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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교회 2024-04-21 주일예배 // 공동체 안에서 유익한 제자가 되라 - YouTube
◈공동체 안에서 유익한 제자가 되라 눅17:1~10
본문 눅17:1~10절까지는 눅13장 정도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여정이 마무리가 되는 시점입니다.
다음 시간에 살피게 될 17:11절에는
'예수님께서 또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라는 것을 누가가 한 번 더 기록하면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고 있는데,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한 여정이 마무리가 되는 시점입니다. *13:1~17:10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제자들에게,
'공동체에서 어떻게 하면 유익한 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교훈을 하고 계십니다.
◑17: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부정의 부정, 즉 이중부정은 강한 긍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여러 성도들과 같이, 공동체로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교회로,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여러분 '실족'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을 시험들게 하고, 망하게 만드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망하게 만드는 것,
그 망하게 만드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라고 예수님께서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가 되새김질을 하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실족시키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까요.
아무리 모범적인 교회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거기에는 한계가 있고, 교회는 연약함을 가진 공동체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완전한 공동체는 없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교훈하십니다.
그런데 완벽한 공동체가 없으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넘어지게 만드는'
즉 '남을 실족시키는 일을, 그러면 해도 되는 건가요?'
예수님의 말씀은, '실족시키는 일이 없을 수는 없는데,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17: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여기서 '작은 자 little one'는 누구겠습니까?
-나이가 어린 사람들을 뜻할 수도 있지만
-교회에서 존재감이 낮은 자들, 즉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
-삶이 형통하지 않고 여러가지 힘든 여건과 환경 속에 놓여져 계신 분들이
'작은 자' 속에 포함됩니다.
결국 이분들은, 쉽게 상처를 받으실 수 있는 분들이죠.
우리가 살다보면, 자기 삶에 큰 문제가 없고 형통할 때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한테 상처가 되는 말과 행동을 해도,
생각보다 쉽게 넘어갑니다.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삶이 어렵고, 또 곤경에 빠졌을 때
그때는 다른 사람이 호의로 했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하게 한다면,
그 사람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
작은 자(little one, 과거 성경에는 '소자')를 실족시키는 언행은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는 심각한 잘못이다.. 라고 예수님은 교훈하십니다.
'연자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과장법입니다.
고대에 사람을 처형하는 방법 나중에 하나가 수장시키는 건데
그때 목에다 무거운 돌을 매어서 바다에 던져 버리는 거죠. 그러면 사람은 죽습니다.
유대인의 연자맷돌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나귀가 계속 움직여서 맷돌을 돌리면,
밑바닥에 있는 곡물들이 빻아지는... 그렇게 탈곡을 했지요.
결국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면, 살아나는 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것은 뭔가 하면,
작은 자 하나를 넘어지게 하는 것, 실족시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 앞에 연자맷돌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게 오히려 나을만큼
그만큼 심각한 죄요, 저주받을 일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마18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마18:7~10절을 보면,
마18:6절에 연자맷돌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 마18:7절에 예수님이 이렇게 교훈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가해자)에게는 화가 있다'
그러면서 마18: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거든'
(문맥을 통해서 볼 때는 '너의 손과 발이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잘못을 범하면)
'그거 그냥 찍어 버려라'
마18:9절 말씀에 '내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네 눈이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데 사용이 되거든)
'그것도 다 찍어 버려라, 뽑아버려라'
마18:10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그들의 천사들'
작은 자들을 지키는 천사들이 있다는 거죠. 보통 '수호 천사'라고 얘기들 합니다.
그 (수호)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고 있다',
대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작은 자를 업신여기게 되면
그러면 하늘에 있는, 그들을 지키는 수호천사들이
하나님께 그 불편함을 이야기(호소)하게 되겠죠.
그러니까 마태는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일은, 시험들게 하는 일은,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낙심케 하는 일은
그만큼 치명적인 잘못이기 때문에
자기 손과 발을 찍어버리는 고통을 치른다 할지라도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일에 참여하지 마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교훈하셨습니다.
1절~2절은 가해자를 향한 교훈이라면,
3절~4절은 피해를 당한 사람 입장입니다.
◑17:3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이거는 1절과 2절의 결론이기도 하고, 3절과 4절의 서론이기도 합니다.
'만일 너의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의 실족시키는 죄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는 일이 생길 때는
그때 그 사람에게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그 잘못을 그냥 방관하지 말고, 책망하고,
그 잘못을 멈추도록 도와주어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레19:17절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견책하라'
본문의 '경고하고'와 같은 맥락의 말씀이죠. :3
교정해줘라, 바로잡아줘라.. 는 뜻입니다.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만일 그러한 의무를 태만히 했을 때는
그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네가 함께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잠27:9, 마18:15-17
*한편 이러한 '권면의 의무'를 확대 해석하면
이것은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대對 사회적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즉 불의와 폭력이 일반화된 사회를 보고도
자기 개인적인 안일 때문에, 그 죄를 침묵 또는 방조하는 것은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기피하는 행위로써
그것은 분명히 죄악인 것이죠.
이와 같은 '공동체 의식'은 신약에서도 강조된 바,
신약의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서로 우의하며 연합하여 나아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거죠.
▲여러분, 유명한 이야기 중에 하나가
2차 대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을 때,
그때 '이 엄청난 전쟁의 재앙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사람들은 쉽게 '미친 히틀러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충분히 연구했던 한 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죠.
'이것은 히틀러의 책임이 아니고, 더 근본적인 잘못을 범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냐? 바로 방관자들이었다.
그냥 지켜보기만 했던 방관자들 bystanders,
전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 그것을 견책에서 멈추도록 도와주지 않고,
방관했던 자들이, 바로 2차대전 비극의 원인의 가장 중심에 있다.'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지금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죠.
눅17:3절에 '경고하라'
레19:17절에 '견책하라'
누가 잘못할 때 마음으로 미워하지만 말고,
그 사람이 죄를 멈출 수 있도록 경고하고 견책해줘라.
▲마18:15~17절은, 예수님 더 풀어서 설명해 주셨어요.
'먼저는 일대일로 그 사람 잘못을 지적해 줘라.
그런데 듣지 않으면, 그때는 두세 증인이 같이 가서
그 사람의 잘못을 깨닫게 해줘라. :16
그것도 거부하면 마지막으로는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서 권면하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때는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겨라' :17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공동체 안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 잘못된 일은 피할 수가 없지만,
'그때 사랑으로 알려줘서, 그 잘못을 멈추도록 도와주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눅17:3b절을 다시 한 번 보시면,
그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회개를 합니다.
회개하면 어떻게 하죠? '바로 용서해 줘라'
4절에는 이것을 풀어서 설명을 하십니다.
◑17: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마18:21~22절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 줘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죠.
이것은 무제한 용서를 뜻합니다.
제가 아내와 결혼 전에 연애를 할 때, 집사람은 서울 여자이고, 저는 경상도 남자라서
문화적인 차이가 참 심각했죠.
그래서 이야기하다 보면, 아내가 뭔가 삐졌어요.
뭔가 제가 잘못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성경에 '해질 때까지 노를 품지 마라' 이런 말씀도 있고 해서,
제가 전화를 해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사과하면
아내가 '그래 알았다. 조심하세요' 이렇게 끝내주면 좋겠는데, 꼭 묻는게 있습니다.
'뭘 잘못했는 줄 아세요?'
그러면 제가 '내가 그걸 알면 고치죠.. 내가 사실은 그걸 잘 모르겠어요'
아내는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뭘 미안하다고 사과합니까?'
제가 '그래도 미안합니다.' 그냥 뭐 이러고 통화를 끝냅니다.
그러면 대부분 관계가 회복이 되는데...
그런데 저는 지금도 '제가 미안합니다.' 이 말을 잘 못 하겠어요.
근데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면,
여러분 이거는 유대인들도 똑같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했다'라고 사죄하며 회개할 때
꼭 무엇을 제시해야 되냐면,
회개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되었습니다.
'내가 회개했습니다'라는 증거를 제시하면
'그러면 용서해 줘라'
이게 유대인 랍비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죠?
예수님은 아무런 제한 없이, 회개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아도
'그냥 잘못했습니다'하고 회개를 하면,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해 줘라'
그게 하루에 7번 똑같은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짜증나지 않습니까?
특별히 아마 아내들이 짜증을 많이 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제게 의문이 들더라고요.
잘못을 저지르고나서, 그냥 말만 번지르하게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라고 하면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들한테, 꼭 면제부를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이고,
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여러 자료들을 한번 연구해 보니까
제일 마음에 드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한 번의 회개를 통해서, 완벽한 회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을 하고 용서를 구하지만,
그 후 즉시로 완벽한 회개를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사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사람이 결국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바뀌어서 완벽한 회개까지 도달하려면,
지속적인 용서가 계속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 주신 거죠.
여러분 한 번의 용서, 그렇지만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또 잘못을 하기도 하고,
또 그때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
주님은 우리한테, 정말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무제한적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셔서.. 결국 어떻게 되느냐?
그 지속적인 용서를 통해서, 내 속에 깊이 뿌리에 박혀져 있던
이 죄가 점점 힘을 잃어가게 만드시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회개하면 용서해 주되
하루에 7번이라도 용서를 해 줘라' :4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셨던 그 지속적인 용서와 사랑을
그 사람(가해자)에게도 베풀어 주어라' 이렇게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본문 눅17:1~4절까지 말씀을 정리하면,
여러분 우리가 교회 생활할 때, 이 세 가지 교훈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교회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우리를 실족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먼저 주의해야 될 것은
신앙의 길에서 앞선 분들이, 믿음이 작은 자에게
그들의 믿음을 망가뜨리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많은 청년들을 섬기면서
여러분 결국 작은 자들이 언제 실족하느냐? 제가 두 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1) 하나는 이중인격이 될 때입니다.
앞선 사람들(어른들)이 이중적이 될 때, 작은 자들이 실족합니다.
눅16장의 바리새인들처럼, 그들은 당시에 가장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인데
누가는 그들을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다' 라고 기록합니다. 눅16:14
그들은 입만 벌리면 '하나님을 사랑한다' 라고 했는데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돈을 선택하는..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볼 때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그 외식을 보고서, 실족할 수밖에 없죠.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때론 교회 속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 그리고 쾌락을 멀리 하라고 그렇게 말을 했지만,
정작 자신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그게 바로 작은 자(믿음이 어린 자, 새신자)를 실족하게 합니다.
2) 또 하나는 무엇이냐? 말로써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기가 쉽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말들,
또 자기 중심적인 말들,
이 말들이 바로 작은 자들을 망가뜨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제일 기뻤던게,
어떻게 보면 저한테도 치명적인 약점이 되겠죠. 저는 참 말을 잘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대방한테 좋은 말을 한다고 했는데,
제 귀에 들려오는 이야기는 종종 '실족했다. 시험들었다' 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제가 그때 했던 말들을 복기 해보면
분명히 저는 잘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남이 실족할 만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개인적으로는 '아~ 내가 정말 내 혀를 통해서, 내 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정말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덕을(믿음을) 세우는...
그렇게 내 혀가 사용될 수 있을까?' 이게 저한테는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잠언과 야고보서... 이런 말씀들을 대하면서, 스스로 공부하면서
제가 비로소 확인하게 된게
'야~ 어쩌면 내 혀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는 혀로 바뀌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을 저는 발견했습니다.
성도님들께서 이중적이 되지 않고, 혀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높이고, 품어주고, 격려하는...
살리는 혀, 정말 생명을 주는 혀로, 사용되어져야 되는 거죠.
또 하나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할 때, 지속적인 용서를 그들에게 베풀어 주어야 된다는 거죠.
그런 다음 17:5절부터는, 조금 더 우리가 유익한 제자가 되는데,
5절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17: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왜 이런 요청을 제자들이 했겠습니까?
아마 저도 예수님 제자 중에 있어 가지고,
가까이서 예수님 말씀을 들었으면, 저도 가슴이 답답했을 것 같아요.
'아니 정말 사람을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매고 들어가는게 낫다고?'
그러면 아마 저도 '야, 그럼 나도 연자맷돌 매고 물에 빠져야 되나?'
또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해 줘라'
그럼 저는 '아니 저 인간을 용서해 주라고?'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자들은, 자기 인격으로는 도저히 예수님 말씀을 실행에 옮길 수 없죠.
그러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요청한 것입니다. :5
또 하나, 그들이 맡고 있는 사역들, '내가 정말 예수님이 맡기시 이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죠.
제자들은 인격도, 사역도 자신이 없고,
결국 그 중심에는 믿음의 문제가 있다는 거를, 제자들이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때 6절의 예수님의 답변을 잘 보시면
◑17: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질문과 대답이 여러분에게 연결이 되나요?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그렇게 요청하면,
예수님은 '믿음이 더해질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셔야 되잖아요.
그런데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 연결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생뚱맞게 뽕나무 얘기를 꺼내셨거든요.
여기서 '뽕나무'는 뿌리가 가장 견고한 나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뽕나무 sycamore tree'는 우리나라의 뽕나무와 같은 게 아니라,
'돌무화과나무'를 뜻합니다. 뽕나무는 영어로 mulberry tree 라고 하죠)
그러니까 뽑히기 거의 불가능한 나무가 뽕나무인데,
마태, 마가복음에 보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본문 눅17:5절은 '뽕나무'인데, 마태, 마가복음은 '산'이 뽑히어 던지우리라고 나오죠)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네가 겨자씨만은 믿음을 가지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게 도대체 선문답 같죠. *신선, 도사들이 주고 받는 비현실적인 말
정말 이게 무슨 어떤 대답이 이렇죠?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면, 믿음이 더해지는 비법을 가르쳐 주셔야 되는데...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 뽑혀 바다에 심겨질 수 있다니요?'
저는 참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근데 여러분들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아마 한 번 정도는
'왜 내 인생은 이렇게 안 풀리나?' 하는 시기가 한 번 정도씩은 다 있었을 것 같아요.
저는 20대가 제게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야~ 나는 왜 하는 일마다 이렇게 안 풀리나?'
저는 제가 기대하고 소망했던 대학의 물리학과를 갔는데,
결국 데모를 하게 되면서, 뭐 물리학에 대한 공부도 다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 다음에 또 성경에 빠져 가지고 매일 성경만 보고 있으니
그래서 학교성적은 완전히 바닥을 치게 되고...
그래서 그때 저는 '야, 내가 어디 취직할 수는 있을까?'
그렇게 미래가 먹구름이었던 시절도 한 때 있었습니다.
근데 그때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불러 주셔서, 신학의 길을 가게 해 주셨고 *총신대원
또 제가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제가 (교육전도사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대학부를 3년 동안 열심히 섬겼는데,
근데 제가 대학부를 시작할 때, 제가 200명을 물려받았거든요.
근데 3년 동안 열심히 섬기고 나니까, 120명으로 줄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부 담당 교역자를 끝내자,
두 달 만에 대학부가 다시 200명이 됐어요.
그래서 제가 그 소식을 들을 때, 참 비참한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200명을 열심히 섬겼는데, 120명 된 거는 '뭐 그럴 수도 있겠지'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제가 그만두고 나서 두 달 만에, '대학부가 다시 200명이 됐습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대학부를 말아먹은 인간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사역해야 하나? 내가 앞으로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패배감, 자괴감 같은 것이 들었습니다.
결국 제 질문은 '나는 왜 실패했나? 나는 왜 3년의 사역동안 이렇게 처절하게 실패를 했나?
도대체 원인이 뭔가?'
그래서 대학부를 사임하고, 저는 난지도라는 곳에 가서
사실 거기서 아침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한테 실패의 원인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왜 실패를 했는지 원인을 알아야, 바꿀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제가 씨름하다가, 이 말씀에 부딪히게 됐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주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라는 이 요청이
저한테는 너무 생생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제가 6년 동안 최소한,
물리학 공부를 할 때도 그랬고,
신학을 하면서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섬길 때도
제가 항상 드렸던 기도의 끝은 이거였습니다.
'주님 저한테 믿음을 대해 주십시오.
제 공부도, 다시 성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제게 믿음을 주십시오.
제가 사역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 제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5절처럼
어쩌면 제가 오랜 시간 동안 기도했던 제목은, 바로 이거였어요.
'하나님, 지금 수준가지고는 안 됩니다.
뭔가 더 추가적인 믿음과 능력을 저한테 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바로 뽕나무가 (또는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근데 제가 이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교훈을 주셨어요.
'야 너는 이제 나한테 믿음 더해 달라는 기도는 그만해라.'
정말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저한테 도전하셨어요.
'너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잖아? 네게 없는 게 아니야.
네게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니까, 그거 한 번이라도 써먹어 봐라!
자꾸 믿음을 더해 달라고만 요구하지 말고,
네게 있는 겨자씨만 하면 믿음이라도, 그걸 한번 사용해 봐라!'
여러분 이게 저한테는 무슨 말이었느냐 하면,
제가 그때 전도사, 강도사 때, 보통 일주일에 세 번 설교 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도, 제가 아주 열심히, 틈틈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전하기 위해서, 금요일 쯤에, 제가 지난 며칠 동안
틈틈이 준비해서 완성시킨 설교원고를 읽어봅니다. 검토해 보는 거죠.
제가 쓴 설교원고를 딱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준비했는데
제가 읽을 때 드는 생각이 '야, 이 말씀으로 누구 입에 풀칠이나 하겠나?'
'야 내가 이 정도 설교 내용으로, 어떻게 대학부 학생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겠나?'
도저히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약하다는 거죠.
그래서 또 금요심야기도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또 하루 동안 밤새우면서 또 열심히 설교원고를 보완했어요.
설교를 새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토요일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새벽에, 그 열심히 준비한 설교원고를 제가 딱 읽어보면
'이것으로 누구 입에 풀칠 하나?'
이것 갖고는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설교했겠습니까?
제가 성령충만함을 구하고, 직통계시를 받아서 설교를 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설교한 것이죠.
왜냐면 제가 열심히 설교를 준비했는데,
그 원고를 제가 읽어보면,
이 정도 깨달음 가지고, 이 정도 적용을 가지고, 이 정도 해석을 가지고
'누구 입에 풀칠 하나?' 저는 대학부를 섬기는 동안 3년을 그렇게 했거든요.
그때 제가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깨달았던 것은,
'하나님, 3년 동안 제가 실패한 것은
제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고,
한번도 믿음을 사용해 보지 못했던 것,
하나님, 이게 저의 실패의 원인인 것을, 이제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되죠?
제가 그때부터 자세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작은 깨달음이라도 주시면
그거를 기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 가지고 누구에게 풀칠합니까?' 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이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깨달음이니까, 제가 믿음으로 선포하고, 믿음으로 설교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해 주십시오!'
'주님이 주신 것이, 제가 볼 때는 겨자씨처럼 작게 보여도
제가 믿음으로 전할테니까, 하나님 역사해 주십시오!'
그때부터 저는 무슨 환상을 갖게 되었냐면,
제가 지금도 부족한 깨달음을 갖고 설교를 하지만
저는 어떤 기대를 하냐면,
하나님이 제게 주신 것을, 믿음대로 전하면
'내가 창세기 1장의 역사가 펼쳐지게 해 주겠다'
이게 하나님이 제게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이 뭡니까? 주님이 말씀하실 때 빛이 창조 됐잖아요.
세상이 혼돈했을 때도, 주님이 말씀하실 때, 거기에 거룩한 질서가 세워졌고,
텅 비었던 곳에, 하나님의 충만함이, 말씀을 통해 채워졌습니다.
'야, 너한테는 겨자씨 작은 것 같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냥 믿음으로 한번 선포해 봐!
그러면 내가, 네가 전하는 말씀을 사용해 가지고
성도들의 삶에 빛을 창조하고, 거룩한 질서를 창조하고,
텅 비었던 삶을 풍성함으로 채우는 그 역사는 내가 할테니까,
너는 그냥 믿음으로, 그 작아 보이는 말씀,
그냥 하나님을 기대하고 전해 봐!'
저는 이것이 제 삶과 사역을 완전히 바꿨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죄송한 말씀인데)
'내 혼자 힘으로 5천 명 분을 준비해야 된다'라는
저는 그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내가 준비해야 될 것은, 1인분이면 된다.'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 이렇게 1인분만 준비해도
그걸 주님께 드리고, 주님이 축사하시면,
그리고 나누어 주면, 5천 명은 주님이 먹이실 수 있지...
'주님은 내가 준비한 1인분 식사라고 할지라도,
그걸 믿음으로 드리면,
5천 명은 주님이 먹여 주신다!'
그래서 내가 해야 될 것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을
제가 구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도 설교 준비할 때마다. 항상 메모하는게 있어요.
'나의 작음에 압도되지 말자!'
이게 제 설교 슬로건입니다.
여러분, 주일날 설교할 때마다, 제가 얼마나 괴롭겠어요?
'이것 가지고 누구 입에 풀칠 하나?
이 정도 깨달음 가지고 도대체 누구 입에 내가 풀칠할 수 있겠나?'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저를 짓누르지만,
제가 그냥 메모하는게 '나의 작음에 압도되지 말고
능력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위대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전하자!'
이게 그냥 설교할 때마다 끊임없이 저한테 되새김질하는 경구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노력해도 풀리지 않는...
그게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관계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때로는 건강이 문제일 수도 있고, 사역과 관계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미 필요한, 바로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지 말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주신 작은 것을
믿음으로 한번 실천해 보십시오.
정말 믿음으로 한번 실천해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서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산을 옮기는 놀라운 역사를, 그분이 이루어 주십니다.
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교훈하셨습니다. 마지막 가르침은
무능력했던 사람이, 작은 겨자씨 같은 믿음을 사용해서
산을 (또는 뽕나무를) 옮기는 놀라운 삶의 결과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게임이 끝납니까? 그렇지 않죠.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교만이라는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어지는 7절 말씀을 보면,
◑17:7절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수사의문문입니다. 그럴 리 없다는 거죠.
종이 밭에서 일하고 돌아왔는데 '야 편하게 쉬어라'
2천년 전에, 이런 말 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신에 8절처럼 이야기하는게 더 정상이죠.
◑17:8절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이때 제자들의 반응은
모두가 '맞습니다. 그게 종이 해야 되는 일이죠. 종은 그렇게 하는 거죠.'
그러자 예수님은 9절에 또 질문하십니다.
◑17:9절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렇게 세 번이나 수사의문문으로 질문하십니다. :7, 8, 9절
예수님은,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신 다음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이 내용을 적용하십니다. ↓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렇게 주님은 교훈을 하셨습니다.
▲참 저와 같은 사역자들, 또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무능했던 사람을, 유능한 사람으로 바꿔주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교회 속에 수많은 간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무능했는데, 겨자씨만한 믿음을 사용했을 때
산을 옮기고, 뽕나무가 뽑히는... 이런 놀라운 기적이, 자기 삶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에는 이런 입지전 적인 간증을 가진 인물들로 넘쳐났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지금은 이런 놀라운 기적,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가
우리 한국교회 가운데 풍성하게 있었지만,
지금 위기라고 다 이야기를 하죠. 왜 위기가 왔습니까?
바로 이 10절 말씀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겨자씨 같은 믿음을 사용해서,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 되면,
무엇에 빠지게 되느냐? 교만에 빠지게 되는 거죠.
여러분, 예수님 마지막 교훈,
삶이 무능했던 사람이, 믿음을 통해 유능한 사람이 됐을 때,
그때도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10
이 겸손과 이 감사의 고백을 잃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이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의 위기가 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참 많은 사역자들, 또 저 자신도 그렇고 많은 사역자들이,
말씀드린 것처럼, 무능했던 사람이 예수 믿고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쉽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많은 분들이 이런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힘든 것이 무엇이냐?
유능한 사람이 하나님과 성도 앞에서 끝까지 겸손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저는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통해
정말 무능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서
정말 열매 가득한 유익한 사람이 되고, 유능한 제자가 되었을 때
그때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감사와 겸손을 잃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 공동체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 특별히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일을
우리가 할 수만 있으면 피해야 됩니다.
저는 그래서 특별히 말과 관계에서, 제일 사람이 작은 자들을 실족을 많이 시키잖아요.
어떻게 하면 남을 실족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하나 그냥 깨달은 것은요,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1:19
그래서 제가 조금이라도 말을 통해 실족 안 하게 하려면
말의 속도를 무조건 늦춰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막 바가지를 긁으면, 제가 말의 속도를 낮춥니다.
'당-신- 왜- 그-러-십-니-까?'
집에서 애들이 저를 자극을 하면,
또 교회 성도님들도 한 번씩 저한테 뭐라고 말하게 되면
어쨌든 저는 제 말의 속도를 늦추려고 애씁니다.
말의 속도를 늦추면, 자기 혀를 통제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도 집에 가셔서 혹시 남편들이 바가지 긁으시면,
말의 속도를 낮추어 대응해 보십시오.
'남-편-분, 왜- 그-러-십-니-까?' 천천히 말씀해 보시고
또 남편들도 부인들이 막말을 하시면
'여-사-님-이- 왜- 이-러-십-니-까?'
말 속도를 늦추어서, 우리가 말로 상처 덜 주고,
서로에게 기쁨이 될 수 있는 말을
우리가 연구에서 말할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누가 내게 잘못했다고 회개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용서해 주셔야 됩니다.
그리고 삶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분 다시 한번 믿음으로 도전하셔서
산을 옮기는 역사가 펼쳐지고
또 여러분들이 끝까지 견고해서
'주님 앞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 고백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유익한 종이라' 인정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