과 심판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견디지 못합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겁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 라는 점이었고, 
이것을 예루살렘 거민들과 디아스포라 유대교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54절에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를 갈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 설교가 중간에 스톱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7장의 설교는 분량이 매우 길지만, 끝까지 다 설교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 사도행전의 모든 설교는, 죄를 질타하지만 
결국에는 예수 믿으라는 초청으로 가는 거예요.  

다윗을 이야기하든, 모세를 이야기하든, 성막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 자체가 뭔가 하면, 
결국에는 '예수'라는 거죠.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받으면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아무리 완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받아주실 줄 믿습니다.' 
이 말을 스데반이 해야 되는 거예요. 그 말로 가려고 하는 도중에, 설교 중간에 잘린 겁니다. 

사람들이 너무 소리 지르고, 격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그래서 스데반은 딱 설교 한 번 하고 죽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한 번도 끝까지 다 못하고 
설교중간에 하다가 그만두고 죽은 거예요.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스데반을 생각하면, 짐 엘리엇이 생각난다

 

시카고에 가면 근처에 휘튼 대학이라는 기독교 대학이 있습니다. 
참 신실한 참 좋은 대학인데, 해마다 7월에 코스타가 이 학교에서 열리고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이 학교를 나오셨습니다. 

그 전에 짐 엘리엇이라는 청년이 다녔습니다. 
그는 졸업 후에 친구 4명과 함께 5명이 적도 부근 에쿠아도르에 선교를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마을을 선교할까 돌아보다가, 
아우카 부족이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호전적이고 사나운 부족이어서, 접근이 어려웠던 거죠. 그 소식을 듣고 다가갑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가서, 부족 위를 선회하면서 선물을 떨어뜨리고, 
이러면서 원주민들이 선물을 받고 막 좋아하면서, 아주 프렌드리한 얼굴로 받는 거 보고요. 
선교하기로 결심합니다. 

1956년 1월 초에 경비행기 타고, 쿠라라이 강가에 착륙합니다.
부족의 일부 사람들과 두 세 차례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1월 8일에, 낯선 외부 사람이 오니까, 환영하는 일부 부족민이 아닌,
거부하는 주류 부족사람들이 막 소문이 이렇게 지었나 합니다. 
'이 다섯 백인들이 아우카족 여인들을 납치해 갔다' 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말에 격분해서 추장이 창과 도끼를 들고, 사람을 몰고 와서 선교사들을 공격합니다. 
당시에 선교사들이 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쏘지 않았습니다. *짐승 퇴치용
'우리가 이 사람들을 선교하러 왔는데 어떻게 총을 쏘겠나?'

The End of Spears 라는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네이트 세인트(경비행기 조종사)의 아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교 캠프에서, 선교를 떠나는 아빠를 쳐다보면서
'아빠 저 사람들이 공격해 오면 어떡하죠?' 

 

'아들아, 우리는 그들을 쏠 수가 없어. 우리는 천국 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They are not ready for heaven 그들은 지금 죽으면 천국 못 가잖아.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잖아. 
우리가 죽는 게 맞아' 라고 말합니다.  

*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의 간증☞ 남겨진 5인의 미망인 (짐 엘리엇 외 4명 순교자의 아내들)

이 다섯 명의 젊은이는 선교를 위해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한 번도 제대로 전도하지 못하고 살해되었습니다. 

선교본부에서 연락이 안 되니까, 실종된 선교사들을 찾아갑니다. 
닷새 후에 구조대를 보냈는데, 강가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잔해들,
시신이 강물에 빠져 있기도 하고... 결국 다섯 구의 시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소식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에 <라이프> 잡지가 있었죠. 라이프 잡지가 10페이지에 걸쳐서 상세히 보도합니다. 
그리고 그 전체 타이틀을 그렇게 달았어요. 
'What an unnecessary waste!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쓴 거죠. 

당시에 짐 엘리엇은 신혼이었고, 아내 엘리자베스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남편 짐 엘리엇과 네 명의 친구들의 죽음은, 결코 불필요한 낭비가 아닙니다. 
낭비라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의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일 뿐입니다. 

이후로 다시는 내 남편의 죽음을 '낭비 waste'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낭비라면, 불필요한 낭비가 아니라, 거룩한 낭비입니다."  

얼마 후에 짐 엘리엇의 대학 시절의 일기가 공개되었습니다. 책으로 묶어져 나왔습니다. 
우리말로 <전농자의 그늘>이라고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농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여...' 라고 하는 책입니다. 시91:1
엘리엇이 늘 묵상하고 기록했던, 그 주님과의 대화를 아주 소상히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 성공하게 하소서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이 하나님을 아는 가치를 드러내는 전시품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제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부족한 나의 나무 토막 같은 인생에, 주여 불을 붙여 주소서! 

제가 주를 위해 태워지도록, 나의 삶을 죽여서 소멸시키십시오. 
이 몸은 주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바로 주님과 같이!'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대로 20대에 순교했고요.

여러분, 이러한 마음을, 이런 기록을 아내가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담대하게, 선명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 중에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언젠가는 놓아야 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이 세상 명예와 재물과 안락한 삶도, 그는 생명까지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 고백을 따라서, 그 가족들이 4년 후에 
엘리자베스가 그때 낳은 딸을 데리고요. 그 마을로 다시 찾아갑니다. 
네이트 세인트의 누이 레이첼도 함께 여자 3명이서 찾아갔습니다.

다행히 아우카족은, 여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흉폭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이제 가서 의료봉사를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추장이 와서 물어요. 
'당신들 누굽니까? 어떻게 이 먼 곳 외지에 와서, 
이 험지에 와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합니까?' 

이때 엘자베스가 5년 전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의 아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 와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추장이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을로 가십시다.' 극진히 대접하고요. 자기부터 예수를 믿습니다. 
세례을 받았고, 이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전도의 열매가 아주 강하게 맺히기 시작합니다. 

그 죽어갔던 다섯 명의 믿음, 그들의 용서가 씨가 되어서, 자라서 열매 맺은 줄 믿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스데반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그 중에 사울이라는 주동자 급의 청년이 있었잖아요. 이때를 저는 상상해 봅니다. 

그때 스데반과 사울의 눈빛이 서로 마주치지 않았을까요? 
사울을 스데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위험한 사람, 증오, 경멸... 
그런데 그 안에 일말의 당혹, 열등감도 있었을 것 같아요. 
워낙 강렬하게 설교하니까! 

스데반이 확신 있게 말씀을 전하니까, 한편으로는 '저 미친놈!' 하면서도요. 
마음 한 쪽에 '혹시?' 하는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스데반은 사울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나를 죽이려 하니까 증오했을까요?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과 똑같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은 예수님이니까 그랬다 치고, 
여러분 죽어가는 사람이, 나를 죽이는 사람을.. 
그것도 막 돌을 던지고 '죽여라 죽여라'하며 증오를 내뿜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게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착해서? 

얼마나 착해야, 얼마나 인격을 도야해야 이렇게 될까요? 
이거 쉽게 안 됩니다. 

여러분, 복음은요. 착하게 살자는 노력이 아니에요. 
교육도 아니에요. 잘 가르치면, 알아듣게 설명하면 이렇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5~56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이 하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로다' 

여러분 에콰도로에서 세인트 네이트(항공 선교사)가 아들에게 
'우리는 천국에 가잖아. 저 사람들은 지금 죽으면 천국에 못 가잖아' 라고 했을 때 

내가 지금 죽어도, 하나님이 나를 안아주신다는 걸 알 때,
여러분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겁니다. 

▲또한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나를 향해 '저 인간을 죽여라' 하며 고래고래 욕하고 고함치는 돌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거예요.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죽었잖아요. 어떻게 이게 가능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처럼 살아야, 예수처럼 죽는 것도 가능한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지막 순간에 뭐 폼 잡으려고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처럼 살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가 죽는 그 순간에 '저분이 돌아가시는 거 보니까 예수님이 생각난다' 하는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스데반과 바울의 관계

제가 '그 사람 스데반'이라는 설교 제목을 써놓고요. 제가 이 시가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우정에 대한 시죠. 참된 우정을 갈망하는 시입니다. 
이 우정은, 그냥 친하니까 너하고 내가 같은 동문이니까, 우리가 남이가 잘해주자... 
이런 우정이 아니죠. 
의로운 길, 대의를 함께하는 우정입니다. 

내 목숨보다, 내가 세상을 떠나도, 
저 사람이 있으니 나는 웃으며 죽을 수 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이렇게 죽으면 죽어도, 복된 사람입니다. 
함석헌 선생에게 그런 갈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시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보다는, 우리를 더 쓸쓸하게 만드는 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이런 우정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이 아니라, 조그마한 이익 앞에서도 바뀌잖아요. 배신하잖아요. 
그래서 이 갈망, 이 인간이 꿈꾸는 참 우정, 
대의를 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길만한 신뢰 관계에 대한 갈망, 
이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저는 스데반과 바울의 관계를 놓고 생각해 봅니다.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야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저 사람 때문에 눈을 감을 수 있는 그 사람!' 

만약에 스데반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 바울의 미래를 알았다면, 바로 이런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렇잖아요. '나는 죽어도 바울이 있으니... 
바울이 세계를 다니면서 주의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살릴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나는 웃고 죽을 수 있다.' 그랬을 거예요. 

그러나 스데반은 몰랐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게 끝이 아니잖아요.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스데반을 환영해 주시고, 
그 승리 가운데, 그 영광 가운데 스데반은, 
바울이 견고한 복음의 열정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웃음, 빙긋이 웃고 
바울 때문에 할렐루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렸을 줄 믿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딱 한 번 설교하고 죽었지만, 한 번의 설교도 제대로 못 마쳤지만, 
그가 전한 설교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생명을 살렸습니다. 

그 중에 청년 사울, 장차 사도가 될 바울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설교를 듣고 당장 바뀌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말씀이 사도 바울의 마음에 충격을 주었을 거예요. 대단히 부대끼었을 거예요. 

바울같이 민간함 사람이,
천사와 같은 그 표정을 보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죽을 때에도, 온 몸에 돌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환하게 웃고 있는 그 모습! 
스데반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말하던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저게 뭐지?' 파고드는 그 물음표, 
청년 사울의 마음의 균열은 여러분 점점점점 더 커지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 여러분 다메색으로 달려가는 그 길 도중에도, 
이 물음표가 점점 커져서 심장박동이 컸을 거예요. 

그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이 살아오는 느낌, 
마음에 와서 박히는 그러한 경험,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의 이야기를 차근차근히 하는데 
'저 이야기는 내가 다 아는 이야기야' 했는데요. 

스데반은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게 맞나? 아닌데? 맞나?' 
그러다가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다메섹 도상에서요.
'아 그렇구나' 그제서야 깨달음에 이르른 겁니다. 

여러분 동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삼국지에 그런 말이 나오잖아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다.' 참 재밌는 말입니다. 
'죽은 스데반이 산 사울을 이겼다.' 
이겼다기보다는 살려준 거죠. 참 생명을 전해준 거죠. 

죽어가면서도 천사 같던 그 얼굴, 
자신을 돌로 치던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던 그 여유와 평안이 어디 가지 않았습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조문도면, 
석사라도 가의다.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지만, 

저는 조전도면 석사가희 朝傳道 夕死可喜
아침에 도를 전하면 저녁에 죽어도 기뻐할 수 있다.. 라고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공자가 깨달은 도는 보석과 같습니다. 
너무너무 빛나는 보석이라서, 하루라도 그 돌을 안고 있으면 너무너무 행복해서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그런 사람이 간혹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의 도는 '씨앗'입니다. 
볼품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거 심어 놓고 죽는 거예요. 
그 작은 씨앗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자라나고,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는 꿈을 꿀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가 씨를 뿌리는 이 일,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매일매일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삶이셨어요. 예수님 스스로가 씨앗이 되셨잖아요.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를 따라 살았던 한 알의 밀알로 살았던 스데반! 
바울도요. 복음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로 결국 죽었잖아요. 
그 생명이 수많은 사람들의 선교의 물길로 이어지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온 줄 믿습니다. 
이 생명의 역사가 굳건하게 이어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