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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성도

LNCK 2024. 4. 26. 20:5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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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성도    롬14:13~23

 

◑도입 /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성도가 되십시다!

 

성도들은 하나님에게만 칭찬 받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인정받으면 된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 드리면 된다,

하나님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올바른 생각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로마서 14:18절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아야합니다.

교회 안팎에서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하고, 사람에게도 잘 보여야합니다.

사람도 기쁘게 해 주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면에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청소년기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눅2:5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하나님에게도 사랑스러워 가셨고 사람에게도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칭찬 받는 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경우에는

사람의 칭찬을 버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쪽을 택해야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버리고 잘못된 길로 갈 때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좋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그러나 일상적인 경우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또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관계에는 기본적으로 둘이 있습니다.

세로 관계와, 가로 관계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와의 관계, 세로 관계는 잘 유지했는데

형제들과의 관계, 가로 관계가 좋지 않았다가 큰 고생을 했지요.

 

성도들에게 세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가로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 관계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한국의 성도들에게는 대체로 세로 관계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로 관계는 소홀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약점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교회가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면,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자주 한 말이 있습니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먼저 인격자가 되시오",

 

이 말은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먼저 인격자가 되십시오"

 

인격은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옷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옷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인격 수양에 힘쓰지 않는 것은, 더러운 옷을 빨아 입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찢어진 옷을 꿰매 입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성전 건축과 관련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 가운데 하나는

조경공사가 참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경공사를 한 다음에는 성전이 아주 달라 보입니다.

 

어느 분에게 "조경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했더니

그 분이 "목사님 그것을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조경은 건물의 옷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조경은 건물의 옷이다" 이 말을 듣고는, 제가 다른 건물들을 볼 때

'조경을 얼마나 잘 했나?'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는데, 인격은 그 사람의 옷입니다.

동시에 신앙의 옷이기도 합니다.

 

옷을 함부로 입은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고

사람에게 칭찬 받을 수 없습니다.

 

▲성전(예배당)의 조경과 관련해서 두 가지 말씀을 더 드립니다.

저희 교회는 삼경(三景)이 좋습니다.

뒤에 산이 있어 배경(背景)이 좋고,

앞이 탁 트이고 시내가 있어 전경(前景)이 좋고,

그리고 성전 주변 조경이 좋습니다. 그래서 삼경이 좋습니다.

 

조경공사에서 나무들을 많이 심었습니다.

키가 큰 교목(喬木)을 수백 그루 심었고, 관목(灌木)은 수천 그루 심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이식이 힘들다고 알려진 나무들도 여러 종류 있습니다.

다 뿌리를 내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

 

저희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공사를 한 주변의 아파트 단지에 가 보면

여러 그루에 이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그런가보다 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예민하게 보는 입장에서는 이것도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를 사랑하는 증거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인격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신학대학의 학장 한 분은 학생들에게

"목사가 되기 전에 인격자가 되시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습니다.

 

그 신학대학을 졸업한 분들은, 학교에서 들은 이야기를 다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그 말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저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목사 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게, 진하게 기억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목사가,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뜻은 같은데 표현을 강하게 바꿔서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시오"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 말은 성도들의 일상생활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성도가 되기 전에 인격자가 되어야합니다."

"성도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직분을 넣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장로가 되기 전에 인격자가 되십시오."

"권사가 되기 전에 인격자가 되십시오."

"집사가 되기 전에 인격자가 되십시오."

 

▲강남에서 목회하고 있는 한 목사님이 자기의 목회생활을 돌아보면서

최근에 「믿음의 본질」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

 

"믿음이 과연 무엇이냐?"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의 답을 찾으면서 쓴 이 책에서 이 목사님은

"믿음은 인격적 특성을 가장 중요한 본질로 보고 있다"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책은 믿음의 본질을 여러가지로 정의했는데

첫째가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믿음은 지정의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을 추구하거나, 신비주의적인 명상에 몰두하거나,

사회의 개혁만을 강조하는 것은, 균형 잡힌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랑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격적 특성을 가장 중요한 본질로 보고 있다"

"믿음은 첫째 본질은 인격과 인격 사이의 관계이다"

이 말의 뜻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각료들의 대부분이 링컨보다 학력이 높았습니다.

아시는 대로 링컨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치 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접시 저울의 한쪽에 링컨을 올려놓고, 한쪽에는 다른 각료들을 모두 올려놓는다면

링컨 쪽이 더 무겁다고 기울어질 것이다.

그의 인격의 무게가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다"

 

성도들도 자기가 속한 단체에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이 하나 말씀드립니다. 성도의 인격은 신앙적 인격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는 신적 인격(神的人格)이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The Personal Responsibility before God 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책임성"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해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인격적으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인데

모세의 인격은 하나님 앞에서 수십만 명을 인도하는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격이었습니다.

 

미스 코리아를 뽑을 때 초기에는 얼굴과 몸매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얼마나 교양을 갖추었나 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간단한 스피치를 하게 해보고, 여러 가지 면면을 두루 살핍니다.

 

러시아에서는 한동안 미스 러시아를 선발할 때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도 보았다고 합니다.

 

교양미, 인격미를 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인격적으로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격적으로 아름다운 성도가 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면,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 문제를 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어도 좋으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고 로마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문제에 대해 고린도전서 8장에서 이미 답을 내렸습니다.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다시 말씀드려 "나는 믿음이 튼튼해서 이런 것이 문제되지 않아!"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마구 먹는 일 같은 것은 삼가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속뜻을 말하면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위해서

먹는 것을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세요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그리고 바울은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자기는 아무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자기의 행동이 남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 삼간 것입니다.

 

▲승려들은 원칙적으로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전생(輪回轉生)을 믿기 때문에 소가 전생(前生)의 나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어서 먹을 수 없다는 것이고

또 가축이 도살당할 때 분노와 고통이 클 텐데

그 분노와 고통이 엉긴 살덩이를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육식을 안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안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육식을 안 했는데, 바울은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려 남을 위해서 육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이 일을 하면 나에게 어떻게 되지?" 하는 것도 생각해야 하지만

"이 일을 하면 남에게 어떻게 되지?" 하는 것도 생각해야합니다.

 

아주 간단한 것,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핸드폰 큰 소리로 걸거나 받으면

남에게 어떻게 되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남에게 어떻게 되는지를 먼저 생각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남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 살고 있는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하나님과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의인 사십오 명이 있으면"

"의인 사십 명이 있으면" "의인 삼십 명이 있으면" "의인 이십 명이 있으면"

"의인 십 명이 있으면" 이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이 때 아브리함은 진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모세는 고난받는 동족을 위해 애굽 왕실의 영화를 버렸습니다.

 

아모스는 드고아 초장에서 양을 치며 뽕나무를 기르는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가적인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번영하나

안으로 심한 부패에 빠져 들어가는 동족들을 볼 수 없어서

그 생활을 박차고 나와 예언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영국의 어느 정치가가 의회에서 중요한 연설을 하기 위해서

부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의사당으로 갑니다.

마차 안에서 이 정치가는 연설 원고를 살피면서 마지막으로 연설내용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부인이 마차의 창문을 닫는 순간, 마차가 덜컹하면서 창문이 아래로 쾅 닫혔습니다.

부인의 손가락이 창문 틀에 끼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아픔을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이 일을 알면 연설을 준비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의사당에 도착해서 부인은 남편에게 먼저 내리라고 하고

마부에게 부탁해서 창문을 열어달라고 하고,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손수건으로 감고

의사당에 들어가서 방청석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남편의 연설을 경청했습니다.

부인의 이런 내조에 힘입어 이 정치가는 영국의 유명한 수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이기주의가 너무 심합니다. 이기주의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지역 이기주의,

그런 가운데서 성도들이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주의의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기뻐하실 것이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내가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은 어떻게 될까?"

이것을 먼저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펀 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온다

 

모든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에서 온다.

 

분노와 미움을 가지고는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승리가 아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자기 자신의 분노와

미움을 이겨낸 사람이다.

 

자신을 예쁘게 만드는 사람은

세월이 가면 추해지지만

 

남을 예쁘게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빛나리

 

두려워 할 일이 없는데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두려워 할 이유가 있는데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부모 된 사람의 가장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함이다.

 

부모 된 사람의 가장 큰 지혜로움은

자신의 삶이, 자식들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3.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면, 남을 칭찬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도 고등학교에서 문학발표회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나와서 자기가 쓴 시나 문학작품을 읽고

다른 학교 학생들이 찬조출연을 하고, 음악순서가 한 둘 들어가고

그리고 초청문인이 강평을 하고...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안수길(安壽吉)이라는 소설가가

한동안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연고로, 그 뒤에도 늘 오셔서 강평을 하곤 했습니다.

 

어느 유명한 문학가 한 분은, 고등학교 문학발표회 강평을 맡아 가면,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첫 작품부터 끝 작품까지 하나 하나 거론하며 "이 작품에서는 이 대목이 가장 좋았다" 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이 일이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름난 대가가 자기의 작품 가운데서

비록 한 대목이지만, 인정을 하고 칭찬을 해주니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나중에 문인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신중신(愼重信)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이름의 앞 글자와 끝 글자가 같다고 해서 별명이 전차입니다.

예전에 땅위를 달리던 전차들은, 앞뒤가 모양이 똑같았거든요.

 

이 시인에게 "당신은 어떻게 해서 시인이 되었습니까?" 물었더니 자기도 모르겠답니다.

하나 기억나는 것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시간에 독후감을 발표했더니

선생님이 잘 썼다고 칭찬을 많이 해 준 것이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칭찬하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칭찬하고, 교회학교 교사들, 학생들을 칭찬하고

이웃을 칭찬하고, 형제간에 칭찬하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장차 큰 인물, 중요한 인물이 되는 일에 도움과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저술가이며 사회심리학자인 죠지 크레인이라는 사람이 ‘칭찬 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이 칭찬클럽에 입회하려면, 한 달 동안 심사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그 한 달 동안 하루에 세 번 이상 남을 칭찬해야 합니다.

그래야 입회자격을 부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루에 세 번 이상 남을 칭찬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 남에게서 칭찬을 받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남을 칭찬하는 것은 더 행복한 일이로구나!'

그래서 자기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칭찬한다고 합니다.

 

어느 회사에 대표적인 말썽꾼이 있었습니다.

불성실하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서의 책임자가 견디다 못해 사장에게 가서

"사장님, 아무개는 더 이상 이 회사에 둘 수 없습니다. 해고시켜야 하겠습니다" 했습니다.

 

사장은 "그 직원에게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만

반면에 의리도 있고, 사람을 끄는 힘도 있고 뱃심도 있고

이러 이러한 좋은 점들도 있는 것 같은데 조금만 두고 봅시다" 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뭐, 사장님이 나를 칭찬했어?"

 

그는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모범 사원이 되었습니다.

칭찬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존경을 받으려면 남을 먼저 존경해야 합니다.

또한 칭찬을 받으려면 남을 먼저 칭찬해야합니다.

 

로마서 14장은 "형제 장 chapter"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라는 말이 그만큼 많이 나옵니다.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13b절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5절도 형제라는 말이 두 번 나오고,

21b절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그런데 로마서 14장에 "가로 장"이라는 이름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이 설교 시작 부분에, 가로 관계와 세로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로마서 1장~11장까지는 세로를 강조하고 있고, *수직적 관계

12장부터는 가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수평적 관계

 

로마서 14장은 ‘가로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14:1절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4절에서는 “남의 하인도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 뭐 저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가서 "목사가 뭐 저래?" "장로가 뭐 저래?" "권사가 뭐 저래?" "집사가 뭐 저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다시 한 번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주의하라'는 '판단하라 judge'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거칠 것이 되지 않는가?'

'이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가?' 판단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19절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여러분 화평하게 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피스 메이커(Peace Maker)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갖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즉 우리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서로 덕을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덕을 세운다 edify' 라는 말은, 그의 신앙을 차곡차곡 벽돌 쌓듯이 세워준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에 힘쓰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전 본당 공사현장 건물 외벽에 일본말로 아시바 라고 하는 것이 매어져 있습니다.

요즘 공사현장에서 ’우리말 쓰기 운동‘을 하는데, 우리말로 족장(足場)이라고 하지요.

이 족장을 설치하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비용이 많이 듭니다.

 

지금 성전 본당공사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데

족장(비계) 세우는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드는 것을 보고 놀았습니다.

 

족장을 세울 때 먼저 세로 기둥들을 세웁니다.

그 다음에 가로 기둥들을 세웁니다.

그런 다음에 그 위에 판자나 알루미늄 판을 놓고. 그 뒤에 서서 작업을 합니다.

 

6층 높이의 족장(비계)에 올라서면,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데, 기술자들은 태연하게 일을 잘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세로 기둥을 세우고

그 다음에 이웃과의 관계라는 가로 기둥을 세웁니다.

그 위에 발판을 놓고 서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것은, 가로 막대기와 발판이 튼튼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튼튼해야 우리는 그 위에 서서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인격자가 되기 위해 힘쓰고,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칭찬하기에 힘써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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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남동생 둘과 함께 대전에서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펀 글)

부엌이 딸린 방 하나를 얻어서 저와 고등학교 다니는 동생

그리고 중학교 다니는 동생이 함께 지냈습니다.

큰 형인 제가 엄마 노릇까지 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여기는 다세대 주택이었습니다.

한 울타리 안에, 여러 세대가 같이 사는 집이지요.

 

보통 그런 집은 평안한 날이 별로 없습니다.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옆집끼리 서로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 남학생 셋이 자취를 하러 들어갔습니다.

 

저희 형제는 어릴 적부터 우애가 좋았습니다.

때로 다투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큰 소리 내며 싸워 본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형은 형이어서 양보하고, 동생은 동생이어서 양보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우애 좋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들 힘써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큰 이유였습니다.

 

그 집에 살 때, 바로 옆에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들을 학교에 먼저 보내 놓고, 제가 강의를 들으러 집을 나가는데,

옆집 색시가 따라 나오면서, "학생, 잠깐, 저 좀 보세요"라고 부릅니다.

제가 돌아서서 "예, 무슨 일인가요?"

 

그러자 그분이, "학생, 우리 남편 좀 전도해 줄 수 있겠어요?"라고 묻는 겁니다.

저는 놀라서 "아, 예, 왜 그러시지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총각 셋이서 자취 생활을 하는데, 한 번도 소리 내어 싸우는 일도 없고,

일요일 아침마다 셋이서 즐겁게 대화하면서 교회에 가는 모습이 너무 부러워요.

저도 남편과 그렇게 싸우지 않고 살며, 남편과 함께 일요일 아침마다

즐겁게 교회에 다니면 참 좋겠어요. 나는 언제든 교회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으니,

우리 남편 좀 전도해 주세요."

 

당시, 저희 형제들의 신앙수준이래야, 미천한 수준에 불과했습니다만,

우리의 우애와 생활 방식이 믿지 않는 이웃에게 이렇게 특별하게 보였다는 점에 기뻤고,

또 한 편으로는 겁도 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저희가 그 집에서 이사 나올 때까지

그 남편을 교회까지 이끄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지금 돌아 보면,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나를 좀 전도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전도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 저는 씨앗을 뿌린 것이고,

언젠가 다른 사람에 의해 수확되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어,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 새색시가 저희 형제들을 보고 부러워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지만, 저희 형제들 사이에 있던 ‘사귐’과 ‘섬김’이었습니다.

신혼 부부였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사귐과 섬김이 없었습니다.

그 새색씨는 바로 그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남편과의 진정한 ‘사귐’ 그리고 그 사귐 속에서 나누는 진정한 ‘섬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새색씨는 교회 때문에, 저희의 믿음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분은 저희 형제를 보았지만, 저희를 통해 교회를 보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