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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물을 단물로 바꾸라

LNCK 2024. 5. 2. 18:1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시험>

 

https://blog.naver.com/karamos/80050843990

쓴 물을 단물로 바꾸라           출15:22~26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의 400여 년의 노예생활을 마치고 출애굽을 했습니다.

홍해가 맨땅처럼 갈라지는 것을 그들은 경험을 했고

홍해에 애굽 모든 병거와 군대를 다 수장시키시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이 역사를 본 모세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가 출15:1~21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기뻐서 춤을 추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총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삼일 만에 그 찬양이 원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들은 홍해를 건너서 3일 동안 수르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 한 방울의 물도 얻지 못한 그들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일 만에 도착한 곳에 물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물맛을 보는 순간 그 기쁨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은 마실 수 없을 만큼 쓴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이 쓰자 백성의 모세에 대한 원망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그래서 그 장소를 히브리 말로 “쓰다”라는 의미를 가진 ‘마라’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가변적인 인간과 불변의 하나님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가변적인 존재인지 이 사건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처럼 외부환경에 따라서 수시로 변합니다.

 

날씨가 맑을 때는 기쁘다가도 봄비가 좀 내리면

“나를 울리는 봄비~” 하면서 쓸쓸해지지 않습니까?

 

시편 30편 6절 말씀처럼 사람이 좀 형통하고 잘되면 영원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말하지만

잠깐 주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로 근심하게 하시면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지금은 소천을 하셔 이 세상에 안 계신 장모님께서 하루는 겨울에 날씨를 보고 계셨습니다.

아침에는 맑더니 오후가 되어 흐리고 밤이 되면서 눈이 오고 추워지는 것을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겨울날씨는 꼭 노인네 건강 같단 말이여.

오늘 건강해도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 저는 그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됩니다.

인간의 마음도 겨울날씨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마음이 요동하고 변할지라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조금도 요동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마음이 슬프고 괴로울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대신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의지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라의 스토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첫 번째 시험의 예표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시험을 통해서 성숙합니다.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우리의 영적인 실력이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과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사탄 마귀가 저지르는 악의 시험은 유혹(temptation)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악의 시험이 올 때에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하겠으며, 시험이 와도 승리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혹은 하지 않으시지만 때때로 시험 test 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he tested them).”(출 15:25)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성숙했는가?

우리가 죄성을 얼마나 잘 이겨내고 있는가를 알아보시기 위해서 시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시험이 올 때에 잘 준비해서

좋은 성적을 맞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학생들이 다 공부하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사람이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시험을 봐야 압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마라의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여정에 오는 광야의 첫 번째 시험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광야의 첫 시험

 

첫 번째 시험은 보통 영적인 생활의 초기에 옵니다.

처음 예수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처음에 큰 기쁨이 옵니다.

죄사함을 받은 것이 기쁘고, 영생을 얻은 것이 기쁘고,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 참 기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계속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 기쁨이 지나고 나면 시험이 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이 마라의 시험입니다.

 

그리스도 인들 중에는 이 영적인 시험을 잘 이겨낸 성숙한 신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이제 막 시험을 겪고 있는 초신자들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룻에게는 나오미가 있었고, 바울에게 바나바가 있었듯이

예수 처음 믿은 초신자들에게는 먼저 성숙한 신자들의 돌봄이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켜 영어로 티쳐(teacher) 혹은 맨토(mentor)라고 부릅니다.

teacher는 지식을 주는 사람이지만 mentor는 삶과 경험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초신자가 시험이 들어 힘들어 할 때에 성숙한 신자가 “아 나도 전에 그랬었는데

이런 것은 시간이 지나니까 이렇게 해결되더라, 믿음을 가지고 잘 극복해라.”

하고 한 마디만 해주면 그것은 초신자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 믿고 성숙한 신앙인들은, 이제 막 신앙생활 시작한 초신자들에게

멘토의 역할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초신자들의 신앙 초기에는 반드시 흔들림이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아! 나일강의 물은 입에 달았는데, 애굽의 고기는 정말 맛있었는데,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죄질 때에도 낙이 있었는데” 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먼저 성숙한 신자가 “애굽에 돌아가면 다시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갈지도 몰라요.

이 시험이 지나고 나면 단물이 옵니다”

이것을 일러 줄 때에 초신자들이 배우고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초신자들을 잘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험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옵니다. 수르 광야에 3일 동안 방황할 때에는

물이 없는 것이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라에서 물을 만났을 때에는 물이 쓴 것이 시험이었습니다.

 

건강이 좋은 사람은 재산이 없고, 재산이 많은 사람은 건강이 나쁘고,

자식이 잘 하면 남편이 속 썩이고, 남편이 잘 하면 자식이 속 썩이고,

또 잘 믿어 보려고 하면 먼저 믿은 성도가 자꾸 나쁜 소리 해가지고

신앙의 시험에 들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가들 때문에 시험을 들어서 신앙생활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에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조지 부시가 싫어서 다른 나라로 이민 간

미국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정치가 때문에 시험 들어서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누가 정치를 하든지 지금 정권을 잡은 정치가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있습니다.

주님께 맡기시고 그런 일로 시험 들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험은 형태도 다양합니다만 대부분 우리의 삶에 중요한 필수요소와 관련해서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서 원망한 것은 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가장 필요한 요소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을 삼일 못 마시는데 불평 안할 인간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쓴물의 시험을 극복해야,

반석에서 나오는 단물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쓴물을 맛본 사람이라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요단 강의 생수를 마실 때에

아 이 물이 좋은 물이구나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겪어야 생존력이 강해지고 자생력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아무 시험도 없이 축복을 받게 되면 그것이 축복인 줄 모릅니다.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축복을 축복으로 누리지도 못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야 ‘아 이것이 축복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의 쓴물이 있어야.. 단물이 단물인줄 아는 것입니다.

 

◑광야 시험의 목적

 

광야의 시험을 하나님이 왜 주셨을까요?

그것은 광야가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래에서 나는 물은 쓰다고 합니다. 그 물은 낙타도 안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쓴 물을 마시게 하셨을까요?

 

광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두어야 할 비전은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위대한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인생살이에 어려움이 오는 것은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좀 와야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게 되고

이 땅에 마음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고 처음에 매일 성경 읽고, 매일 기도하고 예배 참석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니까 마음이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참 구주시고 살아계시는가? 내가 믿는 성경은 진리인가?’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의심이 밀려왔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계속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마태복음 11장 6절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침례 요한이 보낸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신앙생활하다가 시험에 넘어져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족하지 아니하면 복이 있을 것입니다.

 

◑시험이 드러낸 인간의 본성

 

사람은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드러냅니다.

군대훈련을 받으면서 세 달 정도 같은 내무반을 써보면,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을 같이 가보면 그 사람을 잘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려운 시험을 겪을 때 자기의 본성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시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드러낸 본성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인간 본성의 원망, 불평, 비난입니다.

우리의 본성, 아담 때부터 내려온 죄성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물이 없는 것을 가지고 모세를 향해 원망합니다. 모세가 물 전문가입니까?

모세가 수도국장입니까? 왜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까?

모세가 쓴 물을 단물로 바꿀 능력이 있습니까?

모세가 그것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모세를 향해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불평을 하면 그것은 내 속의 죄성이 불평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입에 단 물이 들어와도 감사하고

쓴 물이 들어와도 감사하는 것이 새 성품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입니다. 24절에 기록된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는 말씀은

하나님이 이 광야에서 무슨 수로 남자만 육십만 여자포함 이백만 대군이 먹을 수 있는

물을 낼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그런 능력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삼일 전에 체험한 사람들이었지만 타락된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신앙은 우리의 타락된 본성이요 이런 본성은 예수 믿은 우리 속에도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옛 성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신의 성품, 새 성품을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 성품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도 감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렵게 하시고, 개천에 빠뜨리시고

우리를 미말에 두셨다고 할지라도 감사하는 것이 새 성품입니다.

 

욥은 자기의 열 자녀가 다 죽고 재산을 날렸어도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어다”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은 결국 두 배의 축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불평과 불신앙의 옛 성품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옛 성품을 따라서 살지 말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새 성품을 따라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쓴 물이 단물로 바뀐 방편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주셔도 이스라엘 백성을 목말라 죽게 하시려고

시험을 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시험을 주시면 치료책도 주십니다.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모세는 쓴 물의 시험을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소곤소곤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부르짖었습니다. 모세는 목이 터져라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여! 이 백성이 여기까지 와서 목말라 죽게 하십니까? 쓴물을 어떻게 마시라고 주셨나이까!

홍해를 가르신 주여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시옵소서!” 조용히 기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이 나무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했을 때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쓴 물의 치료책은 그 쓴 물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하기 이전에 모른 것이지 하나님은 이미 치료책을

그곳에 준비해 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영감을 주시고 치료책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를 쓴 물에 던지면 그 쓴물이 단물로 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했고, 그 쓴 물은 변했으며 백성들은 마시고 해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가 무슨 자연 치유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나무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나무와, 하나는 골고다 언덕의 나무입니다.

 

에덴동산의 나무는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은 그 실과를 금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먹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 전체가 쓴 물을 뒤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죄악이 오게 되고, 사망이 오게 되고, 고통이 오게 되고, 미움, 시기다툼,

질투 분쟁이 인류의 삶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의 그 나무는 이 쓴 물의 치료책입니다.

인류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꾼 나무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나무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그 자체로는 쓰디 쓴 나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형벌을 받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것은 그 자체로 고통의 나무요, 쓴 나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쓴 나무가 인생의 쓴 물에 들어오게 되면, 쓴 물이 단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동족요법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일반의사의 치료보다 동족요법의 치료비가 훨씬 비쌉니다.

이 사람들의 상담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원리는 간단합니다.

 

사람이 열 날 때 찬 물 먹습니까? 뜨거운 국 먹습니까? 이열치열입니다.

열날 때는 뜨거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뜨거운 음식을 먹어야 땀이 나면서 열이 가라앉게 됩니다.

열 난다고 찬물을 먹으면 몸이 열을 더 내게 되는 이치입니다.

 

내 인생이 참 쓴 물이라고 느껴질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나무,

그 쓰디 쓴 십자가를 그 쓴 물에 적용하면 됩니다.

 

“인생이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괴롭고 망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 믿었는데 어찌해서 이렇게 괴로운 쓴물 마라 앞에 당도했는가?”

하는 사람도 역시 십자가 나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인생은 시험도 없고 고난도 없고 싸움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 배고픔과 어려움이 있어야 거기서 승리의 기쁨도 맛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난에도 유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고난당하고 쓴 물을 마실 때에는 십자가 나무를 적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고난을 받아도 나를 사랑하신다. 나의 죄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 형벌을 대신 지게 하셨다.

하나님은 죄를 두 번 처벌하지는 않으신다. 고로 나는 형벌을 받을 이유가 없다’

라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믿은 사람은 벌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마라의 쓴 물이 온 것은 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벌은 예수님이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고난은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성숙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라고 믿고, 하나님께서 쓴 물을 통해 주실

유익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 고난을 이겨 내길 바랍니다.

 

마치는 말

 

십자가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성경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처럼 살라”고 했습니다.

덤으로 사는 사람이 뭐 불평할 것이 있습니까? 나에게 쓴 물이 좀 있다고,

하나님이 내 것을 좀 빼앗아 갔다고 불평할 것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쓴 물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에 이름의 본래 뜻이 ‘쓰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원래 이름은 나오미였습니다. 나오미는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살다가 이스라엘에 흉년이 드니까 모압 땅에 가서 10년을 살았습니다.

거기서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참으로 쓴 인생입니다.

모압 땅에서 처절하게 실패하고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며느리 하나가 끝내 따라붙습니다.

 

그 며느리는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거기서 장사지내겠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며느리의 이름은 룻입니다. 이 며느리가 어머니 밥을 위해

보리 타작마당에서 이삭줍기를 하다가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고치고 ‘인생이란 이렇게 씁쓸한 것이구나’

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 따라붙은 며느리가 시집가서 애를 낳습니다.

 

나오미는 아마도 애 기르는 재미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오벳이요, 오벳의 아들이 이새요, 이새가 나은 아들이 다윗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볼까요?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요, 다윗의 할아버지는 오벳이요,

다윗의 증조할머니는 룻이요, 다윗의 증조할머니의 시어머니는 나오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의 가계에는 나오미의 며느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라로 이름을 바꾸었던 나오미는, 인생 말기에 또 다시 나오미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삶이 마라인 분이 계십니까? 내일은 나오미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우리가 항상 자기의 좋은 면만 보여주려고 하는 이유 (강추)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짐승 곁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그의 외로움과 쓸쓸한 시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왕따, 부적응자'로 따돌립니다.

 

폭군에게 쫓겨 먼 나라로 피난했던 아기 예수님은

그의 나그네와 같은 삶의 적막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등뒤에 대고 '떠돌이'라고 말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지만 집이 없었던 예수님은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그(우리)의 불안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경제 파탄자'로 무시합니다.

 

목수의 집에 태어나 시골에서 자라난 예수님은

그의 땀과 고생과 그 피로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밑바닥 인생'으로 분류합니다.

 

돌로 빵을 만들라는 시험을 당하신 예수님은

욕심의 수렁 앞에 선 그(우리)의 위험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유혹에 약한 자'로 비웃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던 예수님은

그의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신앙적 갈등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세리와 죄인'을 쳐다보듯 합니다.

 

친구들의 떠남과 배신을 체험하신 예수님은

비록 혼자서라도 굳세게 살아보려는 그를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뭔가 인격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봅니다.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하고 호소하신 예수님은

그의 약함과 용기를 달라는 호소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나약한 겁쟁이'로 평가합니다.

 

수건을 동이고 제자의 발을 씻기셨던 예수님은

그의 숨은 봉사와 그가 지불한 희생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쓸데없는 일'이나 벌리고 다닌다고 타박 줍니다.

 

갈보리 언덕을 십자가 지시며 홀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남을 위해 남 몰래 흘리는 그의 눈물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자기 머리도 못 깎는 주제에'라고 깎아 내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척, 무슨 척, 무슨 척합니다.

비난의 화살을 맞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험’일 수 있습니다.

항상 자기의 좋은 면만 보여주려 하는 시험!

 

예수님은 자기를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오해가 공생애 내내 따라다녔지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임을... 거의 증명하지 않으시고,

그저 그 오해의 시험을 묵묵히 이겨나가셨습니다. 이것이 공생애 때 지신 십자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자기 좋은 면만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해도, 무시도, 불이익도 가급적 당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건 시험에서 지는 길입니다.

그 시험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시험입니다.

 

사람들의 오해, 천대, 멸시, 무시당함... 이게 다 십자가를 지라는 시험인데,

우리는, 나를 좋게 포장함으로써, 그 시험을 비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는 시험에 낙방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시험에서 이기십시오! 그게 마라의 쓴 물에, 나무 십자가를 던져서 

단물로 바꾸는 일입니다.

 

 

내 자아가 죽을 때, 시험이 그칩니다.

 

시험은 결국 <자기 욕심> 때문에 옵니다.

흔히 시험에는 두 가지 시험이 있다고 합니다.

 

마귀가 주는 시험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거의 구분이 안 됩니다.

 

‘이것이 마귀가 주는 것이냐? 이것이 하나님이 주는 것이냐?’

우리로서는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시험의 근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는 시험이든, 마귀가 주는 시험이든

모든 시험은 결국 철저한 <자기 욕심 추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3~15

 

여기서 말하는 ‘자기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자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아 중심의 사람이 되면,

우리는 이렇게 되어도 시험이고,

저렇게 되어도 시험입니다.

 

잘 되어도 시험이고, 못 돼도 시험인 것입니다.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도 마귀가 주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내 안의 욕심을 제대로 버리지를 못하고

자아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상처 받는 이유도 <자기 자아>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상처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상처받기 쉬운 자아를 붙잡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아는 끊임없이 이기적이고 자아 추구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뿐만 아니고 계속 남에게도 상처를 주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또 많은 성도들이 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역시 자신의 힘에 의지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우리를 향한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면

왜 살기 힘듭니까?

 

그 말은 실제로 우리가 사는 형편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여전히 나 중심으로 내 계획대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내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이시고 예수님이 주님이신데

여전히 내 모든 일들을 내가 주장하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도장 찍고 결정하고 사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의 문제는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식량이 없어서 애굽에 식량을 구하러 내려갔지만,

애굽에 있는 창고마다 가득 가득한 곡식들이 다 사실 자기들 것이었습니다.

동생 요셉이 그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너무나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