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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릇입니다 (youtube.com)
◈나는 그릇입니다 행9:1~19 2024.05.12.
◑본문 설명
오늘 본문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죠.
사울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셨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그렇게 미워하고 핍박 했던 그 예수님이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계셨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삭개오의 예에서도 보듯이, 예수님은
우리가 믿기 이전에, 먼저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청년 사울이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주님이 적극적으로 그를 찾아가시고,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사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은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스데반의 죽음에 앞장 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살기가 가득했다' 라는 말은 :1
단순한 분노로, 감정적인 반응으로 미워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 분노가 나면,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잖아요.
그런데도 사울이 여전히 살기가 등등 했다는 것은
그 분노 뒤에, 어떤 자기 확신,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정의감,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세계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회심은
단순히 '내가 잘못했어요' 하는 뉘우치는 감정적인 사건 이라기보다는,
세계관이 뒤바뀌는 사건으로 보아야 됩니다.
2절에,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 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회당에 보내는 공문, 혹은 회당과 관련된 공문,
-또 하나는 다메섹 당국자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일 수 있죠. 그러면 외교문서가 되죠.
다메섹은 완전히 다른 나라인데, 유대 대제사장의 공문이 통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자 일 가능성이 높죠. 유대인들의 회당에 보내는 공문일 가능성이 높죠.
그렇다면 사울이 다메섹에 가서, 믿는 사람들을 끌고 오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체포' 보다는 '납치'에 가까운 일이 됩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을 들어보신 분 계시죠? 굉장히 유명한 책입니다.
나치 전범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 아이히만이 붙잡혀서 재판 받는 과정을
미국에 살고 있던 책의 저자 한나 아렌트가 날아가서 관찰하죠. *독일 출신의 유대인
그러면서 '악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저렇게 악한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갖고 인간성에 대한 철학적 진술을 해 나간 책입니다.
1960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붙잡혔습니다.
자기 이름도 바꾸고, 평범한 이민자인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숨기며 살았지만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포착을 하고 지켜보다가
어느 날 저녁에 퇴근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그는 붙잡혔습니다.
모사드가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갔는데
이스라엘은 '체포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납치'에 가깝죠.
체포라면 인터폴이든, 아르헨티나 정부의 협조 혹은 승인 하에서 행해져야 됐는데
몰래 비행기에 태워 데려갔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서 하려 했던 일도, 비슷한 일일 것입니다.
이런 행위에는 유대인 특유의 어떤 정서, 세계관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외교적인 문제, 행정적인 문제가 다소 있으나
'그래도 저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정의의 실현이다' 라는 나름의 확신,
이런 생각 뒤에는 '온 세상의 주권이 우리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뭐 인간 나라의 법은 초월하고 넘나들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죠,
▲사울도 이런 세계관 속에 살았습니다. 나름대로 성경적인 근거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엘리야 라는 선지자가 나오잖아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일거에 죽입니다. 재판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저 우상 숭배자들, 이단들을 처단하는데
좌고우면이 뭐 필요하냐? 하나님 뜻인데... 그 엘리야의 열심!...'
영웅주의에 들떠 있었던 청년 사울에게, 엘리야는 롤 모델이었습니다.
그런 확고한 세계관, 신념이 있었고, 그 신념을 형성한 네러티브(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핵심에 엘리야의 하나님이 있는 거예요.
'누가 뭐래도 천지의 주재는 하나님 이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사울이 거침 없이 주먹을 휘두른 것은, 그 신념 때문이고, 유대교 신앙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사울의 다메섹의 경험은, 자기 신념, 세계관이 무너지는 체험입니다.
단순한 감정적 반응을 넘어서, 세계관의 전환, 혹은 신학적 회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옛날 유대교 세계관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세상이 참 패역하고 불의한데, 반역의 역사인데,
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바로 잡으실 것이다' 라는 거죠.
'의인들에게 상 주시고, 악인들을 벌하시고,
의인들을 부활 시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이 실현되려면, 우리 유대인들이 경건하게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되는데,
그래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정의를 회복해 주실 텐데
그 메시야적 회복을 지연시키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람들을, 사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단하려 했습니다.
그 나쁜 사람들의 핵심에 예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납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여러분 예수가 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있습니다.
부활 사건은... '예수가 옳았다' 라고
하나님이 예수의 손을 들어주신 사건인 거예요.
2:36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부활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정 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옳았다는 것을 보증 vindication 해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너희들은 틀렸다... 라는 보증이기도 하죠.
이게 부활 사건 인데,
그 틀린 쪽에 가장 격렬하게 가담해서 서 있던 사람이 사울이잖아요.
근데 그에게 '예수가 옳았다' 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나타났을 때
사울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밖에 없죠. (그가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거죠)
'이게 뭐지?' 그러면서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이 리폼 re-form 됩니다.
다시 형성되었다는 말이죠. 우리는 '개혁'이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다메섹 사건은
-회심이고
-개인적으로 사명을 받은 소명이고
-개혁, 즉 생각의 재형성 입니다.
이걸 동양 사람들이 표현으로는 '대각 大覺'이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요소들이 사울의 다메섹 체험에 전부 다 들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 사울은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죠.
계속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3일 동안 사울이 뭘 했을까요? 여러분 퍼즐 맞추기 해 보셨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다 맞춰 왔는데, 나중에 보니까 '어 완전히 틀렸다'
그래서 전부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는 엘리야의 '응징하는 하나님'이, 자기 신앙의 핵심이었는데
그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먼저 중심에 놓고
구약 성경 전체의 의미를 맞추어 보는 겁니다.
그 퍼즐 조각들, 즉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벨론 포로기의 예언들,
이사야를 포함한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들... 이런 퍼즐 조각들을 다 맞추어서,
결론을 따져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에 대해서 들었던 것들이 좀 있습니다.
특별히 스데반의 설교를 진하게 들었잖아요.
그러한 도움을 받아서, 조각 조각 모아보니, 완전히 다른 그림이 맞추어 졌는데,
그래서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롬10:2~4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유대인들)이'
'그들'에 사실은 과거의 자기도 포함돼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 너무도 잘 압니다. 그 이유는 '잘못된 열심' 때문이었죠.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사울은 열심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에까지 원정 갔던 그 엄청난 열심!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요. 오히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 하지 않았다, 저항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의'는 복음 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롬1:17
복음이 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거든요.
십자가와 부활, 예수의 삶..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결국 이 불의한 역사 속에,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겁니다.
일하기 시작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사울이 이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앞이 안 보여서, 3일 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사람이 누워 있으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남은 평생 맹인으로 살게 된다는 두려움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사울은, 이전에 못 보았던 것을 보게 되었고,
이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묘하게도 이렇게 (누워) 지내던 3일, 9:3
지금까지 이 부지런한 열심 많은 사울의 인생에,
가장 수동적 이었던 이 3일이, 사실상 가장 생산적인,
가장 위대한 생각의 구조물(기초)이 형성되는 시간이었습니다.
▲3일 후에 아나니아가 찾아왔을 때, 바울의 예수 이해는 웬만큼 완성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나니아와 다메섹 공동체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 결과, 사울은 그 누구보다 더 깊은 이해를 가졌고, 더 큰 확신으로 무장되었습니다.
신약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신약의 절반 이상이 바울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아니라 바울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베드로를 가만히 보면, 갈2장을 포함해서
예수를 3년 동안 따라다녔던 베드로 보다,
예수를 보지 못했던 바울이 훨씬 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이 구약성경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바울 청년이, 진리를 붙들고 씨름하는, 놓치 않는 그 집요함이 있었고요.
그 위에 성령의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구약에 그 많은 지식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가,
본 뜻을 찾아가는 핵심적인 키를 얻게되자, 그게 풀리자..
즉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구약성경 전체의 전모가 드러나는 큰 틀을 잡은 것입니다.
그것이 위대한 바울신학의 탄생입니다.
▲이때 아나니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9:15~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 말씀 중에 두 단어에 집중하십시오.
'택한 나의 그릇' 과 '고난' 입니다.
여러분 지금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이 사울을 만나십니다.
그의 회심 이후에 첫 만남이에요. 첫 부르심을, 사명을 주십니다.
그때 하시는 말씀이 '영광'이 아니라, 어떤 특혜, 축복이 아니라 '고난' 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사업이든 결혼이든, 그와 함께 하려는 첫 만남이에요.
그때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 어떤 남자하고 선을 봤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호강시켜 줄게요. 행복하게 살 거예요.' 그런 말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첫 만남부터 '나랑 살면 고생 많이 할 거예요.'
그러면, 그 남자를 따라 가겠습니까?
대신에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그러겠죠.
'뭐 이런 하나님이 다 있어?' 하는 그런 맥락이에요.
처음 만나면서 '네가 나를 따라오면, 고난 받아야 될 거야'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이 그만큼 자신이 있으신 거예요.
'나를 따라오면 고생도 할 거야, 그런데 따라오는 게 훨씬 좋을 걸?'
그 말씀을 하시는 거잖아요.
바울의 삶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값진 삶, 가장 보배로운 삶,
가장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으로 이끌 자신이 있으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바울도 그것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신, 그 큰 그림을, 구약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부터 말씀하신 거예요.
고난을 이야기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으니까 하신 거죠.
전혀 못 받아들일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 큰 그림 안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나의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5
그릇은 무엇을 담기 위해 있는 거지, 그릇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여러분 처음에 신혼 때, 신혼 부부들이 그릇 살 때면, 예쁘고 화려한 그릇들을 많이 삽니다.
그러다가 살림을 좀 해보고, 요리에 달인이 되면
의외로 무늬 없는 그릇을 많이 산다고 해요. 왜 그렇죠?
그릇이 너무 화려하면, 요리가 죽기 때문이랍니다.
그릇의 기능은, 요리를 돋보이게 하는 거예요.
그릇의 기능은 담기 위한 겁니다.
이때까지 바울은 '내가 갖고 있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인가?'
거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근데 이 날 이후로 바울의 삶은
바로 이 '그릇'이라고 하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 됩니다.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하나님이 만들어 가신다는 거죠.
태초에 우리를 지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으셔서,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어 가듯이
나를 빚어가시는 중인 줄 믿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를 부르신 거예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4:7
여러분 참 놀랍습니다.
우리는요. 비싼 보석, 굉장히 좋은 물건들, 이런 거 보면 우리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전문성이 없어서 까막눈일 때가 많습니다. 그럼 어떻게 판단 하죠?
포장지나 포장한 박스가 멋있고 좋으면, 그 안에 있는 물건도 좋을 것이라고 판단하죠.
세상은 비싼 물건은 좋은 포장지에 담습니다. 이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근데 하나님은 반대로 하시는 것 같아요. '보배를 질그릇에 담습니다.'
그 안에 담긴 게 너무 너무 귀한 건데,
그릇은 일부러 헐렁하게 거칠고 흠이 난 그릇에 대충 담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이 왜 그렇게 일하는지 아십니까?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우리가 어리석어서, 누구의 포장지가 예쁘면,
그 포장지 붙들고 세월 다 보낸다는 거죠.
그 포장지나 그릇에 마음이 혹해서, 그게 전부인줄 아는 거예요.
그 속에 담긴 보배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정말 소중한 보배일수록
질그릇에 담으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인생은, 지금까지는 내가 가진 것으로 승부하고,
내 지식으로 자랑하고, 그것 때문에 뿌듯한...
때로는 우리가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고, 반대로 그것 때문에 위축되고 열등감 가지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릇이나 포장지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보배 Christ 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 인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말씀으로, 오늘 어버이 주일인데,
우리가 어떤 어버이가 돼야 되는가요?
내가 가진 것, 내 능력, 내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 물려줄 수 있는 재산...
그걸로 내가 어디까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가요? 그게 아니라는 거죠.
결국 우리 모두는 그릇일 뿐입니다.
'이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그래서 그리스도를 담는다면,
그것이 우리를 어버이다운 어버이로 만들 줄 믿습니다.
◑<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 이라는 책이 최근에 출간 되었습니다.
독일 도르트문트에 있는 이화정 목사님,
이분의 부모님이 연세가 드셔서 다 아프시고, 치매에 걸리시고, 요양원에 가셨어요.
그래서 고향에 있는 부모님이 사시던 조그만 시골 집,
더 이상 살 일이 없어서 정리하러 갑니다.
다락에서 분홍색 보자기에 담긴 일기를 발견합니다.
30권이 넘는.. 30년 동안, 10950일 동안에 일기를 썼습니다.
30권의 노트가 모양이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노트를 여기서 얻고, 저기서 주워다가 쓰고... 하는 바람에 일기장의 모양이 제 각기 달랐던 거죠.
옛날에 '금전출납부'란 노트를 쓰는 집들이 많았는데,
그거 얻어다가, 그 남은 빈공간에 일기를 쓰기도 했고요.
이면지를 모아서, 송곳을 뚫어서 묶어서 노트를 만들어, 거기에 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볼펜도 구하기 힘들어 하셨던 기억이 되살아 났습니다.
그때 가끔씩 '아들아, 엄마가 죽고 나면, 엄마가 쓴 일기를 보아라' 하셨지만
그 일기를 건네준 적도 없고요. 어디에 있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는데,
집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을 한 거예요.
아들(이화정 목사)은 이 일기를 한장 한장 읽어가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한 번도 하시지 않으셨나?'
'우리 부모님이 가난하신 것은 알았는데, 이렇게 가난할 줄은 몰랐다.
힘든 것은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는 거죠.
'엄마의 일기'를 읽으면서, 아들은 울면서 읽고, 기도하면서 읽고,
반성하면서 읽었다고 합니다.
한 동안은 막 시도 때도 없이 눈물 흘리는 시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어머니는 전남 신안군 매도 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웃 섬 청년과 결혼했는데, 들어가서 살 집도 없고 해서,
목포, 평택, 서울 등을 오가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막 애쓰는데
형편이 점점 더 어려워져요.
하루는 평택에서 남의 밭에서 일을 하다가
경운기 시동 핸들에 장갑이 빨려 들어갑니다.
거기에 손가락이 끼어서 뼈가 부서지고, 손가락을 잘라내게 됩니다.
병원비가 없어서 제대로 치료도 못 받습니다.
타향살이 어려움을 못 이기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그때부터는 염전 일을 하고, 남의 농사 일 도와주고, 김 양식도 합니다.
뭘 해도 시원치 않습니다.
몸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데도, 가난은 더 심해집니다.
하루는 엄마가 몸이 아파서 배 타고 한약방에 다녀 오던 길에,
자기 동네는 교회도 없어요. 중간에 조금 큰 항구 쪽에
'단고리 교회' 라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때 남편이 대뜸 '우리 교회라도 가볼까?'
삶에 너무 어려운 일들이 겹치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를 찾아갑니다.
그날 들어가니까, 교회 전도사님이 손을 붙잡고
'잘 왔다'고 사택에 데리고 가서, 한참 얘기를 나눕니다.
그렇게 교회에 등록했고, 이후로 열심히 교회에 나갑니다.
주일 뿐아니라 새벽기도에도, 한 시간 넘는 길을 걸어서
하루도 빠짐 없이, 꼬마 아들 (이화정 목사) 손을 붙잡고 나갔습니다.
가는 길 중간에는 갯벌이 있어가지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차가운 물속을 지나간 날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남보다 먼저 교회에 가서, 종을 치는 것이 이 가정의 기쁨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작년 봄에 이화정 목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래서 이 일기 이야기를 듣고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제가 꼭 책으로 내시라고 강권했습니다.
책이 출판되어 나왔고요. 제가 많은 목사님들께 권했는데
아마 오늘 전국에서 어버이주일에, 많은 교회들에서 이 책을 얘기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교회 1층에 갖다 놓았는데, 1부, 2부 예배 때 다 팔렸습니다.
이번 수요일 날에, 이화정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실 것입니다.
하루면 다 읽을 수 있고,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습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은 전부 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 가정의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부모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편하게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세요.
이 분의 신앙 간증, 가정의 이야기도 귀하지만,
저는 특별히 '쓴다는 것'의 중요성을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말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굉장히 소중합니다.
자녀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쓰는 습관, 쓰는 문화'는 참 좋습니다.
<문서, 편지, 기록의 힘>
그래서 우리는 2년 전에 <자서전 쓰기 교실>을 만들어서
일부러 자서전을 써 본 적도 있습니다.
자서전을 쓰든, 일기를 쓰든, 자녀에 대한 편지를 쓰든,
뭔가를 남기는 것은 굉장히 좋은 신앙의 유산이고, 내 영적인 습관입니다.
▲위 책에 나오는 몇 대목을 소개합니다.
「오늘 새벽부터 날씨가 좋지 않아서 더 바쁘게 일했습니다.
아무리 바쁘게 일을 해도,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 이 연약한 저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소금 작업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집안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 붙잡아 주시고, 주 안에 살게 하옵소서.
어려운 일이 자꾸만 생기고, 시험 거리가 너무 너무 많습니다.
우리 남편 이 집사, 주님과 더불어 살게 하옵소서.
우리 아들 이 전도사도, 항상 지켜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뜻대로 살고자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느닷없이 당한 교통 사고로 무릎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억울하고 슬픕니다. 어느 누가 제게 위로가 될까요?
사람이 살다가 이렇게 허무한 마음, 허무한 육신이 될 수 있습니까?
'법원 손해 사정 직원'이 찾아왔어요.
제게 '장애 판정 받아서 일을 못하게 되었으니, 사람 사서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했어요.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말라'고 했어요.
「 주님, 저를 도우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붙잡아 주세요.
나의 마음, 누가 아오리이까?
주께서 함께 하여 주세요. 」
이 일기에는, 가난해서 받는 서러움들이 아주 절절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어쩌면 저는 이렇게 서글픈 가난뱅이가 되었을까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부자이시지요.
없는 사람 있게도 하시고,
있는 사람 없게도 하시는 주님!
저는 정말 서러워요. 저는 왜 이렇게 복을 못 타고 났을까요?
몇 시간 동안 눈물이 쏟아져서 것잡을 수 없었어요.
저 같은 여자 만난 우리 남편과 아들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살림살이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주민들은 한복 차려 입고 교회 가는 엄마를 보면서
'옷만 잘 입고 교회 가면, 하나님이 빚 갚아 주냐?' 라고 조롱합니다...
당시 심경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 참 신기하게도 저는 그럴수록 전도할 의욕과 소망이 더 솟아 났어요.
주일 예배 뿐 아니라 새벽, 수요예배에 빠지지 않는 엄마는
교회를 오고 가는 길에 만나는 이웃마다 복음을 전합니다.
집 근처에서, 교회 근처에서, 교회가는 길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엄마의 정도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 엄마는 '평생 처음 교회 간 그 날, 그 전도사님이 나를 환영해 주셔서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내가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감사함을 잊지 않습니다.
늘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도 주의 종 되게 해주세요.' 그게 평생 기도제목 1번 이었습니다.
혹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고, 목사님들 비난하는 말을 들을 때에
그게 그렇 마음이 아팠다... 전하고 있습니다. 」
또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아들이, 능력 있는 자나 연약한 자나
모두 품어 줄 수 있는 목회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돈 있는 자나 없는 자나 한결 같이 사랑해주고 기도해 주는 목회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지, 그 마음을 잘 품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가진 것 없다고 남에게 무시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주고 기도해 주는 목회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궁핍해서 고개를 들고 살지 못하는 이들을 손잡아 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가진 것 없이, 이렇게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우리 아들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잘 따라서, 깨끗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
이 아들 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주의 종들을 향하는 어머니의 기도라고... 저는 받고 싶습니다.
깨끗한 하나님의 종 사도 바울도,
자신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사랑으로 편지했습니다.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사도바울이 처음에 하나님 부름을 받았을 때 들었단 말씀이 '그릇' 인데 9:15
이 말씀을 평생 붙잡고 살다가,
이제 말년에 자기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너는 그릇이다. 깨끗한 그릇이 되어라' 딤후2:20~21
사도바울의 이 당부가,
신안군에 살던 그 엄마의 기도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이 기도는, 하나님이 심어 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기도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서 기도 하시잖아요. 어떻게 기도 하십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자녀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도 우리가 잘 몰라요.
그 기도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해 주시고
그 기도가 열매 맺게 해 주십니다.
이 엄마의 일기 곳곳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숨쉬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고 지켜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에서 주무시고 쉬어가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부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될까요?
언제 주님을 만날까 궁금합니다.
오늘은 비가 주룩주룩 많이 와요.
제 마음 속에 성령이 주룩주룩 비 내리 듯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 이런 간절한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 집에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은 이 가정에 이미 임마누엘 해 계신 거예요.
이미 성령 충만한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나는 질그릇입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밖에 안 됩니다.' 그랬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사도 바울의 삶이 너무 너무도 보배로운 그릇, 보배로운 삶이었습니다.
같은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록 가난 해도, 비록 못 배웠어도,
사랑할 만한 경력이나 지식이 없어도
자녀에게 보란듯이 물려줄 만한 큰 유산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 부모들이 깨끗한 그릇이 된다면,
그 그릇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담기지 않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이, 평생 우리 자녀들 과 함께 하고,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유산이 될 줄 믿습니다.
이 가정의 달에 우리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정들이, 하나님 은혜에 담는 그릇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보배로우신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