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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NCK 2024. 4. 26. 11:2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물질과 성공, 성경적 성공

 

2024년4월21일/주일2부/마태복음 5:1-12/'복'/장광우목사 - YouTube 정리
◈복                마5:1-12, 마21:31~32                 

 

◑도입

오늘은 <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복'이라고 하면, 정말 이 개념이 굉장히 혼란해지는 느낌이 있어요. 

여러분들 특별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 
성도들이 말하는 복의 차이가 별로 없는 것 때문에.. 제가 늘 안타까워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신앙적인 이유를 더 붙여서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부자가 됐다' 하면 
'아~ 열심히 신앙생활 하더니 복 받았다' 이렇게 말하고, 

뭐 건강한 사람도 마찬가지고 
또 자녀들이 잘 되는 것도, 심지어는 뭐 이빨이 튼튼한 것까지도 
다 우리는 '복'이라는 개념 속에서 이해를 하고 있는데 

이런 것보다 본질적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본문 팔복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한번 더 생각하고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밥 먹을 때 TV를 틀었는데요. 
가끔 김창옥 씨가 토크쇼를 진행하는 걸 봅니다. 
제가 굉장히 재밌게 보는데요, 한번은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강의 중에 두 여성 이야기가 언급되었어요. 
한 사람은, 나이 23세에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에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분이어서 
너무 지긋지긋해서, 정말 도망가는 심정으로 
마음에 들지도 않는 남편과 그렇게 일찍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해서 보니까, 시댁은 자기 집과는 다르게 너무 화목하게 
부모와 형제가 뭐 아래집 윗집에 살고, 옆집에 살고 
그래서 가족끼리 자주 모이고, 또 그 집에서 제사를 다 모시는데 
위로 6대 조상까지, 1년에 여섯 번의 제사가 있는 그런 시댁이었습니다. 

제사를 그렇게 많이 드리고 하니까, 제삿상 차리는 일에 며느리 몫이 크죠.
본인(며느리)이 처음에는 시댁에 가족 우애가 두터워서 굉장히 좋았는데 
나중에 너무 힘들더라는 거예요. 

근데 시어머님이 얼마나 지독한가 하면, 세탁기를 안 사주는 거예요. 
'손으로 빨래해야 때가 잘 간다' 하면서, 손으로 빨래하게 하고, 너무 고생스러웠어요. 

그 와중에 본인도 직장생활을 하고, 딸 셋을 키우면서 너무 힘들게 살았는데 
그런데 시댁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자기에게 멘붕이 왔다는 거예요. 

왜냐면 자기가, 시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좀 자유롭게 자기 인생을 살아 보려고 했는데,
막상 무슨 취미 생활을 하려고 하니, 
어디 가서 기웃거려 봐도 자기가 도대체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걸 왜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이런 상태에서 오히려 더 혼란이 가중되어서 힘들다... 하는 고민을 털어놓았고요. 

△그 다음 분의 얘기는 정반대입니다. 
이분도 22세에 결혼을 일찍 했고, 
결혼하고나서 보니까 너무 좋은 시부모님 때문에 고생 한번 하지 않고 
오히려 시어머님이 모든 걸 다 해주시고, 

심지어는 자기가 아침에 늦게 일어나도 
'얘야 일어나서 밥 먹고 다시 자라' 그렇게 말할 만큼 
좋은 시부모님 밑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왔는데, 

역시 시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멘붕이 왔다는 거예요. 
완전히 정신적인 지주를 잃은 거잖아요. 
'도대체 시어머님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기가 막힌다' 하는 
그런 내용으로 하소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여러분은 위 두 사람 중에, 누가 시집을 잘 갔다고 생각하세요? 
어느 분이 복을 많이 받았을까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이 내용을, 나중에 '복'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편하게 살았던 후자의 여성을 더 복되다고 말하겠지만,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고생스럽다/편하다' 이게 다복 과 박복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고,

'그 일을 계기로 얼마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었나?' 입니다.

 

그러니까 뒤 두 여성 중에,

전자의 여성이 시집 와서 고생은 더 많이 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그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면,

그는 '복된 인생'을 살았던 거예요... 오늘 이런 내용을 좀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팔복이 나오게 된 배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산상수훈의 서두에서 팔복을 말씀했는가?' 하는 겁니다.
 8가지의 복을 보면요, 첫 번째 복도 그렇고, 마지막 복도 그렇고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팔복은, 첫 번째와 마지막이 동일한 말씀으로 끝나죠.

거게 팔복의 주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팔복의 주제는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래서 '복은 천국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잘살든지 못살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천국이 임해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 복이다!'

그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자 그런데 유대인들은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이해는 이랬습니다. 

'반드시 유대인들만 천국에 들어간다. 
유대인이 아닌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게 확고한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해야 된다.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천국 못 간다' 이렇게 주장했고 
자기들은 율법을 다 지킨다고 주장하고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온전한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간다. 
신체에 하자가 있으면 안 된다. 

또한 도덕적이든 아니면, 경제적인 문제든, 아니면 신앙적인 문제든간에, 
즉 가난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믿고 살았습니다.

 

즉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고, 그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논리죠.

반대로 세상에서 루저들은, 복을 못 받은 사람이고, 천국에도 못 들어간다는 거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아래 말씀을 하셨고, 
마21:28~32절 중에 제가 뒷부분을 좀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21:31~32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건 폭탄같은 선포이에요. 
여러분 유대인들은, 천국에는 유대인만 들어가고, 
흠이 없는 사람들,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들만 들어가는 줄 알고 살았는데... 

예수님 말씀은, 모든 율법을 다 어긴, 
정말로 흠집투성이, 매국노요, 또 몸을 팔아서 생활하는 그런 세리와 장기들이 
천국에 너희보다 먼저 들어간다는 이 말은.. 폭탄 선언입니다. 
그만큼 천국에 대한 개념을 예수님께서 바꿔 놓으신 거예요. 

'천국은 누가 들어가느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다른 요소가 있다. 
너희들이 지금 무시하는 세리와 창기들도 들어갈 수 있다. 

오히려 너희들 그렇게 자기 의에 충만하면 
창기와 세리들이 들어가지만, 너희는 못 들어갈 수 있다'... 는 경고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경을 써서, 이 말씀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오늘 생각해 볼 것은 "복에 대한 정확한 단어의 이해"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복이 있도다'는 헬라어에는 '마카리오스'라는 단어를 쓰고 있거든요.  *blessed 

예수님이 오시기 약 400년 전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런 사람들이 
헬라어의 의미를 바르게 입혀 놓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 의해서 헬라어의 의미가 규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복에 대한 개념이 '마카리오스'입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마카리오스는 '세오스' 라는 단어와 함께 신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예요. 
복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의 특징입니다. 
그것을 세오스 라고 했고, 

마카리오스 라고 하는 것은 신의 상태입니다. 
'신은 존재 그 자체로 복이다' 하는 것을 말할 때 '마카리오스' 

딤전1:11절에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라' 그랬거든요. 
'복되신 하나님 blessed God' .. 하나님을 그렇게 말합니다.  *마카리오스  
'하나님은 복이시다'는 거죠. 하나님 존재 자체가 복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하든지/ 아프든지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출세하든지 / 무명이든지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면... 그게 복인 것입니다.

 

팔복에,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런 8가지가 다 복이 있는 이유는,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더 잘 받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니까... 그게 전부 '복'인 거죠.

반대로, 건강하게 사는데, 부유하게 사는데, 높은 자리에 올라갔는데,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과 도리어 멀어졌다' ... 그러면 그게 복이 아닌 거죠.

오히려 반대로 저주에 가깝죠.

물론 그 일로 인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으면, 그게 복이 맞습니다.

 

행26:2절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나는 복되도다' 라고 했어요. *마카리오스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다행히 여기나이다' 라고 했는데, '복되게 여기나이다'라는 뜻입니다.

거짓 고소로, 바울은 억울하게 재판 받는 자리에 서게 됐는데, 자신을 복되도다 라고 했어요.

왜냐면 그 일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거죠.

 

영어성경들은 'fortunate 운이 좋게' 라고 번역했네요.

마카리오스 라는 단어에는, '행복한, 행운'이란 뜻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근거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어서 행복한, 행운의, 복된' 이라는 뜻입니다.

 

(*가톨릭에서는 팔복을 '행복하여라 심령이 가난한 자여' 이렇게 '행복'으로 번역합니다.

아마 기독교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음이여' 라고 하면, 사람들이 오복으로 오해할까봐,

아예 행복으로 번역한 것 같아요)

 

어쨌든 행복 happy 이든지, 복 blessed 이든지, 뭘로 번역이 되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이라' 시73:28    *토브

 

영어성경에는 모두 히브리어 '토브'를 그대로 'good'으로 번역했는데,

개역성경은 '복'으로 번역했습니다. 기가 막힌 번역입니다.

 

△그것과 조금 혼동되게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게이 부분에 굉장히 비슷한데 
유다이모니아 라는 단어가 또 있어요. εὐδαιμονία
이것은 행복 happiness, 잘 삶 welfare 이라는 단어로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영어 성경에는 보면, 이걸 해피라고도 해요. 복이 있다. 
그러면서 상당히 뭐 즐겁고 행복한 것처럼, 이렇게 복을 설명하는 성경도 있는데 

유다이모니아 라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됐다' ... 유다이모니아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그런 물질을 맡기셨다' 
혹은 '하나님이 그 물질을 통해서 내게 어떤 일들을 행하시고 계시다'
뭐 이런 상태가 될 때는 우리가 '마카리오스' 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관계되어서,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어졌고 
그것을 내가 공유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하나님과의 사역이 이루어져 가는 그런 상태를 
우리가 '마카리오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눅1:46~48절입니다. 이게 마카리오스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카리조

그러니까 비천한 여인인데, 내 노력이나 의지나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택하셔서, 나로 하여금 잉태케 하고, 
아이를 낳게 하시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그 하나님의 복되심을 경험할 수 있었다...
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이 여인이 복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 복은 이런 것입니다.  자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격적인 개입으로 주어지는 것이죠.

처녀가 임신한 게 무슨 복입니까? 그건 저주죠.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된 임신이었기 때문에, '복이 있도다' 한 것입니다.

창12:1~2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바라카

이 부분에서 여러분들이 신경 쓰는 대목은 
'큰 민족을 이루고 막 복을 주셔가지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는' 여기에 신경 쓰시면 안 돼요. 
이건 복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어떤 목적의 성취를 말하는 거지, 
그 사람이 누리는 것들로 인해서 복되다고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어요. 하나님이 아브람의 삶에 개입하셨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믿지 않을 때, 그를 택하셨죠. 그게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태어나고 보니까, 아버지가 하란으로 이사를 가셨고 
하란에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근데 그 당시로 보면, 이건 복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하란에서 살아야 복인 겁니다. 

왜냐면 하란은 메소포다미아 문명의 근원지거든요.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의 상류 지역에 있어서 교통의 요지였고요. 
아주 산업의 중심지었고요. 아주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도 영향력이 막강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룬 그곳에서, 아버지 덕으로 많은 것을 일궈 놓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민가고 싶어하는 그런 지역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그 광야를 향해서 나아가서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 뭐 아무런 것도 모른 채 가나안으로 간다고 하는 것을 
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이 그의 삶에 개입하셨다'는 데서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일부분을 맡아서, 그 일을 행할 기회를 가졌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고 
하나님이 이루실 목적이 있다... 하는 의미에서 '이 사람은 복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팔복의 중요한 의미를 제가 정리해서 
세 가지로 말씀을 드려고자 하는데요.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셨잖아요.
이 말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셨다'고 하신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내게서 하나님께로 중심이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료형을 쓰는 거예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의로워진 거예요. 
그러나 상태는 아직 시원찮아요. 지금의 우리들처럼!
 
분명히 흰옷을 입고 있는데, 맨날 고추장 묻혀서 다니는 거예요. 
그렇다고 여러분이 검은 옷 입은 건 아니잖아요. 

저는 여름이 되면 흰옷을 잘 입거든요. 
그래서 저는 항상 식당에 가면, '앞치마'부터 착용합니다. 

왜 그렇게 하죠? 내 옷이 희고 깨끗하니까 뭐가 묻을까봐 그러는 거죠. 
내가 의롭게 된 자라는 것을 믿으면, 내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요.

이 의식이 여러분에게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흰 옷을 입게 된 것이, 여러분이 하이타이로 빨래해서 된게 아니라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때를 묻히면 안 돼요. 

▲1.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의 상태가 파산된 겁니다. 
왜?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고 보니까 
'내 안에 있는 원래 나는, 파산상태'라는 것을 아는 것이 복이라는 거예요. 

왜 파산이 내게 일어났냐? 
하나님의 의가 내게 왔기 때문에 파산이 일어나는 거예요. 

   미국에서 제가 목회를 할 때, 우리 교회에 서울대학 출신의 교수님이 계셨어요. 
   근데 그분이 이제 교환교수로 미국에 오셨다가, 
   자녀들 교육 때문에 미국에 잔류해서, 세탁소를 17년간 운영하고 계셨어요. 

   근데 제가 뭘 먹다가 김치 국물이 튀었는지 옷에 뭐가 묻었어요. 
   그 다음날 세탁소로 제 옷을 가져갔어요. 

   '장로님(세탁소 운영), 옷에 붉은 얼룩이 묻었는데, 김치 국물 같기도 하고 뭔지는 모르겠는데,
   얼룩이 지워지겠습니까?'

   그랬더니 '언제 묻었습니까?' 라고 묻더라고요. 
   '어제 묻었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래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참 희한하죠. 뭐가 묻어도 금방 가져오면 
   얼룩이 잘 지워지는데, 오래 두면 안 지워집니다. 죄도 똑같겠지요?' 

   '죄도 오래 묵으면 안 지워지겠죠. 회개도 안 나오겠지요.' 
   맞습니다. 똑같은 원리인 거예요. 
   그래서 애통하는 거예요. 회개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예요. 
그 말은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한없이 부서지고, 
그래서 욥이 말하는 것처럼 '티끌이 되고, 재가 되고, 먼지가 되고, 완전히 다 타버린 재가 되고 나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 그 상태를 가지고 있는 자를 복되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자기 자아가 다 깨어져서, 티끌과 가루가 되어서

자기는 없어지고, 대신에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는 사람이 되니까... 복이 있다는 거죠.   
  
▲2.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의를 위한, 
<훈련을 통해서 내 자신의 변화와 성숙이 이루어져가는 상태를..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뭐 청결한 자도 있고, 여기 보면 온유한 자도 나오고, 
여러 개의 말씀들이 나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온유한 자'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온유하다' 이건 우리가 자꾸 성품적으로 이해를 하는데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니, 여호와께서이 말을 들으셨도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함이니라'  민12:1~3

여러분들, 말씀은 똑같이 들었는데 
그 말씀을 통해서 훈련되어진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너희들은 말씀은 들었지만 훈련되어진 사람이 아니고, 
모세는 이것으로 훈련되어졌다'는 겁니다. 

히브리어 '아나빔' 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고난을 당한다. 굴복하다. 자기를 낮춘다' 이런 의미인데 
이것은 '연단을 통해서 제갈이 물린 상태' 이걸 아나빔 이라 그럽니다.
'온유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너희들보다 인격적으로 더 훌륭한게 아니라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실제적으로 자기가 훈련해서 
이 사람은 지금 입에 제갈이 물린 상태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고,
이 사람은 지면에서 온유함이 승한 사람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는데, 이상하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얘기를 왜 했을까요?

시37:1~11절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여러분 지난 고난주간 특새 하실 때, 저도 같이 참석했어요. 
그날 바라바 설교를 들을 때인데요. 
한국에 지금 정치적인 상황, 사회적인 상황들과 
또 그 상황들이 제게 오버랩 되면서
'나라가 너무 혼란하다. 악이 판을 치고, 정말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는 
그런 두려움이 저한테 많이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나라가 좀 조용했으면 좋겠다. 바르게 갔으면 좋겠다' 이런 기대도 있으면서 
내 마음에 어떤 분노와 염려, 이런 것들이 생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설교를 들을 때, 이렇게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꼈어요. 

「바라바를 감옥에서 내어놓고, 강도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은 모순이다. 악이다. 
근데 예수님은 '그게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순리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다.' 

'이렇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그렇게 되리라고 하셨던 하나님 말씀이 엉터리가 되지 않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맡겨야 된다...'」 

제가 그걸 느끼면서 생각한 게 뭐냐면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일을 하는 걸 용납하지 않아요. 
아무리 의가 앞서더라도, 우리가 분노하거나 불평하거나 
아니면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시지 않아요. 

'악역은 내 God 가 할테니까, 너는 의인의 역할만 해라. 
너는 내가 의롭게 하기로 은혜를 베푼 자니까, 
너는 손에 피묻히지 마!' 

'그저 사랑해, 기도해, 축복해, 위로해, 격려해, 기다려!' 
하나님이 제게 그런 말씀을 주시는데, 제 마음에 평화가 임했어요.

하늘에서 오는 평화가 임하니, 
걱정, 분노, 절망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소망과 감사와 기쁨이 
그 고난 주간을 내내, 그 이후로 제 마음을 지배했어요. 

여러분 이게 온유함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거니까!'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시37:5

 

여러분 실제로 그 유대인들의 삶을 보면, 토지법이라는게 있었거든요. 
그래서 토지법에는 유대인은 유대인의 땅을 빼앗지 못해요. 

근데 악한 유대인들이 유대인의 땅을 뺏는 거예요. 힘없는 유대인들의 땅을 뺏는 거예요. 
그래도 하소연 해봐야 아무 힘이 없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하나님께 맡기는 것 밖에 없어요. 

'하나님께 맡겨야만 되지, 내가 해결하려고 나섰다가는 
내가 더 망가지고, 세상은 더 어지러워지고, 더 형편 없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길을 이루실 때까지, 하나님이 반드시 개입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이 문제를 선하게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맡기고 기다리는 것을 '온유'라고 말합니다
이런데 맡긴(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마카리오이'예요. 'blessed, 복이 있도다!'

이게 하나님의 복입니다. 복되신 하나님이세요. 
우리가 거기에 참여했다는 것은 영광입니다. 

그래서 롬12:19~21절 말씀이 제게 더 새롭게 다가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온유하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나는 내 자식이 손에 피 묻는 거 못 봐. 
내 자식이 힘들어하는 거 못 봐. 내 자식이 잘못되는 거 못 봐. 
너는 오직 내 품성만 닮아라. 그러기 위해서 너는 그런 거 모른 척 해! 

내게 맡겨두고 너는 기도만 해. 맡기면 내가 다 정리해 줄게! 
내가 다 선하게 합력해서 아름답게 만들어 줄테니까, 너는 나만 믿고 기다려!' 
이것을 복된 상태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3.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살펴봅니다. *8번째 복

훈련되고 연단되는 것.. 그것도 복이지만, 
여기에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사명입니다. 사명!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복은, 반드시 사명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의와 연결되어야 하고, 사명과 연결이 돼야 돼요. 

세상은 하나님을 미워해요.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해요. 세상은 하나님을 파괴합니다. 
그런 세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옳은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고, 그 일을 맡기시면, 
그 사명자는 힘들게 산다는 거예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아요'

 

인정받지 못하기도 하고,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고 
영원히 잊혀진 사람처럼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네가 사명을 가지고 살았다면 그게 복이다' 그렇게 말씀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이제 '복'이라는 단어를 썼을 때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과 연결된, 하나님과 연합된 것이 아니면 '복'이라는 말은 하지 마시고 

'그냥 부자다' ... 그렇게 말하면 되고요.  *'복 받았다'.. 말하지 말고  
'그냥 건강하다' ... 그러시면 되는 거고요. 
'자식들 농사 참 잘 지었다' ...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걸로 복이라고 보고, 거기에 침 흘리면 안 돼요. 

여러분들 사명 없는 '부'가 얼마나 악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데, 건강한 게 얼마나 나쁜 건지 아세요? 

우리가 말할 때는 적어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훈련을 통한 변화와 성숙, 
그리고 사명을 위한 희생... (이게 다 하나님과 연결된 것들)
이런 것들을 보고 '당신은 복이 있다'

모친 마리아를 보고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여러분들 그게 진정한 복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시고, 
좀 복이라는 단어를 좀 덜 썼으면 좋겠다... 덜 침을 흘렸으면 좋겠다... 
부자들을 보면서 너무 안 부러워 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뭐 잘 되면 좋죠. 그냥 부자일 뿐이에요. (복이 아니에요) 
그 사람에게 의가 없고, 그 사람에게 인격적인 변화와 성숙이 없고, 
그 사람에게 사명이 없으면... 그건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그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내가 가난하지만, 비록 병과 장애를 입고 살아가지만 
그런데 '내 안에 하나님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지분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훈련되어져서, 나는 이제 어렵고 힘든 일,
나쁘고 괴로운 일.. 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옳은 일을 위해서 바르게 살아간다. 
어떤 희생도 감사하고 살아간다...'  

이럴 때 우리가 '당신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라고 인정해 줄 수 있죠.

기독교에서 이 복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구별해서 쓸 수 있는 날이 
속히 다가오기를 바라고 
저를 위시해서 여러분 모두 다
하나님의 복에 동참하는 성도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지금 내 삶이 너무 힘들어서,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이 너무 억울해서 
'나는 복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벌을 받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염려 하시는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아파도 복되고, 가난해도 복되고, 장애가 있어도 복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그 일부분을 경험하고 있는,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져 가는... 
그리고 삶이 곧 사명이 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분명히 복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은혜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은 완성될 그날까지, 나를 내 곁에서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만들어 주실 것을 믿으며 
'나는 복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오늘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