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죽도록 충성하라

LNCK 2024. 4. 24. 10:1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계시록

 

2024년03월17일/계시록2:8-11/’죽도록 충성하라’ - YouTube

죽도록 충성하라         계2:8~11 

 

도입        주1)

 

*위 동영상 7분경부터 녹취 시작

서머나 교회는 어떤 상황이었는가요? 

 

계2:8절 '서머나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그 교회의 사자(편지배달부)에게 편지를 쓰는데,  *결국은 그 교회와 지도자에게 편지한 거죠.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묘사가 일곱 교회마다 각각 다 달라요. 

 

그런데 그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그 교회에 말하고 싶은 메시지와 상당한 연관성을 갖고 있어요

서머나 교회 사자에게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나요?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첫째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   2:8a
-두 번째는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  2:8b

이 두 가지의 묘사는, 서머나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과

굉장한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중요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일곱 교회마다 <예수님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각자 다 달라요. 
그런데 그 다른 묘사는, 그 교회가 안고 있는 어떤 문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요. 

그런데 서머나교회는 두 가지로 묘사를 했어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즉 알파와 오메가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서 인용한 구절이죠.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이사야서에서 자신을 가르쳐 소개하실 때 '나는 처음이오 나는 마지막이라'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처음이요 나중이다'로 소개하셨죠. 
그러면 사44:6절과 관련해서 보면, 본문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가 서머나교회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어요. 
이 문제 때문에 서머나교회가 굉장한 고통을 받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첫번째 어려움은 <환란과 궁핍>

2:9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알거니와'
여러분 주님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숨소리까지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시죠? 아무리 수십억의 인구가 이 지구촌에 살다 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미세한 사연 하나도 간과하지 않습니다. 창조주시고 주권자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서머나교회의 환란과 궁핍을 아신다고 했어요.
그럼 왜 서머나교회 교인들은 가난했을까요? 

어떤 학자는 그렇게 얘기를 해요. 처음에 복음이 들어갈 때는 
노예 계급을 중심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마 교회에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모였었나 보다... 그렇게 해석합니다만, 
아닙니다. 여기서 궁핍의 성격은, 스스로 선택한 궁핍입니다. 

서머나 도시는, 황제 신전을 유치할 만큼 부유한 도시였어요.
그런데 왜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환난과 궁핍을 겪고 있었을까요? 

여러분 당시 '길드'라는 상인조합이 있었는데,
그 상인조합 길드에 들어가야, 경제 시스템 속에서 사회적인 혜택을 누리고, 
경제 활동을 하도록... 사회 구조가 그렇게 돼 있었습니다. 

그럼 들어가면 되지요. 
그런데 그 길드 상인조합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교제권이 신전에서 이루어지고 
신전에서 만남과 상거래가 주선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상숭배와 함께, 황제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가이사가 주님이십니다' 이 고백을 비껴서 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서머나 교인들은, 그 길드에 가입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선택한 궁핍이에요. 
'우리가 비록 저 세상 사람들의 부유함처럼, 그 물결에 휩쓸려 있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하루에 두 끼를 먹더라도, 오직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충성을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궁핍은 스스로 선택한 궁핍입니다. 

요즘도 사실은 다를 바가 없어요. 
세상이 다 투기 안 하면 요즘은 살 수가 없는 경제 구조를 갖고 있어요. 
그저 미련스럽게 그냥 한 푼, 두 푼 평생 꾸준히 저축만 해봐요. 
그러면 그게 물가를 감안하면 결국 마이너스가 돼요.

이윤이 붙어봐야 1~2 % 이렇게 붙는데, 

어디 딱 한번 땅 사가지고, 몇 년만 기다렸다가 딱 팔아치우면, 억대가 떨어지는데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해?' 예를 들면 그런 거예요. 
아니 주변에도 다 그러고 (투기하고) 살더라고요.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설교를 듣다가, 어느 날 내적인 충격을 받았어요. 
그분은 강남에서 소위 '일타 강사'입니다. 한 달에 수입이 몇 천만 원이에요. 

그런데 말씀을 듣다가, 사교육에 대한 적나라한 비성경적인 가치를 깨닫고 
'내가 앞으로도 살 날이 많은데, 이러고 살아야 되겠는가?' 
그걸 내려놔요. 우리 교회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는 기꺼이 '좋은 교사 운동본부'라는 NGO단체 같은 데 들어가서, 간사하고 계세요. 

이런 건 스스로 자처한 궁핍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No
지금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그런 궁핍을 당하고 있어요. 현실이죠. 

2:9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그분들이 비록 그 시대에 그런 궁핍을 자처하고 살았지만 
상대적으로 세상은 돈이 철철 넘치게 먹고 마시고 취해 살았지만 
그런 것들은 영원히 가는 겁니까? 일시적인 것입니까? 
일시적인 것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계시록을 쓴 목적이 뭐라고 그랬어요? 진짜가 뭐냐? 
가끔 목회자들 가운데 참 좋은 대학 나오고, 실력 있고, 똑똑하고, 명석하고, 성품 좋고, 

이런 분들이 있죠.

 

'저분들이 이 길로 안 들어오고, 세상에 좋은 기업 들어가서 
넉넉한 월급 받고 연봉 받고 살면 
저렇게 때마다 이사 다니면서 옹색하게, 궁핍하게 안 살아도 될 텐데...' 
하는 마음이 사실 들어요. 

그런데 그분들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참 기쁘게 즐겁게 행복하게 지내요. 감사하게 지내요. 
누가 진짜 부자입니까? 그 사람들이 부자로 사는 거예요. 
사실은 그게 부유한 자의 삶의 태도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편지를 통해서 '네가 지금은 궁핍 가운데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네가 부자다'
그 격려가 이 아침에 우리 성도들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서머나교회의 두 번째 어려움은 <비방>입니다

2:9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여러분 '마타도어' 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정치계에서 가장 극성을 부리는 현상인데, '흑색선전, 비방'을 뜻합니다. 

마타도어 라는 말은, 원래 스페인 투우에서 마지막 투우사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러 투우사들이 나와서 소하고 싸우죠. 
그러다가 마지막에 마타도어가 나옵니다.   *원래는 '마타도르'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망또로 소를 이리 저리 속여서, 결국은 갖고 있는 칼로 소의 급소를 찔러서 
쓰러트리는데, 그 마지막 등장하는 투우사를 마타도어 라고 불러요.
그러니 '이리 저리 속이다가, 결국은 급소를 찔러서 쓰러뜨리는 자'라는 뜻이죠.

이게 특별히 선거철이 다가오면,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이 마타도어(흑색선전)가 극성을 부려요. 
우리는 그런 흑색선전이나 비방에 현혹되면 안 되죠.

▲그렇다면, 서머나 교회가 그런 비방을 그저 무시하고 지나가면 되지, 그게 왜 환란이 될까요? 
그 비방이 당시 로마제국하에 살았던 성도들에게 
얼마나 생명의 위협과, 생사가 걸린 문제였는가를 좀 깊게 이해해야 됩니다. 

로마제국이라는 커다란 우산 아래, 종교 중의 하나로 유대교가 존재해 있었어요. 
로마제국은 식민지 국가들이, 자기 고유 종교를 믿도록 하는 관용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만 용납을 안 했죠. 

그 종교로 로마의 평화를 깨는, 로마의 통치 질서를 파괴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참혹하게 대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복음이 선포된 곳에 자꾸 문제가 생겨요. 시끄러워진단 말이에요. 
그래서 붙들려가고, 고난을 겪었던 거죠. 복음 자체 때문이 아니고. 

그런데 로마 제국 아래 가장 위협적인 단체가 기독교였습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자꾸 늘어나니까, 
기독교가 처음에는 그저 유대교인 줄 알았던 거죠...

원래 유대교라는 둥지 안에서 태동 되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까 로마 정부의 시각에서는, 자꾸 유대교를 주시하는 거예요. 
그들은 유대교인지, 기독교인지, 로마 정부에서는 그거를 선명하게 분간할 수 없었겠죠.

그러다 보니까 유대교가 (기독교로 인해서) 존폐의 위기를 자꾸 겪게 되니까, 
자체적으로 기독교와 차별화를 하게 됩니다.

사44:6절에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라고 했는데,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이요 나중이다' 이렇게 소개하거든요. 2:8 

이 말을 듣고, 가장 기분 나빠했을 사람이 로마 당국이겠습니까, 유대교겠습니까? 
그렇죠. 유대교죠.
안 그래도 유대교인들이 기독교로 빠져나가서 예민한데...

그래서 정치사회적인 요인과 신학적인 요인이 이렇게 뒤엉켜 있었어요. 
유대교에서 자기 존폐의 위협을 당하니까, 
이러다가 우리가 가만히 있다가는 로마 당국으로부터 억압을 받겠다... 하는
위협을 자꾸 느끼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방어를 위해서, 기독교인들을 고발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저 사람들하고 다르다. 저 사람들은 로마 당국에 굉장히 앞으로 위험스러운 
잠재 요인이 될 거다' 하면서, 자꾸 흑색 성전을 퍼뜨리고 
고소고발을 하고,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형사고발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서머나교인들이 잡혀들어가요. 투옥이 돼요. 목숨을 잃어요. 고문을 당해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비방'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2:9
아주 심각한 문제인 거예요. 

우리도 이때 조심해야 돼요. 
우리도 억울한 소리를 듣고, 비난을 받고 그러면 
제일 위험한 방어 전략이, 감정으로 대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대목이, 사탄이 노리는 노림수예요. 
사탄은 기가 막힌 천재인 것이, 전선을 자꾸 바꿔요. 

그래서 감정적인 싸움을 자꾸 걸어요.

그러면 성도도 욱 하고 참지 못하게 돼죠.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참고 있으니까, 날 바보인 줄 알아?' 

그리고 짠 하고 나도 칼을 뽑고 나오면, 한바탕 말을 쏟아놓고 나오면,
잠깐은 내 속은 시원할 거예요. 사탄은 그걸 노리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비방으로 빚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진단을 하십니다.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2:9

이건 예수님께서 격한 반응으로 '에이 못된 놈들' 이렇게 한 마디 하고 끝내신게 아니라,
그 배후 세력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라... 그 말이에요. 
'사탄의 회당이라' 함은 마귀의 획책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마귀는 우리의 팩트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건드려요.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전신갑주가 전부 우리 정서(감정)에 관한 방어 전략입니다. 

분노, 혈기... 이게 전부 사탄의 도구로 쓰여지기가 얼마나 쉬워요? 
그런 비난과 비방과 오해가 막 내게 덧입혀질 때, 
우리는 감정적인 대응을 하게 됩니다.
그게 확실한 대응책인 것 같고, 빠른 대처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거는 속는 거예요. 

그건 마귀가 전선을 교묘하게 바꾸는데, 사실상 우리가 말려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말려들어가지 마세요. 

한 번은 어느 철학 교수님이 글을 썼는데 
어느 유명한 명문대학 앞에서, 대학생들이 일본 국기를 불태우고 
땅바닥에 밟고 지나가고, 그 나라의 지도자 인형을 만들어 화형식을 하고 그럴 때, 

'그럴수록 그 나라를 이기려면 더 열심히 공부해라. 실력을 키워라. 
그게 이기는 방법이지, 이렇게 한 번 떠들썩한다고 
그 나라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런 냉정한 칼럼을 신문에 썼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제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런 전선을 오해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 '사탄의 회당'이라 함은, 예수님께서 화가 나서 
'에이 이 마귀 새끼들!' 이러고 욕하신 게 아니에요. 

진짜 배후 세력이 뭐냐? 그걸 밝히신 거죠.
진짜 너희의 싸움이 이게 무슨 싸움인지 아느냐? 
감정 싸움이 아니라, 이것은 영적인 전쟁이다... 그 뜻이에요. 믿습니까? 

마지막 시대는 숫자 모아서 으쌰으쌰 하는 게, 우리의 싸움의 방식이 아니에요. 
영적인 싸움을 해야 돼요. 

영적인 싸움은 뭐겠어요? 
우리가 엎드려서 기도하고,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그 다음에 진리에 더 목숨을 거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걸 줄 알아야 되는 겁니다. 
거기서 사탄이 성도를 두려워하는 거죠.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아이고 얘가 참 날 뭘로 보고, 이런 잡다한 것으로 시험하냐?' 
'야 내가 이런 거 하나 못할 줄 아냐?' 그러고 짠 하고 돌멩이로 떡을 만들었다고 해보십시다. 
그럼 구속사역은 끝나는 거예요. 

사탄이 가장 노리는 게 뭔지 아세요? 예수님을 신으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걸 제일 무서워하는 거예요. 왜요? 
온전한 인간이 되시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온전히 대속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그 시험은 거대한 신학적인 싸움이에요. 

우리 교회가 그런 유혹에 얼마나 많이 넘어갑니까? 
자꾸 교회의 싸움을 물리적인 싸움으로, 크기의 싸움으로 벌이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흔한 말로 '우리 교회가 지금 한 200명 모이니까, 
한 1천 명만 모여도 일할 수 있을 텐데...' 이게 마귀의 생각이에요. 
자꾸 교회의 동력을, 크기와 규모로 바꾸려고 하는 거죠. 

이게 사탄의 속성이에요. 한국교회가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겨자씨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돼요. 믿습니까? 전선을 분별해야 돼요. 

◑죽도록 충성하라

2:10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마귀가 몇 사람을 옥에 던질 거랍니다. 그리고 10일로 기간을 정했죠. 
그렇습니다. 환란을 당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무기한 고난은 아닙니다.

여기서 10일은, 그 배경이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왕의 진미를 거절하죠. 

단1:14~15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이 소년들이 왕의 음식을 거절한 이유가 뭐냐면, 
왕의 상에 차려지는 것은, 사실상 신에게 들여지는 우상의 재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고대시대의 왕들은 다 우상이에요. 신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소년들이 그 음식을 거절하죠. 그리고 열흘 동안을 테스트합니다. 
그건 자초한 시험이에요. 진짜 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진짜 주님이시다'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10일간 한시적인 시험, 고난 기간을 통과합니다. 

그런데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나중에 폴리캅을 중심으로 이 고난 속에 많이 순교하죠. 
그런데 고난 끝에 약속한 게 있어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오늘 설교제목이 여기서 나왔는데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죽도록 충성하면, 감옥에도 안 가게 하고, 살려주고...'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죽기까지 충성하라' 입니다. 

▲그리하면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그리하면 생명의 관을 네게 주시리라. 

여기서 '관'은 화관, 꽃으로 엮은 관입니다. 
당시 경주에서 승리자에게 씌워주는 관이 화관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꽃으로 엮은 화관'을 의도적으로 쓴 이유가 뭘까요? 
장차 끝까지 이 경주를 다한 성도들에게 약속된 관이에요. 그게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 관은 누가 받느냐? 
둘째 사망을 비껴간 성도들만 이 관을 받습니다. 

계20:11~12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사람에게는 물리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죽음이에요. 
그런데 둘째 죽음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둘째 죽음과 관련이 없어요.
어린 양의 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는 둘째 죽음과 관련이 없어요.
 
그러면 둘째 죽음은 어떤 형태로 성경은 소개하고 있나요?
계20:13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이거는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지 못한 자들이 가는 최종적 결과입니다. 
이 두 번째 사망, 이 불못의 사망은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어린 양의 공로로, 완전히 해결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그런 행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행위의 기준은 어린 양의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주신 공로를 의지합니다. 
믿습니까? 

♣나만 아프지 않고, 아버지도 함께 아파하신다 (펀 글)

 

운동하러 밖에 나가려는데 아들이 좇아 나온다.

"아빠~"

 

38개월 된 건이는 한국나이로 치면 4살이다.

제법 말이 많이 트여 이젠 문장도 구사하는데,

그런 아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마음이 흐뭇해진다.

 

나가려는 나를 잡으려는 것일까?

다시 발길을 돌려 문을 닫고 들어오려는 데,

 

건이가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른다.

그와 동시에 문에 무언가 끼여 있다는 느낌이 순간 들었다.

 

이런!

건이의 손가락이 현관 문틈에 조슴 끼여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힌 것은 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

 

얼른 손가락을 살펴보니 제법 많이 눌려 있다.

금새 손가락 끝이 피멍이 들었다.

얼마나 아플까!

어린 것이 얼마나 아팠을까!

 

순간 내 눈엔 눈물이 핑 돌았다.

큰 사고는 아니지만, 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순간 받았다.

 

우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미안하다. 건아. 아빠가 실수를 했구나. 미안하구나. 건아......"

 

하나님,

아들의 작은 상처에도 이 처럼 마음이 아픈데,

하나님은 독생하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죽기까지 저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셨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주님이 외치실 때,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지셨습니까

 

아들의 작은 고통에도 아버지의 마음은 한없이 아파하는데,

커다란 고통이, 아니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아들을 내어 준다는 것은

결코 저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죄인인 저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죄인 된 저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일만분지 일이라도,

아니 억만분지 일이라도 느끼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마음을요...

그러므로 오늘 내가 아파할 때, 하늘의 아버지도 나와 함께 아파하신답니다..

 

또한 주님은 죽기까지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

정말 주님은 그 말씀을 실제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그래서 우리는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데,

그 근거는 주님이 나를 죽도록 사랑하셨기때문입니다.

 

주님께 받은 그 사랑에 감격해서

나도 주님을 죽도록 충성하며 따를 수 있는 것이죠.

 

♣오늘의 위대한 기독교는 중세의 종교 개혁자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마틴 루터와 쯔빙글리입니다.

 

이들은 가톨릭의 잘못된 점을 고쳐야 한다는 것에는 같은 목적인데

그들이 개혁을 행하는 방법에는 생각이 달라서 처음에는 자꾸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쯔빙글리는 자신의 영혼을 흔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되어

루터와 마음을 합하여 위대한 하나님의 사업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산길을 걷다가 두 마리의 염소가 하는 행동을 보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의 염소가 한 마리는 내려오고 다른 한 마리는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한쪽은 가파른 산이고 다른 한쪽은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겨우 염소 한 마리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염소 두 마리는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의 염소는 서로 싸울 듯이 바라보고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래쪽에서 올라가던 염소가 갑자기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내려오던 염소가 엎드린 다른 염소의 등을 밟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두 마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각기 제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쯔빙글리는 미물인 짐승도 낮추어 엎드릴 줄 알고 그로 인하여

서로 돕고 사는 데 나는 사람이고

더욱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다투어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 주시려고 예수님도

자신을 사람으로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시지 않았는가 하고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루터와의 의견충돌이 있을 때마다 자신을 낮추고 협력하여 화평을 이루어

종교개혁의 위업을 아름답게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이렇게 제일 먼저 자기 자아를 죽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

 

주1)     도입

오늘은 계시록의 일곱교회 중 두 번째 시간, 서머나 교회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죠. 
그 교회를 알려면, 우선 그 교회가 담아져 있는 도시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그 교회의 성격이 정확히 나오겠죠. 

'서머나'라는 이름은, 뜻 자체가 아주 예뻐요. '몰약, 쓰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베소가 지중해 해안가 쯤에 자리잡고 있다면, 
에베소 북쪽으로 65KM 거리 쯤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비슷한 거리를 올라가면, 버가모 교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7교회가 써클 모양으로 위치하죠. 

그런데 이 도시가 갖고 있는 색깔이 다 있어요. 
서모나는 과연 어떤 도시일까요? '충성스러운 도시'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름이 매겨질 정도면, 거기에 걸맞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한 15개 도시국가에서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을 제일 먼저 유치하자' 하는 치열한 경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황제를 그렇게 숭배하고 싶어서, 신전 유치 경쟁을 했을까요? 글쎄요...
결국은 맘몬의 원리입니다. 
신전이 자기 도시에 유치가 되면, 로마 정부로부터의 지원은 물론, 
그 신전을 중심으로 많은 우상숭배 메커니즘을 통해서 경제, 재정이 오고 갑니다. 돈의 문제예요. 

그래서 이거를 유치하기 위해서 도시들이 치열하게 경쟁을 했는데, 
첫 번째 황제의 신전이 세워진 도시가 서머나입니다. 
그래서 서머나 도시 하면 '충성스러운 도시' 이미지가 새겨졌죠. 황제를 향한 충성!

그런데 오늘 말씀의 제목이 뭡니까? '죽도록 충성하라'  2:10     
본문은, 황제를 향한 충성이 아니라,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라는 거죠.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이 글(계시록)을 쓰면서 
그 로마제국 하에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 이 글을 던질 때에는 목적이 있었어요.
'진짜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런 가짜 것에 현혹되지 말고, 진짜가 무엇이냐? 
예수만이 참된 진리이고, 소망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그 흔들리는 시대에, 성도들이, 교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진짜를 드러내는 겁니다. 

오늘 설교 제목도, 성경에선 따온 제목이지만,  *죽도록 충성하라
황제에게, 또는 그 시대의 돈과 우상에게 충성하는 게, 진짜 충성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시대가 그렇지 않습니까? 전부 뭐 때문에 살아요? 돈 때문에 산다고요. 
돈이 정의이고, 돈이 선이고, 돈이 해답이에요. 

그런데 오늘 말씀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우리가 이 땅에 죽도록 충성해서 쌓고, 먹고, 가지려는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고, 
유한한 것이고, 소멸될 것이라는 겁니다. 

진짜 우리가 충성해야 될 대상은 무엇인가를 
본문에서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거죠. 

그런데 서머나교회의 유명한 잘 알려진 특징이 뭐냐 하면, 
서머나 교회는 책망이 없어요. 일곱 교회 중에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유일하게 책망을 받지 않았던 아주 대단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도 서머나 교회처럼,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 교회는 바로 여러분 각자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어떤 부수적인 특징이 있는가 하면, 
과학과 의술이 발달하고, 특이한 것은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도시예요. 
그래서 아마 황제를 숭상하는 신전도, 그런 이유로 유치가 되지 않았겠는가? 
학자들은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