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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믿음의 완성

LNCK 2024. 5. 4.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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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교회 2024-04-28 주일예배 // 감사, 믿음의 완성 - YouTube

감사, 믿음의 완성          눅17:11~19

눅17:11절은 꼭 보세요!                             

 

누가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예수님께서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시는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신다' 라는 것을 한 번 더 명기합니다. 

◑눅17: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1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경계지역을 지나가실 때라고 기록하고 있죠.

누가복음은 4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긴 복음서이고, 
특별히 9:51절 부터 ~ 19장 끝까지 약 10장 정도의 내용이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에는 안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9:51절 ~19장 끝까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 중에 일어난 사건과
그때 주셨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구절만 좀 찾아보면 
눅9:31절, 예수님께서 변화산 상에 계실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그때 그들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습니다.' 

9:51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이 시작하는 부분인데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서 십자가를 지시기로 예수님께서 결심을 하십니다. 

13:22절도 여러 가지 가르침, 그리고 또 말씀을 주신 다음에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예수님이 여정에 사역을 계속 해 나가시지만,
목적지는 예루살렘 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이죠.

그리고 18:3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예수께서 여리고를 거쳐서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이제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단락이 마무리되는 19:2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그러니까 제자들이 정말 두려워하고 놀랄 정도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 서서  가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본문을 대할 때 상세하게 다루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또 어떤 놀라운 일을 하시든지, 
잊지 않았던 것은 뭔가 하면 '자기의 목적지'입니다. 
'나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다!'

▲제가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을 드린 것은, 
제가 요즘 여러 가지로 관여하는 일들이 많다 보니까

제가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가, 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예수님은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고 계셨는데, 
그렇다면 내 삶의 목적지는 어딘가? 
그리고 나는 그 목적지를 향해 충실하게 달려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 스스로 좀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의 자리에 나왔는데, 
그런데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가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여러분도 내 삶의 목적지는 도대체 어디일까?' 한 번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시간, 남은 인생이 주어졌는지 모르지만 
'내 삶의 목적지는 어디이고, 그곳을 향해 나는 지금 충실하게 달려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목적지가 없이 인생을 산다면, 
나중에 다 살고 나서 돌아보면, 전혀 엉뚱한 곳에 도착해 있을 수 있잖아요..

◑17:12절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와 만나는 장면들을, 
복음서를 보면 여러 번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 당시에 나병 환자들은, 세 가지 정도는 우리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1) 나병 환자는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했나요? 
'나는 하나님께 벌 받은 인생이다'라고 자신들을 생각하는,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냐면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큰 잘못을 범했을 때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 중의 하나가, 나병인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들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스스로 '나는 하나님께 벌 받은 인생이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2) 두 번째, 나병 환자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완전히 단절이 됩니다. 
그리고 레위기를 보면, 나병환자들은 전염시킬 위험성도 있지만 

정말 자기 자신이 부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것을,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기와 접촉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이 나병에 사람이 걸리게 되면  
가족을 포함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된,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3) 세 번째, 나병환자는 낫는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죠. 이것은 불치병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절망에 빠져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병에 걸렸던 분들은 
지금도 우리 한국에도 소록도, 이런데 가면 나병환자분들이 계시죠. 

그분들은 스스로를 '나는 하나님께 벌 받은 인생'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완전히 단절되어서 정말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절망의 지배되어서 살아갔던 사람들이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10명이 예수님을 만났는데, 재밌는 표현은 
'멀리 서서' 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시에 나병환자들은 사람과 장소를 오염시킨다고 해서 
사람들로부터 최소한 50걸음 정도는 떨어져서 대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는데 '멀리 서서' 있었던 거죠.  
13절에 그들이 무슨 행동을 했느냐면, 큰 소리로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17:13절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 선생님이여'
여기 '선생님'은, 예수님께 대해 '주님'이라는 표현보다 등급이 낮은게 아닙니다. 
선생님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누가복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만 사용되었습니다.  *에피스타테스

영어 번역은 이 말을 대부분 Master 로 번역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스승이나 선생님을 아주 높여주는 그런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이 10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겠죠. 
그래서 예수님을 정말 존경하는,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예수 선생님이여!' 하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청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Have mercy on us!

만약 여러분이 나병환자였으면, 어떻게 요청을 했겠습니까? 
'예수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것보다는 
'예수님, 저를 좀 고쳐 주십시오!' 라고 하는게, 오히려 좀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했을까요? 

그래서 학자들이 연구했던 자료들을 보면, 
'아마 이 사람들은 나을 거라는 기대를 포기했는 것 같다' 입니다.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 저를 고쳐 주십시오' 보다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간청했던 것으로 봅니다.

맹인 바디매오도, 나중에, 예수님을 향해 같은 요청을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8:38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드렸던 이 간청, 
아마 교회를 다니시면서 신앙생활을 한번 시작하신 분들은, 
교회에 오셔서 제일 많이 들으면서도, 제일 잘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기도'입니다. 

▲저도 태어날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를 다니면, 참 어릴 때 보면, 
저는 뭐 성경 공부나 이런 거는, 열심히 하면 잘할 수가 있었는데 
기도는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요.

지금 목사가 된 제 동생도, 중학생 때부터 참 기도를 잘 했고 
교회 가면 또 여학생들은 얼마나 기도를 잘 하는지 몰라요. 

근데 저는 기도를 잘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청년 시절을 제가 보낼 때도 
'내가 어떻게 하면 기도해서 30분 한번 넘겨 볼 수 있을까?' 

제가 아무리 고함 지르고 막 난리를 쳐도, 
눈 떠서 시계를 보면, 겨우 5분만 지나가 있었어요. 

'야 어떻게 하면 나도 한 30분 넘겨서 기도 한번 해 볼 수 있을까' 
제가 그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에 첫 번째로 배우게 됐던게 
'기도는 대가에게 배우는거다' '기도는 마스터 (대가)에게 배워야 잘 할 수 있다'
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렇지... 나도 그래야지...'

근데 기도의 대가가 누구시죠? 우리 예수님이시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저는 원래 주기도문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왜 좋아했겠습니까? 
저녁 예배 때는 이거 하면, 마치고 집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아했죠.

그런데 이 주기도문이 '예수님께서 우리들한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거다'
그래서 제가 그때 청년시절부터 이 주기도문을 하나씩 하나씩 손가락으로 꼽으면서 
제가 기도를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야~ 우리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는구나. 
그분이 바로 참 초월자시고, 창조주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고, 
나의 구원자시고, 그분이 바로 나한테 아버지가 되시는구나!'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제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가장 구별되어진, 가장 귀한 존재로 
우리 교회에서,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가 가장 귀중히 여김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이거를 하나씩 하나씩 꼽으면서 제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30분이 순식간에 지나가더라고요. 
제 기도 생활에 정말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또 제 기도생활에 일어났던 큰 변화가 오늘 이 본문의 기도입니다. 
이거는 '예수 기도'라고 알려진, 교회사에서 유명한 기도입니다. 

제가  유학기간 동안 영성 신학을 공부를 했는데, 
그 영성 신학에 자주 '예수기도 Jesus Prayer' 이런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저는 처음에 이게 주기도문인 줄 알았습니다. 근데 그게 아니고,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게 바로 '예수 기도'입니다.

이 '예수 기도'는, 주기도문 다음으로 
우리의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했고 
가장 많은 성도들이 사랑했던 기도문이 바로 이 표현입니다.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가 영성 신학 공부하는 동안 이 기도를 제가 배웠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여러분, 성경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게 가능합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는게, 실제로 해 보면, 쉽지 않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면... 잘못하면 죽죠.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를 그럼 과장법이라고 이해해야 되나요? No
저는 젊었을 때,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가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예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거는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실천했던 방법이었다'는 거예요. 
매순간 무엇을 하든지, 매 순간 마음으로 기도하는 거죠.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로 마음으로 이 고백을 드리면서, 일을 하고, 그리고 또 쉬기도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마음으로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쉬지 않고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기도를 처음 접하고, 제가 사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유학생활동안 뭐 영어를 잘 못하니까 참 고생했는데, 
그때마다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또 논문 쓸 때도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자녀들이 또 거기 미국 생활을 힘들어할 때도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그때 제 미래가 걱정이 될 때도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아마 그때 정말 이 기도 가지고 
제가 유학 생활을 버텨냈던 것 같아요.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 예수 기도 https://rfcdrfcd.tistory.com/15972188

성 프란시스 ... 성자잖아요. 
그분이 밤새도록 기도를 하니까, 제자들이 
'저 성자이신 분이 무슨 기도를 밤새도록 하시나?' 

그래서 그분 옆에서, 이렇게 그분이 밤새도록 기도하는 내용을 귀담아 들어보니까 
밤새도록 기도했던 내용이 무엇이냐?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Lord Jesus, Have mercy on me. I am a sinner 밤새도록 이 기도를 드렸다는 거예요. 

여러분 중에 혹시 기도가 힘드신 분들은,
정말 걱정이 일어나고 염려가 될 때마다. 
그냥 속으로 이 기도를 드리시면 돼요.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참 오랜만에 이 기억에 다시 나서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계속 기도드렸죠. 

여러분이 이 기도를 하면, 이게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걸까요? 
기도하는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까?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면, 내가 불쌍한 처지가 된 것 같잖아요...

그게 아니죠. 여러분, 이 기도가 
기도자를 초라하게 만드는, 내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게 아니라
이 기도를 드리면 
'내 인생을 하나님 수준에 맞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내 수준에 맞는 인생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수준에 맞는 인생으로 바뀌게 돼요.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여러분 참 경제적으로 힘들 때도, 그냥 이 기도를 계속 한번 드려보시죠. 

그리고 가정에 관계가 어려울 때도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가 이 기도를 드리면, 항상 깨닫는게 뭐냐면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바로 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구나' 
여러분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과거에, 우리 청년들 
그때는 뭐 2년에 한 번씩 나와서 우리 청년들한테 이 설교를 제가 했던 적이 있거든요. 

수련회 인도하면서 제가 이 예수기도를 가르쳐줬어요. 
그러니까 우리 청년들이, 그때 후에 제가 돌아오고 나서도, 정말 메일을 많이 보내줬어요. 

 

"목사님, 제가 정말 이 청년 시절에, 
지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많고, 그리고 공부하면서 너무 힘이 드는데, 
목사님이 소개해 주신 이 예수 기도,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 주십시오. Have mercy on me!'

제가 공부할 때마다 이 기도를 자꾸 되새기게 되면, 
'야 내 혼자가 아니구나. 내 인생은 내 수준에 맞게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 수준에 맞게, 내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한번 해 보시죠. '주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 주십시오!' 
그때 우리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14

◑17:14절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셨습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들을, 예수님은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렇게 명령을 하셨고, 
그리고 그들은 그 말씀을 따라 가다가, 가는 길에서 깨끗함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실 때는, 질문을 가지고 보시는게 좋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나요?'  

눅5:12~14절 사건과 한번 비교해서 보시면,
거기는 예수님이 한 사람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누가복음이 하나 더 기록하고 있는 나병환자 치유의 사건이죠.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와서 예수께 엎드리고 구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간청했을 때, 5:13절을 보면, 그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행동입니다. 
이 나병환자는 접촉하면 부정해지는, 만지면 부정해지는 사람인데, 
그래서 그를 만지면 안 되는데, 

예수님이 그 사람을 만졌을 때, 예수님이 부정해진게 아니라, 
부정했던 그를 예수님이 깨끗하게 만드셨던 거죠. 손을 대셨습니다. 
그때 어떻게 됐습니까?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니까 나병이 즉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예수님이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고 
가서 제사장한테 너의 몸을 보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여러분 지금 눅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손을 대셨습니다. 사랑으로. 
그리고 그에게 말씀도 하셨어요. '깨끗함을 받으라' 
그가 깨끗해졌을 때 했던 말씀이 '제사장한테 몸을 보이라'

이거는 레위기 14장을 보면, 제사장은 나병이 치유가 되었는가, 되지 않았는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제사장을 찾아가느냐?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찾아가는 인물이 제사장인데, 

지금 본문의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여전히 몸에는 나병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이것은 무엇입니까? '나았으니까 가라'는게 아니라, 
'아직 낫지 않았지만, 너희는 곧 낫게 될 것이니까 가라'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죠. 
아직 치유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냥 '제사장에게 가라' 말씀을 하셨고, 
그리고 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바로 그의 나병이 깨끗해지는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들에게 도전을 했고, 
그들이 실행에 옮겼던 것이 무엇이냐?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아직 고침 받지 않았는데도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해서 갔을 때, 가다가 길에서 그들이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킬 때, 직접 말씀으로 하실 수도 있습니다. 
눅5장의 경우처럼 '내가 원하니까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가 고침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좀 더 일반적인 경우는 무엇이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우리 삶에 펼쳐지게 됩니다. 

▲요9:6~7절에 보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 맹인의 눈에 바릅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라고 말씀하시고, 
그때 맹인이 거기 가서 씻었을 때, 밝은 눈으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인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슨 이야기하더니만 
자기 눈에 뭐를 바르더라는 거죠. 근데 그게 진흙이었어요.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이야기 하셨느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그러면 지금 그 맹인 바로 곁에, 실로암 연못이 있는 게 아닙니다. 
또 걸어서 그 실로암 연못을 찾아가야 됩니다. 

여러분 눈에는 진흙 바른 채로, '여러분 실로암 연못이 어디입니까? 좀 가르쳐 주세요.' 
그래서 실로암 못 찾아 다니는 이 맹인을 한번 생각해 보시죠. 

그런데 이 맹인은 순종을 합니다. 그때 어떻게 됐습니까? 
밝은 눈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왕하5:10절을 보면, 아람(지금의 시리아) 군대장관 나아만,
그가 나병을 가졌어요. 그런데 자기 종이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를 찾아가서 만나시면,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지금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엄청난 선물 꾸러미까지 준비해서 찾아왔는데 
근데 엘리사가 나와 보지도 않고, 만나 주지도 않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러면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그러니까 지금 나아만이 열 받는 거죠.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이죠. 여차 여차 
그래서 나아만이 화가나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죠. 
그때 종이 권면을 하죠. '주인 어른, 어려운 것도 아닌데, 너무 열 받지 마시고 
그냥 한번 속는 셈 치고 강에 들어가 보시죠'

그래서 14절에 '나아만이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일곱 번 요단강에서 씻을 때, 
자기 몸을 잠궜을 때, 그가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났습니까? 
순종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얘기에... 
내 자존심을 짓밟는 것 같지만, 하나님 말씀에 나를 순종했을 때, 
그때 바로 그가 회복이 되고, 깨끗해졌습니다. 

여러분 이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 말씀에 아직 회복도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 말씀을 따라 제사장에게 몸을 보러 가던 도중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17:15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이렇게 10명이 모두 고침을 받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자기가 낳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여기에 주동사는 무엇이냐? 
'돌아와' 입니다. 

열 명이 고침을 받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돌아왔습니다. 

◑17:16절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직역하면 '예수의 발 아래 자기 자신을 던졌다'
예수님의 발 아래 자신을 던지면서 무엇을 했나? 감사를 했습니다. 

근데 그는 누구였느냐? 뜻밖에도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배교자 라고, 이방인과 피가 섞였다고 그렇게 조롱하고 
가까이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전혀 뜻밖의 인물이, 10명 중에 한 사람 뜻밖의 인물이 돌아왔고, 
예수의 발 아래에 자신을 던졌고, 그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17: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8절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이 이방인'
여기 사용된 헬라어는     *후토스 알로게네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아주 천히 여기면서, 
이방인들을 경멸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뭡니까? 유대인들이 그렇게 경멸하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이렇게 그들을 향해 말씀을 하셨죠. 

뜻밖의 인물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 감사할 거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9절에, 예수님께서 돌아온 한 사람,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나머지 9명에게는 '제사장에 가서 몸만 보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 한 사람에게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구원하였다'는 말의 뜻은, 
병만 고치는게 아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회복이 되니까, 
현세 뿐만 아니라, 영원히 고침을 받게 된 거죠.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한 사람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곧 '너의 감사가 너를 구원했다' 라고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감사는 믿음의 완성이다" 입니다. 
감사를 통해 그 믿음의 진정성이 표현된 거죠. 

그럼 나머지 9명은 뭐 했겠습니까? 
이들도 예수님께 간청을 했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가다가 
놀라운 고침을 받았는데, 고침 받고 나서 그들은 어떻게 했죠?
자기가 꿈꾸는 인생을 살아간 것이죠. 

자기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꿈꾸는 인생을 향해, 그들은 바로 나아갔습니다. 
근데 이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온 거죠. 
예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바로 영광을 돌리고, 
그리고 예수님께 바로 엎드리면서 감사를 드리게 될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를 통해 표현된, 그 진정성이 표현된 그 믿음이 바로 너를 구원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니까, 도전 받는게 무엇이죠? 
저 자신의 삶도 그렇고... 저는 오랫동안 어떻게 생각했느냐? 

저는, 감사는, '그냥 항상, 그래 내가 말로 감사하면 돼지'
여러분 지금 여기 보면, 인상적인 것은
이 사마리아인이 감사드리기 전에 뭐 했습니까? 돌아왔잖아요. 

요즘은 휴대폰이 있으니까, 부모님한테도 감사할 때 전화로 감사하면 돼죠. 
그렇지만 우리 과거에 휴대폰이 없었을 때는, 
감사하려면 먼저 선행돼야 되는게 무엇이죠? 돌아가야 돼죠. 부모님께 돌아가야죠. 
부모님께 돌아가야 감사를 드릴 수 있잖아요. 

그리고 또 우리가 존경하고 신세를 많이 진 분한테도 
그분한테 돌아가야 감사를 드릴 수 있죠. 

제가 참 오랫동안 착각을 한 것 같아요. 
'나의 몸은 돌아가지 않고, 그냥 마음으로써 감사하면 된다' 라고 
저는 오랫동안 생각을 한 겁니다. 

제가 왜 이런지 말씀을 드렸느냐? 
저도 요즘 노회장도 맡게 되었고, 여러 가지 밖에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청하는게 사실 많이 있어요. 
노회 일로 하나님께 간청을 하고, 그 외 일로 간청한 게 많습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께서 많이 이렇게 도와주셨어요.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어떻게 되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리는게 아니고 
'역시 내가 하니까 좀 다르구나' 하고 제 어깨에 힘이 좀 이렇게 들어가게 되죠.

어려울 때는 간청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의 응답하시고 나면, 아홉 명의 사람처럼, 
그냥 자기 인생을 향해 가는 거죠...
그냥 자기 인생을 찾아서 가버리기가 쉬운 거죠. 

저한테도 그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진짜 하나님의 큰 은혜는 언제 주어지나?' 

내 몸이 나병으로 죽게 되었다가 살아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완성은 언제냐?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 돌아와 감사를 드릴 때,
 
주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너의 믿음이 바로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내가 생명의 관계, 사랑의 관계, 
그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진정한 구원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여러분의 삶의 목적지가 어딘지 한번은 생각을 해보시면 좋겠어요. 
'내 인생의 목적지,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거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향해, 거시적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셨던 것처럼, 
우리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방향으로 거시적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우리 삶에 문제가 없는 순간이 없죠. 
그런데 여러분, 고난 당할 때도 위험하지만, 형통할 때가 훨씬 더 위험합니다. 

고난 당할 때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제가 거의 못 본 거 같아요. 
고난 당하면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합니다. 근데 언제가 위험하나요?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성공과 형통의 길을 주셨을 때, 정말 그때가 위험해집니다. 

성공하든 아니면 어렵든지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예수기도를 마음으로 속삭이면서, 여러분 하루하루 한번 살아 보시죠. 
그러면 정말 우리가 재밌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말씀을 통해 주어지기도 하지만, 
내가 말씀에 순종할 때, 놀라운 치유와 회복이 우리들의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서, 순종의 길을 가다가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맛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셨죠. '아홉은 어디 있느냐' 
과거에 수능 시험을 치기 전에, 부모도 학생도 기도를 간절히 드리기도 하고,
또 목회자에게 기도를 받으러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수능 치고 나면, 9명의 사람들처럼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수능 치고 나서도, 주님께 돌아오는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소위 예배 지상주의에 빠져 있던 사람이었어요. 
저는 모든 공예배에 빠진 적이 별로 없었고, 
어릴 때도 새벽기도도 정말 열심히 갔던 적도 있었고 

그런데 제가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은 교회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내 자취방에서도 만날 수 있고, 학교 캠퍼스에서도, 내 직장에서도 
우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게 제 삶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적인 예배도 참 귀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내 삶의 현장에서 주님께 예배드리는 거... 참 중요합니다.
그게 제 삶을 정말 바꿔 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가 된 후에도 우리 성도들에게 
'모든 공예배 참석해라' 이런 예배 지상주의로 그들을 묶어두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소망했던 것은, 우리 성도님들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예배도 참석하고 
자기 가정과 일터에서도 예배드리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근데 이게 보니까 제가 요즘은 약간 헷갈리는게 
'내가 너무 많은 자유를 드렸나?' 라는 생각들을 조금씩 합니다. 

제가 부끄러운 말씀인데 제가 담임목사지만, 새벽부터 좀 많이 빼먹었어요. 
그래서 요즘에  좀 돌아오려고 노력을 합니다. 

목사인 저도, 공적인 예배자리가 아니면, 
돌아와서 엎드려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잘 못 만들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목사인 저도 억지로라도, 공적인 예배 시간에 맞추어서 거기 참여하는게 무엇이냐? 
이건 형식적인게 아니고, 주님께 돌아와서 그분 발아래 나 자신을 던지고 
그리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시간이죠.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지만 
공적인 예배 여러분들이 마음을 좀 기울이셔야 돼요. 

우리 교회의 특징이 뭐겠습니까? 
'빼먹어도 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시고 
너무나도 자유롭게 빼먹으시는 분들을 볼 때 
제가 참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좀 힘들 때도 있습니다. 

금요일도. 주일 오후 예배도 
제가 특별하게 외부에 안 나가면, 
제가 주일 오후도 제가 그냥 인도하려고 해요. 

제 스스로가 말씀 간단하게 나누고, 20분은 내가 기도하면서 
한 주간을 마무리를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노느니 뭐합니까? 와서 같이 예배드리고 주님께 돌아와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께서 이 사마리아인에게 주셨던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즉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가장 복되고 아름답게 의미 있고 참되게 살아가는 우리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