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LNCK 2024. 4. 18. 11:0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소신과 인기 (강추)      ▣십자가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막15:1~15    2024년 고난주간특새(04)

 

※평소에 십자가, 고난 이런 주제로 설교하지 않는데, 고난주간 마저도 그걸 설교하지 않으면

대단히 멀리 간 것입니다. 잘 모르면 연구해야 되고, 살아내야 됩니다.

 

◑막15: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새벽에'
새벽에 계속 이들은 불법의 시간에 재판을 확대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원래 재판은 낮에 해야 되죠. 사형에 관한 판결을 내릴 때는 더욱 낮에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예수님을 체포해서 재판을 진행하다가 
자기들끼리는 '신성모독 죄'를 확인하고는, 
이 사건을 빌라도에게 넘기는 겁니다. 이게 다 밤사이에~ 새벽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1 
본문 막15:1~15절까지 보면, "넘기다" 라는 말이 세 차례 등장을 하죠. 1, 10, 15절

10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그래서 오늘 설교의 가장 굵은 주제가 사실은 '넘겨주다' 입니다.  *파라디도미 deliver

▲그러면, 새벽 시간이 왜 중요했을까요? 
왜 이들은 마치 이 재판을 속전속결로 빨리 끝내고 싶어했던가요?
빨리 허겁지겁 결말을 맺고 싶은 분위기가 확실해요. 그 이유가 뭘까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14:1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이 지금 이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천지사방에서 모여들 것이고, 
그때는 대단히 치안으로도 불안한 시간이 이제 곧 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14:1~2

이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정도를 걷고, 법을 지키고, 진실을 규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이 대제사장 무리와, 빌라도 총독, 헤롯 왕까지도 
이 재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하게 되는데 
이들은 오로지 자기 자리를 유지하는데 관심이 있고, 
혹시나 자기들의 이익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러다보니까 진실과 진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민심이에요. 

오늘날 누구들과 똑같죠. 오직 민심이에요. 
민심의 동향이 어떤가에 초미에 관심을 갖고있을 뿐이에요. 
그 와중에 정의와 공의는 실종되는 거죠.

쉽게 얘기하면, 표가 나오고, 거기에서 자기의 자리가 유지되고.. 그게 중요한 거지,
그 외에는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새벽에 이렇게 불법한 재판을 강행하는 이유가 딱 하나예요. 
'명절에 했다가는 민란이 일어날까봐... 
만약 민심이 요동을 쳐서, 자기들의 기득권 자리가 흔들릴까 봐, 박탈당할까 봐' 
그거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거죠. 

그렇게 이들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넘겨주니, 넘겨주니라, 넘겨주니라'  :15:1, 10, 15
이렇게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형에 넘겨주고 맙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 속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데 가담했던 인물들,
즉 대제사장, 그 부하들인 성전 경비병들, 서기관, 바리새인들, 백성의 장로들,
거기에 합세한 군중들, 
거짓 판결을 내리는 빌라도... 이런 모습들 중에서 혹시 내 모습은 안 보이는지요? 

내가 질색하는 그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이 고스란히 그대로 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거울'을 보고
회개하라고
하나님은 내가 질색하는 사람을
계속적으로 내 곁으로 보내시고,

마치 우연한 손님처럼 해서
나와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나도,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빌라도, 군중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모습속에서 '내 모습'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회개하지 않으면, 

나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빌라도, 예수를 죽인 군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깊은 성경적 고찰이 필요한데, 
왜 예수님은 이때 좀 저항도 하시고, 
그 시대를 향해서 선지자적인 날카로운 항거도 드러내시고, 
불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자들에 대해서 좀 지적도 하시고, 
기적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인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무기력하게 끌려다니시고 
수동태로 계속 넘겨지는 모습으로 일관하셨을까요?

심지어는 침묵을 하세요. 
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고,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고자 하심입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
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위 구절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그는 넘겨지고, 끌려가고, 항거 하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당하는 모습이지만 
그 깊은 밑바닥에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경영과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런 수동적인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사실은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경영과 계획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침묵하는 것도.. 적극적인 하나님의 경영에 동참하는 거고, 
그가 힘을 쓰기를 절제하는 것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범법자 중에 하나로 여겨지는 모습.. 
이렇게 기꺼이 자기 영혼을 버리는 과정이었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요.

오늘 이 과정을 쭉 보면, 빌라도를 대표로 
인간의 죄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악인들, 불법한 자들은 
열심히 자기들이 의지를 가지고, 자기의 경영과 목적을 성취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러한 악인들의 득세를 통해서,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 세상에 당하는 것 같고, 지는 것 같지만 
그 일관된 하나님의 최종적 완성은, 하나님의 경영의 승리로 맞춰진다는 것이 
오늘 중요한 메시지예요. 여러분 그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믿음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진짜 힘이 되어야 돼요. 
내가 세상을 이겨내고, 세상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악인들을 물리적으로 굴복시키고, 
이런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 전체의 불법의 과정 속에 첫째는 넘겨지십니다. 
그리고 심문 과정에서 철저하게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취해야 되는 승리의 모습입니다.

막10:33~34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도 다가오는 하나님의 스케줄에 대해서 
자기가 얼마나 밀착해서,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구원의 경영을 
내가 기꺼이 제물이 되는 대속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야 하는가를 알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이 하나님의 경영과 계획에 너무 동떨어진 열심을 갖고 있었어요. 

'예수님에게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굉장히 의리 있어 보이고, 굉장히 단호해 보이고, 
자기 열정을 드러냄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또 용기를 주는 모습처럼 보일 거예요. 

그런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의 깊은 묵상을 통해서 집중해야 될 것이 뭐냐면, 
드러나는 현상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경영에 일치하는 순종이어야 되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근데 그 기준을 전부 우리식으로 정의해 버리니까, 우리 인생의 엉켜짐이 발생하는 거죠. 

 

 

15:2~5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그래서 우선 오늘은 우리 빌라도 차원에서 한번 본문을 좀 보십시다.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심문하죠. 
그런데 요한복음과 비교해보면, 빌라도 앞에 예수님이 서 있고, 
저 바깥쪽에는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서 있어요. 

그 사이에 빌라도가 왔다 갔다 하면서, 이제 심문을 하는 겁니다. 
바깥에 가서 '저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그러다가 안에 들어와서 '저들이 이렇게 얘기하던데 사실인가?'

요19: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범죄의 증거나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어요. 

요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종교지도자들이 말합니다.
'만약에 빌라도 당신이 이 예수를 풀어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를 풀어주면, 이건 정치적인 큰 죄목에 걸리게 됩니다.'

유대의 헤롯 왕은 실제 왕이 아닙니다. 
유대의 왕들은 분봉왕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하게는 영주입니다. 
이 세상에 왕은 로마 황제 한 사람밖에 없는데, 
예수가 자칭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반역죄 혐의를 만들어 씌운 거죠.

그러니까 계속 종교권력자들의 시도는 
예수를 어떻게든 종교범으로 단죄를 하고 싶은게 아니라, 
정치범으로 걸어서 단죄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야 사형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자기들이 분명 자기들의 입으로도 '신성모독'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이 신성모독죄는, 정치범이 아니라 종교범입니다.

종교범인 줄 알면서도, 종교범으로 고발을 하는게 아니라 
빌라도에게 넘긴 이유가, 정치범으로 물고 싶은 거예요. 
그래야 자기들 손에 피 안 묻히고, 이 예수를 사형으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 앞에 가서는, 지금 종교범으로 계속 모는게 아니라, 
정치범으로 계속 뒤집어 씌우는 겁니다. 전선을 바꾸고 있는 거죠. 

이것이 악한 자들이 하는 마타도어 식의 음모예요. 흑색 선전이죠. 
진실을 왜곡하고 바꾸는 거예요. 

*마타도어 : 스페인어. 黑色宣傳, black propaganda
근거 없는 사실을 조작하여 상대방을 모략하고 혼란하게 하는 정치적 비밀선전.

진실을 왜곡하는 거예요. 종교범에서 갑자기 예수님이 
지금 빌라도 앞에 세워진 이유는 정치범으로 몰기 위해서입니다. 

 

♣사점 dead point을 통과하면 되살아난다!
여러분, 내가 의지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놔두고 끌려가시면서도 침묵하고 계세요. 
이때 주님이 침묵하시면, 그때 다들 침묵해야 됩니다.

그때 그냥 막 소리 지르고 힘들어 하면 안 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해를 안 되지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면, 나도 그 옆에서 십자가를 지고 같이 죽는 겁니다.

죽지 않겠다고 몸부림 치면, 더 비참해지고 어려워집니다. 
죽는 것 까지도 주님을 신뢰 하셔야 돼요. 

두려움을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죽는 지점 dead point 을 지나야만, 우리는 다시 살아나게 돼 있어요. 

마라토너들이 '사점 dead point' 라는 표현을 씁니다. 
워낙에 심폐기능이 좋은 사람들이 마라톤을 하는 거지만 
이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오래 뛰면 맥박수가 빨라지고 막 숨이 넘어가고, 숨이 가빠집니다. 
그러면서 '사점'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막 죽을 것같은 거죠.

그러나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그 사점을 지나가고 나면
맥박이 정상속도로 뚝 떨어지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점에 이르기 전에, 거기서 주저 앉아 버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 터널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 안에서 주저앉아 버리는 겁니다.

'아~ 내가 이러다가 죽을 거 같아' 
아니요. 용기는 당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죽을 거 같을 때는요, 확 죽어버리세요.
10년째 20년째 죽을 거 같을 때, 늘 포기만 하지 말고요!
사점을 한 번 통과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내가 그냥 확 죽겠습니다!
함께 죽으면 함께 살 줄로 믿습니다!'

심한 경멸의 말을 들었습니다. 
나도 비슷한 수준의 말로 되갚아 주고 싶은 말이 목구멍속에서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이 때가 죽는 사점 death point 입니다.
이 사점을 넘기면... 부활하게 되는데,
그 사람을 넘기지 못하고, 같은 말로 되갚아 주면... 십자가 지는 것은 실패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 봐도 
빌라도 입장에서는 예수에게서 아무 혐의를 발견할 수 없었어요. 

요19: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 (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19:37~38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최종적으로 예수를 넘기는 결정적 인물이 되었고
시신마저도 마지막에 아리마대 요셉에게 기꺼이 내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 빌라도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또 하나 아주 중요한 단서가 나오는데 

예수님의 심문 중에 빌라도가 마지막에 이런 얘기를 해요. '진리가 무엇이냐?' 
그의 말은, 진리에 허기 지고, 진리에 목이 말라서 물었던 질문이 아니에요. 

빌라도 입장에서는 참 별 사람 다 본 거예요. 
아니 지금 자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예수님은 계속 진리를 얘기하고, 진리가 중요하고, 진리의 근거해서 말하는 
이 이상한 죄인에 대해서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그래서 심문을 마치기 직전에, 그가 던진 자조적인 뉘앙스의 질문이 뭐냐면 '진리가 뭐냐?'
이 말은 정확하게 이런 뉘앙스입니다.
'이 양반아, 진리가 밥먹여 주냐?' 그 뜻이에요. 

우리도 사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많이 듣게 돼요.
'예수가 밥 먹여 주냐?' 

이렇게 세상은 항상 우리들에게 그런 것을 흔들어요. 
'성경이 밥 먹여 주냐, 예수가 밥 먹여 주냐, 하나님이 너 먹여 살리냐?'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현실의 먹고 사는 문제 밖에는 관심이 없는 겁니다.

결국 이 모든 전체 과정을 종합해 보면 
어디에서부터 모든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대제사장 그룹이나, 빌라도나, 나중에 헤롯, 
빌라도와 해롯은 견원지간 이에요. 그런데 잠깐 서로 친구가 되죠. 

예수를 심문하고, 예수를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데
이 둘은 잠깐 친구가 됩니다. 평소에는 서로 관계가 안 좋지만, 
그러니까 악당들도 목표물이 같으면, 동지가 될 수 있는 거예요. 항상 그렇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은 지금 계속해서 억울함과 불법의 과정을 통해서 넘겨지고, 넘겨지고, 넘겨지십니다.

◑막15: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15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질서예요. 
세상은 민심을 왜곡하여 충동하고... 늘 그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에서는 다수결이 선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에요. 
진리와 하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언제나 '민심, 다수결'이 진리죠.

물론 우리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청정하고 듣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역사를 보더라도,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수가 틀릴 때가 많았죠.

예수님의 죽음에 일조를 했던 자들도, 민심, 청중의 소리였어요. 
빌라도 등 권력자들은, 그 민심의 소리에 기초를 해서 판단했죠.

근데 역사의 실제 사례를 보더라도, 언제나 다수의 소리가 옳았던 적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오늘 그렇게 예수님은 넘겨지는데요. 

막15: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빌라도도 진리에 관심이 없었어요. 
이렇게 주님은 이제 십자가 형에 넘겨지게 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적용점을 줄까요? 
항상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세를 따르는 것보다는 대의를 따라야 돼요. 

그럼 그 대의가 뭐겠어요? 대의는 진리를 얘기하는 거예요. 
성경은 뭐라고 얘기를 하는가.. 그게 진리죠.
 
'사람들은 뭐라고 얘기하는가?'가 아니라,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확인이 되면, 
천하가 덤벼들어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갈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믿습니까? 

이제 또 고난 주간도 이틀 남았습니다. 이틀 동안 묵상하는 가운데 
'나는 모든 판단의 근거가 진리의 기초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면 여론의 먼저 신경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하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이것이 사실은 시대적 경향인데, 이 시대가 에고이즘에 빠져 있어요. 
너무 자기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를 적나라하게 진리라는 기초에 세워놓고,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없이는 
한 호흡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인가에서부터 
우리는 은혜의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이 발자취를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한 걸음, 한 동작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영을 이루어 가는 순종의 걸음이었습니다.

반면에 이 무리들은, 대세를 따르고, 충동질에 휩쓸려 다니고, 
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진리와는 완전히 멀어진 민심, 인기, 자기 자리 방어를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서, 이 인간의 심오한 죄의 깊이가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가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불법의 방법, 불법의 무리들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 불법 속으로, 죄인처럼 헤아림을 받기 위해서 들어가시는 주님의 순종!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과제임을 기억해서 
다시 한번 깊은 십자가의 묵상이 
오늘도 일상에서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죽으면 살리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검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표현 앞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예수님 제자의 길은 분명 그리 호락호락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보다, 자기 가족보다 더 우선순위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은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검 sword 이 따르는 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회할 때, 가족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성직자의 길을 가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기뻐하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제가 가족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저를 원수처럼 여기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들 하나같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찌를 듯한 열정은
막상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딪히기 시작하면서 곧 시들해져 버립니다.

사랑은 이상적인 생각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에 고통이 따라오는 의지의 차원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구체적인 일상생활 가운데
자기를 버리는 법, 십자가에서 주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가 ‘자기 성취’인 이 시대에
‘나를 찾지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죽음입니다.
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죽기 싫어서
예수님과 힘겨루기를 합니다.
“예수님 정말 제가 죽으면.. 살 수 있나요?” 

♣하늘로 부터 오는 권위

신록의 5월,
지금 우리 집 앞뜰에는 갖가지 장미꽃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향기롭게 피어있고
느티나무는 늠름하고 푸른 자태를 자랑하며 큰 그늘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저는 장미꽃에게 시비 조로 물어봅니다.
“너는 누구의 권한으로 그렇게 아름답게 꽃을 피우느냐?
누가 너에게 권한을 주어서 그토록 향기로우냐?”

장미는 아무 대답이 없고, 그냥 향기로울 뿐입니다.

또 버드나무에게도, 질투 조로 물어 봅니다.
“너는 누구의 권한으로 이렇게 늠름하고 푸르냐?
누구의 권한으로 이토록 큰 그늘을 드리우느냐?”

버드나무도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냥 하늘 향해 푸른 가지를 펼치고 서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권위는 자연스럽게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아름답습니다.

참된 권위는 스스로 자기 증명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자기를 나타내 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시지만,
그 권위까지 내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장미나 버드나무처럼) 자체로 권위를 발산하실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