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젖 뗀 아이와 같이

LNCK 2024. 5. 13. 11:0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말씀

 

젖 뗀 아이와 같이  | 금요철야 | 24.5.10 - YouTube

젖 뗀 아이와 같이         시131:1~3         

오늘 본문 시편 131편은 표제에 '다윗의 시'라고 써놨어요. 
설교의 황태자 라는 스펄전 목사님은 이 시131편을 가르쳐서 
'가장 읽기 쉬운 시이면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시다' 이렇게 말했어요. 

가장 읽기 쉬운 시예요. 3절밖에 안 돼요. 
내용도 어렵지 않아요. 
근데 이 말씀대로 삶을 살기는, 이 말씀을 배우기는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단 3절이지만,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겁니다. 

◑131:1절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자신의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눈이 오만하지 않다' 
그러면 이 교만한 자, 오만한 자는 누구를 말하는 거죠? 그 뒤에 나와요.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 
'내가 그것을 힘쓰지 않았다'는 얘기예요.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싶어해요. 
왜냐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사람에게는 성취의 욕구가 있어서, 큰 일을 해보고 싶다는 거죠. 

이왕이면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큰일을 해보고 싶다'는데 
교만한 사람, 우리가 눈이 높은 사람이 그러기 쉽죠. 

교만한 사람, 눈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아래로 쳐다보는 사람이고, 항상 위를 쳐다보는 거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죠. 

이런 사람들이 특징이 뭐냐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만한 자는 항상 헛된 것을 추구합니다.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이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이에요. 큰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놀라운, 기이한 일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인간이 스스로 큰 일을 꿈꾸는 거죠. 근데 뭐에요? 
감당하지 못할 일이라는 거죠. 감당하지 못할 일, 그게 뭔지 아세요? 
그게 헛된 욕망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성취 욕구가 강합니다. 
무엇인가를 해내겠다 라는 강한 욕구가 있죠. 
그래서 자기 자신을 피곤할 정도로 몰아가는 겁니다. 

그 성취 욕구가 크니까, 목표가 크니까, 큰 일을 하려고 하니까 
계속 자기를 몰아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삶에 안식이 없어요. 피곤한 거예요. 

여러분 오늘 현대인들의 모습이에요. 
뭔가를 해내려고 하는데, 얼마나 치열하고 얼마나 분주하게 살아갑니까? 
그러면 결국은 뭐가 많아요? 염려, 근심이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왜 염려와 근심이 많아요? 그게 누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요.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염려와 근심을.. 내 안에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특별히 야망이 있을 때, 이 야망을 가지고 있으면, 틀림없이 걸리게 되는 병이 하나 있어요. 
조급증에 걸려요. 빨리 그것을 이루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겁니다. 기다리지 못하죠. 
그래서 현대인들이 다 조급증에 걸려 있어요. 조급증!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교만한 자와 누구를 대조를 하고 있느냐? 
젖 먹는 어린아이예요.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베이비, 자신의 몸을 엄마의 품에 완전히 맡겨진 상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기 '젖을 뗀 아이'예요. (젖을 떼고 밥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본문의 핵심인, 젖을 뗀 아이는 '젖을 충분히 먹고 난 다음에 만족한 상태에 있는 아이'
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더 이상 보채지 않죠. 만족한 상태, 최상의 상태! 

여러분 아이들을 보면, 젖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픈 상태에 막 보채면서 울어대는 아이와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고 난 다음에 만족한 상태에 있는 아이는, 전혀 달라요. 전혀 달라요. 
엄마의 젖을 보채는 아이는, 못 말려요. 그 아이를 감당할 자가 없어요. 
심하면 막 그냥 뒤로 넘어가 버려요. 

그러나 충분히 젖을 먹은 아이, 젖을 뗀 아이의 모습은 행복 그 자체예요. 
엄마들은 지금 이게 딱 연상이 될 거예요. 아빠들은 잘 모를 수도 있죠.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머니로 비유될 때가 많아요. 
구약에서 종종 하나님을 모성애적 존재로 묘사해요. 
젖 먹이는 어미로 하나님을 묘사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안아주시는 분이고, 돌보시는 분이고, 유모와 같은 분이고, 
엄마와 같은 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의 고백이 뭐예요? 
'내 영혼이 젖뗀 (젖을 충분히 먹은) 아이와 같습니다.' 
가장 평온하고 만족한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정경이 이 세상에 아마 없을 거예요. 
그 엄마의 품에 안겨서 충분히 젖을 먹고, 
그래서 엄마  품에 안겨져 있는 그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은 없어요. 

◑131:2절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근데 본문의 시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 그런 상태와 같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에요.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서, 그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만족을 누리고, 
평안을 누리는 것! 
품 안에 안겨있는 아이는 너무너무 고요한 거죠. 평안한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터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포탄이 날아다니고 그런데도 
그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그 아이는, 여전히 평화를 누리는 것이죠. 
뭐 포탄과 주변의 싸움과..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냥 엄마의 폼 그 자체가 평안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이 다윗이 비유를 한 것은 놀라운 것이예요. 
우리의 신앙의 아주 핵심을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뭘까요? 
엄마의 폼에 안겨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안기는 거죠? 이것은 방법이나 기술이 아니죠. 
'안긴다'는 것은 뭘까요? 맡기는 것이예요. 

신앙의 핵심이 뭔지 아세요? 안기는 거예요. 
그런데 이 안기는 게 뭐예요? 맡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삶에 가장 원초적인 일이 있다면, 주님께 맡기는 겁니다. 
아기가 엄마의 품에 자신을 내어 맡기듯이 맡기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신앙의 여정 전체가 하나님에게 안기는 일입니다. 
신앙은 주님 안에서 안기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거예요. 

문제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그 하나님의 품을 내가 거부하는 것이죠. 
내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자만심! 

오늘의 세상의 문명은 어때요? 오늘 세상의 문화 안에는 
인간이 스스로 충분하다고 믿는 것이에요. You can do it!

그래서 인간의 삶에서 뚜렷한, 오늘날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은 뭐예요? 자만심이에요. 
'내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인간의 이성의 힘을 과시하죠. 
오늘날 과학지상주의가 있잖아요. 어마어마하죠. 

▲여러분 오늘의 현대 과학 문명이 엄청나잖아요. 
이제 AI가 이제 극대화 되면, 앞으로 어떤 세상이 될지 몰라요. 
엄청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거예요. 지금 굉장히 빠르게 지금 변화가 일어납니다. 
AI, 인공지능, 과학이 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거죠. 

그리고 이전에 상상만 하던 것들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뭐가 있죠.?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뿜뿜... 

그런데 여러분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인류가 뭘 경험했죠? 혼란 속에 빠졌어요. 
아주 작은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부터 시작됐는데 
온 세계를 뒤흔들면서, 수백만 명이 죽었어요. 속수무책이었어요. 

백신을 만들게 됐지만, 그 백신이 급조된 거기 때문에 
백신의 후유증이 어떤 것인지... 지금도 계속 의학계는 얘기하고 있죠. 

특히 여러분 서구 사회가, 코로나 때 더 혼란에 빠졌어요.  
근데 작은 것 하나에도 온 인류가 휘청거렸어요.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을 보십시오 야망이 많습니다. 끊임없이 추구하고, 추구하고, 추구합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합니다. 쉬지를 못합니다. 빠른 성취를 원해요. 

여러분 한국인들의 병 중에 하나가 뭐예요? '빨리빨리' 잖아요. 정신병과 연관이 있습니다. 

빨리빨리 하는 조급증은 정신병과 연결이 돼 있어요. 

리차드 포스터는 '조급증이야말로 영성의 적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빠른 성취, 어떤 결과물을 빨리 내려고 하는.. 성공하려고 하는 인간의 야망.. 
그게 막 사람을 몰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조급증이라는 불안정세가 따라오게 돼 있어요. 
칼 융 이라는 유명한 기독교 정신의학자가 있죠. 그는 이렇게 얘기했어요. 
'서두르면 악마가 되는 게 아니라, 서두르면 악마 자체다' 라는 거예요. 

▲본문의 시인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하는 거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젖을 먹는 아이 라는 거죠.
성도를 잘 묘사한 거예요. 철저히 의존적 존재라는 거죠.
자존적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라는 거죠.

'어린아이'는 또 어떤 존재죠? 성취와 상관이 없어요. 
명함 가지고 다니는 아이 봤어요? No

아기는... 수시 목표 이런 거 없어요. 자랑하거나 내세울 게 하나도 없어요. 
아이들은 쫓기지 않아요. 

아기는 누구예요? 엄마의 절대적 돌봄이 필요한 거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 앞부분과 현격한 대비를 하는 거죠. 
'큰 일을 도모하려고 하는, '놀라운 일을 해내려고 하는' 그 인간과 

전혀 자신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철저히 의존된 이 아이와 
1절에서 현격한 대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누구예요? 의존적 존재라는 거예요. 
스스로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존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된다는 거죠. 
한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무엇인가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 만만함이 있어요. 
그들 안에는 남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그런 자존심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의 자존심이, 아주 죄의 속성이잖아요. 엄청나게 세요. 
웬만해선 이 자존심이 안 꺾여요. 

일평생 자기 자존심을 강화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게, 사실은 인간의 삶의 전부죠. 
여러분 시인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합니다. 

우리를 아기로 비유해요. 엄마의 품 안에 안겨있는 아이는 
어떻게 보면 연약해 보이죠. 
그러나 여러분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상태는, 가장 강한 상태예요. 
왜요? 아기의 존재는 엄마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 안겨져 있는, 인간은 가장 안전한 거예요. 
하나님께 우리의 삶이 온전히 맡겨질 때, 가장 평온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아기는 언제 만족을 얻습니까? 
엄마의 품 안에서 만족을 얻고, 안정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의 품'은 절대적이라는 거죠. 아이에게는 다른 게 필요하지 않아요. 
다른 게 아무 필요 없어요. 엄마의 품이면 충분합니다. 

다른 건 아무리 쌓아놔도 소용 없어요. 
엄마의 품 안에서, 엄마의 젖을 먹으면 충분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내 삶을 맡기는 것보다, 더 충분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엄마의 젖을 뗀 (충분히 먹은) 아이는, 다른 걸 찾지 않아요. 왜요? 충분하니까!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되죠? 우리는 아이처럼 단순해져야 돼요. 

어떻게 단순해지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은 신뢰입니다. 

신뢰하는 사람이, 자신을 내가 맡기는 거잖아요. 
신뢰하면 삶이 단순해져요. 그분을 신뢰하면 되니까! 
그 신뢰가 힘이라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단순해지죠? 그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아이들은 엄마의 눈을 놓치지 않아요. 
시선이 엄마에게 머물러 있다는 거예요. 
아기는 엄마만 의지하고, 엄마만 바라보는 거예요. 엄마에게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엄마도 마찬가지죠. 아기에게 눈을 집중하죠. 눈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에요. 
이것보다 더 강력하게 연결된 상태는 없는 거죠. 

그러므로 아이는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마18:2~3절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단도직입 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어린아이를 주로 미숙한 존재로 취급하는데요. 
그러나 여기에서 어린아이는 무엇을 강조합니까? 

마18: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러분 어린아이는 단순해요. 마음이 복잡하지 않아요.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아요. 
마음이 높지 않아요. 교만하지 않아요.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태도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높아지면,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되는 거죠. 

누가 엄마의 품 안에 안겨져 있습니까? 단순해져야 돼요. 
그냥 안겨 있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인류의 역사에 인간은 끊임없이 도피하는 거죠. 
자신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아버지의 품을 계속 거절하는 거잖아요. 

스스로 드라마를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이 험난해지는 거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나이가 몇이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애기들이에요. 

하나님은 연세가 많으세요. 천만 살도 더 넘어요. 
하나님은 나이가 알려드릴까요? '영원세' 예요. 

그분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신 분이에요. 
그래서 백수를 누려도, 하나님 앞에서는 베이비예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폼 잡지 마세요.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공급과,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해요. 
왜 그토록 염려와 관심이 많아요?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우리는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돼요. 

하나님은 안아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그분에게 안겨야 하는 존재라는 거죠. 

이게 시편 131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거예요. 
이것보다 우선적인 게 없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법을 먼저 배워야 되는 거예요. 
그분의 보호를 받는 법을, 그분으로부터 공급받는 법을 먼저 배워야 되는 거예요. 

아기가 먼저 젖을 충분히 먹고 물리는 그 경험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스스로 자존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신학의 핵심은 
그분의 품에 머물러 있는 훈련이에요. 

그분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하는 훈련,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훈련,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가 안식을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거죠. 
다른 데서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가장 원초적인 관계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작점이 뭐예요?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는 거예요. 
'젖을 뗀' .. 젖을 충분히 먹었다는 뜻이에요. 이게 중요해요. 
여러분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미성숙한 상태로 있는 거예요. 
미숙함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죠.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엄마의 젖을 먹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데 
우리가 충분히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돼죠? 
우리가 해야 될 것은 그 젖을 사모해야 돼요. 

벧전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사모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얼마나 사모합니까? 
배고프면 우는 거예요. 젖 달라고! 
아무도 달랠 수 없어요. 젖을 주기 전까지는, 어떤 것으로도 달래지지 않아요. 

여러분 신앙생활에 우리의 갈망이 뭐이어야 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젖)에 대한 갈망이에요. 이 말씀을 사모해야 돼요. 

여러분 딱 보면 알아요. 말씀을 사모하는 신자와,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신자는 달라요. 
인생이 거기서 결정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신령한 저절로 비유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말씀이 필요해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신8:3

우리에게 말씀이 채워져야 돼요. 돈 아무리 있어도 소용없어요. 말씀이 채워져야 돼요. 
집이 열 채 있어도 소용없어요. 말씀이 채워져야 돼요. 
갈비 아무리 먹어도 안 채워져요. 말씀을 먹어야, 영혼의 갈급함이 채워져요. 

말씀만이 우리의 영혼을 채울 수 있다고요. 
말씀만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다른 것은 안 돼요. 
돈 5만짜리를 베개로 만들어 자면 잠이 잘 올까요? 잠이 더 안 와요. 
아기는, 엄마의 젖이 아니면 만족이 안 된다니까요. 

여러분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오면,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욕구불만이 생기면, 어떤 사람은 먹는 것으로 해결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막 살이 쪄버리는 거예요. 폭식을 막 하는 거죠. 

어떤 사람은 문제가 힘들고 어려우면, 막 쇼핑센터에 가서 막 카드를 긁어버리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까 쌓이면 운동해요. 땀을 흘리고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어떤 청년들, 학생들은 게임에 빠져요.
스트레스 쌓이니까 컵라면 먹으면서 게임을 밤새도록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여러분 욕구가 사라져요? 스트레스가 사라지냐고요? 
아뇨, 더 쌓여요!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데, 스트레스가 더 쌓여요.

▲말씀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도는 다른 방식으로 욕구를 해결해야 돼요. 
만족은 외부로도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말씀을 찾아야 돼요. 신자는 다른 데로 도망가면 안 돼요. 
말씀으로 인해 만족을 누리는 경험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쉼없이 요동치는 나의 내면을 잠재울 수 있는 그것은, 말씀밖에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합니까? 
말씀은 생명이에요. 씨앗이 땅에 심겨지면, 나무가 자라고 수많은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하나의 밀알 안에 생명력이 놀라운데 
말씀은 생명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활력이 있다는 거에요. 에너지, 활력을 줍니다.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우리의 일상 속에 여러분, 우리는 죽은 말들을 날마다 듣고 살아요. 
생명력이 없는 말들... 들으면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말들, 
쓸데없는 말들이 홍수처럼 막 넘쳐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어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감정의 소모가 막 어마어마해요. 
화가 막 나는 거죠. 

또 어떤 말을 들으면, 막 두려움이 주어지는 거죠. 
좌절하게 하고, 실망하게 만들고, 그건 죽이는 말들이에요. 파괴적인 말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들어오면 
생명의 작동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저는 이걸 확실히 믿어요.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나 주시는 겁니까? 말씀을 통해서 만나 주시는 겁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인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낍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느끼는 거예요.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힘을 막 불어넣어 주는 거죠.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막 살아나는 겁니다.             

그냥 울던 아이가 엄마의 젖꼭지를 빨면서 젖을 먹다 보면 
그 아이의 영혼이 그냥 막 살아나는 거예요. 나중에 애가 막 활기가 돌죠.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힘을 얻게 하는 거예요.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겨내는 능력이 말씀 안에 있는 거예요. 

우리의 삶의 내면에 염려, 근심, 복잡해 있었던 내 영혼에
말씀이 질서를 찾게 하고, 안정감이 찾아오게 하고, 불안이 사라지고, 
염려가 사라지고, 결국은 어린아이가 젖을 먹고 젖을 물린 상태의 
그 고요한 상태로 빠져들어가는 거예요. 이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추구합니다. 

말씀이 우리 영혼에 깊이 스며들면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요. 
영혼의 힘이 생겨난다는 거죠. 영혼이 견고해진다는 거예요. 

말씀이 우리 안에 스며들면 우리의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말씀은 존재의 깊은 곳을 관통하면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있어요. 여러분 말씀을 듣기 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거예요. 

▲말씀 속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전에 어떤 분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정신병원 방에 넣어놨는데, 침대가 있는데도, 침대 위에 안 올라가고 
침대 밑으로 들어가 있는 거예요. 사람만 오면 침대 밑으로 들어가고... 

그래서 어떤 분이 봉사를 하는데, 그냥 찾아가서 매일 성경을 읽어주는 거예요. 
한 시간씩 읽어주고 오는 거예요. 봉사하는 게 딴 게 아니에요. 
그냥 성경만 읽어주고 돌아오는 거예요. 뭐 달리 할 일도 없어요. 정신병이 너무 심해가지고... 

그는 사람만 찾아가면 두려워가지고 침대 밑에 숨는데 
봉사자가 계속 거기에 가서 성경을 읽어주는데 
어느 날 부터 침대 밑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을 읽는데, 그 성경말씀이 그 영혼 속에 스며들어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말씀이 들어가면 사람이 변하게 돼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너무 애쓰려 하지 마세요. 
어려우면요. 뭘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말씀 앞에 서세요. 

말씀 안에 생명력이 있어요. 말씀에 생명의 에너지가 넘친다는 거예요. 
여러분, 고통 속에 있던 사람이라도, 말씀이 쫙하고 꽂히면 벌떡 일어나는 거에요. 

문제가 해결돼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의 귀에 들려지고, 
주님의 말씀이 인격으로,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 영혼에 꽂히게 되면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내 삶의 내면에 용기와, 소망과, 위로와, 평안과, 안식과, 만족을 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냥 말씀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엄마의 품 안에 안겨 젖을 빨아 당기는 것 뿐이죠. 
아이가 할 게 다른 게 없잖아요. 철저히 수동태잖아요. 매우 단순하고 단순한 행동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발치 앞에 앉아있던 마리아의 행동과도 같은 거예요. 
주님의 발치에 앉아있는 거예요. 그게 최상의 상태의 모습이에요. 

그게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의 모습이에요. 
그 아기의 주님의 발치에 앉아있는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상태가,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란 말이죠.

▲말씀 속에 충분히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일상 속에 가장 중요한 행위는 묵상하는 삶이에요. 
메디테이션, 묵상하는 삶이에요. 주님의 말씀 앞에 앉아있는 거예요. 
철저히 말씀 앞에 수동태로 있어야 돼요. 

그래서 그 말씀 앞에 앉아, 그 말씀이 내 영혼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아이가 몇 번 젖을 먹고 끝나는 게 아니요. 채워질 때까지예요. 
젖을 뗀 아이는, 충분하게 먹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행위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먹되, 충분히 먹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말씀에 내가 사로잡혀야 돼요. 
그 말씀에 내가 푹 잠겨 있어야 돼요. 
그러려고 하면 머물러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현대인들이 못하는 게 뭐예요?
매일 뭘 한다고 바빠요. 그냥 정신이 없어요. 
말씀 앞에 머물러 있지를 않아요. 주님을 기다리지를 않아요... 

◑131: 3절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러분 영성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바랄지어다' 
믿음생활은 기다림이에요. 무엇을 기다립니까? 

여러분 기다리는 게 소망이죠. 그 소망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는 거잖아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어요.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겁니다. 이게 핵심이죠. 
하나님 안에만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을 두는 게, 언제부터 언제까지요?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러분 시간이 흐르면서 소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망이 아닌 경우가 많아요. *헛된 소망
그렇게 믿고 바라보고 좇아왔는데, 어느 날 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참 소망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헛된 소망, 거짓된 소망에 속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 3절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기다림>

여호와를 기다리라는 거예요. '잠잠히 내 영혼이 그분을 바랄지어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게 뭘까요? 기다림이에요.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를 하려고 하면요. 기다려야 돼요. 
기도 훈련은 딴 게 아니예요. 기다림의 훈련이에요. 

그 기다림을 위해서 뭐가 필요하죠?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왜 현대인들이 기도를 잘 못합니까? 기다릴 줄 모르기 때문이에요. 
기다릴 줄 몰라요. 

오늘날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게 뭐냐면, 기다리는 거예요. 
한국인들은 더 기다리는 거를 잘 못해요.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에요. 

(가게에서 물건살 때) '언제까지 돼요?' 
'한 3일 있어야 됩니다' 
'됐습니다. No, thank you!' 

'언제까지 되는데요?' 
'지금 막 됩니다.' 
'그럼 OK, 살게요'

여러분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 닥달하면 안 돼요.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소통이죠. 

여러분 대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대화를 하려고 하면 
가장 중요한 게 조급하면 안 돼요. 

여러분 현대인들이 대화가 잘 안 되고, 오해가 많이 쌓이고, 갈등이 많은 이유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불통이죠. 왜요? 조급한 거예요. 
기다리지 못하는 거예요. 대화는 없고, 남의 얘기는 들어주지 않고, 내 주장만 하는 거죠.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거잖아요. 

내 주장을 상대에게 강요하잖아요. 
그러니까 소통은 없고, 소음만 있는 거예요.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기도할 때 눈을 감습니까? 눈을 감는 이유는 귀를 기울이겠다는 것입니다. 
경청의 태도죠. '주님 말씀해 주십시오' 

여러분, 눈을 뜬다는 건요. 눈은 아차하는 순간에, 이 눈은 탐욕적으로 변해요. 
이 눈이 참 무서워요. 
우리는 내 눈에 보이는 것을 탐욕스럽게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고 해요.

보암직 하면, 그걸 가지려고 하거나, 거기에 한 눈을 팔게 되죠.
그래서 눈을 감는 거예요. 눈을 감는 게 기도예요. 감아야 돼요. 
이 탐욕적인 눈을 접어야 돼요. 

자 디지털 시대의 재앙이 뭔지 아세요?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거예요. 
끊임없이 눈으로 탐욕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있는 거죠. 

이 디지털 문명이 오늘 우리의 영성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재앙과도 같은 거예요. 
성도는 이것과 싸워야 돼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기다릴 줄 몰라요. 기도를 해도 빠른 응답을 원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굉장히 한국 사람에게는 신경이 쓰이시는 거예요. 
'얘들은 너무 급해..' 

여러분 조급증은 정신병을 만들어내는 요인 중에 하나예요. 
그래서 한국교회에는 그동안 교회 안에도 그런 게 많았어요. 

세 이레 기도회, 40일 작정 기도회, 100일 금식 기도회, 성령 대망 기도회 
이래가지고 일본 말로 쇼부(승부)를 내는 기도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응답 안 하면 나 여기서 죽을 겁니다.' 
이런 태도는 좋은데... 하나님을 몰아가는 거죠. 기다리는게 아니라 강요하는 거죠. 

우리 편에서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에게 그냥 강요하는 분위기예요. 
여러분 여기에서는 우리의 기도를 배울 수가 없어요. 

여기서 우리는 관조적 기도라고 그래요. 
잠잠히 그분의 임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무엇인가 큰 일을 이루려고 하면 그럴 수 없겠죠. 

무엇인가 큰 일을 이루어내려고 하니까 조급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거죠.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너무 닮아 있어요. 
엄청난 대형 프로젝트를 이루어내려고 하는 그 욕망... 나중에 어떻게 해요? 
소진되는 거예요. 탈진, 방전이 되는 거예요. 

목회자도 방전이 돼 있어요. 사역자들, 교인들도 방전(탈진)이 돼 있어요. 
코로나19를 지나니까 사람들이 많이 나가 떨어졌는데, 다시 안 돌아와요. 
방전이 된 거예요. 왜요? 삶이 파괴적이니까 지쳐 있는 거죠. 

여러분 서두르면 어떻게 되죠? 파괴적이게 돼요. 공격적이게 되고요. 
폭력성을 띠게 되고요. 여러분 오늘 세상을 보세요. 얼마나 폭력적이에요? 
굉장히 폭력적이에요. 

사귀던 사람이 절교를 요구한다고,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죠. 
이런 데이트 폭력이 굉장히 많이 일어난대요. 

여러분 사랑이 뭐예요? 기다리는 거잖아요. 사랑은 서서히 익어가는 거죠. 
서서히 익어가는 과정이 필요해요. 사랑은 서두르는 게 아니죠. 
여러분 사랑은 속도전이 아니에요. '빨리빨리'는 사랑이 안 되는 거예요. 

반대로 야망은 속도전이에요. 빨리 끝장을 내리고 하는 거죠. 
그건 사랑이 아니고 폭력이잖아요. 

여러분 아기가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어야 물러납니다. 잠잠히 머물러 있는 거예요. 
여러분 전등하신 하나님은 소진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원토록 충분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라고 하는 그 전능하심 안에는, 충분하심도 들어있는 거예요. 
충분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오늘 2절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고백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