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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같은 일꾼

LNCK 2024. 5. 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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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24.04.28)] I ’기둥 같은 일꾼’ I  - YouTube

기둥 같은 일꾼 (빌라델비아 교회) P1          계3:7~13

◑배경

전략       주1)

▲유대교로부터 출교의 위험에 처한 빌라델비아 교회   *key word
빌라델비아 교회가 당한 시험은, 황제 숭배를 거절하거나, 또 우상 숭배를 거절하는 
이런 단순한, 어느 도시에서나 겪을 수 있는 이런 위험이 아니었어요. 
더 실질적인 위협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대 공동체로부터의 출교의 위협이었어요. 

이미 본토 유대 땅을 떠나서, 이 아시아(터키)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유대인 동족들, 
그 당시에는 디아스포라 라고 불렀죠. 

이 유대교인들이 보니까, 언젠가부터 낯선 복음을 가지고 
유대 공동체와는 별다르게 구는 무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리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예요. 오늘날로 치면 교회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이 자꾸 
이제껏 유대인들이 알고, 듣고, 깨닫고, 배워왔던 것과는 다른 얘기를 하기 시작하니까 
어떤 박해와, 어떤 물리적인 위협을 가했는가 하면, 

여러분 유대 공동체에서 제일 무서운 벌이 뭘까요? 그건 출교를 당하는 겁니다.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단순한 징벌이 아니고, 
'너희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러니까 (호적 같은 것을) 파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물리적인 위협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죠. 
'이거 우리가 믿는 게 옳은 건가? 이렇게 계속 믿어도 되는 건가?' 
이게 얼마나 저들의 기준에 아닌 거였으면, 거론하기도 힘든 형벌인 출교를 얘기했을까요?' 

그래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흔들흔들 거렸어요.
'출교'라는 것은 완전히 유대 공동체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우리 민족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라고 잘라내는 겁니다. 

이것이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그들도 유대인이니까, 
얼마나 겁박으로 느껴졌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정서적으로든, 신앙적으로든, 아슬아슬하고 흔들거렸어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건가? 우리가 맞는 건가?' 
항상 이런 의문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 배경과 맥락에서 오늘 이 본문을 읽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자기 소개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계2~3장에 나오는 7교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과 이미지가 똑같지 않고, 각각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은 그 교회의 상황, 그 교회의 맥락과 처해 있는 형평과 속사정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유독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은 세 가지로 자신을 소개해요. 
-첫째 '거룩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두 번째는 '진실하신 분'으로 자신을 소개를 하십니다. 
-세 번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으로 그리스도를 소개를 하세요. 

이렇게 예수님이 자신을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에게 
그림 언어로, 또는 개념을 이미지화 시켜서 설명을 할 때는 
이 이미지 속에,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거죠.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1. '거룩하고'  who is holy
우선 '거룩하고' 라는 말은 전형적인 구약의 표현이에요. 
그런데 '거룩하다'라는 말을 구약에서 
아주 그리고 자주 많이 표현하는데 
공통적으로 하나님에게만 해당하는 수식어예요. 

'거룩하신 하나님'은 시편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 하나님을 지칭할 때는, 반드시 '거룩하다'라는 수식어를 씁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의도가 담아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를,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는 '거룩하다'는 표현을,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거룩하다'라고 소개를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란 뜻이죠.

그러면 방금 제가 이런 설명을 드렸어요.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이 지금 겪고 있는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압박과 핍박이 
유대공동체, 유대교로부터 왔던 것이었어요. 

유대교는 구약성경만 믿습니다.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표현과 수식어와 사건들을 아주 익숙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 공동체를 향해서, 예수님은, 본 서신을 통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신이시다!' 
이거를, 표현 속에 담아서,  3:7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을 공격하고 핍박을 주고 있는 
회당 중심의 유대교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질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교 입장에서는 '저 예수가 어떻게 메시아야?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어?' 
유대교인들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를 
기독교인들이 믿고, 따르고, 가르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내용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이해를 하고, 
거칠게 반응하는 무리들이 당연히 유대공동체, 유대교인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지금 
'나는 거룩하고' 라는 표현을 썼을 때   3:7
자신을 뭘로 소개하고 싶은 거죠? 
'나는 참된 하나님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동시에 흔들거리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은 의도도, 또한 여기에 담아져 있는 거예요.  '나는 거룩하고'

△자 그러면 여러분의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글쎄 그거야 2천 전 이야기이고, 오늘은 그런 상황이 전혀 없지 않은가?'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은근히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묶여서,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공로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고 
복음 비슷하게 설명하는 가르침과 교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이게 전부 어디서 뿌리하고 있는가 하면, 
유대 공동체와 같이 율법주의에 뿌리하고 있는 거예요. 

요즘 어줍잖게 상식적이라는 일부 잘못된 가르침 중에, 이런 가르침이 있어요. 
'신앙생활에는 균형이 있어야 된다. 밸런스가 중요하다.' 

언듯 들으면 옳은 말 같기도 하고, 맞는 말 같기도 한데...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균형을 잡는 싸움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께 올인하는 싸움이에요. 뭔 균형이에요?

신앙생활은, 내가 권고한 상황이든, 내가 처절한 실패의 상황이든 
십자가 앞에 넘어질 줄 알고, 십자가 앞에 고꾸라질 줄 아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게 거룩한 거예요.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세워놓고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했어요. 

'어린아이'라는 것은, 순수하고, 맑고... 해서 '이런 순수한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제가 몇 차례에 걸쳐 설명을 드렸어요. 

그 당시 예수님 시대에 '어린아이'에 대한 사회적 통념은 
숫자에도 치지 않을 정도로 무가치한 존재였어요. 
온전한 인격으로 여기지 않던 시대였어요. 

그 당시 시대에 어린아이에 대한 사회적 통념은, 정확하게 '무가치한 존재' 
즉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자의 것이냐? 
'자기를 무가치한 존재로 여길 줄 아는 자' 

그래서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가 주의 보혈의 공로와, 주의 십자가의 은혜 없이는 
한 호흡도 뿜어낼 수 없는 연약하고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자가, 십자가에 올인하는 자입니다.
넘어져도 십자가로 넘어지고, 십자가 앞에 고꾸라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에서, '가난하다'는 말은 그런 의미예요. 
항상 빈손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피조물의 
가장 완벽하고도 겸손한 태도가... 십자가 앞에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밸런스 게임이 아니에요. 
그건 세상의 세속적인 개념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지, 
우리가 이 땅에서 성도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 올인하는 싸움입니다. 

무슨 일이든, 어떤 형편이든, 무슨 문제이든... 
그 문제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쪽으로 끌고 가는 싸움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린아이, 심령이 가난한 자'예요. 

본문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먼저, 하나님과 밀착할 수밖에 없는 
'거룩한 존재'로 자기를 소개해요. 3:7 

그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동시에 그분의 온전한 아들이라는 설명과 내용을 
이 표현 속에 담아져 있는 겁니다. 

▲2. 예수님의 두 번째 자기소개는 '진실하사'  who is true
'진실'의 반대 개념이 뭐죠? 거짓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진실하다'고 말할 때는 
'거짓'의 반대 개념을 포함해서, 그걸 뛰어넘는 개념이에요. 

여기 '진실하사'에는 true    
신실하다 sincere 는 의미가 같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보세요. 인간도 진실할 수 있죠. 거짓 없이 진실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말 제가 어떤 청년에게 이렇게 약속을 해요. 
진실을 가지고 '내가 네 인생을 끝까지 책임질게' 
그건 조금도 거짓없는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사노라면, 내가 형편이 안 될 수도 있고, 
몸이 병들어서 의지가 떨어질 수도 있고... 
그런 예상치 못한 인생사가 벌어집니다.
그래서 약속은 진실하게 했지만, 그 약속에 본의아니게 신실하지 못할 수 있는 거예요.

부모님들이 자식을 덜 사랑해서 
학교를 중단시켜야 되고, 대학을 못 보내고 하나요? 아니에요. 

부모가 의지도 있고, 약속도 하지만, 
형편이 안 되면... 자녀를 대학에 못 보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진실하심 true 을 넘어서, 어떤 분이라고요? 
신실하신 sincere 분이에요. 

즉 자신이 약속하신 내용은, 반드시 성취시키고, 완성하고야 마시는 
예수님이라는 뜻을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진실하사'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도 내내 자신을 가르쳐서 
헬라말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인,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라고 자신을 소개하세요.
무슨 말이에요? '나는 시작한 일은 마무리 짓는 신실하신 분이다!' 

그 주님의 신실하심이, 
구약성경에도 내내 하나님의 성실로 나타나잖아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 faithfulness 이 크시도소이다' 애3:22~23

거기서 말하는 '성실 faithfulness'은, 인간적인 단순한 인내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을 얘기하는 거예요.   *에무나,  steadfastness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 아니고, 그 차원을 넘어서 
항상 최고로 성실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배반, 우리의 못남을 뚫어내고 
결국은 우리를 하나님의 멋진 자녀로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성실, 
그 성실의 출처는 뭘까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그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아버지의 사랑이에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2

우리가 그 약속에 묶여있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진실은, 진실을 넘어서는.. 신실하신 진실이십니다. 

▲3.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소개하셨어요. 3:7 
열쇠는 기능적으로 문을 여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문이에요? 

다윗은 유대 공동체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인물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거죠.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아, 염려하지 마라. 흔들리지 마라.' 
그리고 동시에 유대교를 향해서 정확하게 반박하고 있는 거예요. 

그 다윗의 뿌리를 통해서, 오늘 본문에 자기를 소개하시는 다윗입니다. 
그 분은 다윗의 키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유대교의 출교 공세를 두려워 말라는 겁니다)

우리도 회사의 어느 부서 같은데 핵심 인물을 소개할 때는 
'이분은 우리 부서의 키맨입니다.' 라고 하죠. 

키맨이라는 것은 통제권을 갖고 있고, 권위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키를 아무한테나 맡기질 않아요.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맡긴다는 겁니다. 
통제권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교회의 키맨은 누굴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키맨이십니다. 
그런데 왜 자꾸 '문'의 개념을 설명할까요? 

지금 빌라델비아 지역, 또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이들이 지금 제일 두려워하고 있는 게 뭐죠? 출교예요.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로부터 제거당하는 거예요. 
유대교가 문을 닫아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걸 뒤집는 거죠. 
뭐가 진짜 문이냐? 
그 회당의 문이 진짜 문이 아니다! 
그리고 회당을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선언하십니다.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여기 보니까 놀랍게도 유대인들의 커뮤니티인 회당이 등장을 해요. 시나고그 라고 그러죠. 
그런데 이 회당을, 예수님은 너무도 정확한 표현으로 
'보라 사탄의 회당' synagogue of Satan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해 있지 않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유대교는 회당을 중심으로

자기들의 전통과, 자기들의 표준과, 자기들의 기준으로 꽁꽁 묶여서
거기에만 생명이 있고, 거기에만 구원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속고 산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는 '그건 사탄의 회당이다.' 
그러므로 회당에서 쫓겨날 것도 걱정하지 말고, 
못 들어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지 마라.

회당 문이 아니라 구원의 참된 문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기를 가리켜 '내가 양의 문이다. 
이 문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전부 강도요, 도적들이라'고 했어요.  요10:7~9

우리는 어느 문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다윗의 뿌리, 그 뿌리에서 오실 메시야, 
그 문의 키를 갖고 계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창조되어서, 그리스도로 이 역사는 마감이 됩니다. 
이 세상이 진짜처럼 보이고, 여기에 영원한 것이 있을 것처럼 우리를 현혹시키고 
중요하게 여길지라도... 그런 겉모습의 화려함과 위용에 속아서는 안 돼요. 

거기에 비하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졌다'고 했어요. 
'적은 능력 little power, little strength'이라는 것은, 영향력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에요.  3:8

교회가 이 땅에 무슨 영향력이 있어 보여요? 
그리스도인들이 그 삶의 현장에서 무슨 영향력이 있어 보여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회당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셨어요.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낳았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여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의 영이 없는 공동체는, 이 거짓에 소속되어서, 거짓의 종노릇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전부 진리처럼 보여요. 

△팀 켈러가 쓴 <내가 만든 신> 책이 있어요. 
거기에 아주 중요한 내용을 하나 발췌해서 소개해 드릴게요.

「우상숭배는 좋은 것이다. 

우상 숭배는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상숭배가 좋다는 말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우리가 우상숭배를 할 때는.. 대개 다 좋은 것들이에요. 
나쁜 것들을 우상숭배하지 않아요. 좋은 것들이에요. 
자식이 우상이 될 수 있죠. 자식은 좋은 것이지만 말이죠.

그런데 그게 좋은 것에 머물면 되는데, 이게 조금 선이 넘어가면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때, 자식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오락과 취미도 좋은 것으로 머물러야 되는데, 
그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그럼 그 오락과 취미가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상숭배는, 다 좋은 것들을 우상 숭배하는 거에요. 
인간이 그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게, 곧 그게 우상숭배라는 말이에요.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히브리 기자의 히브리서의 기록 목적도 마찬가지고,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싶은, 
본문의 여호와의 사자의 편지 속의 내용도 마찬가지예요. 

△항상 이 땅의 사람들은 'Better than 뭐가 더 좋을까? 어느 것이 더 좋을까?' 
여러분 우리는 '어느 게 좋은 것을 붙잡는' 싸움이 아니에요. 
유일한 것을 붙잡는 싸움이에요.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고,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싸움이지요. 

보다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믿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그래서 퍼센테이지의 싸움도 아니고 All or Nothing 이에요. 
전부 아니면 전무 이에요. 

그렇게 살려면,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삶의 라이프스타일이 심플해질 수밖에 없어요. 
복잡해서는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담백하게 사는 사람들 가운데, 신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저 사람은 정말 교회밖에 모르고, 그 다음에는 예배, 그 다음에 직장 밖에 몰라!' 
그러면 사람들이 조롱해요. '저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살지?' 

여러분, 예배 드리며 사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우리는 알잖아요. 
그보다 더 행복한 재미가 있어요? 

그걸 뭐 나이트클럽 가서 겪을 거예요? 
하룻밤 즐기고 나면 허무한 거예요. 집에 돌아오면 허무가 쫘악 밀려오는 거예요. 

그런데 저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샘솟는 이 영적인...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 이걸 뭘로 바꾸겠어요? 뭘로 대체할 수 있겠어요?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그걸 붙들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3: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무슨 얘기냐면 여기서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인내'를 얘기하는 거예요.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 새번역
'참고 견디라는 내 명령을 너는 잘 지켰다' : 공동번역
'Because you have kept the word of My perseverance : NASB

(이 설교는 개역개정, NASB를 따릅니다)
'너희가 나의 인내의 말을 잘 지켰으니'

그러면 '예수님이 무슨 인내를 하셨을까요?' 
즉 우리가 본 받아야 할 'My perseverance(예수님의 인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나를 향하여 
얼마나 인내하시고, 기다려주시고, 참으셨는지요. 그게 그리스도의 인내 예요. 

칼빈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성도의 견인' 이라는 교리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세우신 것도, 여기까지 이끌어오신 것도, 
내 삶이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과, 나를 향하신 긴긴 기다림 속에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주님의 인내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반응하고, 순종하여 
오늘 이 자리에까지 머물 수 있도록... 결국은 누구의 인내입니까? 
그리스도의 인내, 그리스도의 기다림이에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3:10
즉 '나의 인내를 본받으라는 말씀을 지켰은즉'
즉 '너희도 나의 인내를 본받아, 지금까지 인내해 왔은즉' 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 견고한 소망에 묶여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우리는 주님의 인내를 본받아.. 인내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이 그런 뜻이에요, Perseverance of the saints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가서 한 3, 4년 만에 
과거에 같이 동역하던 교역자님들을 만났는데 
어쩌면 하나같이 다 변질된 게 아니라 변화가 됐어요. 
변화가 더 깊어지고, 사려 있게 말하고, 더 단단해지고, 더 견고해지고, 
더 묵직해지고... '아 정말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구나' 제가 절실히 느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 과정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찬송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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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전략된 부분
'빌라델비아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라'
사데 교회에서 동남쪽으로 45KM 정도 떨어진 곳에 빌라델비아 교회가 자리잡고 있어요. 
우선 그 지역을 알아야, 그 지역에 설립된 교회의 성격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그 지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라델비아 지역은 어마어마한 포도주 생산지입니다. 
그리고 양을 치는 목축업이 발달되어 있어서, 가죽업 산업이 함께 발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시대는 어느 도시든 마찬가지겠지만 
도시의 신이 있고, 또 더불어 황제를 우상화하는 신전이 도시마다 있었어요. 

그 중에 빌라델비아 지역은 로마의 통로에 위치해 있습니다. 
교통의 요충지죠. 로마가 전역으로 확장되기기 위해서 이 도시를 반드시 거쳐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AD 17년~26년까지 어마어마한 지진이 났는데 
로마 정부에서 전액을 대서, 이 도시의 재건에 도움을 주었어요. 
그러니까 이 도시도, 결국 로마 정부에 굉장히 충성스러운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지진을 얘기했어요. 
AD 17년의 그 대지진 때문에, 모든 도시가 항상 지진의 공포와 위험에 흔들거렸습니다. 

그런데 지진도 무섭지만, 여러분 지진 못지않게 무서운 게 여진입니다. 수시로 흔들려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사는 삶의 터전이 수시로 흔들흔들 한다면, 살만하겠어요? 
늘 불안하고 공포가 있죠. 

이런 물리적인 어려움도, 이 도시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큰 타격이었지만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질적인 박해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