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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양들의 문입니다

LNCK 2024. 4. 28. 07:0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복음 관련

 

[24.04.21] 예수님은 양들의 문입니다  - YouTube
예수님은 양들의 문입니다              요10:7~10

※'양의 문' 비유는 복음인데, 막상 설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도입

'목자와 양' 이 메타포는, 이 말씀을 전해 듣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메타포 였습니다.   *메타포 : 은유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보통 관계가 아니죠. 언약의 관계죠. 
'언약의 관계'라는 것은, 우리가 구약에서 읽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어마무시한 기적들을 계속 베풀어 주시는 
그런 관계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런 혜택, 그런 특권,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거죠. 

성경은, 그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그런 메타포로 늘 설명을 했어요.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지만
이 '목자와 양'이라는 존재는, 일상생활에, 주변에 아주 친숙한 그런 현실이에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도, 베들레헴 야외에 들판에 한밤 중에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셨듯이... 목자는 가까이에 있는 유대 백성들의 현실이에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숙한 그런 메타포이면서, 
또 동시에 일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그런 소재(목자와 양)를 가지고 

이런 중요한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이 눈높이 교육의 현장으로 
우리가 함께 들어가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요10:1~6절까지 선한 목자, 그리고 양, 도둑들... 
이런 내용들을 다 설명을 해주셨는데   *목자와 양의 비유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더라' :6 
뭔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신 거예요. 다시 설명해 주신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그 양들의 문이니라'   요10:7

 

◑1. '그 양들'

 

'그 양들'
그 양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내용을 듣는 청중들의 입장에서는 
누군지를 알죠. 
앞서 10:1~6절 사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양들'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 양들'이 누구인가요?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8   

*위 8절에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개역에는 정관사가 안 나오지만
원전에는 '그 양들'이라고 정관사가 있습니다.   *타 프로바타

3절에 보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들을 말하는 거예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10:3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양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사람들을 가리키죠.

그 양들의 특징을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 양들은 도둑들과 강도들의 음성을 듣지 않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세요.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8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10:5

그 양들의 특징 한 가지를 강조해서 언급해 주시는 거예요. 
그 특징이 뭐예요? 분별력이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 줄 아는 분별력!

양들에게는 '이 음성은 내 목자의 목소리가 아니구나'
'이 목소리가 내 목자의 음성이구나' 이것을 이제 알아듣는 것이죠.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대입을 하게 되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가는... 
'그런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그런 성도들' ... 양들은 그들을 말하는 거예요. 

진리와 거짓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 
말씀과 말씀이 아닌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의 차이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그 양들'인 것입니다.   :8

예수님께서 그 양들을 주목하시고, 그 양들을 위한 말씀을 주셨어요. 
여러분은 모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양들'의 무리에 다 들어가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2. 예수님은 그 양들의 <문>이시다

예수님이 그 양들을 위하여 주시는 첫 번째 말씀은 
'내가 그 양들의 문이다' 라고 말씀이세요. 예수님이 그 양들의 문이세요. 

문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pen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존재하는 것이죠. 
문의 역할이 그런 통로예요. 어디로 들어가느냐?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거예요. 

'나는 양의 문이다' 라는 뜻은 :7

'내가 그 양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통로인 그 문이다. 
그 말씀을 주셨어요. 

근데 이 통로, 그 문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문이고,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세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말하는가요?    *우리 : 짐승을 가두는 곳 pen
그러면 이 메타포(은유)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우리가 어디입니까? 

들판에 있는 우리, 아니면 마을에 공동으로 활용하는 그 공동 우리,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갑니까? 그건 아니죠. 

'우리'는 하늘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장소, 그곳을 말하는 거예요. 
교회도 우리의 한 의미가 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도님들이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시든지 
그곳이 하늘 아버지가 함께 있는 곳이라면,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계셔 주시는 곳이라면, 
그 곳이 우리에게는 '우리 pen'가 되는 거예요.              

본문의 양의 우리처럼, 하늘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그 장소가 되는 거예요. 
그곳이 에덴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에덴으로 바뀌는 거예요. 

또 그리고 그곳이 하늘 나라예요. 하나님의 나라예요.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임해와 계시는 
그런 그 공간이 우리에게 열려진다... 그런 말씀이세요. 

그곳(양 우리)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 문이 무엇인가?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 외에는, 거기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통로가 없다! 
그 말씀을 주시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그런 말씀을 주셨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가 계시는 곳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을 주셨어요.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다'  엡2:18 

양의 우리 안에 들어가는 것은, 양들에게도 참 귀한 것이죠. 
즉 오늘날 이 땅을 살고 있는 하늘 아버지의 귀한 자녀들에게도, 
하늘 아버지가 계시는 그곳으로 들어가고, 

 

하늘 아버지가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시는, 
함께 거하시는 그 임재의 장소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강조를 해도 모자람이 없는, 그런 소중한 말씀이에요.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양의 우리'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요!
하나님의 나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천국으로!

▲이것(양의 우리로 들어감)이 만약에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가슴에 
현실로, 실제로 느껴지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정말 사도요한이 (계시록에서) 하늘 보좌를 바라보면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이 순간에도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시는 
그 하늘 보좌의 장엄하고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정말 가슴속에 그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얼마나 귀한 특권이라 하는 것을... 느끼게 되죠.

그 자부심과 그 자긍심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세계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음을, 사도요한은 체험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땅에 살지만 
우리가 아버지 함께 계시는 그곳으로 
그 우리 pen 안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가 본다면

우리가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고요.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고, 
그 영광과 그 특권을 우리가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자부심을 
우리가 가슴속에 충만하게 담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일이, 우리에게 열려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예수님이 그곳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통로(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우리 모두 감사하고, 또 평생 잊지 않으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그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에요. 
아무리 우리 pen 가 있고, 예수님이 그 양들을 위한 문이 되어 주신다,
그 통로가 되어 주신다 해도, 

그 통로를 통해서, 내가 우리 안으로 안 들어가면
내게 그 은혜가, 그 모든 그 기적이, 임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그 우리 안으로 들어가 줘야 합니다. 

또한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을 말하나요? 
교회에 와서 이렇게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한 가족으로 또 성도들 간의 교제를 나누는 것도 
우리 pen 안에 들어가는 소중한 그런 모습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우리 pen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예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이런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뜻해요.  

예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냥 내가 먼발치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귀로 들어서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예수님을 존경하고... 그냥 그런 피상적인 관계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무조건 따라 나서는'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그 말씀을 100% 신뢰하고, 100% 믿고, 100% 순종하고 따라나서는 
이런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pen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예수님이 주시는 음성이라면 
우리가 100% 신뢰하고, 그 음성을 따라 나서는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근데 '누구라도 나를 통해서 들어올 수 있다' 말씀하셨어요.
이 세상의 지위, 학벌, 재산.. 이런 세상적인 기준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만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뭐 특별한게 없습니다. 

우리가 대학을 진학한다 하더라도 
그 대학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제안을 한단 말이에요. 
시험을 봐서 몇 점 이상 되는 사람들은 이 학교에 입학허가가 나오는 것이고... 
그 자격에 제한을 둬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끼리 이렇게 만나더라도 
어울리는 사람들의 어떤 클럽이나 단체를 들어간다 하더라도, 가입 조건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로 들어가는, 예수님과의 살아있는 진짜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그 길은 
자격조건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아무런 자격조건 이라는게 없다. 누구라도 나를 통해서 들어올 수 있다.' 
예수님과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로 들어올 수 있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들이 정말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과 진짜 인격적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거예요. 
'아버지'로 부르는 것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뉘앙스가 굉장히 달라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계속 우리가 부르면서,
이 칭호에 익숙해지고, 이 관계에 익숙해지면... 너무 친밀한 관계가 되죠. 거기에서 오는 행복이 있어요.  

▲제가 요즘 혼동을 느끼는 것이, 우리가 찬양을 부를 때마다
'이 가사들을 바꿔야겠구나'는 생각이 들어요. 

'진짜 인격적 친밀한 관계에서 만약에 가사를 쓰는 거라면, 저렇게 안 쓸 텐데...' 
'아버지를 아직도 멀리 생각하니까 저런 가사를 쓰는 거구나' 
'성도와 아버지와 관계는 그 보다 더 친밀하고 가까운데... 더 깊은데...'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거예요. 

주님과, 아버지와, 그런 진짜 관계로 들어가게 될 때에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달라지고요.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일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완전히 달라지는... 
이런 변화들이 우리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진짜 관계예요. 그것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그런 결과가 
그렇게 우리에게 체험 되어지는 거죠. 

◑3. 그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으로, 
그 우리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어요. 

예수님의 약속은 공수표가 아닙니다.
이 일은 우리들의 삶에서 반드시 이루어지는 그런 약속인 줄 믿습니다.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2가지를 기억하세요

▲1. 첫 번째는 구원을 받는데요. 
우리가 죽어서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그것도 구원이에요. 

그것도 예수님과 이런 친밀한 관계로, 아버지의 임재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전적으로 순종하고 따라가는 양들처럼 
그렇게 따라가는 그분들의 삶 속에는
이 구원, 영생의 약속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앞으로 우리는이 세상을 떠나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가보지 않으셔서 갈까 말까 망설이고 
또 그 좋은 본향을 앞에 두고도 이 땅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그거는 본향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분들이 하는 얘기고요. 

그 세계가 얼마나 좋은지 알면,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 저도 지금이 세상 떠나서 예수님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요.'
라는 간절한 소망을 기도하고 싶은 거예요.

이 세상에 아무리 좋다 한들, 그 천국만 하겠습니까? 
영생의 세계, 그러니 이 세계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아 그거는 쓰레기(배설물)입니다.' 

저 본향에서 내 아버지와 예수님과 누릴 그 세계 
그 세계의 영광, 그 현실에 비하면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죠. 빨리 가고 싶은데요. 
이런 마음을 갖는 거지 이게 진짜 관계로 들어간 사람들의 마음은 그거예요. 
거기는 우리 고향이요, 우리 본향이에요. 그 세계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어요. 

멸망당하는 자들은 그 세계로 못 들어가는데 
구원받는 우리는 십자가의 그 길이 너무도 달콤하고 
너무도 영광스러운 길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영원한 세상을 우리가 소망으로 
그것을 우리가 목표로 살아가는 그런 마음이 우리 속에서 이제 올라오게 되는 거예요.
                       주1) 두루미와 달팽이 (예화)

△더 나아가서요. 우리는 몸을 이 세상에 딛고 당분간 살아야 돼요.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인생길을이 광야길을 걸어가야 돼요. 
그 광야 길의 현실에서,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즉 우리에게는 사탄의 공격이 있습니다. 
사탄의 공격은 우리의 생각의 세계를 공격하고요. 
또 우리 주변의 환경을 힘들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런 반응을 보이게 하는 거예요.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반발하고, 또 말을 거역하고 하는 모습이나
우리가 사탄의 공격을 받아서, 사탄의 꾀임을 받아서 
그 결과로 하늘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로 만들고, 멀어지게 만드는 
그런 악한 생각들을 우리 안에 넣어 주고요.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변에 있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풍랑을 바라보면서 
걱정하게 만들고, 근심하게 만들고, 염려하게 만들고 하는 이런 공격들이 
우리에게 온다고요. 

그런 모든 맹수(사탄 마귀)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이게 구원의 현재적 의미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그런데 미래적 구원만 있는 게 아니라, 현재적 구원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자녀다운 모습인가요? 

 

그런 상황에서 평안을 누리도록, 예수님께서 보장해 주셨어요. 
어떤 상황을 우리가 살든지, 우리의 마음은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구원(보호)해 주십니다.

 

그 맹수가 그 이미지가 어떤 거예요? 
'우는 사자처럼'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이를 찾는 우는 사자와 같이 
맹렬하게 우리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앞에서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시는 상을 받는 거예요. 
잔칫상을 받고서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누리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시고, 우리의 삶에 근심과 걱정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그 길을 예수님께서 인도해 주시겠다... 그런 약속을 주셨어요. 
그것이 '현재적 구원'의 의미입니다. 

양은 우리에 들어가면 그곳이 피난처입니다. 
우리 pen 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공격으로부터 피하는 피난처가 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 피난처 안에서 
안전을 누리시고, 평안을 누리시고, 자유함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조지 뮬러의 평안 (펀 글)

조지 뮬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결국 최선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체험했습니다.

 

외동딸 루디아가 장티푸스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조지 뮬러는 최악의 시련을 만났지만, 마음에 한없는 평안을 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딸이 죽음의 문턱에 이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도 뮬러는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자신이 주님께 잘못한 것이 있으면, 주님의 손이 무겁게 누르시는 것을 체험하는데,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뮬러의 기도를 들으시고 외동딸을 살려 주셨습니다.

 

뮬러의 아내가 39년간 결혼생활을 하다가 류머티스 열로 6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뮬러는 자신의 아내의 장례식 설교를 했습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라는

시편119:68절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뮬러는 세 대지 설교를 했습니다.

 

첫째 대지는 아내를 자신에게 주신 주님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대지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내와 함께 살게 해 주신

주님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대지는 아내를 데려가신 주님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내가 와병 중에 있을 때도 뮬러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나의 아버지, 나의 사랑하는 아내의 생명은 주님의 손에 있나이다.

삶을 통해서나 죽음을 통해서 주님은 아내와 저를 위해서

가장 좋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아내가 몹시 아픕니다.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저의 아내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떻게 하시든지,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완전히 흡족하게 계속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외동딸을 돌려주신 분도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

사랑하는 아내를 데려가신 분도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

조지 뮬러는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안식처, 피난처, 거처입니다.

 

▲2. 두 번째 약속의 내용은 꼴을 먹는데요. 풀밭을 발견하는 거예요.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도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가 여호와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거는 목자의 역할이에요. 

양의 역할은, 목자의 음성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푸른 풀밭이 나오는 것이고, 그러면 그곳에 쉴만한 물가가 나오게 되는 거예요. 
다윗은 그것을 알았어요. '목자의 음성을 따라가면 꼴을 얻는다.' 그것을 알았어요.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 많은 것을 우리가 닮아야 하죠.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셨잖아요. 
'나를 따르라'는 것은, 뒤를 졸졸 따라다니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되라, 예수님과 똑같은 사람이 되라' 그런 말씀을 주셨어요.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마5:48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런 내용을 우리가 아셔야 돼요. 
예수님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에, 하늘 아버지를 목자로,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해 주신 그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어요. 
물론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그런 역할을 하시는 의미로서 어린 양을 언급했죠.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살아가신 그 모습 전체가 
목자이신 하늘 아버지와, 
자신은 어린 양으로서, 아버지의 말씀에 100%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적으로 믿고 따라가는 순종하는 그런 삶을 사셨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에요. 

내가 양으로서, 목자의 손에 붙들려서, 하늘 아버지를 목자로 섬기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그분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위대한 결정이고, 위대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안다고요. 
그런데 알면서도 만약 우리가 그런 삶을 살지 못한다면
정말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되겠어요? 

우리 모두가 다 어린 양이 되어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을, 하늘 아버지를 꼭 붙들고 
그분만 졸졸 따라가고, 
어디로 우리를 인도하시든지 100% 신뢰하고 순종하고 따라가는... 
그래서 우리에게 약속된 이 풍성한 은혜를, 이 사랑을 
마음껏 누리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10절에 이런 말씀을 주세요. 
'그 양들이 생명을 소유하고, 더 풍성히 소유하게 하려고 내가 왔노라'  요10:10 

'생명'을 두 번은 구하세요. 
'생명을 소유하되, 그 생명을 더 풍성히 소유한다'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면 아 그것으로 다 완결인데, 
또 더 풍성한 생명은 또 무엇인가요? 

결론만 말씀을 드리면요. 
육의 양식도 주실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 그런 의미예요. 

육의 양식으로 우리의 육의 생명을 우리가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처럼 
영의 양식을 주셔서 우리의 영의 생명으로도 건강하게 성장하고, 
또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즉 아버지와의 가장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그런 의미가 되죠. 

구약 전체에 메시지는 그거예요. 
'내가 너희를 광야 생활 40년 동안에, 만나를 먹이지 않았느냐?'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메시지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야 더 풍성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하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어요.  신8:3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같은 말씀을 인류를 향해서 선포해 주셨어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먹어야 할 것과, 마셔야 할 것과, 
입어야 할 것, 그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의를 구하라.'
 
그것은 '영의 양식에 관심을 두라'는 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말씀하신 첫 번째 내용이 그거 아닙니까?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아 광야에 계실 때, 첫 번째 대답이 그거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 두 가지를 넉넉하게, 
육신의 꼴을, 영혼의 꼴을 넉넉하게 제공해 주신다... 이 약속을 주셨어요. 
우리 성도님들에게, 그 약속이 풍성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영의 양식'을 우리가 먹어야, 그 꼴을 먹어야 
우리가 영으로 성장하고, 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데요. 

오늘날 이 시대에 불행이라고 할까요?
이 시대에 어두운 현실의 한 단면이 뭐냐면, 성도님들이 영의 양식을 잘 잡수시지 않아요. 

제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라는 주제로, 시리즈로 몇 주 동안 말씀도 전해 드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잡수세요. 말씀을 풍성히 드시지 않는 거예요. 

말씀을 드시는(먹는) 것은, 말씀을 내 안에 받아들여서 
말씀이 내 생각이 되고, 말씀이 내 언어가 되고, 말씀이 내 삶이 되는 
그런 수준까지 들어가는 것이... 말씀을 먹는 거예요

이것이(영적 영양 결핍) 이 시대를 힘들게 하고, 
우리가 하늘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주범이다.. 
라는 것을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 

다 어두운 시대지만, 
하나님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리가 섬기고,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영의 양식을 부지런히 드시고,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나고, 영으로 성장하고, 
또 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도달하시는 그런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가 만약 유익하게 재밌는 영화에 푹 빠져서, 재밌게 관람을 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영화의 내용들이 잘 기억이 안나요. 

그래서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다음에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
'전에 내가 이 영화 분명히 봤는데, 이런 장면이 있었나? 
왜 이런 장면이 기억이 안 나지?' 그런 경험이 아마 있으실 거예요. 

제 말은, 주일설교 말씀을 한 번 들으시고, 복습을 하지 않고, 기억을 하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거예요.

설교자인 저도, 이렇게 준비해서 설교했지만, 저도 복습(복기)하지 않으면, 
며칠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거의 안나요. 
계속 반복을 해야 기억에 남아요. 그래서 그 내용을 붙잡고 기도하게 되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이것을 먹으려면 반복을 해야, 
그제서야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 말씀이 내 생각으로 내 의식으로 들어와서 
내 영혼에 피가 되고 살이 되려면, 반복해서 기억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가 음식을 소화하실 때도, 여러 번 씹잖아요. 
어떤 분들은 한 번에 30번, 50번은 씹어야 된다고 말하죠. 

그러면 우리가 이제 설교 요약을 매주일 정리해서 나눠 드리잖아요. 
이거를 30번, 50번 정도, 그 정도로 아주 꼼꼼하게 차근차근 차분하게 읽으시면서 
묵상하시면서, 이것을 내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 요약문에 또 질문을 적은게 있어요. 
그 말씀을 읽고, 듣고, 내 안으로 받아들이려고 할 때 
내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어떤 경험들이 
내 속에 뭐가 이 말씀 받기를 어렵게 하느냐? 

또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어떤 상황이, 
이 말씀을 실천하기 어렵게 만드느냐? 
그런 것들을 내가 하나씩 하나씩 과감하게 깨뜨리고, 

양이 목자의 음성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처럼, 
나도 이 음성을 따라서 순종하고 이 길로 한번 가봐야겠다... 
이런 노력들을 하게 될 때, 그제야 우리가 영의 양식을 제대로 섭취하는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거예요. 

오늘부터라도 다시 한번 분발하셔서 
영의 양식을 부지런히 섭취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봄에, 우리가 봄의 계절을 지나고 있는데, 온천지에 생명이 다시 살아나잖아요. 
그런 것처럼, 구원을 얻고 꼴을 먹으면, 
우리의 심령 속에 그런 생기가 다시 살아나는 거예요. 

이렇게 봄에 연녹색의 그런 색상이 변하는 신록을 보고 
또 각종 꽃들이 폈다가 지는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가 감탄을 한다고요. 
참 너무 아름다워요. 

그런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꼴을 풍족하게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생명'이에요. 
그들의 삶은 참 아름다운 신록과 같은 모습이고,
봄꽃은 봄에만 피지만, 그것도 10일 정도 짧게 피지만 
우리 예수님 안에서 꼴을 얻는 성도들은, 사계절 내내 꽃을 피우듯이 새 생명이 넘쳐나요.
매일 꽃을 피우는 사람으로 사는 거예요.
 
그들에게서 힘과 에너지와 넘치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그런 생기를 우리가 보게 되죠.

우리들은 그런 생명을 마음껏 누리고 
그런 생명이 내 속에 있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그런 분들 되시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요.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들이 있다. 
물론 사탄이 우리를 맹수처럼 공경하는 그것도 있지만은 
우리 가까이에 이것을 방해하는 존재들이 있음을 예수님이 말씀해 주십니다. 

'도둑들과 강도들도 있다' 그런 말씀을 주셨어요. 
거짓 교사들이 있는 거예요.
호사다마 란 말처럼, 좋은 일에는 언제나 가짜가 침입하는 거예요. 

근데 이미 요9장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그들을 '너희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다.' 이렇게 말씀을 주셨어요. 

요9:3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앞만 못 보는 것이 아니고요. 자기들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고요. 
남들도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게 방해하는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들은 거짓이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서는 
하늘 아버지가 계시는 그 우리 pen 안으로 
하늘 아버지가 거하시는 그곳으로 못 들어간다, 영의 세계로 못 들어간다... 
그런 말씀을 주시는 것이에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요10:10
종교지도자들이 다 선한 목자가 아니라는 거죠.

아니 어떻게 종교 지도자들이 이런 모습으로 올 수가 있는가요? 
예수님 그렇다 라고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것을 우리 성도님들은 분별을 하셔야 돼요...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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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두루미의 달팽이 (펀 글)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성경에 계시되는 영원한 것들에 마음을 둬야 한다.

 

달팽이를 먹이로 살아가는 한 두루미가 냇가 주변을 거닐다가

아름다운 백조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백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두루미는

백조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조는 자신이 백조라고 밝히자,

두루미는 백조에게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계속 물었다.

 

그때 백조는 자신이 하늘나라에서 왔다고 말하면서

본격적으로 하늘에서 본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하늘나라 안에 있는 벽옥으로 된 벽,

진주문이 있는 순금의 도시에 대해 열심히 묘사하면서

나름대로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순간 두루미는, 백조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그런데 하늘나라에도 달팽이가 있니?”라며

자신의 관심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조가 아냐, 없어라고 대답하자

두루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고, 둘의 대화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난 하늘나라에 가고 싶지 않아. 난 달팽이를 좋아하는걸!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들만을 좇는 습성이 있다.

 

죄성을 지닌 인간들에게는, 교훈과 훈계를 주는 말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쾌락과 정욕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본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그 동안 즐겼던 죄와 정욕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가올 훨씬 뛰어난 것들을 멸시하고

보기에 좋은 것들만을 사랑하다가 지옥의 멸망으로 들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막상 눈에 보이는 것들에 더 마음을 둠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화평과 소망과 영원한 유업 같은 소중한 것들을

등한시하는 일이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18:8),

 

마지막 때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위에 있는 것들을 소망하기보다는 땅에 속한 것들,

 

특히 재물과 명예 같은 것들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슬픈 일들이

주변에서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1-4).

 

아무리 하늘나라를 설명해도

눈에 보이는 달팽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두루미처럼

주님이 주신 영생의 기쁨과 썩지 않을 유업을 바라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그 찬란한 유업 대신 두려운 책망과 영원한 수치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항상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후 4:18).

 

한순간 눈에 보이는 것들이 좋아 가나안이 아닌 소알 땅을 택했다가

큰 낭패를 당한 롯(13:10),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이 가진 재물에 더 마음을 쏟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19:26, 17:32),

 

하늘의 보물보다 자신이 현재 가진 재물을 선택하려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던 부자 청년(10:21),

 

바울이 아닌 세상을 택한 데마(딤후 4:10) 등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본이 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은

이 세상이 아닌 저 하늘에 있는 영원한 것들에

소망을 두게 하시려는 것임을 늘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