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의 집에서의 잔치 | 2024-0421 - YouTube 정리
◈레위의 집에서의 잔치 눅5:27~35 2024.04.21.
누가복음을 연구했던 로버트 캐리스가 이렇게 얘기했어요.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은 항상, 식사하러 가시거나, 식사 중이거나,
식사하고 나오시는 중이었다’
굉장히 많은 부분이, 누가복음의 전체 중에 약 20%의 분량이
잡수시는 자리, 식탁 교제에 할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첫 번째 기적을 어디에서? 가나의 잔치에서 하셨어요.
또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에도, 유월절 만찬을 가지셨고요,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레위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7장에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세요.
9장에는 5천 명을 먹이시면서 광야에서 같이 식사하세요...
.................................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자리가 10번 나오는데,
오늘 설교는, 예수님과 함께한 식사 세 번째 시간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식사를 아주 중요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냥 잡수시고 헤어진 것 그것이 아니라 잡수시면서 하신 말씀,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행동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것을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가도록
누가복음을 저술하고 있습니다.
먹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먹으면서 친해지는 것이죠. 먹는 그 대상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전통이 생깁니다.
가족의 전통은, 먹는 자리에서 시작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막 비난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눅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예수님이 참 자주 잡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이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텐데
그 ‘하나님 나라에서 너희가 먹고 마실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제 천국에 가서도, 우리가 먹고 마실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설교 시리즈가 끝날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기 원합니다.
더 많이 알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혼의 양식으로
배부르고 또 건강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눅5:27~28
이 시대에 멸시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 문화가 아부하거나 멸시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좀 나은 사람에게는.. 아부하고
자기보다 좀 못한 사람에게는.. 멸시하는 것이,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멸시하는 그 멸시를 경험하기 이전에
우리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멸시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 자신을 멸시한다는 것은 자존감 상실을 말합니다.
나는 쓸데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경멸할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경험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경멸하고, 자존감 없는 삶을 살아갈 때가 있는데
이것은 고통이죠.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경멸할 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넌 가치 없는 존재야”라고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눈빛이나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상당히 힘들어합니다.
만일 그런 느낌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용기와 힘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입니다.
눅5:27~28절을 보면
예수님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레위는 마태라고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마태복음을 저술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시의 세리가 어떤 존재였는지 잠깐 살펴봅니다.
당시 세리는 사람들에게 가장 미움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도 세무공무원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죠)
당시는 로마인들이 식민지에서 직접 세금을 거두지 않고
유대인들에게 그 임무를 맡기고
유대인들이 자기 동족들에게 세금을 거두게 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런 세금 징수의 독점권을 사람들에게 입찰 경쟁을 붙였고,
세금을 제일 잘 거둘 수 있는 사람에게 팔았습니다.
그 독점권을 산 사람이, 자기 동족들에게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세금 거두는 룰이 있었는데요, 로마에서 원하는 그 액수를 로마에 지불하면 됐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더해서 세금을 거둘 수가 있었죠.
물론 그 차액은 다 세리 자기 것이 되었죠.
그래서 원래 납부할 세금보다 몇 배가 되는 그런 세금을 징수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세금 징수원에게 부여된 큰 권한이 있었습니다.
영장 없이 아무 집에나 압수수색과,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검문검색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징수된 세금의 종류는 인두세, 생산세, 시장세, 수출세, 수입세, 토지세,
소득세, 도로세, 국경세, 교량세 등 수많은 세금이 있었습니다.
특히 토지세는 땅에 대한 세금뿐만 아니라
그 땅에서 거두는 곡물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겼죠.
곡물의 10분의 1, 과일은 5분의 1, 포도주 수입의 5분의 1,
이렇게 많은 세금을 부과했던 이 세리들,
만약 세금을 낼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돈을 빌려주어서 사채업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돈 빌려준 것에 대한 이자를 50% 이상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마치 세금 마피아처럼 세금을 폭력으로 수거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이 유대인들은 그들 세리들을 너무너무 미워했고
그들을 사기꾼, 강탈자, 폭도, 반역자라고, 로마에 부역하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 유대인의 사회에서 이들은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죄인 중에 제일 악한 죄인’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당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 출입 금지였습니다.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모든 회당과 교회에서 거절되었던 사람!
그래서 그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어울려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사람들인 자기들끼리 모여서 교제했던 거죠.」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눅5:29
병행구절 마9:10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 이라고 했죠.
여기서 ‘다른 사람, 또는 죄인들’은, 세리의 부역자들로 여겨집니다.
쉽게 말하면, 폭력배들, 세리의 뒤를 봐주는 로마군병들이나 그 부역자들일 것입니다.
세리가 콜을 하면, 바로 가서 그 집을 때려 부수고, 체납자들을 잡아가두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세리들도 계급이 있었습니다.
가장 높은 세리는 가바이 Gabbai 로 토지세나 소득세 등 큰 세금들을 주로 받아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삭개오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세리였습니다. ‘세리장’이라고 나오죠. 눅19:2
그 밑에 모쿠스 Mokus 라는 세리로, 모쿠스도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레이트 모쿠스와 리틀 모쿠스, 즉 큰 모쿠스와 작은 모쿠스가 있었는데,
큰 모쿠스는 사람들을 직원으로 고용해서, 그 직원이 세금을 받게 했고,
작은 모쿠스는 직접 세금을 받았습니다.
레위가 “길가 세관에 앉았더라”라는 말은 눅5:27
그가 작은 모쿠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관’은 눅5:27
오늘날의 큰 세무서 같은 사무소가 아니라 Tax booth와 같은 형태입니다.
요즘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한 사람 들어가 있는 것과 비슷했겠죠.
▲당시에 이 세리들은 회개도 할 수 없는 존재, 절대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우리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아무리 죄가 많아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는
그렇게 간주되는 사람에게라도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 보시고”
‘보시고’는
주의 깊게 응시하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아오마이
to behold, look upon, view attentively, contemplate (often used of public shows)
그런데 이 리틀 모쿠스인 레위에게 있어서, 이것은 정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에요.
왜냐면 평소에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세리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어요.
레위가 깜짝 놀랐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보시는 그 시선에 압도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입에서 너무나도 놀라운 음성이 들립니다.
“나를 따르라” 5:27
레위는, 사람들이 자기와 마주치면, 얼마 후에 ‘우웩 퉤’ 하고 침을 뱉고 지나가는 소리를
자기 등 뒤에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그런 따듯한 소리는, 아마 처음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신 그 의미는 ‘나는 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네가 정말 귀한 존재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결론적인 얘기지만, 이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마태복음을 기록합니다.
레위를 포함한 제자들이 한 일은 세상을 다 뒤집어엎는 일이었습니다.
역사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시작하시면서 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멸시하고 침을 뱉고
마치 없는 것처럼 투명인간 취급하며 미워하던 바로 그 레위에게 가셔서
“네가 그 사람이야. 내가 너를 원하고 있어. 나를 따라오라”
이렇게 우리 주님은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를 부르신다는 사실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눅5: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여러분 이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레위는 예수님이 누군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뭔가 구약을 잘 가르치는 랍비 정도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며, 이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이 사람이 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신학적 입장이 어떤 것인지...
그는 잘 알지 못했어요.
‘당신을 따르면 무슨 일을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그분이 나를 부르신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분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
그 외에 다른 것은 몰라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렇지 않아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사람들은 너무 질문이 많습니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많지만,
질문이 너무너무 많아요.
‘답을 주시면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십시오. 그럼 내가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삼위일체, 성령론, 예정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서 나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럼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과거 기독교 역사를 알기를 원합니다.
기독교가 역사상 올바르게 행해 왔는지요?’
‘이 세상에서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이슈에 대해서
교회 입장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그럼 내가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사람들은, 질문이 많습니다.
너무 질문이 많은 것은, 무슨 대답을 듣더라도, 결국은 안 믿겠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레위는 그러지 않았어요.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주님을 따르면 어떻게 되는지...
성경에 대해 내가 무엇을 알아야 되는지...
이것이 주님을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 주님을 따르는 전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소명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전제조건인 것입니다.
물론 막무가내로 모든 것을 덮어두고 주님을 따르는 게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내가 믿음으로 먼저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한다면,
(물론 그 배경에는, 우리 주님의 부르심이 있지요)
차츰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이 레위를 보십시오. 따르니 결국 모든 것을 다 알았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마태복음이란 성경까지 썼어요.
그가 기록한 마태복음을 통해서, 이제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사람까지 되었어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일자무식, 깡 무식하던 사람이
위대한 놀라운 통찰력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차츰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믿음으로 결단하고 따라 나섰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죠!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예수님은 멸시받던 사람 레위와
함께 따뜻한 식사를 하면서, 그의 자존감과 인격을 회복시켜주신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본래 천성적으로 사람을 멸시합니다.
‘아부 아니면 멸시’가 세상 사람들의 문화라고,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나를 멸시하는 것보다,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멸시한다는 사실입니다.
나 스스로 모든 자존감 다 잃어버리고 ‘난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루저야, 실패자야’
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너는 귀한 존재야.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야!’ 라고 하십니다.
◑2. 예수님은 죄인들과 접촉해서, 그들을 정결하게 변화시키셨습니다 눅5:29~32
레위(마태)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님을 우리 집에 모셔야 하고
우리 마음에 모셔야 하고, 예수님을 우리가 있는 곳에 모셔야 합니다.
레위는 그 잔치 자리에 자기 친구들을 초대했어요.
그들이 (자기처럼) 예수님을 만나도록 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기 집에서 ‘친구초청잔치, 새생명축제’를 한 것입니다.
“세리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29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경건한 유대인이 아니라 세례들과 비슷한 사람들만 있었습니다.
가바이들, 모쿠스들, 그들의 조력자, 협력자들이 와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남은 음식 먹으러 와 있었겠죠.
당시는 음식이 귀한 시절인지라, 잔치를 하면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기다렸다가, 잔칫상에서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볼 때는 ‘저 집에 인간 쓰레기들만 잔뜩 모였구나’
라고 생각할 바로 그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에 계셨습니다.
▲레위는 제법 부자였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왜냐면 그가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29
「당시 잔치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당시 돈 있는 유대인들이 열었던 잔치는 10시간 정도 계속 이어져 진행됐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잔치하면서 그들이 정말 부러워하던 로마 사람들이 여는 그 잔치를
흉내 내어서 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음식에 코스가 있는 잔치였습니다.
먼저 작은 새들과 오리 같은 작은 요리가 나왔습니다.
이 코스가 지나고 나면 휴식 시간이 있었습니다.
무용수나 곡예사 그리고 마술사 등이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잠깐 소화시킨 후
두 번째 코스로 수프가 나오고, 에피타이저가 나왔다.
세 번째로 메인 코스로 구운 고기와 와인이 나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돼지고기를 금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잘 지키지 않잖아요. 다들 쉬쉬하면서 먹었습니다.
보니까, 이방인들이 돼지고기 먹고도 아무 탈이 없거든요.
그들은 좋은 그릇에 담아서 식사를 했고,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하면서
뼈들은 누운 자리 가운데로 버려서, 중앙에 뼈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그런 장면을 담은 그림들도 있죠.
10시간 정도 잔치하면서,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더 잘 거둘 수 있는가
또 세금 거두는 기발한 정보를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께서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잔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1부는 먹는 잔치였고 2부는 심포지움 등이 열렸다고 합니다.
토론회가 열렸을 때, 말을 잘하거나 유명 연사들을 초대하여
연설이나 강의를 하게 했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그런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이런 잔치, 파티가 진행되는데 갑자기 ‘종교 경찰’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오늘날 회교권의 ‘종교 경찰’이라고 표현 가능할 것입니다.
(고대는 제정일치 사회이기 때문에, 종교가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도 유대민족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지요.)
눅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오늘 설교에서 살펴볼 핵심구절입니다.
그들은 스토커처럼 미행하며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요?’ 이렇게 막 지금 책망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신과 제자들은 이렇게 죄인들과 함께 먹고 있는 겁니까?’
그 사람들은 왜 그러는가요?
자기가 무슨 잔치 비용을 지불한 것도 아니고, 그냥 못 본척 하고 있으면 되는데,
왜 지켜보고 있다가, 잔치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따지고 문제를 삼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들의 죄와 그 죄성, 그 죄의 세균들이 오염되어,
자기들의 사회 공동체 안으로 퍼져나가면서, 그 병이 광범위하게 옮겨질까 봐
그것을 금지시키는,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TV에서 보면, 극우파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일을 가지고,
시장이나 거리에 나와 ‘사회와 시민을 감시’하는 일을 자처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들만 안식일을 지킬 뿐만 아니라, 온 사회와 시민이 함께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거죠.
왜냐면 만약 일부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된다는 논리죠.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코로나 팬데믹 때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사람들이 과도하게
다른 사람들의 자유나, 집회를 방해하고 금지하는 일들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방역수칙을 어긴 사람에게는,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사회적으로 돌렸습니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때리면서, 크게 망신을 준 것은,
혹시나 그들이 코로나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할까봐 그럤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대한 질투나 경쟁의식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약점이나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으니까요...
정말 유대 사회를 죄로 오염시키는 그런 죄의 근원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바리새인들은 정말 오염의 근원이고
이 사회를 오염시키는 그 근원이 이 사람들에게 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제거하고 그 사람들을 사회에서 내쫓아 없애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그 무리들의 죄가 점점 퍼져나가서
유대인 사회를 오염시키고 병들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자기들의 그 공동체 정신에 위배되어
하나님께서는 유대나라를 복을 주시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시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에요.
예수님께서 그것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역으로 그것에 집중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눅5: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나병 역시 부정한 병이라서 나병 환자들은 공동체에서 쫓아냈습니다.
나병 환자들과 접촉하는 사람들까지도 공동체에서 내보내야 하는
그런 율법 속에서 이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아주 의도적으로 이렇게 행동하셨어요.
예수님께서 그와 떨어져서, 말씀으로만 명하여 고칠 수 있었는데
일부러 나병 환자에게 가서 만졌습니다.
이건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어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만지셨다면, 그 나병균에 감염될 것이고,
그것은 율법의 정결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로 의심되면, 무조건 격리시키거나 감금시켰습니다. 레13장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레위의 잔치에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은,
마치 나병 환자를 만진 것과 같은 이치죠.
지금 이런 모습을,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죄에 감염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거룩이, 그들의 나병과, 그들 세리들의 죄성을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이, 그들의 죄에 접촉되어, 감염 오염된 게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의 거룩이, 그들의 죄와 병을 접촉해서, 치료하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에 접촉될 때, 깨끗한 것이 더러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더러운 걸레로 깨끗한 상을 문지를 때,
더러운 걸레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상이 더러워지는 거죠.
이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이 말도 원리는 맞죠.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들이 깨끗한 상이 아니었던 거죠. 오히려 더러운 걸레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 거룩하고 깨끗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더러운 죄인들과 접촉해서,
주님의 거룩함과 깨끗함으로, 오히려 그 더러운 죄인들을 깨끗하게 만들기 원하셨습니다.
마치 아프리카에서, 오염된 물에 어떤 약품을 넣어서 물을 정화시킨 후에
그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세리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접촉하는 사람마다, 예수님과 만나는 자마다,
예수님께 손을 대는 자마다,
그의 더러움이 예수님께 옮겨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움이 그에게 옮겨갔고,
그리고 그가 치유되고, 그가 새롭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우리들의 내면이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것에서부터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거룩함을 추구하지만, 그 거룩함은 정말 깨지기 쉬운 거룩함입니다.
스스로 만든 거룩함입니다.
사람들은 신에게 호의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깨끗해져야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해서
스스로가 깨끗해지기 위해서 많은 애를 씁니다. 그것은 깨지기 쉬운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더러운 사람들과는 만나지도 않고,
더러운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면서, 자기의 깨끗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유대교인들이 그랬는데... 그건 복음이 아니라, 세상 종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깨끗함은 깨지기 쉬운 종교적인 거룩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거룩함은, 예수님과 접촉하는 자마다
예수님의 거룩함과 깨끗함이 그에게 옮겨졌으며, 그가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나예요.
예수님과 접촉하는 순간, 나의 더러운 것이
예수님께 옮겨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깨끗함이, 예수님의 거룩함이 나에게 옮겨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가 깨끗해졌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눅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런 역사가 어디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다 환영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
거룩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중에 한 사람도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일하실 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고, 어떤 사람도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덧붙여 한 가지,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사실은,
내가 누군가를 접촉해서 그를 오염시킬 수도 있고, 내가 오염될 수도 있으며
내가 누군가와 접촉해서 그를 정화시킬 수도 있고, 내가 정함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교인이고, 권사이고, 장로이고, 주의 종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누군가와 접촉해서, 그들을 다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추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심한 경우, 오히려 내가 멀쩡한 사람을 오염시키거나 실족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경고하셨죠. 너희가 사람을, 소자를 실족시키면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낫다고요.
우리는 항상 조심해서, 다른 사람을 오염시키는 죄의 근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성화시키는, 예수님 같은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과거에 우리 기독교의 전통 중에 ‘성인 saint’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성도에게 주는 메달이나, 증서가 아니고요,
사람들이 그를 만나고 나면, 뭔가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의 말씨, 그의 행동, 그의 표정, 그의 설교, 그의 따뜻한 손잡음,
이렇게 그와 5분, 10분 접촉하고 나면, 뭔가 그의 거룩함을 내가 전달받는 것입니다.
그런 전달력이 있는 사람들을 ‘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성인들의 표상이었지요.
요즘 사회는, 종교인들을 ‘성인’으로 여기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너무도 당연히
똑같은 보통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통이, 우리 기독교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의 손수건이나 그의 손길이 닿아도’
그의 거룩함이 나에게 흘러들어온다고 믿었던... 그런 전통이 있었다는 거죠.
영~ 비성경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에 들어가면, 기도가 잘 됩니다.
반대로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곳에 들어가면, 기도를 하기는 해도, 기도가 잘 안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기도를 많이 하는 분과, 만약에 손을 잡고 같이 기도를 해 보십시오.
아니면 가까이에서 기도를 같이 해 보십시오. 신기하게 기도가 덩달아 잘 됩니다...
이런 거룩한 영향력을, 예수님처럼, 끼치기를 사모하는
거룩한 능력을 소유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상 죄인들을 대할 때에,
그들을 멸시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따뜻하게 품고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에게 나의 거룩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대조본문인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
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런 평소의 자세를 가지고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죄인을 무조건 배척, 배타가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품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죄인들에게 생명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본문의 말씀처럼, 세리와 죄인들이 모여서 잔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긍휼과 거룩함을 덧입는 자리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 날을 꿈꾸는 저와 여러분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요약/정리 : Y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