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이 두렵지가 않다 행8:26~40 2024.04.28.
3:00초~
▲도입 / 이제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을 보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외국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라고 해야 되겠죠.
저도 이제는 한국에 가서는 외국인이니까요. *미국 시민권자
머물렀던 호텔에서 혹은 거리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에 대다수는 여행객이었지만, 한국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대합니다. 과거에는 다른 인종의 사람이 접근하면 주춤하면서 물러서고
그랬는데 이제는 스스럼 없이 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국이 다인종 다문화로 변화하는 그런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인종에게 점차 적응이 되고,
다른 인종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차츰 적응이 된 결과로,
이제는 서로 어색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또 그렇게 적응됐기 때문에 또 어색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한적한 거리를 지나가다가 서양인을 만나면,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 제 눈길을 주는데요.
이번에 제가 만난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일대일로 만나면 눈길을 피하고 지나갔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마주치고 '하이!' 하고, 제가 인사를 하고 싶은데,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에게는 인사하지 않는, 한국 문화에 그들이 적응이 된 것이지요.
한 번은 엘리베이터에서 아무 말 없이 먼저 내리는 서양인에게 '굿나잇' 하고 인사를 했더니
깜짝 놀라서 돌아서면서 제게 응답을 했습니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낯선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예의이지요.
낯선 사람의 인사는, 서양 문화를 모르는 동양인들에게는 아주 또 어색한 일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양문화권에 처음 온 서양인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는 동양인들의 태도가, 무척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두 문화 중에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은 아닙니다.
문화는 다 그것 나름대로 옳습니다.
동양문화권에서 낯선 사람에게 인사하지 않는 전통이 생긴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서양문화권에서 낯선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도 또한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낯선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의 본능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다른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많은 경우에.. 두려움은 무지에서 오지요.
밀폐된 공간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두렵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낯선 사람을 만나면 모르는 척하는 동양 문화도,
그 어색한 순간을 인사로 풀어내려는 서양 문화도,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만약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고요.
서양 문화권에서는 인사를 함으로써, 그 두려움의 감정을 해소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역사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낯선 땅으로, 낯선 문화로, 낯선 사람들에게로 뻗어나간 이야기입니다.
낯선 것은 언제나 불편하고 두렵습니다.
그 중에도 특별히 들어가기 힘든 땅이 있고,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그 어려운 일을 시작해서 문을 열어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훨씬 용이하죠.
그래서 언제나 첫걸음이 어렵고, 그래서 첫걸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가서 당신에 대해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본 곳이라고는, 성전에서 제사드리기 위해서 간 예루살렘이 전부였을 겁니다.
아니 예루살렘에 가본 경험조차도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겁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가려면, 중간에 사마리아가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 외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혈통을 지켜온 유대인들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이민족들과 뒤섞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민족으로 여겼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차별적인 태도로 인해서 앙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배척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에, 발을 디디기조차 꺼려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면, 유대인들은 저 요단강 근처의 광야길로 우회했습니다.
이렇듯 제자들은, 사마리아 땅조차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고사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조차도 상종하기를 꺼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땅 끝까지 가라'고 하십니다.
국경을 넘어서,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낯선 사람들에게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무지 행할 수 없는 명령을 주신 셈입니다.
이 명령을 주시면서 예수님은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라고 단서를 다십니다.
예수님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제자들에게 있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결코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셔서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너희들이 땅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깁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의 뿌리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죄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려는 선택입니다.
이 선택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낯선 분이 되셨습니다.
그분과 상관없이 살다 보니, 하나님이 낯설어진 거고,
하나님이 낯설어지니 하나님이 두려워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서 인간은, 이 광활한 우주에 내던져진 미아처럼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심겨지게 된 겁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우리끼리 지내고 싶어합니다.
나와 조금만 다르면, 편을 가르고 배척합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안전이 침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즘 외계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외계 생명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외계 생명체가 있어서 지구를 발견한다면,
지구 생명체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본성 깊이 스며들어 있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계 생명체로부터 침략당하는, 그러한 가상의 이야기들이 관심을 끄는 것이지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뿌리가 깊다는 겁니다.
그럴 일은 결코 없겠지만, 만약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온다면
생떽지베리의 동화에 나오는 <어린 왕자> 같은,
그런 반가운 만남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이 되어서, 그분의 사랑을 누리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살고 있으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니,
두렵던 세상에 feel at home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두려워진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로 보이고,
모든 생명체가 친구로 보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면,
낯선 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지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성령의 사람 빌립
행8:26~40절 본문을 통해 우리는 빌립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빌립은 그리스 말을 하는 사람들과, 히브리 말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출된 일곱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 일곱 사람들을 흔히 '일곱 집사'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성경 원문에는 '집사'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직함이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영적 지도자로 발돋움할 만한 그런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면서
서서히 말씀을 전하는 일도 겸하게 되죠.
그들은 그리스 어를 쓰는 유대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사는 그리스 어를 쓰는 유대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사도들보다 훨씬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리스 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모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순교를 당하게 되죠.
빌립도, 스데반처럼 복음전도자로 성장합니다.
그는 스데반의 순교 후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서 (8:1)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 빌립에게 사마리아 땅을 찾아가는 것은
불편하고, 거북하고, 때로는 두려운 일입니다. 테러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불편하고, 거북하고, 위험한 일을 빌립이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성령께서 제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빌립은, 이방 사람들과 함께 지내봤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에 대한 문을 열자
사도들이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세례를 베풀게 되죠.
사도들은 아직 사마리아 땅으로 내려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이 못한 일을 빌립이 한 겁니다.
사도들도 성령으로 충만했으니,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기는 했을 겁니다.
그러나 낯선 땅으로 갈 용기는 내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마음의 변화를 받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이렇게 간격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과 사이가 틀어져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의 응어리를 푸는 것은 가능하지요.
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그 사람과 만나서 화해하는 것은 또 전혀 다른 일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그런 사람 한 둘은 있을 겁니다.
과거에 무슨 일로 틀어져서 심하게 미워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마음으로 그 사람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과거에는 속에서 쓴물이 올라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까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그 사람을 없는 사람처럼 여기고 살고 싶지요.
그런 경우에 '용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와 같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사람과 만나서 화해하는 데까지 가야만 용서는 완성되는 것이죠.
▲스데반의 순교 후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치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들에게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안에도 전도할 사람들이 많았으니
굳이 그곳을 떠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혹은 굳이 낯선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안전지대였습니다.
비록 유대교 교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박해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과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편리한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은 매우 편안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스데반의 순교 후에 일어난 대대적인 박해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사도들 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유다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고 말합니다. 8:1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진 것은, 그들 스스로 결정해서 행한 것이 아니라
상황 때문에 마지못해 행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루살렘 안에, 즉 안전지대 안에 둥지를 틀고 머물러 앉아 있으려고 했던
이 초대교인들을 하나님께서 박해로 인해서 그들을 억지로 밀어낸 것입니다.
그들이 유다와 사마리아의 여러 도시로 흩어졌다 해도
낯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치유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또 안전지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쫓겨간 그곳에서, 낯선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안전지대 안에 머물러 살려는 관성에 이끌리기는 했지만,
언제든 상황이 되면, 낯선 이들에게 말을 걸고,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도, 스데반의 순교 후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루살렘 안에 있는 그리스 어를 쓰는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만족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로부터 생긴 박해로 인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고
빌립은 내친 김에 사마리아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가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 후에 빌립은 또 한 번 큰 도약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마리아 땅을 떠나
예루살렘에서 가사 지역으로 내려가는 광야로 향합니다.
가사(가자) 지역은 지금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하마스가 다스리는 땅입니다.
그 광야길에서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납니다.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에디오피아 왕실에서 일하는 고급 관리였습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사람이지만, 혈통적으로 조상적부터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순례여행을 왔다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빌립은 성령께서 '그에게 가까이 가라' 하는 그런 성령의 지시를 받고
이 마차에 접근을 합니다.
빌립이 이 내시의 마차에 접근했을 때
내시는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빌립이 내시에게 묻죠.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그 본문의 뜻을 아시오?'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아니 나에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이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고 반문을 하죠.
그러자 빌립은 내시의 마차에 올라타서는
'이사야서 53장에 예언되어 있는 그 고난의 종이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
그리고 부활하신 것, 그리고 승천하셔서 지금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해줍니다.
그리고는 '당신도 회개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구원 받을 수 있소!' 그렇게 얘기를 하죠.
그러던 중에 마차가 물 가를 지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신 거죠.
물을 보자 내시에게는, 세례받고 싶은 그런 충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8:36
이 내시의 질문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시는 '여기 물이 있으니 저에게 세례를 주십시오' 이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데 무슨 장애라도 있습니까?' 이렇게 물은 겁니다.
왜 이렇게 물었을까요?
그가 세례를 받는데, 자기에게 장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구약의 율법은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는 말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레21:20~21
율법적으로 부정하다고 규정된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내시는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얼마나 딱한 일입니까.
지금 이 내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갔지만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밟을 수 있는 곳은, 성전 안에 있는 '이방인의 뜰'이라는 바깥 마당 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이 성전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컸기 때문에,
예루살렘까지 그 많은 비용을 들이면서 순례를 갔던 겁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내시가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고대 시대에 내시가 되는 것은, 대개는 타의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노예라든가,
혹은 자의로 내시가 되는 경우는, 가난을 벗어날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경위로 내시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대인의 핏줄로서 늘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겠죠.
그의 신체적인 조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되셨습니다.
그 까닭의 내시가 빌립에게 '내가 세례를 받는데 무슨 거리낌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세례를 받는데, 내가 지금 내시라고 하는 것이 무슨 장애라도 됩니까?'
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는 순간 빌립은 당황했을 겁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빌립도 율법을 따라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적인 사고를 그대로 빌립이 가졌었다면,
이 내시에게 '당신이 예수를 믿는 건 가능하지만
세례받는 것은 내가 사도들에게 좀 물어봐야 되겠소' 이렇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빌립은 물가에 마차를 세우고, 내시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짧은 순간에, 빌립은 내시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빌립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는지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면,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위험을 뻔히 알면서도, 빌립은 세례를 베풀기로 결정합니다.
지금까지 성령께서 계속 인도해 오신 것을 보면,
그리고 이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리고 이 사람에게 세례받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리고 그 순간에 물을 만나게 하시고...
이 모든 걸 생각하면, 이건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인도함이라고 느낀 것이지요.
▲이로써 빌립은 교회가 땅끝까지 퍼져가는 길에서
두 가지의 거대한 장애물을 넘어서게 됩니다.
하나는 부정하게 여겨졌던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 복음의 문을 연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부정하다'고,
하나님의 회중에서 제외시켰던 율법의 장애물을 넘어서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성령께서 빌립의 마음을 만지셔서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해 주시고,
낯선 것을 향해 마음을 열고 손을 뻗치고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빌립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야고보, 바울 같은) 그 큰 이름들에 비하면
빌립은 다만 여기에 한 번 나오고 마는 작은 이름입니다마는
인습과 전통에 젖어있는 사람들로서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두 개나 한꺼번에 넘어섰다는 것은
빌립이 복음 전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우들 가운데 11분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선교 활동을 마치고
귀환을 준비 중입니다. 어제까지 '어머니 학교'를 다 마치고요.
오늘 오전에는 예배를 드리고 그곳에 사는 한인 후예 중에 한 가정을 방문해서
위로로 해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에 참여하신 교우들 중에 절반 가까이는, 단기 선교에 처음 가시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이번 여행을 통해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은혜를 입었을지
다음 주에 우리가 나누게 될 텐데, 그분들의 간증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일반 여행과 선교 여행은, 몇 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 여행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반면에 선교 여행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지요.
일반 여행은 비교적 안전하지요. 낯선 곳을 찾아가기는 하지만
그러나 안전한 곳만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선교여행은, 낯선 곳을 찾아갈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을 만납니다.
일반 여행은 즐기기 위한 것이지요. 반면 선교여행은 고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여행은, 성령께서 마음을 움직여주시지 않으면,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 낯선 일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선교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 <단기선교>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빌립의 이야기에서 누가는, 성령께서 계속해서 빌립을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성령께서 빌립을 강압적으로 이끌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빌립이, 성령의 부드러운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지요.
사마리아로 갈 마음을 가진 것도,
내시가 탄 마차에 접근해 간 것도,
그의 질문에 따라 전도한 것도,
물에 이르렀을 때, 용기를 내서 세례를 준 것도...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 용기까지 낸 것, 이것도 모두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이끌어주시는 대로
순종한 까닭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번에 멕시코 단기선교에 참여하신 교우들은, 모두 그 부드러운 손길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8월에 있을 아리조나 단기선교도 15분의 교우들이 자원했습니다.
처음 광고할 때만 해도 '이게 팀이 꾸려질까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분 한 분 참여하셨습니다.
낯선 땅에 가는 것,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 낯선 일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불편하지만, 성령께서 마음을 만져주시면 용기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 여행을 다녀와서, 자기 인생이 바뀌었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아 인상 깊었다' 그 정도지요.
하지만 선교 여행을 다녀와서, 자기 인생의 질과 방향이 바뀌는 일은 여러 번 보았습니다.
저 자신도, 다른 데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런 여러 가지 경험을 해왔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성령은 더 강하게 일하십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단기 선교에 가는 것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길이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경험이
가장 잘 드러나는 현장이 단기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이미 와 계십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만들어내셔야 할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마치는 말
성도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마음을 활짝 열고 환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라면서 습득한 모든 차별의식을 벗어나서,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맞이하고 대해야 됩니다.
우리 연합감리교회의 모토 중 하나가 Open Hearts, Open Minds, Open Doors 입니다.
어떤 인종의 사람들이든,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 어떤 형편에 사는 사람들이든
판단하거나, 차별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야 한다는,
그런 정신을 이 모토에 담은 것이지요.
하지만 문을 열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사람을 내 마음에서 용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빌립처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눈을 감고 묵상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온전히 제거해 주시기를
그래서 내가 매일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
차별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고귀한 존재로 대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하십시다. 그렇게 마음이 준비되어 낯선 땅으로 찾아가
낯선 사람들을 위해 낯선 일을 섬기는 데까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다.
빌립처럼 성령의 부드러운 손길과 미세한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그분이 원하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도록 이 시간 잠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