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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목회

LNCK 2024. 4. 3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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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적용과실천2 박영호 목사 - YouTube

선교적 목회               계21:5          

'선교적 목회'(강의 제목, 또는 우리의 지향점) 라고 할 때,

사실은 선교도 어렵고 목회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지난 3일 동안 '선교가 뭔지' 계속 강의를 들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더 모르겠어요. 

목회는요, 사실 평생 목회 아주 잘 하시고 은퇴하는 분들도
은퇴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야 내가 목회가 뭔지 조금 알 것 같다' 이러시잖아요. 
우리가 교회에 좀 어려움이 있고 하면 '목회가 이런 거였구나' 아마 그러실 것 같아요. 

저도 미국 가서 이민교회를 개척해서 10년 섬겼는데요. 
정말 목회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교수하다가 포항제일교회에서 목회를 다시 하게 됐는데 
정말 솔직히 고백드리면, 다시는 목회 안 하려고 했습니다. 

개척교회 10년 섬기면서 나름대로 은혜도 많이 받았지만 
그런데 선교도 어렵고, 목회도 사실 힘든 건데 
'선교적 목회' 이러면 얼마나 어려운 걸까요? 

그런데 사실 둘 다 어렵지만, 
선교라는 것과 목회라는 것을 포개어 놓으면,
교집합(공통)되는 부분이 뭘까요?

그걸 우리가 잘 들여다보면 의외로 '목회가 이런 거구나' 하는 
조금 더 깊은 성경적인 통찰에 이를 수 있겠다 싶어요. 

그러니까 '선교적 교회'라는 것 자체가 
목회와 교회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에 
우리를 조금 더 본질적인 통찰로... 
누구나 다, 어느 교회나, 
교회의 크기나 환경에 관계없이 적용할 수 있는 성경적인 통찰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컨퍼런스에서) '로잔과 세계선교' 라는 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오늘 제가 나누면서, 이제 우리가 실제로 목회 현장으로 돌아가셔야 되니까 
'내가 우리 로컬 처치, 우리 교회에 돌아가서 목회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라는 고민에 조금 도움을 드리면 좋겠다 싶어요. 

계속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선교가 복음주의적으로 수용된 게 
선교적 교회 미셔널 처치 Missional Church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신학도 변화됩니다

 

여러분 한 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요. '하나님의 선교'는 진보적 어젠다 였습니다. 
WCC 중심으로.

 

원래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 자체는 굉장히 복음적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선교의 주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이시고, 
교회는 그 안에 하나다 (하나로 연합한다) 는 개념이죠.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는 그러니까 시각을 넓혀주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고 
교회는 겸손하게 만드는 굉장히 복음적이고 좋은 신학적 아이디어인데 

 

본래 이것('하나님의 선교')을 말했던 분들이 진보적 라인에서 먼저 시작을 했기 때문에,
(진보주의 신학개념으로 그 동안 오래 인식되어져 왔어요.) 

사실 여러분의 선배 목사님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은퇴하신 한 80대 되시는 분들 중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은
아주 굉장히 위험한 단어다' 라고 생각하시고요. 
이 말을 듣고 나서는 즉시 귀를 씻어야 되는... 그런 단어였어요. 

        *Missio Dei : Mission of God 의 라틴어, '하나님의 선교'

그런데 지금 대부분 다 보수교단분들이, 이번 컨퍼런스에 많이 참석하셨는데, 
이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라는 게 
이 말이 그냥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큰 변화입니다. 
그것 자체가 '선교적 교회 - 미셔널 처치론'의 기여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이런 큰 신학적인 점프와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건 레슬리 뉴비긴 이나, 한두 분이 그렇게 노력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고요. 

큰 변화는, 여러분 모든 신학적 변화는, 위기와 충격에 의해서 생깁니다. 
사람은, 충격받지 않으면, 어제 했던 생각 그대로 합니다. 
대단한 충격이 있어야 생각이 바뀝니다. 그때 신학도 바뀝니다.

구약의 대부분의 신학도, '바벨론 포로기'에 크게 바뀝니다. 
포로기라는 큰 충격을 겪으면서, 과거 성전 중심의 신학에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신약의 신학은 '십자가'가 그 중심인데, 충격의 신학이거든요. 
십자가는 스칸달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정통 신학으로 바뀌었어요! 

'하나님의 선교' 이게 굉장히 진보적 어젠다 였는데 
'복음주의 교회가 과연 이걸 품을 수 있겠나?' 우려했는데, 

결국 복음주의 교회가, 이 개념을 품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게 
포스트 크리샌덤이죠. 후기 기독교사회의 충격이, 이걸 수용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Post Christendom

레슬리 뉴비긴이 대표적으로 말했듯이   Lesslie Newbigin (1909~1998) 
우리가 기독교 국가에서 비기독교 국가로 가서 
선교지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선교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평생 선교하고 고국에 다시 돌아와 보니까 
'영국도 인도 못지않게 세속적인 사회야' 라는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국 사람들이 최근에 '어느 날 눈 떠보니 선진국이 됐다' 이런 말을 하잖아요. 
우리가 유대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산다고 생각했는데 
눈떠보니 바벨론(이방 사회)이었어요. 그게 바로 포스트 크리샌덤입니다. 

'교회가 이 사회 전체의 대표도 아니고, 주도도 아니구나'라고 하는...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곳에 일하신다. 
교회가 어떻게 그 하나님의 손길에 쓰임 받을까?'라고 하는... 
교회가 겸손해진 거죠. 

포스트 크리샌덤 이라는 엄청난 충격이 서구신학에 있었기 때문에 
'선교적 교회 Missional Church', 또는 '하나님의 선교 Mission Dei'  
즉 우리는 바벨론 같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 라는 인식이 가능하게 된 거고요. 

그리고 그것이 선교학자의 이론이라기보다는 
뉴비긴 같은 실제로 선교 필드를 경험했던 분들에 의해서 나왔기 때문에 
힘있게 전환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굉장히 큰 기회이고요. 
그래서 선교적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복음주의적 수용이라고 하면, 
선교적 목회를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의 목회'라는 관점을 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선교, 선교적 교회'의 개념에 대해서
제가 5가지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위 둘은 비슷한 개념이죠.        

1)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가 되신다
교회는 선교의 주체가 아니다. 목회자가 목회의 주체가 아니다. 
내가 목회하는 게 아니고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 보내시고, 
사역자를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목회하시는 것입니다.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다.

2) 두 번째, 회복의 큰 이야기 
하나님이 주체이시면, 
내가 부임해서 이 교회가 시작되는 게 아니고, 
우리 교회가 개척해서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되는 게 아니고요. 

그거보다 훨씬 더 큰 이야기, 로잔대회 그것보다도 더 큰 이야기... 
즉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선교'가,   계21:5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그 도도한 구원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그의 백성이며, 우리는 큰 이야기의 일부일 뿐인 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정점에 이른 만물의 회복 = 새창조 
하나님의 나라 혹은 통치 = 회복 이라는 큰 복음의 흐름 안에서 
우리 교회, 내 사역이 있는 거죠. 그 속에 로잔 운동도 있는 거고요. 

물론 한 개인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은 
복음 전도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선교, 선교적 교회'의 두 번째 키워드는 '회복'입니다. 창조 질서로의 회복

3) 세 번째,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는 
역사 속의 그의 백성을 창조하고, <그 백성을 통해서> 그분의 선교를 이루어 가십니다.

교회를 통해서, 회복을 이루어가십니다. 그게 선교죠.

그 백성들, 즉 복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 declare 하고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display 합니다.

4) 다양한 문화를 향한 선교.. 이거는 넘어갈게요. 
다른 강의에서 논의를 많이 했으니까요. 

5) 탄식과 소망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목표는 '고통하는 피조물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6

지역교회의 성도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저는 이게 선교의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멀리 가서 뭐 하는 것보다는, 가장 중요한 출발은 지역교회죠. 
이웃과 사회의 재반 영역, 그리고 세계적 과제에 
교회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기도합니다. 

'만물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소망으로 
오늘 여기에서 here & now
하나님이 행하실 회복, 

만물의 회복을 향해가는 그 회복에서 
'오늘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은 어떤 회복을, 교회를 통해 하길 원하시는가?' 하는 것을 
교회가 하나님이 하실 것을 기대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탄식과 소망을 함께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이야기, 큰 그림 

사도행전으로 우리가 공동설교 하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기초에서 이 이야기를 조금 풀어봤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여쭈었죠. 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거 아니야, 이스라엘이나 하나님 나라의 회복 그건 잊어버려! 
그건 옛날 이야기야. 
이제는 다른 거야 이제는 전도해서 예수 믿고 세례받게 하고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그게 이제 하나님의 일이야!' 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이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고요.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그렇죠.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이 되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서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1:8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뭔가요? 
이게 정치적 기대인가? 아니면 뭔가? 굉장히 많은 말을 하겠지만 

'무엇이 구원이냐?' 라는 것은 사람마다 개념이 조금 다르겠지만 
핵심은요, 이게 뭔가 하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면 
나는 이스라엘 나라의 일원이기 때문에, 속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구원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죠? 

니고데모의 말도 다 그렇습니다. 전부 당시에 세례요한까지도 전부 패러다임이 
이스라엘에 속한 특별한 예외, 세례와 죄인 이런 사람들이 아니면 
이스라엘나라에 속해 있으면, 도매금으로 단체,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근데 성경의 메시지는 그게 아닙니다. 
행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각각 각각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나라 사람이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새 백성의 창조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각각 개개인, 이스라엘 나라를 개인으로 분리하는 거죠. 
그런데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반대 방향으로 훨씬 더 큰 방향으로 나아가서 
<만물의 회복>을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가 사회 전 영역에서 참여, 회복하라' 입니다)

좀 전에 이은호 목사님도 '교회는 그 안에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몸인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라' 만물 회복의 비전이 함께 있는 거예요.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1)개인구원 
바울도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심판받을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권이 있다고 당연히 그냥 구원 받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걸 굉장히 축소, 쪼개서 보는게 '개인구원'입니다.
이게 우리가 지금 말하는 복음, 전도, 복음의 중요성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과거의 선교나, 교회의 방향이 
이 협소한 영역에만 갇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시각과 영역을 넓히자는 것이죠. 성경적인 시각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2) 만물의 회복
그 반대 방향으로 훨씬 더 크게 '만물의 회복' 
이게 본래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갖고 있던 계획입니다. 

그 계획 속에서 이스라엘의 시작, 아브라함의 부르심 등이 일어났죠.
그를 부르실 때 '너를 통해서 세상 모든 백성이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는 
만물의 회복! 전체로 함께 나가는 겁니다. 

3) 교회의 회복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개인 구원 사역도 이어가시고, 만물의 회복도 이어가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선교'의 신학적 구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중한디?      주1)

 

주목하여 보기 

사도행전에 1장을 다시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천사 두 사람이 나타나서 이야기하죠.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1:11

'쳐다보느냐'
주목하여 본다, 아테니조 라는 아주 독특한 단어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특별히 많이 쓰이는 단어예요. 

이 단어는 '집중해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마치 시선을 못으로 박아놓은 것 같이' 쳐다보는 것을 뜻합니다.

지나가면서 힐끗 쳐다보고 가는 게 아니라, 
지나가면서도 계속 시선을 못으로 박아놓듯이 계속 쳐다보는게 아테니조 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천사들이 '너희가 어찌하여 하늘만 아테니조 하느냐?' 라고 했죠. 

행3장에 보면 이 단어가 다시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거예요.

거기 앉은뱅이를 전도하러 간 게 아니고, 
자기의 일상적인 일을 하러 가는 가운데
거기 어떤 사람(미문앞 앉은뱅이)을 만나는데, 그 사람을 주목했습니다. *아테니조 
굉장히 의도적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3:4

그럼 행1:11절과, 3: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행1:11절은 '하늘을 주목하여 보지 말라'는 거죠.
행3:4절은 '땅을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즉 천사는, 성령님은,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만 쳐다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치 않고,

이 땅에 살 동안에 '만물의 회복'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발맞추어
'이 땅을, 현실을 주목하여 바라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하라는 거죠!

주기도문에서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지는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게' 
주기도문의 핵심이잖아요. 그게 선교입니다. 

그러면 그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땅의 어떤 현실에 주목해야 되는가요? 주목할 분야가 너무 많잖아요. 

장애인, 교도소 재소자, 독거 노인, 재한 외국인
누구를 바라보고, 무엇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요?
문제는, 우리가 가져야 될 관심사, 선교 영역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그렇죠? 

김난도 교수가 '한국사회 전체 트렌드' 이런 것 보시는 게 필요합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4 
제가 재작년에 <시대를 읽다 성경을 살다>라는 책을 냈고요. 
아주 중요하게 <로잔 2024의 25개 이슈 네트워크>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서 총체적 선교라고 이야기할 때 어디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하는 후보군에 해당하는 거죠. 

저는 김난도 교수님이 제창한 '돌봄 경제'라는 것에 좀 집중합니다. 
제 책, 그리고 로잔의 25개 이슈 네트워크가 
지금 세계가 갖고 있는 총체적 선교 이슈들입니다.



저는 당회나 우리 교역자들에게 이 25개 이슈를 나눠주고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만으로도 2시간 정도 충분히 토론할 수 있습니다. 꼭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요, 
그냥 관심 가져야 되는 것으로 끝낼 일들이 있습니다. 

'건강이 중요하니까 운동해야지' 이거는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어휴 내 아내가 살 좀 뺐으면 좋겠어' 이거는 내가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인플루언서는 할 수 있겠죠. 잔소리를 하든지, 도와주든지, 피트니스를 끊어주든지... 

그래서 우리 인생의 모든 과제가 그렇습니다. 
'내가 무엇에 컨트롤 할 수 있는가, 컨트롤 해야 하는가?'를 잘 분별하는 게 지혜거든요. 
*뭣이 중요한디?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개교회가,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가, 혹은 우리 교회, 내 목회가 
포커스해야 될 점, 인게이지 해야 될 점, 그걸 응답받아야 합니다.

물론 기도는 좀 폭넓게 하는 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죠. 
그러나 그 전쟁에, 우리가 당장 참여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어떤 교회는 '우크라이나에 구호품을 보낸다'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게이지가 될 수 있겠죠.
그러한 것들 가운데서 기도하고 함께 활동하다 보면, 포커스가 되는 거죠. 
아테니조, 집중해서 보게 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 declare 하고, 나타내는 display 하는 공동체'가 로잔의 슬로건이죠.

 

행2장에 보면 유무상통, 서로 필요를 따라 나누어지는 이야기가 나오고 
행4장에 비슷한 말이 반복되는데, 2장과 4장은 조금 다릅니다. 

4장에서는 어떻게 했다 하는 게 아니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라는 태도와 성품이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이게 교회의 문화가 된 거죠. 

내 것을 챙기고, 남과 경쟁하고... 그게 아니라 
함께 서로 나누고 살아가는 삶이 문화가 되는 것, 
여러분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어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Attitude is everything! 
여러분, 어떤 사람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2~3년 지나도 기억나는 분이 있습니다. 
사업하다가 누구 만나서 이야기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너무나 많은 말을 해서, 다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런데 한참 지나서도 '그 친구 참 말이 많더라' 그건 기억해요. 
'그분이 참 온유하고 겸손하더라' 그거는 기억해요. 

한국교회가 지금 최고 억울한 게 뭔가 하면,
'우리가 사회봉사 이렇게 많이 하는데, 왜 사회가 교회의 봉사를 안 알아주냐?' 
하는 것은, 우리의 태도가 안 돼서 그렇습니다. 문화가 안 돼서 그렇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이웃을 돌보는 문화가 되어야, 
저는 아까 김난도 교수의 '돌봄 경제'를 언급했는데 
그런 돌봄에 교회가 활동을 하는 게 중요.하죠. 

그런데 이게 선교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함께 어디 아웃리치도 가고, 가난한 사람들도 돕고.. 이렇게 하면요 

함께 하는 사람들 중에서 돌봄에 민감성이 생기죠. 
옛날에는 그냥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은 장애인을 보고 그렇게 주목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요9장에 보면, 예수님이 쳐다보니까 막 쳐다보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그런데 완전히 바뀌었어요. 민감성이 바뀌는 그게 선교예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닮은 성품이 형성되고 
돌봄의 문화가 형성됩니다. 

그 공동체를 통해서...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게 바로 그거예요. 

Being을 통해서 다시 Doing의 단계로, 한 단계 더 올라가는 거죠. 
제가 이제 말씀 네트워크 이야기를 잠시 드리면 
로잔대회 주본문인 사도행전 1년 동안 함께 설교하는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Acts Now 라는 앱이 있거든요. 한글로 '액츠나우' 치시면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매주 설교 자료를 보내드리고요. 
굉장한 집필진들이 함께 섬기고 계십니다. 

말씀 네트워크, 사도행전을 1년 동안 공동으로 설교하는 흐름입니다. 
카톡 검색창에 '사도행전 말씀 네트워크' 검색하시면, 친구추가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작년에, 2024년 한해 사도행전을 공동 설교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교한국>에 모인 강사님들이 말씀을 나누고 싶다고 해서 
함께 강의했던 내용을 정리해서 최근에 책으로 냈습니다. 

사도행전 공동설교에 발맞추어서 cgn에서 '사도행전 퐁당'에 말씀 묵상이 매일 나갑니다. 
우리 집필진들 중심으로 주 5회 나갑니다. 그래서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사도행전 퐁당'에 지금이라도 조인하시면 
아주 풍성한 은혜를 함께 교회가 누릴 수 있습니다. 

해외를 포함한 각 지역에서 함께 소그룹 모임들 진행하고 있고요. 
쯔빙글리가 사역했던 취리히 에서 목회자들의 함께 설교 준비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일설교를 함께하는 공동체'가 단톡방을 공유하면서
지금 전국 각지에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을 중심으로 삶을 나누면서 
'목회자의 서로 돌봄 운동' 
이게 설교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목회 현장이 얼마나 힘듭니까? 

함께 성장해가는.. 함께 삶을 나누고, 서로를 세워주는 흐름으로 갈 수 있는...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렇게 기대합니다. 

'공동설교운동'은 제4차 로잔대회가 한국교회에 남길 소중한 열매가 될 것입니다. 
사실 세계 어디에서도 한 적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면서, 그냥 시행착오 겪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데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너무 큰 은혜를 주시고, 
그래서 내년 이후로도 이런 모임들을 통해서 함께 계속해서 
어떤 형태로든 설교를 할 수 있는 툴을 만들어 볼까... 지금 아주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금 그래도 내가 목회에 연륜이 있고, 설교에 대해서 조금 그래도 경험이 쌓인 분들이 
또 그렇지 않은 분들을 함께 돕는... 그래서 말씀이 바로 서는... 굉장히 중요한 운동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탄식 

목회의 가장 큰 출발은 '탄식'인 것 같아요. 

여러분 제가 신학생들을 자주 만나는 편인데, 늘 그런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목회하면 목양실에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압니까?' 
그건 티슈입니다. 

여러분, 성도님들이 찾아와서 울잖아요. 그렇죠? 
성도들이 기도해달라고... 울 때는 목회자를 찾아오지만 
또 잘되면 잘 안 와요. 

잘 풀리면 자기들끼리 어디 가서 파티하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목회인것 같아요. 

'할머니 어디 가세요?' 
'지금 예배당에 간다'

'그런데 왜 울면서 가요?' 
'울려고 간다.' 

'왜 예배당에 가서 울어요?' 
'울 데가 없다' 

어디 울 데가 없는 분이, 목사한테라도 와서, 얘기하고 울 수 있으면 
여러분 저는 '그런 목회 잘하는 목회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가 이걸 해줘야 되죠. 

선교는 여기서 출발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의 눈물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그 눈물, 그 아픔이 
바로 이웃 동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이거든요.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살전4:13
슬퍼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소망을 갖고 슬퍼라는 거죠. 
탄식 없는 소망은 피상적입니다. 
'잘 될 거야, 괜찮아!' 그런 헛공양이 얼마나 많아요? 
또 소망 없는 탄식은 피상적입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복음은, 함께 깊이 탄식하되 
그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선교적으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본다는 거예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막 다니면서 
그 어떤 장면을, 어떤 눈으로,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요? 
우리가 따라가면서 읽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을 읽으면, 
인천에서, 서울에서, 경북 봉화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우리가 그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여러분 소망, 
사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은 장애인을 봤을 때, 탄식이 있죠. 
피조물의 탄식을 본 거예요. 그렇죠. 

근데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야~ 예수만 만나면 이 사람이 펄쩍 뛸 건데... 
예수만 만나면 그의 인생이 완전히 너무 해피해서, 막 예수 예수 예수하고 다닐 건데...' 
하는 그 소망이, 그래서 그를 주목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냥 이 사람 불쌍한데?'가 아니라 
한 단계만 넘었으면, 예수만 만나면요. 완전히 바뀌는 거예요. 
그 변화되고 바뀌어질 인생을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바로 이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성도들과 함께 탄식하기를 원합니다. 
깊이 탄식해야 됩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을 함께 전한다면, 
저는 거기에서 선교가 출발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잔대회를 생각하면 저도 많이 기도를 하는데 
어젯밤에 주기철 목사님의 고난의 이야기를 잠시 들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대한민국은 참 특별한 나라인 것 같은데, 사실은 특별한 거 별로 없어요. 
뭐 러시아, 중국처럼 뭐 거대한 문화가 있는 게 아니고 
세계를 정복한 적도 한 번도 없고요. 
몽고가 지금 저래도 한때 세계를 호령했잖아요.'  

한국 역사를 보면, 진짜 얻어터진 역사밖에 없어요. 
그런데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이게 본래 '성서로 본 한국 역사' 이런 책이거든요. 

대단합니다. '어떻게 한국이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가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나라가 될까?' 

메시아, 고난받는 메시아잖아요. 
그래서 우리 민족의 고난, 일제시대, 그 이전의 침략 당함, 또 남북 분단의 아픔, 

우리가 사실 로잔대회 이러면서 우리 히스토리를 읽으면서 
에딘버러 1910 부터 시작해서 한국교회 성장과 쇠태 이런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의 렌즈가 너무 이 교회 안에 가두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많아지거나/ 교회가 작아지고... 
너무 여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을 잃습니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목회 현장에서 한 교회라됴, 조그만 교회라 하더라도요. 
한 교회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 모든 삶의 고난과, 시대의 아픔과, 사회적 소셜 문제들을 전부 다 몸에 갖고 있는 거예요. 
목회를 제대로 하려면, 여러분 총체적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어요. 
로잔대회에 오시는 세계의 대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세계들이 지금 고통받고, 피조물이 탄식하고 울부짖고 있습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해서 잘했고... 물론 행사를 잘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저는 케이프타운에서 3차로잔대회 모일 때 
사실 그때가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어가지고 굉장히 큰 변화가 일어날 때였거든요. 

굉장히 아쉬워요. 케이프타운이 당시 그때 남아공에서 그때 했는데, 
그 진실과 화해의 역사를 조금 더 잘 접목을 했으면, 굉장한 대회가 됐을 거예요. 

우리나라가 지금 분단 국가이고요. 
우리 말고도 세계 많은 나라들이 지금 엄청난 아픔을 겪고 있는데 
'하나님이 한국을 이런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 특별히 고난 많이 받은 이 나라의 교회를 
이렇게 성장시켜주신 이유가 뭘까?'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이 일하셨듯이 
한국인 성도인 우리가 갖는 이 고난을 
우리가 충분히 그 안에 침잠한다면

바로 이 대목에서, 고통받고 있는 많은 다른 나라들, 
다른 교회들과 함께 아파하며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를 배워가는 거죠. 
그 고난의 현장을 말하다 보면, 너무 거창하게 될 수 있는데 

핵심은 '우리가 다른 교회가 이런 건물 짓고, 이런 선교적 프로그램을 하더라' 
하는 거는 참고를 하시고요. 

내가 포커스 해야 될 아픔이 무엇인가? 
우리가 포커스 해야 될 주제가 무엇인가? 

그러면서 하나님의 큰 이야기 속에서, 내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해가는, 
우리 목사님들 또 목회사역 다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오늘 이 자리까지 인도하셨습니다. 

한국, 이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해주시고 
그래서 더 절박하게 주님께 매달리고 
예수만이 소망이라는 고백들 가운데 
하나님 놀라운 부흥과 은혜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고난의 역사와,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이 가슴 뛰는 이야기들이 
세계에 함께 나누어질 때, 
또 세계에서 오는 많은 복음의 증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하나님, 로잔대회를 통해서 영광받으시고 
이 땅의 새 역사를 여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 새로운 장이 
로잔을 통해서 열릴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고개 속에 모든 하나님의 종들과 그들의 사역 현장에 함께 해주시고 
성도들의 눈물과 아픔 가운데 피조물의 탄식을 보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그 고통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발견하고 
소망의 하나님 앞에 함께 달려나가자고 담대하게 초청하는 
우리가 다 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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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여러분 <곡성>이란 영화 아시죠? 
그런데 '만물의 회복'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다 회복되어야 되니까, 교회가 손을 대야할 영역이 너무 많잖아요. 그렇죠?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를 뜻한다... 라고 할 때, 
그러면 할 일이 너무 많고, 모든 게 다 사실은 선교라는 거죠.

장애인 문제, 동성애 이슈, 결혼의 순결을 지키는 문제와,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되는 문제와 
가난의 해결, 문화적 선교 등 너무너무 많은 문제들이 다 있기 때문에 
지레 한계를 느끼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취해야 될 자세는
'뭣이 중한디?' 입니다. 
영화 <곡성>에 나오는 대사인데요. 이 말이 한 때 유행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제일 중요한 것만 헌신하면 됩니다.
 
내 손이 미치지 않는 다른 분야는, 
내가 손을 대지 않더라도, 다른 분이 중요하게 여기시므로, 
그 영역에 부르심을 받은 분이 헌신하면 되는 것입니다.

'뭐가 중요한디?'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사역자들은, 다들 자기가 헌신하는 분야가, 하나님 나라에서 제일 중요하다 그러잖아요. 그렇죠? 

그 <곡성>영화에 보면, 아빠가 주인공인데, 경찰인가 그래요. 
그 마을이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 있는데, 
'어디 가서 이것만 물리치면, 이것만 해결하면 뭐가 될 거야' 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그래서 우왕좌왕 뛰어다닙니다. 
'이것을 바꿔야 돼!' 그러면서 시간이 다 지나가는 거예요. 비극적 결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될 진짜 중요한 질문은 '뭣이 중한디?' 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회의 문제, 선교의 모든 문제가, 
아주 복합적이고 종합적이고 
하나님은 그 전체를 보시면서 '만물의 회복'을 향해 나아가시는데 

 

그 와중에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나는 이게 중요한 것 같아!' 하면, 
그걸 고집하고 '이거 안 하면 안 돼' 라며 헌신하는 거죠.

그게 학문적으로 말하면 Reductionism 입니다. 
하나로 다 Reduce 하는 거죠. 좁혀 나아가는 거죠.

총체적 선교가 아주 중요한데, 
총체적 선교의 반대는 Reductionism 입니다. 
'내가 관심 가진 이게 중요하다' 
영어로 Nothing but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개념입니다.

-한국교회가 살려면 동성애 열심히 반대하고 물리쳐야 되는데, 
-한국교회 살려면 지금 세속주의를 반대하고 물리쳐야 되는데... 

다 필요한 거예요. 개개로 다 필요한 급선무인데 
여기에 꽂혀서 그것만 고집하고 리듀스(감소, 축소) 해버리니까 
전체 시야가 사라지는 그게, 총체적 선교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문제는 종합적이고, 하나님의 해결과 회복도 총체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 게.. 선교의 과제, 목회의 과제 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