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다의 집에서의 잔치 눅10:38~42 2024.05.05.
◑도입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함께 한 식사” 시리즈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르다 집에서의 잔치” 시간입니다.
이 본문은 다섯 절로 짧지만,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 본문으로부터 누가복음은 흐름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기적과 기사를 동반하시고 많은 이적을 일으키시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면
오늘, 이 본문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6개월이 시작되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이곳에서부터 출발해서 가르침에 집중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기사와 이적을 통한 복음 전파 ↔ 가르치는 말씀 사역의 비교가 필요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르치는 사역에만 집중하십니다.
그리고 장소나 시간 같은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병고침 같은 기적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14:1~6의 수종병 고치신 일을 제외하면)
그만큼 예수님은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셨다는 거죠.
☞사복음서 대조표 https://rfcdrfcd.tistory.com/15532588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눅10:38
우리가 잘 아는 베다니입니다.
그런데 ‘베다니에 들어가셨다’라고 하지 않고, 그냥 ‘한 마을에 들어가셨다’고 기록했죠.
눅11:1절에도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기도하신 장소도 특정하지 않고, 그저 ‘한 곳’으로 기록합니다.
시간과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배우는 것에 집중하는 그 6개월 동안
학생은 제자들과 사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그들 중에는 곧 성경을 저술할 몇 명의 제자들이 있음을 우리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그 기간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그 태도는
오늘 본문의 마리아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그런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우리의 남은 인생을 살아가라고 오늘 우리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마르다는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본문 내용은 다 잘 아시니, 설명을 건너 뜁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모습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이 어떤가를 볼 것이고,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가야 하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마르다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마르다는 자기 마음에 불편함이 좀 있어요.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에 마리아 같은 사람이 필요할까요? 마르다 같은 사람이 필요할까요?
목회적인 측면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은, 마르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
구역장도 하고, 찬양대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봉사의 일을 많이 하는, 마르다 같은 사람들이 필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마리아를 지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무엇을 잘못 했는가? 마르다가 잘못하고 죄를 지었는가?
그것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오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결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르다의 특징을 살펴봅니다.
우리는 이 마르다의 모습속에서,
혹시 내 속에 마르다의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게 되기 바랍니다.
▲1. 마르다는 초점이 흐트러졌고, 마음이 산만해졌습니다.
마르다는 봉사하고 싶었습니다.
마르다는 모든 크리스천들처럼 열심히 봉사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봉사하고 싶을 때가 있죠.
그래서 찬양대도 하고, 구역장도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너무 열렬해서, 자기 직업을 팽개치는 사람도 있고,
또 은혜받았다고 신학교에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했습니다. :40
교회에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교회 일이 너무 많아서, 마음이 분주하고, 주의가 산만해졌어요.
이것이 마르다의 특징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가대, 교사, 여선교회 봉사를 하고 싶어 했는데,
하고 보니까 막상 일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랬더니 주의가 산만해졌어요. 마음이 분주해졌어요.
주의가 흐트러졌어요. 이것이 마르다의 특징이었습니다.
우리도 사역하면서, 이런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주의가 산만해지고,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어야 되는 마음이,
어느 틈엔가 일에 빠져서 흐트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현상이, 불평과 투정입니다.
마르다가 그랬죠.
그러므로 우리가 봉사의 일을 하다가, 입에서 불평과 투정이 나온다면,
재빨리 나의 초점을 다시 예수님께로 맞추어야 합니다. ‘영점 조정’을 다시 해야 됩니다.
예수님께 내 시선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불평과 투정과 부정적인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와 찬양과 경배의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법이지요.
목회자도 목회하면서 너무 많은 일들 때문에, 주의가 흐트러지고, 마음이 산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때 반드시 일어나는 증상이, 격한 말이 나오게 됩니다. 입에서 친절한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러면 ‘마르다’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빨리 초점을 예수님께로 조정해야 됩니다.
많은 일들은... 나중에 내려놓고 보면... 꼭 필요한 일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2. 마르다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졌습니다.
마르다의 말을 들어보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내 동생이’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도우라 하소서’ 자기 자신에게 집중이 되는 거예요.
‘나만 힘들어 죽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그게 지금 이 마르다의 모습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게을러요. 내가 아니면 안 돼요.’
‘모든 짐들이 다 나에게 집중되고 있어요’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후회할 말을 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그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하고 막 우리 주님께 덤비는 거예요. :40
지금 마르다는 ‘자기 일’에 너무 꽂힌 나머지,
예수님이 말씀 사역하는 도중에, 무례하게 중간에 끼어 들어가서,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40
:39~40절을 연결해서 읽어보면,
마르다가, 예수님의 설교 도중에 끊고 들어간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 시간에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었거든요.
오늘 나도 곰곰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묵상해 봐야 됩니다.
‘나는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너무 자기 중심적은 아닌가?’
‘내가 나 중심적으로, 다른 사역자의 사역을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저 사람은 왜 나의 사역을 도우지 않는가?’
▲3. 마르다는 분노했습니다.
마르다는 분노를 발합니다. 화를 내는 거예요.
일을 안 하는 마리아에게만 화가 난 게 아니라,
‘나 혼자 일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예수님께도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목사인 저에게도,
사역하는 많은 일꾼에게서도, 우리는 종종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집안 일은 다 내가 다 하고 있어! 당신은 뭐 하는 거야?’
분노하고 분개하기 시작합니다. 보통 ‘오버한다’ 그러죠.
교회 일, 집안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내가 분개하게 된다면, 화를 내게 된다면,
‘왜 나를 안 도와주느냐?’고 시험에 들게 된다면,
그건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교회 일, 집안 일을 안 해도 된다는 건가요?
네, 성숙한 사역자는.. 일을 하되, 분을 내면서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일을, 꼭 그 때, 그 시간에 해서 끝내라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그때 힘을 합쳐서 해도 ..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역자는, 일을 하되, 결코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만약 자기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면, 조용히 내려놓고 때와 시기를 기다립니다.
성숙한 사역자는, 그 맡은 일을 열심히 하지만,
거기에 목숨 걸 정도로, 남들과 싸워가면서,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주방 일에도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돕니다.
성숙한 사역자는, 주방 일을 하지만, 그 일에 서열을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걱을 휘두르며 막 큰 소리 치지 않습니다.
주방 일을 하지만, 조용히 섬김으로 합니다.
타인이 하고 싶어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그 일을 기꺼이 타인에게 양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르다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시는가요?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갖기> 라는 책이 있습니다.
Having a Mary Heart in a Martha World
그 책에 보면, 이 세상은 마르다의 세상 Martha World 이에요.
마르다의 관점과 마르다의 생각이 작동되는 것... 그것이 현실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어요.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어필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일은 서로 도와서 해야지..’ 하고 그의 항의에 동의하지 않으셨어요.
이 시대에 경영전문가라면, 행정이 달인이라면
‘그래 네 말이 맞다. 일을 공평하게 나누어서 해야지’ 이렇게 마르다를 두둔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마르다의 세상 Martha World 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를 두둔하는 대신에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1
지금까지 살펴본 마르다의 특징은 열심히 하고 싶었지만
일이 많아서 주의가 산만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진단하고 계시는 거예요.
‘너는 지금 염려와 근심에 가득 차 있구나’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것은, :41
예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경우가 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경우는 대개 ‘Stop 해라, 그만해라, 머물러라’ 할 때입니다.
본문에 ‘마르다야 마르다야’ 하신 것도 ‘그것을 스톱하라’
Stop 해라는 직접적 언급은 없지만, 행간을 읽으면 그렇다는 거죠.
‘마르다야 마르다야’ 두 번 부르신 것은, ‘그것을 스톱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거죠.
왜냐하면 ‘너는 지금 염려와 걱정이 가득 사로잡혀 있구나’
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속에 혹시 마르다와 같은 모습이 없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시는 것을 들으시길 원합니다.
“네가 내 일을 하기를 원하는 거는 참 좋다마는
많은 일들 때문에 네 정신이 산만해져서
그것 때문에 너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면...
‘아무도 나를 돕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 일하는 것 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분노하고 있다면,
"그거 Stop 해라! 너는 지금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오늘 이런 주님의 Stop 하라는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단 교회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여러분은 머릿속으로 좋은 그림을 그리면서, 상상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오늘 우리 주님께서 ‘Stop Stop 그렇게 살지 말라, 그 길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이 들린다면,
오늘 이 본문에서 해답을 찾기를 원합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1
영어성경은 ‘you are worried and upset/ you are worried and bothered’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꼭 필요한 염려, 근심이 아니라, 쓸데없는 염려, 근심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자기 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파생되는 염려와 근심이죠.
예수님은 마르다의 그 점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 자신도 그렇게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치료법 :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42
위 구절은 설명이 필요한 구절입니다.
영어성경은 대부분 ‘But one thing is needful’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게 맞습니다)
이 말은, ‘반찬을 만들 때 5가지, 10가지 만들지 말고.
오직 한 두 가지만 만들면 된다’ 이렇게
무슨 일을 심플하게 하면 된다... 그런 교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해결책은 ‘마르다야, 네가 꼭 우선적으로 해야 될 한 가지 일이 필요하다.
그 한 가지 일을 집중하면, 나머지 일은 다 따라오게 되어 있다’ .. 이런 뜻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42b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만 듣고, 나머지 모든 일은 면제받았다... 그런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나머지 일은 다 따라서 잘 되게 되어 있다... 라는 뜻인 것입니다.
약간 설명을 보탰는데, 예수님의 진의가 그런 뜻이라는 거죠!
마르다가 해야 될 일, 마르다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에게
우선순위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 중요한 한 가지를 하면, 나머지는 다 그 한 가지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only one thing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오늘 우리의 마음이,
오늘 주님 앞에 앉아 있는 마음이 그래야 합니다.
위 시27편 말고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도 only one thing 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 한 가지를 최우선해서 잘 순종하면,
내 삶의 나머지 영역들은, 다 따라서 잘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진정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직장에서도, 학교 공부도, 가사 일도... 나머지 일은 다 성실하게 잘 하게 되어있다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다의 모습에서 점점 마리아의 모습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목적입니다.
마르다의 모습에서 마리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
그 책 제목처럼, 마르다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Having a Maria Heart in a Martha World
▲선택하라.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라
먼저는 선택하는 일입니다. 선택하는 일은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2)
마리아는 우연히 예수님 바로 앞에 앉아 있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곳에 앉기를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 대해서 No 해야 이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No 한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 언니 마르다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고,
자기를 원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No 했어요.
이건 굉장한 선택입니다.
그 집은 언니 마르다의 집이었고, 마리아는 지금 얹혀살고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집세도 내지 않고 얹혀살면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다면
무조건 그 사람을 도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마리아는 그것을 거절하는 거예요.
아무리 직장에서 내 삶에 필요한 것들을 다 공급해 주고 나를 먹여 살린다 해도
내가 선택하지 않아야 할 것은 No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Yes 하면서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그 앞에 앉기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들은 ‘바쁜 삶이 어떤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지는 마르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쁜 것이 미덕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이 시대에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쁜 게 좋은 것이 아니야. 더 나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야.
더 나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골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 주님을 보기 위해서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주변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마리아처럼 선택해야 할 선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있기 위해서
우리들의 삶에 사사로운 것들, 덜 중요해 보이는 것들,
그리고 내 눈앞에 보이면서 나를 질질 끌고 가는 것들,
내 생각들을 다 분산시키는 그것들을 차단하고
그것에 대해서 No!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후략
♣사랑의 우선순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좀 엉뚱한 질문으로 해 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첫째니 둘째니 하는 순서를 두셨을까요?
그냥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사랑에도 순서가 있다는 말일까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랑에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빗나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힘든 처지의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은 예배에 참석할 필요가 없고, 기도할 시간도 없으며,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럴 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잊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불완전성과 오류의 가능성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선한 목적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더라도, 거기에는 틀린 사랑이 있을 수 있고,
엇나간 과정과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결국 자신의 성을 쌓기에 바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들이 쌓는 성은, 모래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어떤 사랑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들과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짓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적극적으로 이웃의 고통에 함께 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집착이던지, 자기과시던지 자기만족이던지 간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대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한계를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선적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조금이라도 완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마22:34~40에서 예수님께서는 우선 순위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과 오류의 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사랑은 그분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