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처음 맛보는 자유

LNCK 2024. 5. 3. 18:0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처음 맛보는 자유 - 2024.04.28  YouTube

처음 맛보는 자유         행8:26~40          

※다소 사변적이나, 깊이 생각해 봐야 되는 내용입니다.   

◑평소에 말씀에 민감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행8: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오늘 말씀은 '주의 사자가' 라는 주어로 시작합니다.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가라' 그랬습니다. 

예루살렘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근데 거기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 아무것도 없는 광야라 그랬습니다. 

'주의 사자'가 주어입니다. 
본문은 빌립이 전도한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가시는 분은 '주의 사자' 
즉 천사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니까, 곧 하나님이 이끌어가신 것입니다.

빌립이 이 말씀을 듣고 광야길로 가서 한 마차를 만납니다.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성경에 '수레'라고 되어있는데 '마차'라는 번역이 좀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가까이 나아가라' 말씀하시죠. 

빌립은, 이 마차에 탄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하고 세례를 줍니다. 

:39 '그 후에 둘이 물에서 올라올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본인이 계획해서 간 게 전혀 아니고요. 
'가라, 가까이 가라' 해서 빌립이 갔습니다. 아주 세세하게 인도하시는 대목입니다.  :26, :29

'이리 가라, 저리 가라, 거기 서라, 우회전해라, 기다려라!' 이런 거 보면요. 
'내 삶도 하나님이 이렇게 좀 구체적으로 인도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도 어디로 가야 할지,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할 때가 많잖아요. 
'하나님 누구랑 결혼해야 되나요? 
어디다 투자해야 되나요? 
취업 준비가 참 힘든데, 이쯤에서 포기하고 다른 길 찾아보아야 되나요? 
한 해 더 해볼까요?' 

우리 목사님들도 심방하면서, 이런 상담 참 많이 받으십니다.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인도를 쉽게 받을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분명한데, 조금씩 패턴이 다릅니다. 

1) 첫째로 일상적인 걸음 가운데의 인도하심 
특별한 음성 없이, 자신의 판단으로 길을 가요. 
그러면서 민감하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거죠. 
성전 미문으로 향하여 가던 사도들이, 거기서 구걸하던 장애인을 보고 주목했던 사건, 

2) 두 번째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상적이지 않은 경로를 갈 때가 있습니다. 
나는 몰랐지만, 본래 이 길로 가지 않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가게 된 거죠. 

빌립이 사마리아 전도한 계기가, 
예루살렘의 박해 때문에 흩어져서 가게 된 거죠. 
'가보니까 하나님 뜻이다...' 발견하게 되는, 그런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정에 보면, 많은 경우가 야반도주예요. 
핍박받아서 도망가다가.. 어떻게 가다 보니까 어떤 성에 들어갔고 거기서 전도했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세 번째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경우 
오늘 본문처럼 '빌립에게 어디로 가라' 그러시고요. 
바울이 마게도냐로 넘어갈 때,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오라'는 인도를 따라 가죠. 

△저도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기도하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한국에 살다가 미국으로 유학 갈 때, 
또 미국에서 유학하다가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리고 개척한 지 10년 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결정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개척한 교회가 가장 좋을 때였어요. 
너무너무 행복하고 은혜 충만할 때였는데, 제가 교회를 내려놓고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교수를 하고 있는데, 포항제일교회에서 저를 찾아오셨을 때, 
그때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동쪽으로 가거라' 이러신 것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정된 정보, 제한된 지혜를 갖고 미래를 모색해야 될 때가 있고요. 
또 가다가 '여기가 아닌가 봐' 할 때도 있습니다. 
기다림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애타는 경우도 많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이미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순종은 마음의 등불을 켭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119:105

이 말씀은, 그냥 성경에 활자로 적혀있는 말씀이 아니에요. 
내가 행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순종해 본 말씀입니다. 

아마 요즘에 이런 말을 쓴다면요, 
'주님의 말씀은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비게이션 기계를 샀습니다. 집에 선반에 모셔놓습니다. 
그렇하면 내비게이션 가지고 있는게, 아무 도움이 안 돼요. 
내비게이션을 켜고, 보고, 그 길로 따라 가봐야... 그 길을 알게 되는 겁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집에 성경책 갖다 놓는다고,
그게 내 발의 등이 되지 않습니다.  내 인생 길을 인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깨닫고, 순종해 가야 
그제야 성경이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하나님이 빌립을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하는 것보다, 
'빌립이 이렇게 순종했구나' 입니다

하나님 '가라' 하면, 빌립은 순종해서 가는 거예요.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라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거예요. 
그럴 때에, 연약한 내 영혼, 우리가 비록 많이 부족할지라도, 어리석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받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아주 섬세하고 미묘한 부분까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명확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십시오. 

예배하고, 말씀 생활하고, 내 책임을 다하고... 그렇죠?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 너무도 쉽고, 기본적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런데 순종을 안 해요. 

그러면서 '하나님 뜻을 알려주세요...' 간구한다고,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혹시 알려주셔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듣는 내 감각이 둔해져 있어서... 알아듣지 못합니다. 

빌립이 주의 사자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은요. 
그가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한 결과입니다.   *이 단락의 주제 

◑복음을 '입을 열지 못한 자'라도... 증거하게 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정의가 세워집니다. (이게 본문에 나타난 '복음'의 한 측면)

그렇게 빌립이 광야에 나가보니까, 마차가 한 대 지나가죠. 
그 마차 위에서,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소리 내어 낭독합니다. 

'그에게 가까이 가라'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가보니까 에티오피아 사람인데 내시 입니다. 여왕의 아주 최고위 관료였습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인데, 그가 왜 예루살렘에 갔을까요? 

하나님께 대한 사모함이 있었던 거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을 거예요. 
예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먼 길을 예루살렘에 갔고, 
갔다 오는 길에도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열정으로 성경을 읽는데, 그가 깨닫지는 못합니다. 
빌립이 묻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주1)

 

그런 의미에서 빌립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즉 '읽는데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런데 내시는 '읽기는 읽어도 알지 못한다'고 답했어요.

내시는 아마 예루살렘까지 가서 많이 물어보기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직도 이사야서를 깨닫지 못합니다. 

8:31 '대답하되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성경은 배워야 됩니다. 누군가 가르쳐줘야 됩니다. 
내 맘대로 읽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같이 입을 열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전도자)들이, 대신 입을 열어 주었습니다.

8:32~33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 구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입을 열지 않은 자'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한 사회적 약자' 
'억울한 죽음, 한 많은 인생...' 

여러분 세상에 그런 삶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약자를 대표하는 한 죽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33절에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누가 그의 삶 Life 을 말하리요?' 라는 뜻이고요,

연이어서 '그의 생명이 땅에서 뺴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러면 문맥이 부드럽게 연결되죠.

영어로 보면 '누가 그의 라이프를 말하리요? 그의 라이프가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죽었으니까 말할 수가 없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정말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울하게 죄인으로, 말도 못하고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닙니다. 대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인간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입니다. 
이겨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기 좋은 대로 말한 게, 역사로 남아 있는 거예요. 

여러분, 서부 영화 좋아하십니까? 서부 영화를 보면, 유독 영웅들이 많습니다. 
정말 신출귀묘한 총잡이들, 권총 하나로 수십 명의 악당들을 상대했던 건맨들이 많잖아요. 
왜 서부 영화에만 그런 영웅들이 있을까요? 
황야(서부)는, 모르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들 다 만나는 곳이고, 한 번 만나고 나면, 그를 다시 만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부(영화)는, 과장하거나 거짓말하기 딱 좋은 환경입니다... 
(역전 같은 곳이죠. 그래서 과거에는 역전 앞에서 약을 많이 팔았습니다)

만약에 농촌이나 전통적인 마을이면, 과장이 잘 안 돼요. 
'에이 내가 봤는데, 그 사람 늘 숨고 비겁하게 다니다가, 총싸움에서 어쩌다가 한 번 이긴 거야' 
그런 폭로가 많을 겁니다. 근데 서부는 좀 다른 공간이죠. 

우리나라에도 서부극이 있나요? 
조선팔도 다 돌아다녀도 서부극의 스토리가 나올만한 환경, 그렇게 뻥칠 만한 데가 잘 없습니다. 

여러분 '만주 웨스턴'이란 말 아십니까? 
일제시대 때 사람들이 만주로 많이 갔잖아요. 
'그때 만주에서 이런저런 일을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내가 만주에 있을 때 말이야...' 라고 이야기 시작하면, 절반은 깎고 들어야 됩니다. 
아무도 안 봤으니까요.

여러분, 우리가 역사라고 알고 있는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의심해 보아야 될 이야기예요. 
'내가 나쁜 놈들 많이 죽였다' 
그렇다면 죽은 놈은 다 나쁜 놈인가요? 
역사 속에 수많은 억울한 의인의 죽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맨 처음에 '아벨의 죽음'을 위치시킵니다. 
아벨은 들에 가서 맞아 죽었어요. 아무도 안 보았어요. 자손도 없어요. 

세상의 역사라면, 아벨을 '죽어마땅한 놈, 살려두면 이 세상의 해가 될 자'
'오죽하면 형이 죽였겠어?' 그랬을 거예요. 왜냐면 승자가 역사를 기록하니까요. 
여러분 그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가인의 역사입니다. 이긴 자의 역사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니까, 패자로서 아무 말이 없는 거죠. 

그러나 성경은 세상 역사와 전혀 다릅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증언해 주십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도 입을 닫고 죽었으나) '그가 죽었으나 지금도 말하느니라' 어떻게 말합니까? 
하나님이 증언해 주시는 거예요. 그의 믿음을!

똑같은 말씀이 여기에 나옵니다. 
8:32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리고 예수님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지금 빌립이 뭐라고요? '입을 열어' 같은 말이 반복되죠.  :35
그래서 예수를 전파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않으셨는데, 대신에 누가 입을 엽니까? 
빌립이 입을 여는 거예요.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5
예수의 제자들이 입을 여는 거예요. 
오늘도 수많은 교회들에서 입을 열어, 예수를 높이는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예수님의 명예가 회복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억울한 이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예가 회복돼야 정의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은 '역사 바로잡기'죠. 그게 복음이에요. 

역사 속에 죽어간 모든 억울한 이들, 약한 일의 사정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그것이 그냥 묻혀 버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게 
복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정의의 회복입니다. 

여러분 '정의 실현' 자체가 복음은 아니에요. 
'내가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은, 복음하고는 다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의 실현을 포함합니다. 
진정한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정의가 실현됩니다.

'인간의 자존감을 인간의 힘으로 회복하자' 그게 복음은 아니지만 
복음은 진정한 자존감을 회복해 줍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면서, 또한 개혁적인 초대교회          

8:36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보라 물이 있으니 세례받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여러분 이 말이 굉장히 묘하고요. 굉장히 재밌고요. 굉장히 급진적인 말입니다. 

여러분 물만 있으면 세례받습니까? No!
세례받는데 어떤 조건이 필요하죠? 
믿음을 고백해야 되죠. 세례 교육 받아야 되죠. 
당회의 허락받고 교회의 승인이 있어야 되죠. 문답도 해야 되죠. 

여러분 세례받으려면요. 꽤 복잡한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라 물이 있으니 세례받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 말은 정말 놀라운 말입니다. 

예를 들면 대학 강의실이 있어요. 아무나 지나가다가 딱 들어와서 
'보라 여기 분필이 있으니.. 내가 강의하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으리요?' 하는 말하고 똑같아요. 

분필이 있으면 교수 됩니까? 
물이 있으면 세례받습니까?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굉장한 과장인데 
이게 어떤 해방의 선언이란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시면요. 신23:1절에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내시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죠. 

그리고 신23:3절에는 암몬 사람, 모압 사람 같은 이방인은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온다고 명시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에티오피아인은, 이중으로 걸리는 거예요. 
-내시기 때문에 
-이방인이기 때문에 ...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 멀리에서, 당시에 땅끝이라고 할 만큼 그 먼 길을 
에티오피아에서 마차를 타고 하나님을 사모해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갔는데 
그 안에 들어왔는데 정작 들어가지는 못했어요.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거부당한 자아죠. 
'나는 자격이 없는 인간인가 봐' 했던 그 자의식이 바뀌는 거예요. 
그것도 빌립의 말로 '괜찮아요. 세례받으세요. 당신은 괜찮아요' 한 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여기 물이 있으니 무슨 거리낌이 있으리요?'
이렇게 내시가 당당하게 말한 것은, 
복음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무슨 거리낌이 있으리요?' 
이 말은, 평소에는 거리낌이 많았다는 거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 위축된 마음, 그런 열등감! 
그 거리낌이 일거에 사라진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안 나오지만,
빌립이 사53장 말씀을 통해 전해 준 복음을 듣고, 그가 마차 위에서 변화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자존감을 회복하자! 
그게 복음은 아니지만, 
진정한 복음은 모든 사람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줄 믿습니다. 

▲사회학에서 '지위 불일치, status dissonance' 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두 가지 지위가 일치하지 않을 때... 
예를 들면 몰락한 양반, 
그의 신분은 양반이에요. 명문가예요. 
그런데 가세가 기울어서 가지고 있는 게 찌그러진 갓밖에 없어요. 그 불일치... 

반대로 부자예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이 별로에요. 그래서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아요. 

복음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 교회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위 불일치'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스데반... 굉장히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예 출신이었어요. 
(히브리 인이었으나, 조상이 노예로 붙잡혀 외국에 갔다가, 시간이 지나서 해방되어 돌아온 사람)

많은 여성들... 이 세상에서 옛날 기준으로, 조금 능력 있고 똑똑한 여성들은 
전부 다 '지위 불일치'를 경험한다고 봐야 됩니다. 그런 말들 하잖아요. 
'야, 네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참 아깝다' 그러잖아요. 굉장히 그게 불일치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 여성의 잠재력들이 막 드러나고 실현이 됩니다. 
이 에티오피아 사람은, 원하면 마차를 타고 예루살렘까지 여행할 수 있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한나라의 재정기획부 장관, 대통령실 실세...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남부럽지 않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졌으나... 내시입니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는 굽신거리지만, 
속으로는 자기를 인간 취급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엄청난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았을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그냥 가난하면 오래 괜찮아요. 그냥 힘없으면 괜찮아요. 
끊임없이 상류층의 문화에 노출되며 살면, 그런데 가난하면... 
그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훨씬 더 깊습니다. 

이 지위불일치를 가장 크게 경험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잖아요. 그런데 낮아지셔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갈릴리 서민들과 함께 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높이셔서, 만주의 주로 삼으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면요, 사람이 높아지고 낮아지고.. 그거 별거 아니구나.. 
사람의 눈에 보이기에 잘나고, 못나고... 너무 그것 때문에 위축될 필요가 없구나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이 중요하구나 할렐루야!' 이런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용납해 주셨음을 깨닫고,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11장에 이런 말 나옵니다. 고넬료를 빗대어 사는 말인데요.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여러분, 베드로는 교회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이기에'  *설교제목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코류오 withstand   :11:17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못 막는다는 거죠.

'어떤 거리낌이 있으리요?' 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코류오 withstand, hinder  8:36

여러분 보세요. 지금 인간의 모든 제도로 생각하면 
이 내시 같은 사람은, 교회에 안 받아들이는 게 맞아요. 

우리의 전통으로 생각하면 No 하는 게 맞습니다. 
성전에도 못 들어오고,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 가입 못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분명하다는 거죠.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막겠느냐?' 라는 거죠. 11:17
그래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 전하고, 세례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교'라고 하는데요. 
하나님이 주도해서 선교하신다는 개념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이방인들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게 대단히 개혁적이고, 대단히 급진적인 일이었습니다. 

사마리아에 전도했는데 '사도들이 와서야 성령이 임하셨다'
이거는 굉장히 보수적인 면모입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 '무슨 거리김이 있느냐?' 
이 말은 엄청난 굉장히 개혁적이고 급진적이까지 한 말이죠. 
성경에 이 둘 다 나옵니다

 

이 말이, 사도가 아니요, 빌립도 아니요, 내시가 했던 말이에요. 이 사람이 이끌어가요. 
오히려 굉장히 놀랍죠. 급진적입니다. 

초대교회 세례신학에 중요한 기초를 놓은 이 말이, 이방인의 입에서 나온 겁니다. 
굉장히 놀라운 겁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천 년의 문서(성경)를 중심으로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가장 보수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보수의 두께가, 역사가 100년도 안 돼요. 그렇지 않습니까? 

100년 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상투 틀고, 갓 쓰고 다녔잖아요. 
지금 갓 쓰고 교회 온 사람 하나도 없잖아요. (그럼 다 개혁적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현대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전통 전통' 하는데,
사실은 전통이 아니고 
우리가 젊을 때 좋아하던 거예요. 
한국 기독교 자체가, 한국 문화에서 굉장히 새로운 겁니다. 

그런데 교회는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을 붙잡고, 공부하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잖아요. 
100년, 200년이 아니라, 수천 년이 지났어도, 
변치 않는 진리는 지켜야 하는 줄 믿습니다. 이건 찐보수입니다. 

동시에 기독교는 개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기 때문에 
교회는요 근본적으로 개혁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미래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어요. 

세상 사람들이 나누는 보수와 진보 이런 걸로 교회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둘 다 나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건 또 개혁의 슬로건이죠. 둘 다 나옵니다.

사도행전 전체의 역사가, 성령의 새 술이 들어왔어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셨어요. 이제 맞춰가는 거예요. (개혁적이 된 거죠.)

그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따라가면서 
사람들의 삶과, 관계와, 제도와, 라이프스타일, 문화가 
이제 점점 새 부대로 만들어져 가는 이야기입니다. (보수, 개혁 둘 다 있다는 얘기죠)

복음을 들으면, 믿으면, 사람들의 삶이 결코 이전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크신 분이고, 복음은 새로운 삶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개혁을 외치고, 개혁을 시도했고, 개혁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사실은 제대로 된 개혁은 별로 없습니다. 
좌절된 개혁, 미완의 개혁... 그런 말 너무도 많잖아요. 

혁명이 일어나서 혹 성공해도요, 혁명의 아들들이 혁명을 배신하는 게 인간의 역사예요. 
기득권을 타도하자... 그래서 성공해서 자기들이 권력을 잡으면,
자신들이 기득권이 되잖아요. 더한 기득권이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세상에 진정한 개혁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역사상, 가장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은 종교개혁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게, 사실은 우리말로만 '종교개혁'이지 
영어로는 The Reformation 이에요. '종교'라는 말이 안 들어갑니다. 그냥 개혁이에요.
독일어, 라틴어도 마찬가지로 그냥 '개혁'이에요. 

무슨 말입니까? 종교만 바뀐 게 아니라, 사회의 제반 영역이 모두 다 개혁된 거예요.
어쩌면 당연한 거죠.
신앙이 바뀌니까, 모든 게 다 바뀌는 거예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사회 전반이 다 바뀐 겁니다. 

인류 역사에 정말로 개혁이라 할 만한 유일한 사건이, 종교개혁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인간을 바꾸는 게 복음이에요. 그런데 이 개혁을 뭘로 했습니까? 

'아드 폰테스 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옛날 초대교회 때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

굉장히 새로운 뭔가를 했는데요. 
따지고 보면, 요즘 말로는, 굉장히 보수적인 개혁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하고 개혁한 겁니다. 
(성경에, 기독교에 보수와 개혁 두 개념이 다 들어있다는 거죠)

수천 년 전에 쓰여진 이 말씀을, 그대로 살 때에 *보수적
거기에 인간의 삶을 바꾸는 역동적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혁적

그게 여러분 성경의 역사입니다. 
이 내시는, 그리고 이방인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신23:1~3

여기서 '총회'라는 말은 assembly, ecclesia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신명기 23장에서 보시듯이, ecclesia라는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굉장히 배타적입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어디 이방인이 들어와? 절대 안 돼!' 
아주 굉장히 배타적인,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의 집합이 '에클레시아' 안에 들어있었어요. 
똑같은 단어가 그리스에 와서는 민주주의의 제도가 되었습니다. 

◑내시가 세례 받음 .. '누구든지' 초대하는 복음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어로 '민회, 시민총회'도 됩니다. 
귀족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다 함께 모여서 평등하게 토론하는 '직접 민주주의'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제도였지만, 그러나 한계는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은 아니고, 아테네 시민들만 참여할 수 있었죠.
또한 노예들은 아니고, 자유인들만, 
아이들은 아니고 어른들만, 
미안하지만 여자들은 아니고, 남자들만! 
그게 아테네의 민주주의였습니다. 

그게 당시에 에클레시아, 가장 선진 문화의 에클레시아(민회) 였습니다. 

여러분 구약에서는 에클레시아(총회) 라는 말이 베타성에 쩔어있는 단어였고, 
그리스 시대에도 엄청나게 많은 한계가 있었는데, 
그런데 교회는 어땠습니까?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이다'
하는 복음이었습니다. 

갈3: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종이나 자유인, 그 엄청난 구분이 사라졌고,
남자나 여자, 그 태생적인 구분이 없어졌다는 거죠. 

여러분, 구약에서 할례가 하나님 백성되는 절차였는데, 할례가 신약에 세례로 바뀌었잖아요. 
할례로 남아있는 한, 여성들은 교회의 주체가 될 수가 없어요. 곁다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로 바뀌면서 여성들이 당당한 주체가 됩니다. 
내시도 이제 포함이 되는 거죠. (다 세례를 받을 수 있으니까)

사도행진의 전도의 말씀의 핵심이 뭡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데 세상에서는 '누구든지 오시오' 그래놓고요. 
'노예는 말고, 여자는 말고, 장애인은 말고, 내시는 말고...' 이렇게 다 빼요. 
멤버십 자격요건이 채워져야만.. 누구든지 들어오라고 합니다.

'진짜 누구든지'는 여러분 세상에 좀처럼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은 완벽하게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게 세례받고 새 사람이 되는 거예요. 

39절 함께 읽습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빌립은 사라지고, 내시가 어떻게 반항합니까? 
'기쁘게 길을 가므로' 

여러분, 여기 좀 이상해요. 
사람이 같이 있다가 헤어지면 좀 아쉽잖아요. 

내시가 성경을 몰랐는데, 너무 좋은 선생님 빌립을 만나가지고 
딱딱 가르쳐주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리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어요.
받자마자 빌립은 가버렸어요. 

나 같으면 굉장히 아쉬웠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면, 아쉬운 눈빛이나 뉘앙스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 말씀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엠마오 사건하고 대단히 비슷합니다. 
두 제자가 풀이 죽어서 낙담하여 엠마오로 걸어갑니다.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한참 지나고 나서 이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걸 알게 되자 말자, 예수님은 사라져요. 
여러분 인지상정이라, 당연한 반응이 '아이고 우리가 그걸 몰랐네, 이 어리석은 나자신이여!'

근데 여기 엠마오 사건에도, 예수님과 헤어졌다고 아쉬워하는 낯빛이 조금도 없습니다. 
대신에 그 자리에 일어나서 밤에 에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요. 
그 복음,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이 복음이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줄 믿습니다. 
그냥 길을 가는 거예요. 그런데 기쁨으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롬6: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삶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 믿어도, 갑자기 다른 동네, 다른 데 가는 거 아닙니다. 
그냥 자기 길을 그대로 계속 가는 거예요. 

이 에티오피아 사람이 세례를 받고, 자기가 가던 갈 길을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전과는 다른 걸음으로, 기쁘게 가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는 삶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요. 은혜를 받아도요. 
아침에 출근하고요. 아이들 열심히 공부해서 진학하고요. 
어르신들 은퇴하고요. 비슷하게 삽니다. 인생길을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길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이 에티오피아 사람이 빌립과 헤어지고 나서, 마차를 타고 계속해서 광야 길을 갑니다. 
가면서 뭐 했을 것 같아요? 
아마도 계속 이 성경을 읽으면서 갔을 것 같아요. 

사56장에 가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사56:3~5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놀랍죠. 이 사람은 그 먼 길을 갔는데, 
두 가지 조건, 이방인이고 내시였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미 구약성경에, 이방인 고자에게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훨씬 더 풍성한, 복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나님이 받아들여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리라' 
할렐루야, 내시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셨구나' 
나를 위한 말씀으로 들리는 은혜, 할렐루야! 
같은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그냥 활자로 있는 말씀이 아니고요. 
우리 집 선반에 둔 성경책에 들어있는 그 글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 
그 말씀을 듣는 귀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를 정리하면, 오늘 이 긴 이야기는 두 가지 질문이 핵심이에요. 
-하나는 '읽는 것을 깨닫느냐?' 읽어야 되고, 깨달아야 됩니다. 
그 말씀 안에서 우리가 나를 발견하고, 예수를 만나는 거예요. 
그럴 때에, 예전에 알지 못했던 자유가 그 안에 있습니다. 해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내시가 말했어요. '세례를 받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할렐루야! 
이 자유(개혁),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를 누리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 자유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빌립이 묻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재미있게도 '읽는다'는 말은 헬라어 '아나기노스코' 입니다. 

*아나 : into the midst, 기노스코 : know
 
'깨닫는다'는 기노스코입니다.    

그러니까 '기노스코 하려면 아나기노스코 해야 된다'
'알려면(이해하려면) 읽어야 된다, 읽으면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동지방에서는 요즘도 '소리내서 읽는' 방식으로 공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