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요10:11~14
◑1. 예수님은 '그 선한 목자'
요10: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1절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이렇게 번역을 해야 돼요.
'나는 그 선한 목자라' 또는 '나는 선한 그 목자라'
그렇게 번역을 하는 것이 정확한 번역이에요.
'나는 그 선한 목자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은,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었어요.
구약성경에 '목자'가 나오거든요.
예수님은 '내가 (구약성경의) 바로 그 목자다. 그 선한 목자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면 구약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그 목자가 누구신가? 그것을 우리가 확인해야 되잖아요.
구약성경 여러 군데에서 목자에 대한 정체를 밝혀주셨는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설명하는
그런 표현들도 다양하게 발견됩니다.
우리가 한 곳을 살펴보겠는데, 겔34장이에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밝혀주신 거예요.
겔34: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15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위 구절에서, 주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어요.
양을 찾아 나서고, 또 찾아올 그 사명.. 그 사역, 그 역할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선한 목자다. 내가 바로 선한 그 목자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그 얘기는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여호와다'
'내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유일한 신이다!' 드디어 그 정체를 공개하신 거예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요?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신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선한 목자이세요.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목자 되신 분이 누구신지를 알고,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셔야 마땅합니다. 그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우리의 목자는 예수님이시고, 그분은 다름 아닌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분이 나의 목자이시다... (하는 자부심으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통의 목자를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부심과 그런 자랑을 우리 가슴에 가득 담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글쎄 할리우드의 애니메이션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양들이 서로 '니네 목자가 좋으냐, 우리 목자가 좋으냐?'
서로 이렇게 목자를 비교한다 그러면,
우리의 목자 되시는 분은 비교 불가하신 분이시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만유를 창조하신 창조주 여호와께서
'그분이 우리 목자가 되신다!'
이거는 우리에게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특권이자 영광이 아닐 수가 없어요.
우리 성도님들의 의식 속에 '우리가 그런 존재이구나..
우리가 그런 분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우리는 그런 대단한 존재이구나' 하는
그런 자부심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양과 사슴 .. 물 먹는 모습이 다릅니다.
옛날에 동물의 왕국에서 보니까, 연못 같은데서 물을 먹는 모습들이 나왔는데..
거기 보니까 사슴이 물을 먹는 모습과, 양이 물을 먹는 모습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슴은 그 특유의 불안한 눈동자.. 그 긴장한 모습...
그래서 아주 작은 소리 하나만 나도 그냥 놀라서 도망치는 모습으로
잠시 잠시 와서 물을 마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반면에 양들은 천하태평으로, 편하게 물을 마셨습니다.
지키는 목자가 있으니까,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뭐 무슨 소리가 나던, 다른 소란이 일어나던, 아무 관계없이 물을 먹는 걸 봤는데...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들은 불안과 근심과 스트레스, 의욕상실로 말미암아
참된 평안이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슴’처럼,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도 놀라서 펄쩍 달아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양’이기에,
편안하게 물을 마시고, 편안하게 누워서 잠을 청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쥐 않습니다...
◑2.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특징은 이거다" 라고 정확하게 설명을 주셨어요.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목숨을 실제로 버리셨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이 말씀은, 선한 목자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걸 정도는 돼야 된다...
그런 말씀이에요.
그런 아주 두드러진 예가 있죠? 다윗의 경우에서 그 예를 우리가 봅니다.
다윗이 청소년이었을 때, 이스라엘이 골리앗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에 떨던 그 시점에,
형들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기 위해서 전쟁터로 나갔어요.
그러다가 다윗이 사울왕을 대면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 장면에서 다윗이 '제가 나가서 골리앗을 무찌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형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집안 망신시키려고, 이런 망발을 하느냐?'고 다윗을 야단친 거예요.
그때 다윗이 사울에게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어요.
삼상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아마 우리는 그냥 평범한 마음으로 아무 느낌 없이 이 장면을 읽고 있지만.
만약에 이 얘기를,
형들이 또는 아버지 이새가 이 얘기를 들었다면, 아마 기절초풍을 했을 거예요.
'아니 그런 일이 있으면 도망쳐야지... 사자를 쫓아가다니,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곰을 쫓아가다니, 너 죽으려고 작정했냐?'
아주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거예요. 야단 맞았을 거예요. 그런 장면이란 말이에요.
다윗이 여러분의 자녀가 아니니까, 이렇게 평안하게 듣고 계시죠.
이게 보통 장면이 아니란 말이에요.
다윗도 사자가 곰을 쫓아가면서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그런 각오로 쫓아가지 않겠어요?
아무리 새끼양을 물고 가서 속상하다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쫓아갑니까?
그런데 목자 다윗은 쫓아갔다는 거예요. 그건 목숨을 건 거예요.
목숨을 걸 정도로 이 정도는 돼야 '선한 목자'이죠.
그런데 다윗은 물멧돌 실력이 탁월해서, 사자를 무찌르고 곰을 무찌르고 양을 찾아왔지만
목숨까지는 아버지의 은혜로 여호와의 은혜로, 목숨은 버리지 않아도 됐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본문에서 말씀하세요.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1
그리고 실제로 십자가상에서 목숨을 버리셨어요.
선한 목자가 목숨을 무릅쓰고, 다윗처럼 양들을 구하기 위해서 쫓아간다...
그거는 그 양들과, 특별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삯꾼이 나오지만, 자기 소유가 아닌 양들은, 그렇게 목숨 걸고 쫓아가지 않는다고요.
남의 집 목자들은, 이 집 양이 물려가는데
남의 집 양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목숨 걸고 쫓아가나요? 안 가죠.
특별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목자가 목숨을 걸고 쫓아가죠.
▲이 특별한 관계가 무엇인가요?
1) 그거는 첫째로 소유관계예요.
'내 양이다!'
그럴 경우는 사자가 오든, 곰이 오든, 이리가 오든 못 견디죠. 내양이기 때문에!
2) 예수님과 예수님의 양들,
하늘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는, 더 깊은 관계가 있어요. 혈연관계 예요.
아버지가 자녀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자녀가 지금 위험에 처했는데,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녀의 목숨을 살려내는...
아버지니까 그런 액션이 나오는 거죠.
그거는 혈연관계일 때에만 가능한 그런 이야기예요.
3) 더 나아가서 이것은 사랑의 관계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랑하는 자녀가 어려움에 빠져서, 정말 힘든 상황이 있을 때
부모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해내는 것은,
사랑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목숨을 거는 일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이런 소유관계요, 혈연관계요, 이런 사랑의 관계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구해내야 목숨을 버리는 일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주셨다는 거예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위 세 가지 관계로 특징이 지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는데
우리에게도 그런 세가지 관계적의식이 있는가요?
'내 삶의 전부는 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 의식이 우리에게 들어와 있어야 되고요.
'나는 하늘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이 자녀라는 의식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어야 되고요.
'나는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여호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런 존재다' 라는
그런 실감나는 의식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이 목숨을 내려놓으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의미가
우리 가슴 속에서 살아나는 거예요.
근데 아무리 '너희는 내 것이다. 너희는 내 자녀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하시는 데도,
어항속에 있는 붕어마냥 눈만 꿈뻑꿈뻑하고,
뭔 말인지 그 중대성을 못 알아들으면... 얼마나 하늘 아버지께서 답답하시겠어요?
우리 교회에는 그런 답답한 분들이 안 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진심으로 '네, 맞습니다. 제 생명, 제 인생 전체는 아버지의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아가는 양이 맞습니다.'
그런 자부심, 그런 자긍심, 그런 영광스러운 마음이 제 속에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어요.
그 예수님의 희생에 담겨있는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살아가시는, 실감하고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선한 목자는 양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세요.
▲구역장의 중보기도가, 이혼의 위기에 처한 구역식구를 살리다 (펀 글)
한 여 성도가 이혼을 결심하고 도장 찍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허탈한 심정이 되어 새벽예배에 나갔다.
다른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 부담되어
새벽예배가 끝나는 시각을 선택하여 조금 늦게 가서 기도만 하고 나오려 했는데,
한 분이 예배실 앞좌석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를 위한 기도였다고 한다.
같은 목장에 속한 목자가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였다.
“하나님, 제가 벌써 여러 날 금식하고 이 부부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이 부부를 이혼하도록 버려두시겠습니까?”
그 순간 이 분의 가슴을 때린 생각이 이랬다고 한다.
‘아니, 내가 누구이기에 이 분이 우리 부부를 위해 금식하면서까지 기도한단 말인가?
그런데 나는 이렇게 쉽게 이혼을 결심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너무나 쉽게 이혼을 결심한 자신이 뉘우쳐지면서
그분은 통곡의 기도 끝에 결심하고 남편과 화해했고,
지금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이요, 목장교회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3. 예수님은 양들을 아신다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내 양들을 안다, 예수님은 양들을 안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는 것과 같이 그런 수준으로 나는 내 양들을 안다' 하신 거예요.
참 기가 막힌 말씀이 아닐 수 없어요.
예수님은 저에 대해서도 속속히 아시고,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을
'하늘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아시는 것처럼' 다 알고 계십니다. :15
이렇게 아시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 이론으로 아는 것, 객관적으로 아는 것과는
이건 하늘과 땅 차이에요.
우리가 최근에 뉴스를 보면서,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예요.
거기에 많은 분들이.. 러시아 쪽도 그렇고, 우크라이나 쪽도 그렇고,
사람들이 전쟁으로 많이 죽는다고요.
그 전쟁으로 죽은 가족들의 아픔과 슬픔을, 뉴스를 보면서 우리가 안다고요.
그러나 이것은 화면을 통해서 아는 것이고, 뉴스를 들어서 아는 것이지,
그렇게 아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안다'는 게 아니에요.
그 이후에 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계속되고 있죠.
풀려난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도 수십 명이 인질로 잡혀 있어요.
또 폭격으로 생명을 잃는 민간인들도 있어요.
우리가 그 소식을 뉴스로 들어서 알아요.
그런데 그 뉴스를 들으면서, 가슴이 찢어지거나 발을 동동 구르시는 분 계십니까?
처음에 그런 뉴스를 들었을 때는 '어이쿠! 어이구! 또 큰일이 났네' 하고
우리가 마음으로 조금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똑같은 뉴스를 여러 번 반복해 듣다 보면
또 '그렇구나...' 알긴 알되 우리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고요. 왜요?
우리 가족이 아니니까, 우리 아들이 아니니까, 우리 남편이 아니니까,
우리 부모가 아니니까... 느낌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아는 것은 '아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나는 내 양을 안다' 이것은 그런 말씀하는 게 아니에요.
마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어요.
막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여기에 '불쌍히 여기다'라는 것은
부모가 자녀를 향해서, '내 자녀가 팔레스틴 군대에 의해서 인질로 잡혀갔다'
그때 그 심정은 오죽하겠어요? 그건 어떻게 이루 말을 할 수 없어요.
'이건 생지옥이다' 살아서 돌아오기 전까지 하루하루를 그 고통 속에 사는 것 아니겠어요?
예수님께서 지금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슴 속에 그 통증이 있다는 거예요.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심정을 주님께서 가지셨습니다. 이렇게 '아시는' 거예요. :14
우리 성도님들께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경험하실 때
주님께서도 똑같이 느끼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아셔야 된다는 거예요.
사도바울, 예수님의 제자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그 마음, 그 심정, 그것을 알았어요.
그 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체휼'은.. 온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느끼는 거예요. 피로 느끼는 거예요.
'체휼 體恤'의 한자를 파자해 보면
체는.. 몸이죠
휼은.. '마음 심' 과 '피 혈'이죠. *불쌍할 휼
그래서 체휼은, 온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느끼는 거예요. 피로 느끼는 거예요.
아니, 어느 정도까지의 심정이면, 피로까지 똑같이 느끼나요?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느끼고, 혈관까지도 그 고통을 같이 느낀다...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와 그렇게까지 같은 심정으로 느끼신다는 거죠.
예수님은 그런 차원에서 '내가 내 양들을 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에 신음소리까지 다 듣고 계시고,
또 남의 집 양들 쳐다보는 것처럼 '내 양이 아닌데...' 이렇게 냉랭하게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기쁨과, 우리의 살면서 경험하는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근심과 걱정과 염려까지도 다 아시고,
그것을 다 체율하는 이분이 우리의 목자이시다...
그리고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어서 빨리 하루속히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런 분이 예수님이시다..라는 것을 우리가 아시고,
그 부분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우리가 꼭 붙들고 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한 말씀 더 던지세요.
'양들도 나를 안다' 이렇게 말씀하세요.
:14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예수님께서 양들에 대해서, 이건 예수님이 자랑스러워 하시는 거예요.
'내 양들은 내 마음을 알아! 내 양들은 내 뜻을 알아!
그리고 내 음성을 듣고 나에게 순종해!'
이런 양들과의 관계에서 '내 양들은 내가 다 알지!'
왜요? '내 음성을 듣고 따라오니까!'
그런 자부심이 예수님에게도 있는 거예요. 그런 자랑을,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우리들을 바라보실 때, 예수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그런 양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 그것을 의미해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뜻을 알아드리는 거예요.
자녀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드리면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만약에 부모님들 가운데
'우리 자녀는 내 마음을 다 알고, 내 뜻을 다 알고,
내가 하는 그 말에 항상 순종하려고 한다.'
이거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식 자랑 아니겠어요?
또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 라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어요. 그 안에 담겨있는 그 능력,
'그게 어떤 건지를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체험했다. 그 능력을 우리가 맛봤다.
그 능력을 우리가 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된 거예요.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깊은 사랑인지... 그것을 제가 경험했습니다.'
살면서 그 사랑의 깊이를 제가 체험했습니다.
그런 고백을 하는, 그런 수준으로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돈독하고 친밀하고 긴밀한... 그런 사이인 거예요.
'그것이 어떤 능력인지, 그것이 어떤 사랑인지... 제가 알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제게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우리 아버지한테 제가 부탁하면... 그러면 됩니다.
제 마음이 편안합니다.
왜요? 우리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나는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아는' 관계로 쑥 들어가서,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게 될 때
주님도 우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앎이 있어요. 그건 뭐냐?
'예수님께서 나를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계시고,
또 내 아픔과 슬픔, 연약함을, 몸과 마음과 혈관으로 체육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라는 것을 제가 압니다. 우리 하늘아버지는 그런 분이라는 것을 제가 압니다. 제가 믿습니다!'
이 믿음을,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놓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안다'라고 얘기 하는 거예요.
그 모든 것의 결론은 '저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 속에서 마구 솟아나는 거예요. 생겨나는 거예요. 회복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3년 동안 제자들을 훈련하시고요.
이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부활하셨어요.
승천하시기 직전에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에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향한 그 사랑하는 마음이 회복되면
3년 동안에 받았던 모든 제자 훈련이, 그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사랑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말로만 아니라, 머리로만 아니라, 우리 가슴 속에 살아날 수 있으려면
예수님이 그야말로 '그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리고 예수님이 정말 나에 대해서 다 아실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으로 목숨을 버려주신 그런 분을 내가 목자로 섬기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 대해서, 지금 이 순간에 내 삶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알기 때문에 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너무 격려가 되고...
이 믿음으로, 나는 이 세상에 어떤 상황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아무 염려 없이, 아무 근심 없이, 아무 걱정 없이 나는 삽니다.
왜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의 목자이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제가 알기 때문에
또 그분과 특별한 관계에 제가 살고있기 때문에... 저는 살아갈 적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염려를 잠재우는, 그 생명의 근원이
내 속의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싹트게 되면,
내가 살아나고, 내 가정이 살아나고, 이 세상이 살아나는
그런 놀라운 기적들이 이제 시작되는 역사를 우리가 보게 될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희가 5월 한 달, 2024년 가정의 달 주제를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로 정했습니다.
이 사랑은 가장 먼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죠.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게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정말 그 사랑을 우리가 느끼면서, 그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 성도님들 살아나시고요. 우리 가정이 살아나고, 우리 교회가 살아나고,
이 세상이 살아나는... 그런 놀라운 기적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오늘부터는 자부심을 가지셔야 돼요.
그분과 함께 우리가 걸음을 걸어갈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이고요.
우리 스스로 자긍심과 자부심과 영광스러운 마음을 우리가 가득 품고
이 세상을 당당하게 승리하는 모습으로 힘차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자가 홍정길 목사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간사를 포함해 46년간 사역했습니다.
가장 의미 있었던 순간은?”
“평생 목회했지만 진짜 목사로 지낼 때는
1975년부터 78년까지 3년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남서울교회를 개척한 이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모든 성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기도했습니다.
새벽기도 마치고 6시부터 시작한 기도는 늘 9시가 넘어서 끝났습니다.
그러나 교인수가 2천 명이 넘어서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진짜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가 아니라 교회 경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