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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들과 높은 사람들이

LNCK 2024. 5. 2. 15:09

[사도행전 순서설교 415] 대제사장들과 높은 사람들이 (25장 1-5절) (youtube.com)

◈대제사장들과 높은 사람들이       행25:1~12       2015.10.02.설교녹취

◑본문 해석

 

노예 출신으로 총독의 자리에까지 오른 벨릭스는 위대한 
사도 바울로부터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한 설교를 들었지만,  24:25
권력을 남용하고 돈만 밝히다가 결국 네로 황제에게 소환당해서 
인생 무대로부터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고 말았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자신의 후임으로 부임할 신임 총독 베스도를 위한 업무 인계를 준비하다가 
단지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바울을 2년 동안이나 구금 상태에 방치해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하지만 벨릭스 총독은, 그 즉석에서 바울에게 무죄를 선고해서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바울에 대한 판결을 바르게 매듭 짓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리어 자신이 이임하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마지막 선심을 쓰기 위해서 
바울을 계속 투옥시켜두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행25장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25:1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드디어 신임 총독 베스도가 유대지방 제12대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신임 총독 베스도는 행정력, 판단적, 지도력 등 모든 면에 걸쳐서 
전임 총독 벨릭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유대지방의 로마 행정수도인 가이사랴에 도착한 뒤에, 
가장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자기 관할 구역 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예루살렘의 현지 시찰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3일 후'는, 3일째를 가리키는 유대식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신임 총독 베스도가 가이사랴에 도착한 날이 첫째 날이고, 
이튿날은 둘째 날, 그리고 그 다음 날이 3일째가 됩니다. 

즉 가이사라에 도착한 신임 총독 베스도가, 단 하루(이튿 날)만 쉬고, 
곧장 예루살렘 현지 시찰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사흘째)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부터 가이사랴까지는 2240 Km의 거리였습니다.
2240 Km의 거리라면 당시의 범선으로 최소한 열흘 이상의 항해 거리였습니다. 

로마에서 황제의 명을 받은 신임 총독 베스도가 배를 타고 
최소한 열흘 이상 지중해를 횡단해서 가이사랴에 도착한 것입니다. 
결코 편할 리 없는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신임 총독 베스도는, 가이사랴에 도착하고 
그 다음 날 단 하루만 쉬고, 곧장 가이사랴에서 104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현지 시찰에 나섰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그 정도로 신실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25:2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 총독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 유력자들과 상견례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력자들,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인 장로들이 
유대사회를 실제로 움직이는 핵심 인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정교일치 사회

신임 총독 베스도를 만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고 나섰습니다. :3

25:3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그가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동안, 
가이사랴에 투옥되어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시켜서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재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청하니'  *아이테오 :  beg, call for, crave 현재 중간태 분사
헬라어 원문의 뜻을 그대로 옮기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계속해서 집요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끔찍했습니다. 
가이사랴와 예루살렘 사이의 길에, 암살단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길에서 바울을 죽여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대사회 최상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임 총독 베스도와의 첫 번째 대면에서 
체면이나 체통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바울 제거에만 있었습니다. 

25:4~5절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는, 바울을 암살하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심중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시켜 달라는 그들의 집요한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이 투옥되어 있는 가이사랴로 
자신이 며칠 내로 돌아갈 것이므로, 
만약 바울을 고발할 사람이 있다면, 자신과 함께 가이사랴로 가서 
그곳의 법정에서 정식으로 고발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역시 베스도 총독은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의 이 내용은, 우리가 행23장과 24장에서 이미 있었던 내용의 재현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의 진지에 갇혀 있을 때 
40여 명의 암살 단원들이, 로마군 진지와 산헤드린 공회 사이에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암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들의 계획을 기꺼이 승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살해 모의를 전해들은 예루살렘의 천부장은 
그날 밤 한밤중에 470명의 군인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에게 이송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이 돈을 주고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를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104 Km나 떨어진 가이사랴까지 직접 찾아와서 
총독 벨리스에게 바울을 고발하지 않았습니까? 

희한하게도 본문 속에서 그와 똑같은 내용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행25장은, 앞서 행23장과 24장의 내용을 되풀이해서 설명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적용 / 전혀 변하지 않는 종교인들 (혹시 나는 아닌가?)

 

행23장과 24장은 전임 총독 벨릭스 시절의 내용이고 
행25장 첫 머리인 오늘의 본문은, 신임 총독 베스도가 부임한 이후의 일입니다. 

더욱이 행24장과 25장 사이에는, 무려 2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그런데 2년이 경과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사회 최상위 계층에 속해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변치 않고 바울을 고발하고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2년 전과 다른 사람들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한 사람이었고, 
대제사장이 죽으면 대제사장 직은 장자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어느 시대이든지 단 한 명의 대제사장 밖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구약 어디에도, 대제사장이 단수로 기록되어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대제사장이 단수가 아니라,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형으로 
기록된 곳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제사장이 살아 있는데도,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서, 대제사장이 교체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 경우에는 전임 대제사장과, 신임 대제사장이 모두 살아 있게 되므로 (구약 때는 죽어야만 교체)
신약성경은 그들을 통틀어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행23장과 24장에 등장했던 대제사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나니아입니다. 
하지만 벨릭스 총독 통치 말기에,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 2세에 의해서 
대제사장이 아나니아에서 이스마엘로 교체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베스도 총독이 부임했을 때의 대제사장은, 신임 대제사장 이스마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임 대제사장 아나니아도 여전히 살아 있었으므로, 
본문 역시 '대제사장'이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인 '대제사장들'이라고 썼습니다. 25:2

2년 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함께, 바울을 벨릭스에게 고발할 때 
이스마엘은, 장로들 속에 포함되어 있었고 
2년이 지나서 오늘의 본문 속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바울을 고발할 때 
전임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대제사장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2년이라는 긴 세월이 경과했는데도 
동일한 사람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동일하게 바울에게 불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매일 각종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만약 한 주간에 한 번씩만 제사를 드렸더라면 
그들은 지난 2년 동안 100번의 제사를 드린 셈이 됩니다. 

그들이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만큼, 만약 한 주에 두 번씩 제사를 드렸더라면 
지난 2년 동안 그들이 드린 제사의 횟수는 무려 200번이 됩니다. 

2년 동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렇게 숱하게 제사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2년 전과 똑같이 의로운 바울을 증오하고, 
2년 전과 똑같이 의로운 바울을 고발하고, 
2년 전과 똑같이 의로운 바울을 길에서 암살해 버리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2년의 시차를 두고, 두 번 다 공식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두 번 모두 바울을 암살단을 시켜서 
길에서 암살해 버리려고 했습니다.   *공식적, 실제적을 비교하세요

그것은 그들이, 총독의 법정에서는, 로마 제국의 실정법으로는 
바울에 대한 사형 판결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에서 두 번 다 바울을 죽여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시정잡배들이나 조폭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유대사회의 최고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도 모르게 바울을 죽여버리려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숱한 제사를 드리고 2년이 경과해도 
바울을 죽이려는 그들의 생각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2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렇게 숱하게 드렸던 제사는, 
그들의 삶 속에 아무 변화도 수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제사들은.. 무의미한, 습관적, 종교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무의미한 습관적 종교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리도, 
그런 제사를 통해서 그들의 삶이 변화될 리도 만무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자신들의 실정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난 2년 동안에 주일 예배만 드렸다 해도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무려 100번의 예배를 드린 셈이 됩니다. 

그 100번의 예배가, 우리 각자에게 무슨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까? 
혹 2년 동안 100번의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2년 전에 시기하고 미워하던 사람을, 지금도 계속 미워하고 있습니까?

2년 전에 행하던 불의한 삶의 방식을, 지금도 계속 답습하고 있습니까?
2년 전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 누군가를 해치는 일까지 여전히 서슴지 않고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예배 역시, 무의미한 습관적 종교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예배를 2년이 아니라, 20년을 더 드린다 할지라도 
그 예배가 하나님과 무관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대체 우리에게 무슨 영적 성장과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예배를 계속 드려서야, 
2년 동안 숱하게 제사를 드리고서도 변함없이 바울을 죽이려 했던 
본문의 대제사장들 및 장로들과 우리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예배는 참된 신앙생활의 시발점입니다. 
예배가 살아있어야 삶이 변화되고, 
이 세상 속에서 일주일의 언덕을, 그리스도인답게 넘어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구약 성경 레위기는 제사. 즉 예배의 책입니다. 
예배의 형태와 방법은, 제사를 드리던 구약시대와 바뀌었지만 
그러나 구약시대 제사를 드릴 때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 예배 속에서 그대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새신자반에서 배운 것처럼, 레위기 1장은, 모든 제사의 모본인 번제를 
어떤 정신으로 드려야 하는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번제의 특징은, 제물을 남김없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제물을 통해서, 제사 드리는 사람인 자기 자신이 온전히 죽어지는, 

완전한 자기 부인, 자기 의탁의 제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예배의 영원한 모본입니다. 
예배 자체가 곧 하나님에 대한 자기 부인이요, 자기 의탁이기 때문입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흠 없는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흠 없는 재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이 바치는 제물에 흠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살펴야만 했습니다. 
참된 번제는 반드시 준비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준비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드려지지 않는 예배는 '흠 없는 예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예배당에 나와서 침묵으로 기도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의 예배와, 

겨우 예배 시간에 맞추어 허겁지겁 달려와서 예배 드리는 사람의 예배는 
결코 동일할 수 없습니다. 

▲번제는, 제사 드리는 사람이 제물에 안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안수는 문자 그대로 손을 얹는 동작입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제물로 바치는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순간, 
그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실제로는 바쳐지는 제물을 통해서, 
제사 드리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바치는 제물이 자신을 대신해서 죽음으로 
자신의 죄가 속한 받는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면서 
제사 드리는 사람은, 감격과 감사 속에.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반드시 회개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안에서 
우리를 변함없이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배 드릴 때, 
우리의 예배는, 성령님과 진리를 좇아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인이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기에, 
그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 없는 예배는, 무당의 굿판과 다르지 않습니다. 

번제의 제물은 반드시 제사 드리는 사람이 잡아야만 했습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모든 제사 과정을 제사장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뒷짐을 지고 구경만 하지 않았습니다

번제의 제물을 잡는 모든 과정은, 철저하게 제사 드리는 사람의 역할이었습니다. 
그 역할은 제물을 죽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죽인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살코기의 각을 뜨고, 내장과 다리를 정결하게 씻는 역할까지 모두 직접 담당해야만 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 드리는 사람이 죽이고 각을 뜬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려주고 
불 위에 내장과 다리를 태워주는 역할만 담당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제물의 목을 칠 때 튀어오르는 피를 맞아야 하고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때의 비린내, 
내장과 다리를 씻을 때의 역겨운 냄새를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치면서, 그 사람의 제사는 살아있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목을 치는 심정으로, 제물의 목을 치고 
자신의 안팎을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으로, 제물의 살코기의 각을 뜨고, 
자기 사지 백체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리라는 다짐으로 
내장과 다리를 씻는 과정을 통해, 

실제로는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사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옷이, 제물의 피투성이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해도,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제물과 함께 죽어버린 그의 심령 속에, 하나님께서 주인으로 자리 잡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지난 2년 동안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철저하게 죽어짐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배하게 하시는 바른 제사를 드려 왔더라면 
2년이 지난 오늘의 본문에, 그들은 또다시 바울을 변함없이 죽이려는 어리석음을 
결코 범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배는 목사의 설교나 성가대의 찬양을 감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죽는 시간입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목을 치고 
자신의 심령의 각을 떠서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시간입니다. 
즉 자기 굴복과 자기 부인의 시간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철저하게 죽어지는 예배를 통해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고, 하나님에 의해 삶이 변화되어 
이 세상의 혼탁한 일주일의 언덕을, 그 하나님을 힘입어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가 살아있어야, 일주일 내내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 한 청년이 제게 보낸 편지를, 당사자의 허락을 얻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목사님, 제 결혼식을 축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용기를 갖고 결혼하게 되어 참 기쁩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고민도 많았고, 양가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작년 11월 15일 주일 예배 시간에 <나의 생명조차>라는 제목의 목사님 설교를 통해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주님의 은혜로 용기를 얻어 결혼하여 출산한 
어느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서, 저 역시 큰 감동과 함께 용기를 얻어서 
결혼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그 설교를, 지금 제 아내도 들었고, 동의해 주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대출을 받아서라도, 자존심을 세워서 결혼해야 한다고 하셨으나, 
저는 주어진 경제 상황에 맞게 검소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세상적인 기준을 버리고, 믿음 안에서 결혼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주님께, 
그리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일 예배가 이 청년을 살렸습니다. 
만약 이 청년이, 세상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대출을 받아가면서까지 허례허식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더라면 
이 청년은 앞으로도 일평생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 자기 경제 형편에 맞게 검소하게 신혼생활을 시작한 이 청년은 
앞으로도 아내와 함께, 주님 안에서 매사를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반듯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청년이 작년 11월 셋째 주일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앞에 굴복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청년에게 용기를 주시고, 그 청년의 삶을 직접 지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주일마다 어떤 예배를 드리느냐에 따라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화는 커녕 오히려 심령이 돌처럼 굳어지는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롬12:1절의 고백처럼 '자기 삶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바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제부터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죽으십시다. 
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온전히 굴복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죽음으로써 부활의 능력으로 되살아나,
결코 짧지 않은 인생을,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매주간의 언덕을 휘파람을 불며 넘어가십시다. 

살아있는 예배는 참된 삶의 시발점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예배가 우리를 살리고, 결과적으로 이 세상을 살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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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행25:6~12

◑25: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베스도 총독은 8일 만에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오가는 날 수를 포함해서 예루살렘 현지 시찰에 도합 10일이 소요된 셈이었습니다. 

새로운 인지에 부임한 총독이, 자기 관할 지역 내에서 첫 현지 시설에 나설 경우 
연일 호화판 대접을 받느라 많은 날들을 소요하던 당시의 관례에 비추어 보면 
베스도 총독이 불과 열흘 만에 (:6), 오가는 날 수를 다 포함해서 
예루살렘 첫 번째 현지 시찰을 마무리 지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것 역시 베스도 총독의 성실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가이사랴로 귀임할 때, 대제사장 무리 역시 베스도 총독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104킬로미터나 떨어진 가이사랴까지 동행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제안한 것처럼 
그곳에서 총독의 법정에서 바울을 또 다시 고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베스도 총독은, 이튿날 곧장 재판석에 앉아서 바울을 호출했습니다. 

◑25: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총독의 호출을 받은 바울이 법정에 출두했습니다. 
대제사장 무리는 이번에는 2년 전과는 달리 변호사 더둘로를 대동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를 동원해 보았자 돈만 들지, 효과는 없다는 사실을 2년 전에 확인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대신에 대제사장의 무리는, 바울 주위에 둘러 서서 
베스도 총독에게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바울을 직접 고발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사건'이란 2년 전 더둘로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 가지 혐의로 바울을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 무리는, 자신들의 고발 내용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실정법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법도 어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무리의 고발 내용은, 늘 그래 왔듯이, 한낱 거짓 모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진술 기회가 주어지자, 
베스도 총독에게 단호히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25: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우리말 성경에는 '아니하였다'는 표현이, 단 한 번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 같은 의미의 부사 '우데'가 2번 반복되어 있습니다. 

즉 바울이 나는 율법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고 (우데) 
성전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고 (우데) 
가이사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다 (우데)라고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법정에서 있을 수 있는바, 피고가 자기 범죄사실을 숨기기 위한 
거짓 진술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진술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법도, 세상의 법도 어기지 않고 살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가이사' 라고 번역된 '카이사르'는 
영어식 발음으로 우리가 '시저' 라고 부르는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장군의 이름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주전 27년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에 등극한 이후에 
카이사르(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습니다. 

◑25: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바울의 확고한 진술을 들은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자신의 입회 하에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을 받을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베스도 총독이, 전임 총독 벨릭스 처럼 
단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목적으로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베스도 총독이 전임 총독 벨릭스처럼, 유대인들의 관심을 사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으면, 
그가 예루살렘 시찰에 나섰을 때에, 대제사장 무리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시켜서 
재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이미 그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올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바울의 의사를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울을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에 넘겨버렸을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나는 율법에 대해서나, 성전에 대해서나, 가이사에 대해서나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는 바울의 확고한 진술을 듣고, 
바울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베스도 총독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자신의 입회 하에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을 받겠느냐고 바울에게 공개적으로 질문한 것은 :9 
정치인으로서 그 자리에 있는 대제사장 무리의 입장을 고려해 주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한 것이었습니다. 

◑25: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베스도 총독이 예상했던 대로, 바울은 총독의 제안(:9)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 총독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바울에 대해 
그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거절은 총독 베스도가 원하던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은, 뜻밖에도 로마 황제의 권한이 위임되어 있는 
바로 그 총독의 법정에서,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 

◑25: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총독이 재판할 때는, 법률 전문가와 총독의 자문단이 계속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그 배석자들과 상의를 거친 뒤에, 
로마 시민인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였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상소 하는 것은, 로마 시민의 권리 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크나 큰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 했다고 하는 것은, 로마에 이르는 길, 
다시 말해서 로마로 가는 길이 확정 되었음을 뜻했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 에서부터 
자신의 마지막 전도 대상지가 로마 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위해, 자신의 마지막 생을 던져야 할 곳이 
제국의 심장 '로마' 라는 총론이, 이미 그때부터 확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국의 수도 로마에, 어떻게 이를 것이냐 하는 각론은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 미확정 각론이 '황제에 대한 상소'를 통해, 본문 12절에서 확정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 했다는 말은, 
바울이 로마 제국 군인들의 보호 속에서 
제국의 수도 로마로 가게 됨을 의미 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사람은, 그 사람이 황제의 법정에 서기 까지 
로마 제국이 그를 보호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까지는, 2240 km 였습니다. *뱃길로
암살 단의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바울이, 그 먼 거리를 
로마 제국 군인의 보호 속에서 이동하는 것보다 더 안전한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에게 우연히 주어진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천부장에 의해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았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변호사 더둘로의 고발 내용과, 
바울의 자기 변증 내용을 듣고 바울의 무죄를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벨릭스 총독은, 바울로부터 뇌물을 받을 요량으로, 
바울에게 무죄를 선고 하지 않고, 바울에게 상당한 자유를 주는 조건으로 
바울을 계속해서 헤롯 궁에 구금하여 두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자신이 기대하는 뇌물을 바울로부터 받기 위해서 
여러 차례나 바울을 불러 개인적으로 만났지만, 
바울은 도무지 뇌물을 바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속은 벨릭스 총독은 
그 분풀이로, 바울을 무려 2년 동안이나 구금 상태로 방치해 두고 왔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자신이 이임 하기 전에, 바울이 여전히 구금 상태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유대인들에게 마지막 성심을 쓰기 위해, 상당한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바울을 
오히려 결박시켜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무리는, 신임 총독 베스도가 새로 부임하자 
새 총독에게 바울을 또 다시 고발하고 나섰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과정을 다 거치고 나서야, 황제에 대한 상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을 해 보십시다. 
죄 아닌 죄 때문에... 단지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죄 때문에 
2년 동안이나 구금 상태로 억류 당해 있다는 것은, 매우 억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처음에는 상당한 자유가 보장되는 것 같았는데, 벨릭스 총독의 이임을 앞두고 
유대인들을 위한 마지막 선심을 쓸 요량으로, 
또다시 결박 당해 투옥 될 때, 바울은 마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신임 총독이 부임하자, 대제사장의 무리가 
2년 전과 똑같이 자신을 또 다시 고발할 때 
바울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2년 동안의 그 절망 스럽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다 거치면서, 
예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로마 황제에 대한 상소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였습니다. 
3차 전도 여행을 매듭 지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상경한 이후부터 
대제사장의 무리가 바울을 죽이기로 한 이상, 
바울이 언제든지 총독의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 되기만 하면 
바울은 그 즉각 암살단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 2,240 km나 로마까지 가장 안전하게 이동하는 길은 
로마 제국 군인들의 보호 속에 이동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고 
그것은 오직 로마 황제한테 상소 할 때에만 가능했습니다.
그 시기가 무르익는데 2년이 소요된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의 2년은, 얼마나 긴 기간인지 모릅니다. 
그 고통스러운 2년의 긴 기간을, 바울이 인내하며 극복함으로써 
마침내 황제에 대한 상소를 통해, 
바울을 로마군의 보호속에서 안전하게 로마로 이끌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엡5: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했다는 것은 
그 자신이 지금 로마 감옥 속에서,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을 살고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빌4:4~6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로마감옥 속에서도 늘 기도하는 바울의 심령은 
언제나 감사와 기쁨으로 넘쳐 났습니다. 

골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졌음이라'

바울은 로마감옥(가택연금)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감옥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감금 속에서도 
고개를 들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우르러 뵙는 삶을 살았습니다. 
참된 생명은 오직 위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은, 자유가 속박되는 구금 상태 가운데서도
위에 계신 하나님께 자기 심장의 초점을 맞추고 살았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그의 삶 자체가 예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심령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만 비롯되는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했고 
그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2년 동안 억울하게 가이사랴의 헤롯궁에 갇혀 있을 때에도, 
로마감옥에 갇혀 있을 때와 똑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탐관오리 벨릭스 총독 인해, 2년 동안 헤롯 궁에 구금 당해 있었지만 
그의 심령은 자기 절망에 빠지기는 커녕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께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더더욱 충만할 수 있었고 
마침내는 로마 황제에 대한 상소를 통해 
바울을 로마 군대의 보호속에서 안전하게 로마로 이끌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삶 속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헤롯 궁에 2년 동안 구금 당해 있던 바울의 심령이 
한탄과 절망에만 멈추어 있었더라면, 결코 불가능했을 대역전극 이었습니다. 

◑적용

제가 예배를, TV 카메라와 TV에 빗대어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TV 화면에는, TV 방송국의 카메라로 비추는 것만 투영됩니다.

TV 카메라가 축구장을 비추면, 모니터에는 축구 경기가 방송되고 
TV 카메라가 방송국의 앵커를 비추면, TV에는 뉴스가 나옵니다. 

그리스도 인의 삶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심령이, 세상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설령 우리의 몸이 예배당 안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는 세상의 속된 것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위에 계신 하나님께 우리 심령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의 초점이, 위에 계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나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돌이나 금속 같은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생명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의 초점이, 위에 계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한 
우리가 비록 칠흑처럼 어두운 이 세상 한복판에 있다 해도 
우리의 삶 속에는, 예배의 생활화 와 생활의 예배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기 심령을 위에 계신 하나님께 맞추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결코 짧지 않은 손을 지니고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지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켄터베리 주교 였던 윌리엄 템플은, 예배를 이렇게 정의 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인격을 하나님께 순종 하게 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의 의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그의 진리로써 우리의 생각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그의 아름다우심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정결케 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며, 
그의 원하시는 뜻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 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배에서 하나로 모아지게 되며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덜 이기적인 감정이다.' 

예배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영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의 초점이, 위에 계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영적 행위가 실행될 수 있겠습니까? No

그동안 이 세상의 이해 관계에만 고정되어 있던 우리의 시선을 들어서, 
이제부터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께 우리 심령의 초점을 맞추십시다. 

우리 심령의 초점이 위에 계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한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선미가, 반드시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심령 초점이 위에 계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한 
현재 우리의 처지가 억울하게 2년 동안 헤롯 궁에 구금 당해 있던 바울과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우리를 로마 군대의 보호 속에서 
안전하게 로마로 이끌어 주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성취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작 한 줌의 흙으로 끝나 버릴 지극히 유한한 인간에게 
삼위일제 하나님께 자기 심령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지혜는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