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우리가 한 마음이 될 때 행4:32~37 2024.03.03.
◑다 함께 동행하면, 다 함께 삽니다
▲혼자 사는 사람이 겪는 어려움
우리는 긴장이 높은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습니다.
복잡한 업무에 신경이 곤두서기도 하고,
업무와 별 상관없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더 숨막히게 하는 때도 많습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이나 간부직에 있는 분들도
긴장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저녁에 녹초가 되어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퇴근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다음 날 아침에 파릇파릇하게 솟아나는 새싹과 같은 표정으로 출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전날의 짙은 그림자가 그대로 눅진하게 남아있는 표정으로 집을 나섭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퇴근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직장에 다시 출근할 때까지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시간을 보냈는가? 그 차이 입니다.
퇴근해서 집에 가면, 엄마가 또는 아내가
맛있는 찌개 끓여놓고 '우리 딸, 아들 수고했지!' 하면서 다독여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퇴근하면서 편의점에 들러서, 삼각김밥 같은 거 한 개 사들고 가서 먹고,
TV 켜놓고 혼자서 맥주 한 캔 따서... 그렇게 저녁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가정이 있어도, 환영받고 격려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싱글이어도 마음에 맞는 친구가 있거나,
교회와서 함께 마음 터놓고 얘기하고 기도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사정은 또 다를 수 있습니다.
▲행4장은 그런 차이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3장에서 사도들이 성전 미문에서 장애인을 만났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오랫동안 앉아있어서 누구나 다 알던 그 사람(맹인)에게
일어난 기적이었기 때문에. 삽시간에 소문이 퍼집니다.
예루살렘 일대에 파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은, 그 일을 싫어했습니다. 사도들을 불러서 협박합니다.
그 권력자들은, 앞서 예수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두렵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강철같은 의지를 보입니다.
행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놀랍죠? 사도들은 어떻게 두렵지 않았을까요?
그 비결이 23절에 나옵니다.
4: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동역자들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의 담대함의 비결은, 그들에게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본래 이 사람들이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비겁했고, 도망갔고, 불리하면 맹세하면서까지 거짓말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알았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어려운 상황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신앙이 뛰어나도,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혼자는 약합니다.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진심으로 함께하는 사람 있을 때에.. 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기도할 때 들으시겠다' 하셨잖아요.
밖에서 아무리 협박받고, 세상에서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그것을 함께 털어놓고, 아픔과 불안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함께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시련과 공격에도 맞설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사도들은 이 위협의 현장에서 돌아와서 함께 기도합니다.
4:24~31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리고 그 다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보여줍니다.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2장에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런 장면이 나왔었습니다.
'믿는 사람' 이라고 시작합니다.
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4:32에는 '믿는 무리',
2:44에서는 '믿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1)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를 믿는다'가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믿음에 의해서 규정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다르게 삽니다.
이것은 무게중심이,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내 중심의 삶, 내가 나를 위해 삽니다. 내가 나를 증명해야 됩니다.
내가 나를 책임지는 삶... 그게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말씀처럼, 주님이 책임지시는 삶이 되는 겁니다.
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내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이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탈피할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이 생깁니다.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인간 사회의 가장 큰 고통은 '자기중심성'입니다.
어려운 가정이 많은데, 가장 어려운 가정은
식구가 다섯이면 다섯 명 전부 다 견고하게 자기중심적인 캐릭터면,
그 가정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1998년 IMF 이후로, 개인주의가 심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성이 본래 자기중심적이지만
현대사회, 지금의 한국사회는 정말 이게 극단적이 되어 있습니다.
각자 도생의 사회, 즉 알아서 자기 것 챙기고, 자기가 자기 것 먹고 살아야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요.
현대사를 되짚어보니 1999년에 이런 영화가 나왔더라고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당시에 굉장히 히트한 영화입니다.
이 제목 자체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졌던 것 같아요.
그 말은 한국 사회의 한 심층을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1999년 7월이에요. IMF가 일어난 지 1년 반 정도 지나서
그 IMF의 충격이 사회 심리에 많이 반영되었을 때 즈음에 나온 영화입니다.
옛날에 여러분 사업하시던 분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때는 개인적으로 돈 빌려주기도 하고, 어음받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는 사람들끼리 좀 퍼석해도(물러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사업하는 거, 제가 옆에서 봤는데
그래도 그냥 좀 서로 봐주고, '그래도 같이 살자'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었어요.
그게 IMF 이후에 싹 사라졌습니다.
정말 이 비즈니스 업계도 굉장히 비정하게 변했습니다.
'인정사정 봐 주다가는 내가 죽게 생겼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로 변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다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옆사람이 살아야, 내가 사는데.. 사업이 그런 관계잖아요.
근데 각자 자기 살길만 찾다가, 결국은 함께 망하는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른들이 그렇게 하면, 얼마 안 가서 자녀들도 따라서 합니다.
지금은 청소년들의 분위기도 이렇게 된 것 같아요. *각자도생
친구가 사라지고 경쟁자만 있습니다.
'네 꿈이 무엇이냐?' 묻던 자리를
'너는 내신 몇 등급이냐?' 하는 물음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교회는.. 공동체로 살아야 됩니다.
이 삭막한 개인주의 이기주의 사회, 소망 없는 사회에 대한 해결책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찾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2: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네, 어려운 거 아닙니다. 모여서 함께 밥 먹는 것입니다.
'집에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떡을 떼고, (*둥근 빵을 떼서 먹었던 문화)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삶을 나누는 거예요.
여러분 이번 주부터 우리 사랑방을 cell group 다시 시작합니다. 바로 이거 하는 거예요.
초대교인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서 음식 먹고 서로 교제했습니다.
요즘 건강 비결, 관심들 참 많으시잖아요.
'뭘 어떻게 먹어야 건강에, 몸에 좋을까요?
제가 중요한 비결 하나 소개해 드릴게요.
<뜻밖의 건강 비결> Video Clip
「1961년, 오클라호마 대학의 스튜어트 울프 박사는 학회에서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산골, 로제토 라는 작은 마을에서 온 의사를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이 의사는 지난 10년 동안, 자신이 진료한 환자들 중에
다른 지역처럼, 심장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55세 미만의 사람들 중
심근경색에 걸린 사람을 본 적도 없으며
자살이나 소화성 궤양 질환도 없었다고 했다.
로제토에 사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 말고는
죽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말이 된다.
울프 박사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 미국 중년 남성의 주요 사망원인은, 심장질환 이었기 때문이다.
울프 박사는, 로제토 마을의 연간 사망률이
이웃 마을보다 약 50% 낮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연구팀을 데리고, 이 마을을 직접 방문했다.
마을사람들의 가족내력을 확인하고
신체검사와 심전도 검사를 진행했다.
식단, 알코올 섭취, 흡연, 운동, 유전자 등을 중심으로 검토한 결과,
이들에게서 건강한 생활습관이나 음식 등, 특별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들은 싸구려 담배와 소시지를 즐겼으며,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채석장에서 위험한 일을 했고
고기 기름으로 요리를 했으며
생각했던 것보다 과체중이었다. (남미 사람들도 이렇게들 살죠)
그들의 식습관과 생활방식은
오히려 건강에 해로워 보였다.
연구원들은 각종 데이터에서 시선을 떼고
로제토 라는 마을 자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친구들은 현관에 나와 앉아 있었으며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시간을 보냈고
여러 세대가 모여 함께 식사했다.
부유한 가족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 않았고
어려운 시기에는 이웃들이 서로를 지지해 주었다.
1960년대 초, 이 마을의 범죄 발생률은 거의 0%에 가까웠다.
의사들과 사회학자를 포함한 연구진은
로제토 마을의 놀라운 건강비결이
끈끈한 사회적 유대감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965년 이후 미국의 일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퇴근 후 저녁 약속이나 모임, 다른 커뮤니티 행사에 참여율이 낮아졌다.
텔리비전이 보급되었고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기 보다는
화면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젊은이들은 성공을 위해 소도시를 떠나 대도시로 갔다.
그 물결 가운데 로제토 마을도 변해 갔다.
이웃과의 만남,
대화들이 줄어들었고,
공동체 의식도 점점 약해져갔다.
1971년, 마을 역사상 처음으로
심장마비로 사망한 45세 미만의 주민이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후 30년간 연구를 계속했다.
로제토 마을의 심장마비 발생율이
점차 이웃마을과 비슷한 수치까지 증가했다.
많은 사람들은 건강에 좋은 음식을 찾는다.
그러나 장수 마을의 특징은
특별한 음식에 있지 않았다.
'함께 먹는 문화'를 가진 마을들이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같이 먹었던 사람들' 행2:46참조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던' 그 공동체가
얼마나 건강하고 행복했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위 동영상이 놀랍죠.
여러분, 건강에 좋은 음식을 찾는 것보다
함께 서로 삶을 나누고, 함께 밥 먹을 줄 아는 사람들!
그게 건강과 행복의 비결입니다.
이게 굉장히 성경적인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잖아요.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
그리고 성경 전체가 '공동체'를 이끌어가고 세워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꼭 로제토 마을과 똑같이 할 수는 없겠지만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가급적이면 공동체적 삶을,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가까이 지내던 한 교회는, 성도들이 이런 걸 하는 걸 보았습니다.
몇 가정이 어울려가지고, 매일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것입니다.
꼬마들을 학교에 보내야 되는데, 8시까지 학교에 가는데요.
7시에 교회로 다 옵니다. 가까우니까 대부분 걸어서 오는데,
돌아가면서 부모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거예요. 그냥 계란 굽고 간단하게 하는 거죠.
그러고 나서 담당 아빠가 차에 태워서, 학교에 보내주고 헤어지는 겁니다.
뭐 예배드리고 큐티하고 이런 것도 없고, 그냥 모여서 아침밥을 같이 먹는 거예요.
때로는 신앙적인 이야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잡담하기도 하고...
3, 4년을 그렇게 했대요.
3, 4년을 아이들이 매일 모여서 이웃과 아침을 같이 먹으니까
아이들 성격이 바뀌는 거예요.
그렇게 수줍던 애들이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 좋아지는 캐릭터로 바뀌었어요.
몸도 건강해지고.. 물론 학업 성적도 다 좋아졌고,
나중에 걔들이 전부 다 성공한 애들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깜짝 놀랐어요.
여러분,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겁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해당하는 거죠.
▲지금 여러분, 한국의 출생률이 한국 사회의 큰 문제잖아요.
최근에 보도 보셨습니까?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 중이라고 세계가 다 불쌍히 여기는데요.
한국의 출생률이 전쟁 중인 나라 우크라이나보다 더 낮대요. 정말 심각한 거죠.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애 낳으면 돈 준다, 애 봐준다, 지금 심지어 외국에서 값싼 도우미 데리고 와가지고
보모로 수입하겠다...'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근본적인 문제는, 부모들이 행복해야 돼요. 안정되어야 됩니다.
근데 이 사회 자체가 갈수록 불안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출생률 자체만 가지고 아무리 붙잡고 발버퉁쳐도... 한계가 있다는 거죠.
어떻게 하면 한국 사회가, 좀 더 사람들이 건강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됩니다.
▲또 하나, 지금 한국 사회가 출생률과 함께
건강하지 못하고,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는 싸인은 '중독'입니다.
마약 뿐만 아니라 각종 중독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중독에 잘 걸립니까?
같이 술을 마시는데, 어떤 사람은 알코올 중독에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같이 도박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패가망신할 정도로 허우적거리고 빠져듭니다.
중독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독을 연구한 분들에 따르면,
하나의 중독에서 빠져나오더라도, 쉽게 다른 중독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도박 중독에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조금 있다가 보니까 음란물 중독, 성 중독,
어떤 사람은 섭식장애, 게임 중독, 마약 중독까지....
왜 그럴까요? 왜 어떤 사람은 이 중독에 유독 약할까요?
어릴 때부터 애착관계 형성에 실패한 경우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라고 나서도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가장 큰 유형을 차지합니다. 한 마디로 외로운 사람들이죠.
그들이 중독에 잘 빠지고, 더 나아가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함께 밥 먹는 사람,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봐주는 사람,
'내가 기도해 줄게' 하고 격려해 주는 사람만 있으도
우리는 훨씬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고,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회의 경제가 외형은 커졌으나
물질적으로 좀 풍요해졌으나, 속으로는 무척 아픈 사회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비슷한 맥락이 나옵니다.
행2장에 공동체가 서로 나눔의 행동에 대해서 나왔잖아요.
4장에 이게 다시 나와요.
그 사이에 뭐가 나오는가, 3장에 성전 미문에...
아름다워야 할 성전이죠. 아름다워야 할 예루살렘 도시죠.
그런데 그 안에 아픔이 있어요. 사도가 와서 병자를 고쳐줍니다. 착한 일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착한 일이 생겼으면, 누가 고침 받았으면,
그 자체로 기뻐해야 되는데, 축복해줘야 되는데
오히려 싫어하고 압박하고 갈등이 생긴다...라고 볼 때
'당시에 예루살렘 사회가 얼마나 병든 사회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새로운 사회의 모습이 다시 나옵니다. *4장
행2~4장을 모아서 보면,
'무엇이 아름다움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3장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2장과 4장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4:32
2장에서는 '나눔의 행동' 이렇게 서로 나누었다.. 라는 행동 중심으로 그려진다면,
이제는 그게 계속 되면서, 하나의 문화가 된 겁니다.
그리고 나눔과 구제의 공동체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고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공산주의는 힘을 갖고 뺏어서 나누어주고 '이것이 공평한 거야, 입 닥쳐'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자발적인 결정으로 나누었습니다. 사랑으로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새로운 문화가 된 것입니다.
행동이 태도가 되고, 태도가 성품이 됩니다.
그 성품이 문화가 되는 거예요.
그 문화 안에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마치 공기처럼 교회문화를 느끼고
'이렇게 사는구나.. 서로 존중하고, 돌보고, 서로 위해주고, 서로 아픔을 나누고 사는구나'
하는 그 문화 안에서 예수 닮은 성품이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됩니다.
시133:1~3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거기서 복을 명령하셨다' 복 받을 자리 어디입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입니다. 본문의 예루살렘 교회요,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복 받은 자리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명령하신 곳은, 복을 주시는 곳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며 서로 함께 사랑하며 사는 공동체구나'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주길 원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의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장애우 릴리.. 돌봄의 사람이 되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각자 도생의 (개인주의) 사회에서
여러분 서로 돌보는 사회로 가야 되는데, 어떻게 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하는 노력들이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청소년들 학교폭력이 워낙 심하니까요.
한 20년간 한국 사회가 폭력 근절을 위해서, 법도 만들고, 무슨 위원회도 많이 만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꽤 성과가 있습니다.
폭력이 현상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법으로, 제도로 강제하다 보니까
친구관계가 더 메말라가요. 사제관계에 더 어려움이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여러분, 인간의 문제에는, 때로는 법이 필요하지만
법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나면, 머리 위에 두개골 부분이 비어있잖아요.
한 1년 6개월 지나야 붙습니다. 인간의 머리는 큰데, 크게 나을 수 없으니까
조그맣게 나와서 머리가 빨리 자라는 거죠.
그래서 처음에 이게 조금 간격이 있죠.
1년 6개월 동안에 서서히 이게 붙는데, 이게 너무 빨리 붙는 아이들이 있대요.
그럼 얼굴 모양이 변하고, 성장에 교란이 생기는 병이 됩니다.
'릴리 레이첼 스미스'라고 하는 아기가 이 병을 앓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스러운 수술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참 감사한 게, 이 아이가 밝은 성격으로 잘 이겨내고 살았어요.
그런데 중학교에 가면서, 다들 외모에 관심이 많아지잖아요.
초등학교보다 인간관계가 폭넓어지죠.
릴리는 적응이 안됩니다. '내가 너무 초라하다' 느껴지는 거예요.
공부할 때는 괜찮아요. 앉아있으면 되니까.
그런데 점심시간이 문제입니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요.
밥 먹고 나서 막 수다 떠는 시간이, 중학교에서 진짜 행복한 시간인데
릴리는 같이 앉아서 얘기할 친구가 없어요. 그 시간이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화장실로 가서, 화장실에 앉아서 엄마하고 통화하면서, 매일 시간을 보냅니다.
그럼에도 이 아이 릴리에게,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좀 생겼어요.
그래서 릴리가 조금 돕다 보니까, 이게 어떻게 잘 되고 유명해졌습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를 돕는 일,
사창가에 있다가 사회로 복귀하고 싶은 사람들을 돕는 운동을, 함께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릴리는 좀 유명해지고, 영향력이 생기고, 친구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클린턴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신문에 나기도 했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15살 되던 해에, 밤에 자다가 숨을 그둡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칭송했습니다.
릴리의 학교 친구들이, 릴리의 엄마를 찾아가요.
'우리가 릴리를 기억해서 뭔가를 하고 싶습니다.
릴리가 그랬듯이 세상에 도움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뭘 하면 좋을까요?' 그랬습니다.
중학생들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뭐하라고 그러겠습니까?
릴리의 엄마가 제안해서 이런 단체를 만듭니다. Beyond differences
'차이들을 넘어서서' 라는 단체죠.
그래서 이 단체가 한 일들 중에 하나가
여러분 이거는 인스타에 나오는 겁니다.
'No One Eats Alone Day 아무도 혼자 점심을 먹지 않는 날'을 정했습니다.
2월 며칠 날, 발렌타인 근처의 날로 정해서, 해마다 이걸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국의 50개 주에서 참여하는 꽤, 큰 운동으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작은 일 같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학교에서, 사회에서, 이웃관계에서, 이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 희망을 심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점심을 혼자 먹지 않는 날'
우리 교회가 그런 말 자주 하지 않습니까?
'아무도 혼자 울지 않는 교회!'
그러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는 겁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돌볼 줄 아는 그런 사람이, 이웃을 돌볼 수 있어요.
서로 돌볼 줄 아는 교회가, 세상을 돌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거 하는 겁니다.
우리 교회가 '돌봄 수업, 케어링'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다 관심 가지시고 참여하시면 좋겠습니다.
서로 돌볼 줄 아는 이 마음이 있어야, 사실은 마을 목회도 하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위로의 사람, 바나바
오늘 말씀에 이 돌봄의 모델이 되는 사람이 한 분 나옵니다.
4:36~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분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보니까
이분은 정말 '위로의 사람, 미스더 위로' 였어요.
사람들이 이 사람만 만나면, 용기를 얻고, 힘을 얻고, 생기를 얻고,
그래서 아예 이름을 바꿔버렸어요. '바나바 - 위로의 아들' Son of Encouragement
여러분 교회가 사람을 세울 때, 임직자를 투표할 때,
'이분이 훌륭하니까, 이 사람을 선발해서 중요한 일을 맡기자' 그게 아니에요.
임직자에게 훨씬 더 중요한 자질이 있어요.
여러분, 교회 중직은, 모든 성도들을 성장하기를 격려하고 돕는 자질이 중요합니다.
바나바 같은 사람이죠.
그 과정에서 권사님, 안수집사님, 장로님도 세우는 겁니다.
일 잘하는 장로님, 말 잘하는 집사님, 사회에서 인정받고 능력 있는 권사님...
물론 그분들이 도움은 되겠지만, 무엇보다 '위로의 아들, 위로의 딸'
즉 바나바와 같은 하나님 사람들이 세워주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위로의 사람, 돌봄의 사람이 될 때에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사도행전 2장에 나눔과 돌봄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이거 하는 거예요.
교회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면 안 되고요.
교회에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함께 나누고 돌보다 보면, 민감성이 생겨요.
예전에는 그냥 사느라고 바빠서, 주위에 누가 아픈지, 누가 외로운지, 누가 죽어가는지...
전혀 눈에 보이지도 않던 사람이, 이제부터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 선교적인 민감성입니다. 기억하시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의 장애인에게 주목한 것입니다.
동전 하나 주고 가는 게 아니고, 주목하는 게 중요해요.
사도들이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거든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타인의 아픔에 주목하는 민감성이 생깁니다.
그리고 반응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면 됩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러면서 계속 그렇게 반응하다 보면, 성품이 바뀌어요.
돌봄의 성품이 개발됩니다.
그렇게 함께 성품이 바뀌어 가면서,
교회 안에 돌봄의 문화가 형성이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돌봄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가장 중요한 모판은 사랑방입니다.
서로 만나서 목자가 우리를 돌보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거예요.
초대교회는 각 집에서 가정에서, 날마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초대교회의 능력이, 이 아름다운 부흥이 부러우면
우리도 날마다. 모여야 됩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그게 성경적이에요.
그렇게는 못해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같이 모여서 서로 삶을 같이 나누는 것
이거는 영적인 건강의 기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삶의 스타일이죠.
내가,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각박해지는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삶!' 그걸 만드는 게 교회에요.
▲오늘 본문에 바나바가 상당히 주목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냥 공동체 이야기를 쭉 하다가
한 사람이 이렇게 주목받는 게 약간 의외입니다.
다음 주에 보시겠지만, 한 사람이 너무 주목을 받는 게, 약간의 부작용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나바가 강조되는 이유는 뭘까요?
가장 중요한 게, 여러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바울 아닙니까?
그런데 이 바울이라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어요.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서, 그쪽으로 너무 가버렸습니다.
너무 잔인무도한 나쁜 짓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가 교회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뛰어나고 차질이 아까운 사람인데, 열정 있는 사람인데,
이제 시켜주면 잘할 텐데...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아요.
'저 사람 위험한 사람인데...' 다들 그럴 때에, 그때 손을 잡아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아니었으면, 바울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No
바울이 없었다면, 초대교회와 선교에 얼마나 손해가 많았을까요?
여러분 바나바가 이렇게 공동체 내에 인정을 받고, 존경받는 어른으로 서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들 '위험하다. 저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러는데
마음을 열고 바울의 손을 잡아준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나바예요. 그렇죠?
이렇게 보면, 여러분 '돌봄의 성품, 위로하는 성품'
이 안에 세계선교의 비전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선교는 프로그램으로 자꾸 생각하는데, 돈으로 자꾸 생각하는데,
돈들여서 한다고 되는 거 ... 그거는 선교에 있어서 여러분 굉장히 작은 부분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성품을 바꾸시면서,
그 성품을 통해서 선교하시는 거예요.
바나바의 '돌보는 성품'을 통해서, 새로운 선교의 역사가 준비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누군가에게 손을 잡아주는 사람, 자기 곁을 내주는 사람, 그런 성품,
원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
그런데 이런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세계로 나가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적용, 실천 계획
오늘 3월 첫째 주입니다. 우리 3월달을 사순절로 보내고요. 3월 말에 부활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부활절을 축하하고, 4월달에는 그 부활의 소식을
담장을 넘어 전하는 달이 되기 원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가라 그랬으니까,
말씀 그대로 담장을 넘어 전도하는 달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별로 한 마을씩 정하는 거예요. 어느 공동체는 이 마을, 저 마을...
여러분 모여서 정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 가서, 주일날 오후에 가서 함께 예배드리고, 전도하는 거예요.
토요일날 가도 좋습니다. 마을 잔치를 해도 좋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여러분 창조적으로
자기 공동체에 맞게, 또한 그 마을에 맞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우리 교회만의 성장이 아니라
이웃들이 함께 성장하기 원합니다.
요즘에 여러분 시골교회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런데 큰 교회들이 가서 조금만 도와주면, 정말 힘을 내서 잘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교회는 오랫동안 '바울 전도대'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이웃 마을에 가서 열심히 전도한 경험이 많습니다.
부활절 전에 가서 전도하고 오니까, (그 교회를 위해서 전도해 줍니다)
부활절 날 그 조그만 교회에 수십 명이 왔습니다.
그 동네 성도들과 목사님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올해 2024년 봄꽃이 필 때면, 이 인근 마을 각 마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수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웃음 꽃이
찬양의 꽃이 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기도해 주십시오 이 일에 우리 모든 교우들 다 초청합니다.
공동체별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 선교지예요.
'내가 언젠가 은혜 받아서 저 멀리 해외 선교 가리라' 그것도 좋지만
우리의 생활 중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서 선교하는...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 그러면서 담장을 넘어
내 개인적인 한계, 내 개인적인 기도 제목을 넘어서 가는 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더 깊이 복음 안으로 들어가고, 더 멀리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사도행전을 책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으로, 사도행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가 말씀 들고 나갈 때에, 여전히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그런 은혜를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우리의 성품과 문화가 바뀌는 거예요.
우리만 위한 교회가 아니라,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여는 사람이 되고,
세계를 향해 선교할 교회가 되어 가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좀 넓혀지면 좋겠습니다.
늘 그냥 내 기도, 내 자식들, 우리 사업, 넓어봐야 우리 교회...
이걸 좀 벗어나서, 이웃 교회들, 한국 교회들,
세계에서 아프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 그런 성도 되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아픈 곳이 어딜까요? 여러분 단연 북한입니다.
북한 동포들만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유럽과 남미와 곳곳에서
정말 하나님 은혜 주셔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하고 전혀 관계없는 분들이에요.
한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외국 젊은이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전도하겠다고 헌신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생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북한을 위해서도 계획을 갖고 계신 줄 믿습니다.
우리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억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북한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라고 초청하는 영상을 하나 같이 보시겠습니다.
맨 위 동영상 35:45~38:40
최근 들어서 북한은 '통일, 남한' 이런 이야기를 급격하게 잘라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때 우리는 모일 때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렇게 노래부르는 게
이제 아득한 옛날 이야기가 되어가고, 무관심해져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특별한 은혜를 주신 것은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북한을 제대로 잘 선교하라고 주신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세계교회가 마음을 갖고 함께 할 것입니다.
기억하시고 우리가 지난주에 3 .1운동... 참 귀하게 예배드렸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해방을 경험했지만
아직까지도 압제에 눌려있는 북한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 세상에 어디든지 하나님이 살아계신 곳에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는 고백으로 우리가 선교적 삶을 함께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추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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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여러분 '믿는 사람'이란 이 말이, 아무런 목적 없이 뭘 믿겠어요?
믿는다는게 뭐에요?
지금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불교를 믿는다. 유교를 믿는다. 기독교를 믿는다' 그러지만
사실 여러분, 불교는 믿는 게 아닙니다. 수행하는 거예요. 자기가 그냥 도 닦는 겁니다.
유교도 바르게 행하는 행함이 중요하지, 뭘 믿는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죠. '믿는' 것이 중심입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종교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량이 워낙 크고 사실상 표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고 속에,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종교' 그러면 '뭔가를 믿는 것' 이런 등식이 들어 있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교도 유교도 믿음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요.
예수님 시대에 로마에 맞는 종교도 '믿음'은 생소한 개념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