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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의 교훈

LNCK 2024. 5. 2. 17:27

https://blog.naver.com/karamos/80050867248

 

◈만나의 교훈         출16:4~5절

 

출애굽시 남자만 60만 명이 출애굽을 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는 여자는 인구의 계수에 넣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여자와 아이들까지 대략 계산해 보면 200만 명이 넘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200만 대군과 함께 광야에서 행군할 때, 지도자 모세에게 아마도 가장 어려운 점은

그들을 먹이는 일일 것입니다. 입는 것이야 단벌로도 얼마든지 지날 수 있고

잠이야 밤이 되면 텐트 치고 자면 되지만, 200만 명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아침도 먹이고

점심도 먹이고 저녁도 먹여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 가서 물을 먹을 것이며,

어디 가서 쉴 것이며, 화장실은 어떻게 썼겠습니까? 이것 정말 큰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노예근성을 가진 200만의 대군을

이 광야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국가로 훈련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광야의 생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키실 때에 사용하신 가장 중요한 도구는 음식입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얼마나 큰 스승입니까?

사람이 배고픔을 경험하지 않으면 밥맛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목말라 보지 않으면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의 맛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200만이나 되는 엄청난 대군을 40년 동안 하루같이 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마시게 하셨으니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시 78:25)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세 있는 자의 떡을 풍족히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광야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은 무궁무진합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는 도구였다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첫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가르치는 도구로 만나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종교개혁가 칼빈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을 아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칼빈은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될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지식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1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돌봄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가끔 부정적인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이 나 같은 존재도 돌보아 주십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존재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내가 지금 고통이 있고 고민과 슬픔이 있는데 나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러나 만나를 통해 가르쳐 주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개별적으로 돌보아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매일매일 돌보아 주고 계십니다. (매일매일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집단성보다는 개별성이 더 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별적으로 사랑하시고 개별적으로 돌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각각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관심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출16: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 명에 한 오멜씩을 취하라.”

 

오멜이라고 하는 것은 쌀되로 칠 때에는, 한 되 두 홉쯤 되는 것입니다.

쌀되보다는 조금 더 큰 것이 오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 만나를 먹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 각자에게 필요한 만나를 다 공급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택하신 주의 백성을 개별적으로 다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믿음이 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머리카락 하나가 빠진 것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한 번도 빠짐없이 매일 만나를 다 공급해 주시고

금요일에는 두 배를 주셔서, 안식일에는 굶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우리를 개별적으로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할 때

이것은 얼마나 귀중한 진리입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치 말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크고 위대하신 분

 

두 번째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마라와 엘림을 거쳐서 백성들은 신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신 광야에 도착하니 백성들은 배가 고파졌습니다.

쓴물이 단물로 바뀔 때는 하나님을 찬송하더니 또 다시 불평을 합니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고기 삶는 냄새라도 맡았는데 광야에 오니까 그것도 못 맡는구나,

애굽에 있을 때는 떡이라도 실컷 먹었는데... 그 때가 좋았지 한없이 좋았지, 그러나 이젠 꿈이야'

 

그러자 하나님이 그 날 저녁에 동풍을 불어서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진영에 보내 주셨습니다.

메추라기가 떨어져서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자고 나니까 하늘에서 이슬이 내렸는데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고 서리 같은 것이 맺혔습니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 말로 “만나”입니다. 만나의 뜻은 “이것이 무엇인가?(what is this?)”라는 말입니다.

 

31절에 보니까 “이 만나는 깟씨(고수풀 씨) 같고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더라.”

마치 꿀 섞은 과자 웨하스와 비슷한 만나를 하나님이 40년 동안이나

하루 세끼 200만을 다 먹이셨으니 도대체 얼마나 크고 위대한 하나님이냐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문제가 크고 어렵고 감당할 수 없으십니까? 하나님은 참 작아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도 억만 배 더 큰 분이신 것을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병 속에 하나님을 가둬 두시고 “하나님 내 문제는 내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하지 마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너그럽고 후하신 분

 

세 번째로 하나님은 너그럽고 후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만나를 주시되, 모자라지 않게 주셨고, 거저 주셨습니다.

 

부자도 돈 안내고 가난한 사람도 돈을 안 냈습니다. 거저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것을 거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어떤 분은 교회 나오면 목사가 자꾸 돈 내라고 해서 나오기 싫다고 하시는데

구원은 십일조 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거저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 가는 것은

순 공짜, 완전 공짜, 거저 받는 것입니다.

 

공짜로 받은 이 구원이 너무나 감사해서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하는 것이지

그것을 드려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값없이 돈 없이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이요 너그러운 하나님이요 후한 하나님이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지혜로운 사람은 절약해서 절대 한 푼도 안 새어 나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자의 원리입니다. 신자이십니까? 좀 흘리고 다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보시고 “저 사람은 많이 흘리고 다니니까 많이 채워 줘야겠구나”  주1)

해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후하고 너그러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 가서는 후합니다. 술집에 가서 후하지 마시고

선하고 좋은 일에 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백성들은 불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후하고 넉넉하게 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4 지혜로우신 분

 

만나야 말로 광야에 가장 적합한 음식입니다.

하늘에서 티본(T-bone) 스테이크가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뼈에 맞아서 이마가 깨질 수도 있고 코가 깨질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만약에 하늘에서 자장면이 내려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해장국이 내려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광야에 가장 적합한 음식은 만나입니다. 이슬처럼 내려서 작고 세미한 것이 있어서

먹어 보니 달콤하고 맛도 좋고 영양도 얼마나 좋습니까?

무궁무진한 영양의 복합체가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만나를 먹고 소화불량 걸렸다는 사람 있습니까?

그것을 먹고 체했다는 사람 있습니까? 그것을 먹고 영양실조 걸렸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나는 광야 최고의 양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기를 원했지만,

메추라기를 먹다가 금방 병이 돌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만나는 최고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싫어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민 11:5)

하나님이 그렇게 최고의 음식을 주셨어도

그들은 만나를 비참한 식물(miserable food)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은 권세 있는 자의 떡입니다.

천사가 먹는 음식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 음식을 먹고 당뇨 걸렸다는 기록 보셨습니까? 고혈압, 신장병, 암에 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만나는 최고의 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매일 돌보시고,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고 너그러운 분이시며, 무궁히 지혜로운 분이시라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만나는 순종을 가르치는 도구였다.

 

만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시험을 하십니다.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 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시면서 세 가지 율례를 주셨습니다.

 

▲첫째는 한 호멜만 취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인수대로 매 명에 한 오멜씩 취하라.”(출 16:16)

 

한 오멜 이상 취할 것도 없고, 그 이하도 취할 것도 없고,

각 사람이 한 오멜씩만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욕심을 냅니다.

어떤 사람은 두 오멜씩을 취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동이 느려서

반 오멜 밖에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두 오멜 가지고 가서 장막에서 보면 한 오멜 밖에 남지 않았고

반 오멜 가져와서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더니 그것이 한 오멜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많이 거두어도 남는 것이 없고, 모자라게 거두어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한 사람이 한 오멜 거두라고 하면 말씀에 순종하면

그것이 행복이요 축복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 안 드리고 십일조 안 드리면서 일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실지 모르지만

그 번 돈이 나중에 남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반면 십일조 떼어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로 적금 들어서 나중에 부자 되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일 지키고 십일조 내면 나중에 굶어죽는가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신앙의 기본이 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기도생활, 전도생활 이런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시비 거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일을 안 하면 어려울 것 같고 사업이 안 될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주일에도 일한 사람과 결국은 같게 됩니다.

아니! 도리어 주일 쉬었는데 더 벌게 되는 역사를 체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복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일에도 일해서 돈 더 벌면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보다 잘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1986~91년까지 미국 배이턴 루지 Baton Rouge 루이지애나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중에 한 부인이 마켓에서 흑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주일성수 때문에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주일날 가게를 열지 않으면 돈을 벌지 못하는데...’

하지만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서 낮에 예배 드릴 때에는 가게 문을 닫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웬 흑인이 하나 오더니 가게 물건을 다 사버린 것입니다.

아침부터 팔아도 그만큼 못 파는데 오후 두 시간 열었는데, 거기서 몇 배를 더 팔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 부인이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알았습니다. 순종이 복이요 불순종은 도리어 그것이 어려움과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율례에 순종하는 것이 축복이요 행복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두 번째 율례는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출 16:19)

‘그 다음날 하나님이 주실지 안 주실지 어떻게 아는가? 내가 비축을 해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비축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그 만나에 벌레가 나고, 냄새나고, 집안 더러워지고, 믿음 없다고

모세에게 야단맞고, 이중으로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무엇을 가르칩니까? 순종하면 축복이요 불순종하면 손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26절에 보면 “안식일 전날에는 두 오멜씩 거두고”

안식일에는 만나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16:27절에 보면 “제 칠일에 백성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말지 혹시 있을까 해서 나갔지만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두는 것도 하나님 뜻대로 해야 하고, 먹는 것도 하나님 뜻대로 해야 하고,

보관하는 것도 하나님 뜻대로 해야 하고,

거두러 나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거둘 때도 있고 보관할 때도 있고 먹을 때도 있고 쓸 때도 있습니다.

거두는 인생기에 있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거두시고,

보관해야 할 인생기에 있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보관하시고,

보관해도 나중에 썩겠다는 생각이 드시는 사람은 부지런히 쓰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축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만나는 물질 축복의 원리를 가르치는 도구였다

 

만나는 물질 축복에 관한 교훈도 가르칩니다.

 

▲첫째로 물질 축복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축복은 이차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직장이요, 내 기술이요, 내 지식이요, 내 손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물질축복의 1차적인 원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련한 사람은 2차적인 원인만 가지고

‘내 사업을 어떻게 하면 잘 해볼까?’ ‘내 손에 어떻게 하면 능력을 길러 볼까?’ 하고

원인만을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차적인 원인이 근본원인이 아니라

일차적인 원인인 하나님이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잘 보이고, 영광 돌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또 만나를 통해서 가르치신 것은 물질의 축복은

하나님이 위에서 주셔도, 사람이 아침마다 나가서 거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노력을 말합니다. 성경은 게으른 자를 축복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도 엄히 명하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 게으른 자는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물질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분량에 만족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분량을 조절하는 주권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일하되

탐심은 피해야 합니다. 이것이 만나를 통해서 배우는 물질 축복의 교훈입니다.

 

◑만나는 영적 축복의 원리를 가르치는 도구였다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영적인 축복의 원리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만나는 영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를 먹는 자는 먹고 죽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요 6:48)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영생의 떡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고

한 번 죽어도 다시 부활해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또한 만나는 성도의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매일 먹어야 합니다.

 

“10년 전에 먹은 만나를 가지고도 지금까지 배부릅니다.” 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어제 먹었으니 오늘은 필요 없습니다.” 해도 안 됩니다. 만나는 매일 먹어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이 양식이 되어야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성경은 하루에 세 장 읽고 주일날 여섯 장 읽으시면 일 년에 한 번 읽습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개신교의 영성은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또 만나는 본인이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거둔 것을 자신이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읽고 자기 영혼의 양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나는 작은 갓씨 같습니다. 영적인 진리는 작은 것이라도 무시하지 말고 먹어야 합니다.

작은 말씀이라도 무시하지 말고 먹어야 합니다.

제 핸드폰에 어떤 집사님이 문자를 매일 넣어 주시는데

그것 하나도 하루의 양식이 됩니다. 작은 진리도 자꾸 먹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큰 은혜 주시옵소서 큰 은혜 주시옵소서!” 해서 큰 은혜만 받으려고 하면

큰 은혜가 그렇게 날마다 옵니까? 큰 은혜만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신앙이 건강치 않은 것입니다.

 

만나는 큰 덩어리가 아닙니다. 한 번에 큰 덩어리 먹고 한 달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진리 하나도 참 귀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먹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매일 먹어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

 

마치는 말

 

우리 인간은 하늘의 만나, 영원한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하는 것이 피조물 된 인간의 첫 번째 의무입니다.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사람 있다면 미루지 말고 당장 예수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 인간의 첫째 의무입니다.

 

두 번째 의무는 그 말씀을 생명의 만나로 여기고 매일 먹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매일 말씀 읽고 묵상하고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큰 은혜를 사모하기보다는 매일의 은혜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의무는 말씀을 먹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축복이요 불순종하면 고통입니다.

율례에 순종하면 축복이고 불순종하면 고통이라는 것은 신자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믿고, 먹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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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투정

오래 전에 조카아이들은 밥투정을 하고,

엄마(제 누이)는 먹이려고 하여 실랑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못해 제가

“먹기 싫다고 하면 굶기라!”고 한 마디 하면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분위기가 묘해집니다.

 

아이는 자기를 위해 먹는 것이고,

안 먹으면 자기 손해인데

마치 엄마를 위해 먹는 것인 양.. 떼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그 어린 아이가

이렇게 애를 먹여도 자기를 사랑하는지..

엄마의 사랑을 테스트하는지, 그 사랑을 즐기는 것인지

그러면서 자기의 주가를 올리려는 것입니다.

 

밥투정을 할 때 “먹기 싫으면 그만 둬!”하고

밥상을 치우면 엄마는, 그 아이에게 계모가 되고

엄마의 사랑에 대한 아이의 믿음은, 심하게 상처받게 됩니다.

 

그러니 엄마는, 아이의 버릇이 나빠져도

그 놈의 사랑 때문에,

계모가 아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달래서라도 먹여야 합니다.

 

요6장 말미에, ‘생명의 양식’을 설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꼭 이 형국입니다.

당신을 목말라 하지도 않고 배고파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음식인지 깨닫게 하시려고, 주님은 안달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당신을 먹으면 결코 다시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도 않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라고 아주 간절히 호소하시는데

 

그런데 사실은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볼모로 놓고

밥투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사역자의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엄마입니까, 계모입니까, 삼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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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선한 눈을 가진 자의 복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잠22:9

 

눈은 마음의 창이다. 우리는 이웃의 눈을 보며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이웃의 눈은 그의 마음의 미로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눈을 통해 이웃들의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를 접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눈을 관리하는 일은 마음을 관리하는 일이다.

아니, 마음을 관리함이 곧 눈을 관리함이다. 우리의 마음은 눈으로 드러난다.

 

크게 보면 사람의 눈은 선한 눈과 악한 눈으로 나뉜다.

그것은 사람이 마음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은 선한 눈을 만들고, 악한 마음은 악한 눈을 만든다.

 

그런데 여기 ‘선하다’고 표현된 단어는 *토브

본래는 인색함이 없는 넉넉한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영어로 ‘제네러스’(generous)하다는 뜻을 가진다.

 

그러면 선한 마음은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잠언 기자는 양식을 가난한 자와 나눌 줄 아는 것이

바로 넉넉한 마음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라고 말한다.

 

자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한 마음에서만 자선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이다.

 

인생의 여로에서 만나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태도가

바로 우리의 선함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부요한 이웃들만이 아닌

가난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고통을 주목하는 눈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복한 눈이다.

 

성도의 눈에서 흐르는 가난한 이웃을 향한 자비의 눈물이야 말로

세상의 먼지를 씻는 청량제라고 할 수 있다.

선한 눈을 지닌 복 있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