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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위엄을 갖추고

LNCK 2024. 5. 6. 11:4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2023 11 05 / 사도행전 강해 (87) / 크게 위엄을 갖추고 - YouTube

크게 위엄을 갖추고         행25:13~27

 

중반부 "◑그 중에서 25:23절이 오늘 주목할 부분입니다" 단락이 하이라이트 입니다!

 

......................................................

 

앞서 우리는 바울의 4차 변호를 살펴봤습니다.                      
4차 변호는 베스도 앞에서 진행되었습니다. 
4차 변호는 바울의 재판의 방향을 바꿔 놓았습니다.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자 이었기 때문에, 베스도는 바울의 청원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25: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본문은 '수일 후에'로 시작됩니다. 
수일 후에 가이사랴로 신임 총독 베스도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입니다. 
두 사람은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를, 인사차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총독이 나오고, 이 나옵니다. 
왕은 무엇이고, 총독은 무엇인가요? 왜 갑자기 왕이 등장하나요? 
유대 땅의 최고 통치자는 왕인가요, 총독 인가요? 헷갈릴 수 있습니다. 

원래 로마 제국은 속국에 총독을 파견해서, 총독 정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민족 의식이나 종교 의식이 굉장히 강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로마가 총독을 파견해도, 유대인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이 어떻게 했느냐? 유대인들 가운데 왕을 세워서 
유대 지방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세계 제국의 역사를 보면 종종 그렇게들 했죠.

유대 귀족들 중에서 로마 제국에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그 사람을 선택해서 유대 지방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 왕이 바로 헤롯 대왕입니다. 

헤롯 대왕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던 왕입니다. 
헤롯 대왕은 정통 유대인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Herod the great
주석에 보니까 유대인의 혼혈이었다고 말합니다. 
다른 주석에 보니까, 야곱의 자손이 아니라, 에서의 자손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에돔 사람인 거죠. 쉽게 말하면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아랍계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헤롯대왕은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사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은 게 바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래서 헤롯 대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해 주었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성전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어마어마한 성전을 누가 지었느냐? 헤롯이 지시해서 지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을 재개축, 증축한 사람이 헤롯대왕입니다.

    근데 성전을 거대하게 짓고 싶어도, 구약에 보면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

    더 이상 키우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꾀를 낸게 뭔가 하면, 위의 성전은 그대로 두고,

     그 성전 아래를 엄청난 기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성전이 엄청나게 큰 건물처럼 보이는 거예요.

 

    지금 예루살렘에 가 보시면 서쪽 벽, 통곡의 벽이라는 높은 벽이 있잖아요. Western Wall, Wailing Wall

    그게 헤롯이 쌓은 성전 지대, 기반입니다. (진짜 성전 벽은 아니죠)

    그래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구경오고, 성전을 보고 뭐 깜짝 놀랄 정도로 '와~' 그랬습니다.

 

그 외에도 유대 땅에서 굵직한 건축물을 많이 지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대왕의 별명이 '건축 왕'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헤롯 대왕이 죽게 됩니다. 

그는 영아살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죽었습니다.

 

헤롯 대왕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 세 명이 유대 땅을 3등분 해서 나누어 다스리게 됩니다.  *유대, 갈릴리, 이두매와 드라고닛

북쪽(헤롯 안디바), 남쪽(헤롯 아켈라오), 동쪽(헤롯 빌립)을 나누어 통치했는데, 
남쪽을 통치했던 분봉 왕이 헤롯 아켈라오 라는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 아켈라오가 정치를 너무 못했습니다. 못해도 너무 못했습니다. 
야만적인 독재 정치를 했습니다. 
유대인 수천 명을 살해하고,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쪽에 있던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로마당국에 탄원서를 냈습니다. 
'도저히 우리는 헤롯 가문의 통치를 받지 못하겠습니다' 편지를 써서 탄원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당국은, 유대(남쪽) 지역에는 총독을 파견합니다. 
이후부터 유대 땅은, 왕과 총독이 나누어서 통치를 하게 됩니다. 

북쪽 갈릴리 지방은 유대 왕이 통치를 했습니다. *헤롯 안디바, 나중에 본문의 아그립바가 통치 
남쪽 예루살렘과 가이사랴 지방은 로마에서 직접  파견한 총독이 통치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5대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했습니다. 
그 후임이 바로 벨릭스 총독 입니다. 
본문의 베스도는, 벨릭스의 후임 총독이죠.

▲본문은 유대 남쪽을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 베스도가 새로 부임한 시점입니다. 
새로 부임을 했으니까, 함께 유대 북쪽 땅을 통치 하던 왕이 문안 인사차 온겁니다. 

그 왕이 누구냐? 바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입니다.    *헤롯 아그립바2세 

먼저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갈릴리 분봉왕이었죠. 
그는 세례요한을 참수해서 죽였던 왕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심문했던 왕입니다. 

헤롯 안디바의 아들이,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행11장에서 야고보 사도를 죽였던 왕입니다. 
베드로도 죽이려고 감옥에 넣었던 왕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진이 나면서 기적적으로 구출을 받았었죠. 

그러니까 헤롯 가문은 예수님과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예수님과 교회를 핍박 했던 가문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자녀들이 3명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2세 (아그립바 왕), 버니게, 드루실라 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 세 사람이 몽땅 등장하죠.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3

드루실라는 전임 벨릭스의 아내인데, 24:24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 합석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3형제가 다 모이는 자리이니까요.

아그립바의 여동생이 버니게, 드루실라 입니다.  

그런데 아그립바와 버니게, 이 둘이 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뭐 남매가 같이 왔나 보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둘은 부부관계였습니다.   주1)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이 두 사람이, 신임총독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왔습니다. 
그때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의 얘기를 꺼냅니다. 

베스도는 왜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의 얘기를 꺼냈을까요?
베스도는 이제 바울을 로마 황제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보내려면 기소장을 작성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뭘 잘못했길래, 로마 황제에게 항소를 하는지.. 기소장을 적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작성할 내용이 마땅치 않은 겁니다. 바울이 죄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작성할 내용이 없는 겁니다. 

그때 인사차 가이사랴로 내려온 사람이, 아그립바 왕이었습니다. 
아그립바는 아무래도 유대계라서, 유대인들의 법과 풍습과 문화와 역사를 잘 알았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의 종교 문제에 대한 전문가라는 평판이 있었습니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26:3
 
그러니까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이라면 바울의 죄목을 알아내 줄 수 있겠구나, 
기소장을 쓰는데 한 줄이라도 도움이 되겠구나' 그런 기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에 대해 자신이 정리해서 설명한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본문 25:14~21절에 그 내용이 이렇게 나와 있죠.

「첫째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둘째 바울을 심문해 본 결과, 바울은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로마법상 잘못한 게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에게 반역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무죄 입니다. 
다만 바울은 유대교와 이견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이견이란, 바울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믿습니다. 
그게 유대인들의 분노를 낳았습니다. 

셋째 그래서 내가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재판을 받겠느냐?' 
그러자 바울이 놀랍게도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로마 황제에게 보내려고 지금 바울을 구금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대화는, 지금 바울이 배석하지 않은 자리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베스도를 찾아온 아그립바 왕, 두 사람 사이에서만 오고 간 대화 였습니다.

그런데 베스도의 설명을 들은 아그립바 왕은
내가 바울의 말을 직접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가 다음 날 바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2

▲그 청문회 장면이 본문 23절 이하에 나오는데요.

24~27절은, 베스도가 청문회에서 기조 연설을 하는 장면입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에 대한 청문회>를, 왜 열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을 로마 황제에게 보내야 하는데, 보고할 자료가 없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 바울을 심문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청문회를 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게 행25장의 나머지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 25:23절이 오늘 주목할 부분입니다.

25: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여러분이 머릿속으로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가면서 설교를 들으시면 좋습니다. 
청문회 장에 문이 열렸습니다. 

청문회장 상석에는 벨릭스 총독이 앉아있었겠죠.

 

자 그때 청문회 장에 문이 활짝 열리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들어옵니다. *23절을 보세요.
'크게 위험을 갖추고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주 화려하게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양 옆으로 서서 도열했던 것 같습니다. 
그 사이로 왕이 입장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왕의 머리에는 금으로 된 왕관을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예복인 자주색 왕복을 입고서, 굉장히 화려한 모습으로 입장하고 있습니다. 
그게 '크게 위엄을 갖추고'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가 들어옵니까? 아그립바를 뒤따라 천부장들이 들어옵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죠. '천부장들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는 항구도시죠. 그러다 보니까 이동이 수월하지 않습니까. 
배를 타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가이사랴가, 자연히 이스라엘의 로마군대 본부가 된 셈입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가이사랴에는 5개의 로마 군단이 있었습니다. 
한 군단은 천부장 한 사람이 이끌었습니다. 
5개의 군단이니까, 가이사랴에는 5명의 천부장들이 있었겠죠. 
그 천부장들도 다 들어왔습니다. 

이어서 '시중의 높은 사람들'도 뒤따라 들어옵니다.  :23 
'시중의 높은 사람들'은 로마의 고위 관료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림이 그려지시나요? 
지금 이 청문회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체 유대 땅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쪽(예루살렘, 가이사랴)에 가장 높은 사람들, 
또 북쪽(갈릴리)에 가장 높은 사람이 다 모인 겁니다. 

총독과, 분봉왕과, 군대 지휘관들과, 로마 고위관료들이 다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위험있고, 높은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누가 들어옵니까? 마지막으로 바울이 들어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바울 앞에 사람들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있습니다. :23
화려한 의복과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온갖 폐물로 자기들을 치장하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세상의 부위와 영화와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자 그에 반해 지금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끌려 나오는 죄수에 불과합니다. 

자 이때 바울의 나이는, 학자들에 따르면, 60세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60세는 지금의 60세가 아닙니다. 
이때 60세는 죽음을 바라보는 늙은 나이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노년의 사도 였던 거죠.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키가 아주 작았다고 합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말

그의 허리는 구부정 했으며, 어깨는 좁았고 또 굽어 있었습니다. 
그의 외모는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는 대머리 였으며, 눈썹은 짙은 일자 눈썹에, 
메모리 코에, 다리는 휘어져 있었습니다. 안짱다리 였던 거죠. 

저는 가끔 궁금합니다. '바울은 결혼을 정말 안 한 것일까, 아니면 못 한 것일까?' 
그 정도로 바울의 외모는,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손과 발은 차꼬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아니면 포승줄에 묶여져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화려한 의상이 아니라, 죄수들이 입는 아주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2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기 때문에 
머리카락 상태도 엉망이었고, 몰골도 아주 엉망이었을 겁니다. 

자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바울은 청문회장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노년의 초라한 사도 바울 앞에는, 권력자들이 총 출동해서 앉아 있습니다. 
크게 위험을 뽐내며, 바울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 홀로 서 있는 초라한 바울의 모습... 
여러분 너무나도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완벽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살면서 이런 느낌 받은 적 있으십니까? 
저는 조금 있습니다. 저는 믿는 친구보다, 믿지 않는 친구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제가 기독교 과정에서 자라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예수 믿지 않았다 보니까, 저는 지금도 불신자 친구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모임에 나가면, 믿는 친구들은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던 동네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 친구들은 다 교회를 나가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8년 만에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났는데요. 

신앙을 떠나서도 참 나와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목사이다 보니까요. 

생활 수준이나 뭐 취미나 자녀를 교육하는 부분에서 
그 가치나 자세가 많이 달랐습니다. 

대화 중간 중간에 이런 저런 얘기들이 나왔는데요. 
나누면서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대조를 보여줍니다. 그것도 완벽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보면 누가의 의도적인 묘사인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 보면, 극과 극의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크게 위엄을 갖춘' 부류 들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권력에 오른 사람들... 

반면에 그저 죄수인 바울, 
두 부류의 사람이 대조 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자기의 위엄을 과시하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온갖 패물과 명품과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너무나도 남루한 복장에, 홈모할 모습이라고 하나도 없는 
초라한 노년의 사도바울! 

여러분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누가 더 성공한 인생 입니까? 
누가 더 부러운 인생입니까?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적어도 바울은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느 편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느 편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적어도 세상의 관점에서는, 왕이나 총독이나 로마의 고위 관료들이 위엄 있는 인생입니다. 
빛나는 인생이고, 화려한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인생이고, 성공한 인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할 만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그 하나님의 관점이 본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크게 위험을 갖추고'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23
이 말이 헬라어로는 '판타시아'라는 단어입니다. 
'굉장하고 볼만한 장관' 이라는 뜻입니다. show, showy appearance, display, pomp
그만큼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서 파생한 영어단어가 바로 환타지 fantasy 죠. 환상, 꿈, 공상 이라는 뜻입니다. 

바울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세상이 보기에는 화려해 보였습니다. 판타스틱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말 그대로 그저 '환상 꿈 공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위엄, 그들의 과시, 그들의 치장, 그들의 권력,
그들의 부귀 영화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환상, 꿈, 공상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 fantasy 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없어질 것들입니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말 그대로 판타시아, 환타지, 환상일 뿐입니다. 눈 뜨면 없어질 것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그들이 뽐내는 위엄과 화려함은, 단지 환상이나 공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종교를 개종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나는 주일에는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은 그대로 있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 추가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여러분이 지금까지 가지고 살아왔던 삶에 대한 관점과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진짜 성경이 말하는 '예수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립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진짜 믿어 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날마다 눈을 뜨면, 믿음으로 보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믿어 집니다.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게 진짜로 믿어 집니다. 

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진짜로 생생하게 믿어 집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 나라가, 이 땅에 와 있음이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참 되고 영원하다고 믿어 집니다. 

이제껏 우리가 가지고 살았던 삶에 대한 관점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기에 바르게 세상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다르게 세상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것들을 동경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이제는 바르게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들은 그저 눈 뜨고 일어나면 사라져 버릴 
판타지, 환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영원에 대한 눈이 뜨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것들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장관처럼 보이지만, 화려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눈으로는, 판타지, 그저 환상일 뿐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외적인 가치와 자랑이 아무리 화려해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그저 덧 없는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이 땅의 삶이 무의미하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땅의 삶은, 그때부터 진짜 가치 있게, 진짜 의미 있게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리고 그 분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게 진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진짜니까요. 
그건 허상이 아니라, 판타지가 아니라, 그게 실상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바울은, 그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예술을 믿게 되어, 왜 이렇게 내 인생이 초라하게 되었을까?' 
하는 그런 자조 섞인 후회나 자기 연민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뒤에 26:9절에서 그들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결박된 것 외에는,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되기를'이 무엇입니까? 
'나처럼 예수님을 믿기 원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위엄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 앞에서, 전혀 굴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주눅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도 나와 같이 예수를 믿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생명을 확신하고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의 것들을 부러워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의 것들을 '크고 위엄있다'하며 
자랑하고 과시하고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 '부러워하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게 아니라, '부러워하면 잘못 믿고 있는' 겁니다. 
부러우면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오죽했으면 장기하 씨가 '나는 부럽지 않아' 라는 제목의 노래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게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맞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부러워합니까?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맞는 거죠. 
우리는 예수를 가진 자들 인데요. 
우리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인데요. 

우리는 무엇보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자들 인데요.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방황하고 
이 땅을 살아갈 때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 인생의 답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더 이상 사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오늘 진짜 왕족은, 
아그립바 왕이나 총독이 아니라, 죄수 바울 입니다. 

죄수 바울 만이, 오늘 본문에서 진짜 왕족 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 왕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 중에, 진짜 왕족은 죄수 바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나 세상의 권력은 말 그대로 판타시아, 환상에 불과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눈 뜨고 일어나면 사라져 버릴 일시적인 권력에 불과합니다. 

최고위직이라고 해도, 고작 몇년 지나면 끝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는 왕의 권세는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왕이 신 하나님은 영원하지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지금도, 왕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을 다스리고, 죄를 다스리고, 예수의 권세를 가지고 
우리는 사탄도 다스리고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권력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짜 왕의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천국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천국 가는 그날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도 여러분, 뭐가 부럽겠습니까.

본문의 아그립바와 버니게를 보십시요.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화려함 이면에는, 수치스러운 추악한 스캔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고발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외모로 보이는 것과 
뒤에서의 삶의 비참함을 고발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TV 에서 보는 화려함 들이 있습니다. 
또 SNS 같은 거 보면 화려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보이는 것, 그 뒷면에는 삶의 비참함 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게 인생입니다. 그걸 우리가 뉴스로 확인하지 않습니까. 
연예인의 마약 이야기라든지요... 

그런데도 여러분 이 땅에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뭐를 그렇게 부러워 하십니까? 
뭐가 두렵고, 뭐가 주눅이 드십니까? 

그래서 누가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크다고 말하는 위엄들이 사실은 환타시아, fantasy 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의 고백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고백이 나의 믿음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이 명예와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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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런데 아그립바와 버니게, 이 두 사람도 관계가 복잡합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헤롯 가문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저분한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입에 담기에 민망한 얘기인데요. 
버니게도 엄청 예쁜 걸로 유명했습니다. 
막내 드루실라도 굉장히 미인이었죠. 자매들이 다 예뻤던 것 같습니다. 

아그립바 와 버니게 사이에 스캔들이 났습니다. 오빠하고 동생사이이죠.
둘이 같이 살면서 성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부부처럼 산 거죠. 근친상간 관계였죠. 

버니게는 오빠하고만 같이 산 게 아닙니다. 
그 전에는 자기 외삼촌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외삼촌하고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별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나서 오빠한테 돌아와서, 오빠랑 같이 사는 겁니다. 
그게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사이였습니다. 
 

♣「꽃들의 희망」에 나오는 우화 (펀 글)

 

땅에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늘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나는 이 먼지 속에 늘 코를 쳐 박고, 모든 더러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평생 살아야 하다니...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가?

 

걸어 다니는 짐승들을 보니 부러웠고,

뛰어다니는 짐승을 보면 흠모의 대상이었고,

더욱이 하늘을 훨훨 나는 짐승들을 보면.. 몹시 부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애벌레들이 어디를 향해 큰 행렬을 지어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당신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가는가?”

“매우 중요한 데로 가고 있다네!”

 

그 애벌레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애벌레 떼의 행렬을 앞질러 좇아가보았다.

그랬더니 애벌레들이 한 우람한 나무를 타고 줄지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주위의 애벌레들에게 물어보았다.

“저 위에 뭐가 있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이 있데!”

 

애벌레들은 한 발짝이라도 먼저 가기 위해, 서로 남을 밀치고 아귀다툼하였다.

그 애벌레는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 자기도 남을 밀치고 당기고 싸웠다.

 

그 노력의 결과인지, 이제 자기도 나무에 올라가는 대열에 겨우 서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애벌레들과 한참 올라가는데, 내려오는 행렬을 만나게 되었다.

 

“저 위에 뭐가 있더냐?”

“가 봐야 아무 것도 없다네!”

 

그러자 동료 애벌레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자기는 구경할 것 다 구경하고, 가질 것 다 가지고,

누릴 것 다 누리고 나서, 말로는 아무 것도 없다고 그래!”

 

그 애벌레는 동료들과 함께 계속 위로 꼭대기까지 애를 쓰고 올라갔다.

정말 꼭대기 정상까지 가 보니 거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 빈 하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허탈하게 내려오는 길에

용을 쓰며 올라오는 여러 애벌레들의 행렬과 자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저 위에 뭐가 있더냐?” 그들이 물었다.

“위에 올라가봐야 헛수고다. 아무 것도 없다던데, 사실이더라” 그가 대답해 주었다.

 

그래도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 둥치를 기어 올라오는 애벌레들은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 애벌레는 절망적인 자기 인생을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나뭇가지에 자기 몸을 누이고 고착시켰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기 내면을 깊숙이 살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자기 몸에 고치(캡슐, cocoon)가 덮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속에서 더 깊은 묵상을 하며, 그 모든 시간을 인내하며 견뎠다.

그랬더니 그 못생긴 애벌레가 변해서, 어느 날 찬란한 호랑나비가 되었다.

 

그 호랑나비는 이곳저곳 꽃들을 돌아다니면서

꽃들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애쓰고 수고해서 계속 위로 올라간다. 계속 소유를 쌓는다.

그런데 올라가 본 사람은, ‘위에 가면 아무 것도 없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밑에서 아귀다툼하며 올라오는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저는 가져 봤으니 하는 소리야!’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우화이다.

 

기도의 사명자로 특별히 부름 받은 한센병자

 

한센병자라고, 얏봐서는 안 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가, 자기 병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상언 선교사)가 결혼하자마자 신혼여행지로 택한 곳은 소록도였습니다.

당시 저와 같은 CCC맨 들은, 소록도로 신혼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내를 꾀어서, 괜한 돈 들여서 신혼여행 가느니

여수 소록도까지 거지전도여행을 가자고 제안했고,

당시 순진했던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아마 30년 전쯤 이야기)

 

우리가 소록도 교회에 도착한 시간은 컴컴한 밤이었습니다.

마중 나오신 할머니가 내 손을 붙잡으시는데, 오 마이 갓!

그 분은 손가락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시간이 컴컴한 밤에, 그것도 처음 가보는 생소한 낯선 곳에서

음성이라고 해도, 얼굴이 거의 해골처럼 보였으니..

소름이 끼칠만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분들은 손가락도 없는 손으로,

막 박수를 치면서 찬양을 힘껏 불렀습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세상 사람들이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니,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거기에 양재평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젊었을 때 김준곤 목사님과 동년배 친구였는데,

 

김 목사님은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가 되셨고,

양 장로님은 나환자가 되어서, 소록도에서 교회를 섬기고 계셨습니다.

다 같이 주님을 섬기고 계시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극과 극이었습니다.

 

양 장로님이 소록도에 와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 민족의 기도의 파수꾼으로 세우셨구나.

사람이 건강하면 기도 잘 안 하니까,

그냥 나병에 걸리게 해서, 아예 여기 가둬놓고 기도를 시키시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양 장로님은 별로 바쁜 일이 없으니까, 개인적인 시간이 무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주로 하시는 일이

나라 위한 기도그 다음에 성경 암송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계시록까지 성경 주요 부분을 줄줄이 암송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 분을 만나고서 너무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양 장로님 말고도,

소록도에는 <나라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한센병에 걸리게 해서 소록도에 가둬놓고 기도 시키시는 일...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만약에 그런 자기 삶을 억울하다고 느낀다면,

천국에서 다 곱배기로 갚아주시겠지만,

그러나 억울함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 늘 기도하면서 성령충만 하게 사는데,

항상 행복하지, 뭐가 억울하겠습니까? (위의 찬송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한센병자라고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대한민국 기도대장들은, 주로 그 분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