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9 04 / 사도행전 강해 (38) / 사도행전 10:1~23 / - YouTube
◈고넬료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 하나님 행10:1~23
◑도입, 본문의 배경
본문 사도행전 10장은 가이사랴에서 시작합니다.
행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가이사랴는 지중해의 항구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105 Km 떨어져 있고요.
AD 619년, 아랍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현재는 폐허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 도시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는 곳인데요.
당시 가이사랴는 지중해의 화려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항구 도시가 발전하면 굉장히 큰 도시가 됩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부산도, 인천도 원래 작은 항구였는데,
지금은 부산과 인천을 광역시라고 부를 만큼 큰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이곳은 유대인의 땅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보다 이방인이 훨씬 더 많이 살았던 지역입니다.
특별히 로마총독과 로마군대가 주둔했던 곳입니다.
유대 땅을 지배하던 로마군대의 본부, 집결지였습니다.
가이사랴 라는 항구가, 군사도시로 커지게 된 것이지요.
총독과 로마군대가 거주했던 곳이니까, 로마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살았죠.
그러니까 땅은 유대 땅인데, 작은 로마와 같은 도시였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태원 과 같은 곳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태원에 미군들이 많이 다녔습니다.
근처 용산에 미군부대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태원에 가면, 외국인들이 굉장히 많이 다녔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외국인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지금은 이태원이 핫플레이스가 되어서 한국인들도 굉장히 많은데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태원에 가 보면, 분명히 서울에 있는 땅인데
마치 제가 외국의 한 동네에 놀러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이사랴가 그랬다는 거죠.
땅은 유대 땅인데, 로마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입니다.
실제로 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의하면,
'가이사랴엔 이방인들이 주로 거주했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로마인들은 이방인이었던 셈이죠.
물론 로마인이 사는 곳에는, 또 세계 곳곳에서 데려온 노예나 종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 지금 사도행전의 흐름이 보이십니까?
행9장 후반부의 무대는 룻다, 욥바 였습니다.
오늘 본문 행10장은 가이사랴,
그러니까 갈수록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무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1:8절의 말씀대로,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즉 이방인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기 가이사랴에서
드디어 순수 이방인이 최초로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고넬료 백부장과 그의 집안 사람들입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사는 로마인 이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1
백부장은 1백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장교였습니다.
그리고 '이달리야 부대' 라고 했는데요. :1
이는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뜻합니다.
당시 로마군에 외국 국적 군인들도 많았는데, 순수 이달리야 부대원들로 구성된 부대였죠.
이유는, 총독 보호와, 반란이 심한 지역에는, 충성심이 강한 본국 군인들을 배치했다고 합니다.
한편 '부대'(스페이라)는 600~1천명의 군인으로 구성되는 '군단'을 가리키는 말인데, :1
그중에 고넬료는 1백명을 지휘하는 백부장이었던 것이죠.
당시 가이사랴에 배치된 로마군단(스페이라)은 약 5개 정도라고 합니다.
이 군단을 지휘하는 천부장들은, 바울의 재판에 배석하기도 하죠. 25:23 '천부장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란?
특별히 고넬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아할 한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10:2절 '그가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a devout man and one who feared God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라는 말에는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을 가리키는 관용구 이고요.
2) 이방인인데 유대교를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인데, 유대교의 가르침과 세계관에 매력을 느낍니다.
그래서 유대교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3) 그러나 할례는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관용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φοβούμενοι τὸν Θεόν
*God fearer, 행13:16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행17:4, 17:17, 아마 행10:7의 '경건한 자' 등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경건한 사람'이란 뜻이 아니고요,
할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절반 유대교인이었던 셈이죠.
2절에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는 외적 증거가 나옵니다.
바로 구제 와 기도입니다.
'고넬료는 많은 백성을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구제와 기도는, 유대교가 특히 강조하는 덕목이죠.
물론 기독교와 공유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고넬료가 하루는 제구시 쯤에 기도를 했습니다. 오늘날 오후 3시죠.
오후 3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저녁 번제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맞추어서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에 올라간 적이 있었죠. 3:1
특별히 이제 저녁 번제를 드리는 시간인데요. *상번제를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렸죠.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시간에 맞추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각자 흩어진 곳에서 기도를 했던 거죠.
그 시간에 고넬료도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이 천사를 고넬료에게 보내십니다.
▲보냄을 받은 천사가 고넬료에게 두 가지를 전하는 데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고 말합니다.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대목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 드신 적 있으시죠?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셨는데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를 모셔와서 복음을 들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베드로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이사랴에 있는 게 아니라, 멀리 욥바에 있습니다. 약 50 Km 떨어진 곳입니다.
걸어서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결코 가까운 지역이 아니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급하게 천사를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데리고 와서 복음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복음 전하는 자의 특권
여러분 이 대목을 눈여겨 잘 보십시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천사들에게 맡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베드로에게 맡기십니다.
복음을 나누고 전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이 귀한 사역은, 천사의 역할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복음의 비밀을 아는 일을,
그리고 복음에 전하는 일을 천사들도 흠모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때로는 어떤 면에서 인생의 짐이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환영 받기 보다는, 거절 받는 순간들이 많기 때문이죠.
특별히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돌아오지 않는 강력한 가족, 친척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내 인생의 짐 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천사의 입으로도 전하지 못하는 메시지를
여러분과 저의 입으로 전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천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이 귀한 역할을
우리에게 맡겨 놓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의무 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부름' 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형용할 수도 없는 복음의 영광이,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시는 그 귀한 부르심이,
여러분과 저의 입술을 통해 선포 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입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오늘도 복음을 나누도록
우리에게 그런 위대한 부름을 주셨습니다. *'화목케 하는 직책' 고후5:18
여러분 얼마나 귀한 영광이고, 부르심 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새롭게 했습니다.
제 주변에도 아직 믿지 않는 친척들이 많이 계십니다.
때로는 그분들을 보면, 솔직히 복음 전하는 일이, 제게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귀한 복음이지만, 제가 복음의 영광을 결코 모르는 게 아니지만,
'복음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구원을 얻는다는..
이 놀라운 복음의 은혜와 그 영광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이게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왜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왜 나는 이렇게 가족,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늘 눌려 살아야 하는 것일까?'
특별히 다음 주가 추석 명절 인데요. 그런 부담 감에 솔직히 눌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전하면 무엇하나?' 하고 입을 닫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아~ 이게 짐이 아니구나.. 나에게 맡겨진 너무나 영광스러운 부르심이구나.
부담이 아니라 정말 존귀한 특권이구나!' 다시금 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천사를 보내셨는데, 천사가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천사가 보내셨는데, 베드로를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틀이나 기다려서 듣게 하십니다.
얼마든지 천사를 통해서 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그 일을 여러분과 저에게 맡기고 있다는 이 사실이
여러분 가슴에 꼭 새겨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만큼 이 일은 부담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특권이요, 영광스러운 짐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맡겨진 너무나도 귀하고 영광스러운 부르심 입니다.
'천사들도 흠모할 만큼' (찬송가 가사)
이 영광스러운 부르심이 우리에게 맡겨진 줄 알고,
이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최고의 자랑이고
여러분의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한 사람(고넬료)을 전도하기 위해서 애쓰시는 하나님
천사의 고지를 들은 고넬료가 자기 수하의 사람들을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보냅니다.
자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은, 베드로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10: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지금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성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평소에 볼 때마다, 베드로가 늘 위험해 보였습니다.
'왜 하필 베드로가 위험하게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나?
혹시나 기도하다가 졸아서, 아래로 떨어지면 어쩌나?' 그런 조마조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지붕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경사진 지붕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치면 편평한 옥상과 같은 곳입니다.
대구 경북 지역에 가면, 편평한 옥상에서 사람들이 그늘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쉬고, 평상 위에서 밥도 먹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유대지역도 그런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편평한 옥상(지붕)에서 베드로가 기도했던 것이죠.
제가 괜한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그 시간이 제6시라고 말합니다. 우리 시간으로 낮12시 정오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눈 앞에서 환상이 펼쳐져 보입니다.
10:10~12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낮12시니까, 아마 시장끼를 느낀 것 같아요.
환상 가운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먹어도 되는 짐승과, 먹지 못하는 짐승이 섞여 있었던 거죠. 주1)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을
구약에서 구별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부정한 짐승을 정하셔서 못 먹게 하셨는가요?
그 이유는, 이 구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이방인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정해 놓으신 음식을 멀리해야 했습니다.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음식을 먹을 때도 구별하여 먹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깨닫는 거죠.
'아 우리는 이방인 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우리는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구별되게,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구나'
음식 규례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음식정결법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있었던 한시적인 법이었습니다.
왜냐면, 이제 신약시대는 음식을 통해 거룩해지지 않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는부터는,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정결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는, 이런 구약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을 사는 우리는, 삼겹살을 마음껏 먹고 있고, 순대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이 폐기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정한 사람과 정결한 사람도 이제는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도 철폐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오순절 성령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시대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을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과도기에.. 구약 율법에서 신약 복음으로 변천하는데 좀 시간이 걸렸겠죠)
실제로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일어나 이것들을 다 잡아 먹으라'고 하십니다. :13
그러나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 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이제껏 내가 결코 먹지 않았나이다'고 말합니다. :14
그러니까 아직도 베드로는, 구약 시대에 딱 갇혀 있었던 거죠.
유대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도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 과도기적 상태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한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반응에 대해 자 두 번째 하나님의 소리가 들립니다.
10:15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마음껏 먹어도 된다는 거죠. 하나님이 분명하게 못을 박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깨끗한 음식과 더러운 음식이 더 이상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말씀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16
여러분, 저는 이 '세 번'이라는 단어에서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왜 하필 세 번이나 말씀 하셨을까?'
자 '세 번'이라는 숫자, 여러분 베드로에게 참 의미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베드로는 유독 이 '세 번'에 대한 추억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세 번 이었고요.
예수님께 절절한 사랑의 고백도 세 번 했고요.
여기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 듣습니다. 그만큼 확실하다는 거죠!
그러나 세 번을 들었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 환상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가?' 어리둥절 했습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했다'고 말합니다.
때마침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령께서 베드로 에게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20
이렇게 해서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마침'이라는 타이밍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먼저 여러분, 오늘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기 전까지의 과정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고넬료 라는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지금 하고 계시는지요!
한 쪽에서는 고넬료를 준비시킵니다. 그에게 천사를 보내시고요. 환상을 보여 주시고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해서 오라고 하십니다.
또 한 쪽에서는 베드로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 주시고요.
환상을 통해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십니다.
즉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잘못된 신학을 깨뜨리십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말씀해 주셔서, 베드로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서야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물던 곳에 도착합니다.
여러분 이 타이밍이 너무나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소름이 돋지 않습니까?
만일 이들이 베드로가 환상을 보기 전에, 베드로가 머물던 집에 도착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베드로는 그들을 문전 박대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넬료가 누구죠? 완전한 모태 이방인 입니다.
그러니까 짐승으로 치면, 먹으면 안 되는 부정한 짐승 입니다.
그런데 정통파 유대인인 베드로가 순수 이방인의 집에 초대받아 간다?
이것은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청입니다.
그러니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만약 30분만 일찍 도착했더라도
아마 베드로는 그 초청을 거부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이 타이밍을 보십시오. 기가가 막히지 않습니까.
환상을 본 다음에 즉시로 고넬로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합니다.
베드로는 아직 지붕 위에 있다가... 그제야 아래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20 '내려가'
그러니까 베드로는 지붕 위(2층)에서 지금 아래로 내려다보고 얘기했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은 1층 집밖에서, 위를 쳐다보며 대화가 잠시 오갔던 것입니다. :17~21
여러분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는데
'마침'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now, 헬 '데'
헬라어 성경에도 '마침'이 제일 먼저 17절의 첫 단어로 등장합니다. 강조 라는 뜻이죠.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환상을 보고 나서 의아해 할 때, 마침 그들이 도착합니다.
환상이 있고 나서 마침 그들이 도착합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통해 베드로를 먼저 이쪽에서 준비 시키고 나서, 마침 그들이 도착합니다.
여러분이 '마침' 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 처럼 읽혀 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구보다 세밀하게 배후에서 간섭하고 계신 것 같은
그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들이 보기에는 그냥 우연히 되어지는 일처럼 보이지만,
마치 하나님이 짜여진 순서대로, 이 일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그 치밀함이 보입니다.
너무나 완벽한 타이밍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합니다.
그때에도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시는 분인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가장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으로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고넬료와 마찬가지로
'마침' 이라는 타이밍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그래서 내가 믿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그 사람이 연락을 해서, 내가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치 그때 나간 교회를 통해, 주님이 마침 나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마침 태어나 보니, 엄마가 교회를 다니는 바람에, 교회에 저절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건 은혜가 아닌가요? 은혜가 맞습니다.
-마침 입학한 학교에서, 마침 다니던 학교에서
누군가를 통해 캠퍼스에서 전도를 받아, 제가 믿게 되어서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일, 그 타이밍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제가 믿음을 갖지 못했을 텐데,
때마침 그때 내게 그 일이 일어나서, 내가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간증은 각자 저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수많은 베드로들을 내게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나라는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 한 사람만 쓰신 게 아닙니다.
전에도 나를 수 없이 설득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길가에서 전도지 한 장을 건넸던, 내가 지나쳤던 사람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아침마다 저를 교회로 데리고 가려고 했던 옆집 아주머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는 아침마다 저를 깨워서, 교회 데리고 가려고 했던 그 친구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심지어 군대에 갔을 때도,
그리고 제대하고 복학을 했을 때도, 쉬지 않으신 하나님은
'나 (설교자)' 라는 한 사람 구원하기 위해,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쓰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마침 하나님의 정하신 타이밍에,
누군가를 보내심으로 저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각자도 비슷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우연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기적이요, 열심입니다.
'마침' 이라는 타이밍을 통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분의 완벽한 타이밍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 과정속에서 우리는,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과 열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그랬듯이,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수많은 일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유일하신 아들,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 마저도 아낌없이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시어
성령을 대신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천국에 이르도록 우리와 내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시간에도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보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결코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과, 그분의 지독한 사랑에 의해
우리의 구원은 영원히 취소되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위해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보냄을 받은 성자 하나님께서는, 계획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나를 위한 구원계획을 성취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보냄받은 성령 하나님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을
오늘 나에게 믿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심으로써,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나에게 일어난 구원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중간에 버리는 일이 결단코 없으십니다.
그 분은 구원한 당신의 자녀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그 자녀의 평생을 함께 하십니다.
그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이
나를 구원하기 위한 내 삶 가운데 여전히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 살면서
어디서 보호를, 어디서 우리가 안전을 얻을 것인가요?
나를 찾아오신 그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나를 구원하시고 지금까지 붙들고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
그 흔들리지 않는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사역 가운데서, 우리는 안전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 또 하나 오늘 말씀을 통해 적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은 고넬료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수많은 일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 한 사람만 쓰신 게 아닙니다.
전에도 나를 설득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 (설교자) 경우만 보더라도
아마 그때 제게 복음을 전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때 저의 냉담함 때문에
누군가는 자책을 하고, 낙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들 가운데는 주일 학교 선생님들과
동네 조그만 개척 교회의 목사님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에게 그분들은 절대로 실패한 분들이 아닙니다.
제가 제대, 복학하고 나서 예수를 믿고 나니 보니까
저에게 (제가 군대가기 전까지 전도했던) 그분들은
마치 저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손길처럼 재 해석이 되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옆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교회를 다니던 분이십니다.
그분이 아들이 있었는데요. 저랑 동갑이에요. 그런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근데 어느 날부터는, 옆집 아주머니는
저도 함께 끼워서 교회를 데리고 갔습니다.
최근에 얼마 전에 저희 어머님한테, 그러니까 한 삼십 년이 지났죠.
어떻게 연락이 닿아서 안부 전화를 주셨는데,
그분이 이제 '제가 목사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그때 막 저희 어머니한테, 기뻐하며 통화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시절에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아주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분의 얼굴이 기억이 잘 나질 않아요.
근데 딱 하나, 제가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날도 이제 주일이니, 교회를 갔는데요.
찻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분이 제 손을 꽉 붙잡아 주고 계셨습니다.
한 쪽에는 자기 아들 손을 붙잡고, 한쪽에는 제 손을 붙잡았는데
여러분 신기하게 그 장면이, 제게 잊혀지지가 않아요.
너무나 신기하지 않습니까. 다른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거든요.
신기하게도 그 장면만 제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대하고 복학해서 제가 예수를 믿고 나서
이제 기도하는데... 어릴 적 그때 그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그러면서 제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 그때 그 분의 손이, 저를 꽉 붙잡고 계셨던 하나님의 손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그때도 나를 그렇게 꼭 붙잡고 계셨구나!
하나님이 그때에도 나를 찾아와 주셨구나!'
그분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서 제가 받은 개인적인 체험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가 있습니다.
그 분은 그때 저를 전도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때 교회를 제대로 나가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 분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예수를 믿고 뒤돌아 보니,
그분은 그때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쓰셨던 분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그 분을 통해
'아 하나님이 그때도 나를 부르고 계셨구나'
그분을 통해서, 어릴 적부터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절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전도하는 우리의 손길을 차갑게 뿌리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분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는 내 남편이, 내 자녀가, 우리의 가족들이
어느 날 어느 시점에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러나 그때 그분들도 동일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그때도 나를 구원하시려고, 그 사람을 내게 보내셨구나!'
우리는 전도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그 순간들을 통해
누군가는 훗날에,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번 한 주간도,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이번 한 주간도, 구원이 필요한 고넬료 같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내십니다.
특별히 오늘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면서
베드로를 불러 오라고 하신 장면을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영광스러운 일에, 천사가 아니라
부족한 저와 여러분에게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르심이고, 특권 인지를 알고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최고의 자랑 중에 자랑이요, 최고의 영광 중에 영광 일 것입니다. 할렐루야!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1 나 한 사람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지...
그 분의 사랑과 열심을 보았습니다.
2 한편으로 구원 받은 우리 역시
또 다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또 다른 고넬료 에게 우리를 보내십니다.
이 전도자로서의 부르심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부르심 인지 알고
기쁨으로 잘 감당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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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레11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들이 나옵니다.
짐승의 경우는,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 하는 것만 먹을 수 있습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졌으나, 되새김질을 못 하잖아요.
물론 이방인들은 구별하지 않고 다 먹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가려서 먹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이 짐승 자체들이 부정하다는 게 아닙니다. 돼지고기 자체가 부정하다는 게 아닙니다.
자 그러면 지금도 우리가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