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 예수님을 만나다 | 사도행전 9장 1-9절 - YouTube
위 동영상 2분 경부터 녹취~
◈예수님을 만나다 행9:1~9
본문은 핍박자였던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사도바울의 회심사건>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강한 빛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사울이었을 때,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그 사명감으로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고, 그리고 다메섹이라는 곳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들어오려고 가던 길에
하늘에서부터 강력한 빛이 비추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4
그 말씀을 통해서 사울이 주님을 만나게 되죠.
▲이렇게 빛으로 주님을 만나는 이런 은혜를 경험하신 분들이, 꽤 여러분이 계십니다.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 분들도 있고요...
저희 장모님께서도 한 번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당신이 밤에 잘 때, 꿈에서 주님을 만났다'는 간증을 하시더라고요.
문이 이렇게 열리는데 너무나 강력한 빛이 비취더래요.
눈앞에 어떤 것이, 휘장에 쌓여져 있는 것을 보았대요.
마치 주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처럼...
그러면서 '너는 내 것이다' 그런 말씀을 들으셨다고 해요.」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는 꿈이냐?' 제게 그렇게 물으시더라고요.
그때 장모님 생각에는 '하나님이 나를 불러가시려고 하시나?'
그런 생각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장모님이 그렇게 기도하던, 중요한 기도 하나를 응답하시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장모님이 꾸셨던 그런 꿈을, 저도 부목사 때 꿨던 적이 있어요.
「누가 집에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데
'누군가?'하고 제가 문으로 나가려는데
그 문 옆에 있는 틈으로 너무나 강력한 빛이 비춰 들어오는 거예요.
직감적으로 '주님이시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문이 저절로 열리는데, 정말 너무나도 강력한 빛이 비치는데
감히 제가 눈을 들어서 쳐다 볼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냥 제가 그 자리에서 꼬꾸라져서 엎드렸어요.
제 온몸의 힘은 다 빠져나가는... 정말 완전한 탈진한 상태 비슷한...
힘이 하나도 없는 그런 상태에서 제가 엎드려만 있는...
그런 아주 선명한 환상 같은 체험을 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나도 좀 그런 체험을 하면 좋겠는데' 그러실 분이 있을 거예요.
'나도 그런 체험 좀 하면, 모든 의심, 모든 갈등, 모든 마음의 무거운 짐들이 다 사라지고,
진짜 예수님을 잘 믿고, 정말 주님께 충성하고 살 텐데...'
그런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거예요.
▲그런데 오늘 꼭 사도바울이 그런 체험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이 사건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나도 이처럼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을 강력한 빛으로 만나면
신앙생활을 더 잘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런 체험이 없어서,
나는 예수를 믿어도 좀 이렇게 방황하고 뜨뜻미지근하게 예수 믿는다' 하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빛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요1:5절에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3:19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강력한 빛으로 주님이 나를 만나 주시지 않아서,
내가 지금 신앙생활을 뜨뜻미지근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은 이미 빛 가운데, 너무나 강력한 빛 가운데,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님 당시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요6:36절에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좀 만나면... 그러면 내가 정말 신앙생활 잘 할 텐데...
내 마음에 답답함과 의심이 다 사라질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우리가 읽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도) 믿지 않는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사도 바울도 이날 예수님을 만난 건 아니었어요.
그 전에 청년 사울이 이미 예수님을 만났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을 만났을 때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었어요. 예수 믿는 교인들을 핍박한 거예요.
사울이, 교회와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셨어요.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성도들을 핍박한 것을, 예수님은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교회를 향한 핍박을, 예수님은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을 핍박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다만 자기가 몰랐던 거죠.
그런데 그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눈이 열렸던 거예요.
그 예수님을 비로소 바라보는 눈이 뜨였던 겁니다.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있어요.
우리는 늘 예수님과 함께 삽니다.
예수님 없이는 설명이 안 되는 삶을, 이미 우리는 살고 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을 나는 아직 못 만났다.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면 좋을 텐데...'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눈이 뜨이지 않은 거지,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역사를 안 하고 계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애통하고 또 고통스러울 거예요.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면서,
못할 말을 하고 살았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고 살았던 일이
너무 많았던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만나 뵐 때 너무 고통스러워 할 거예요.
우리는 아마 주님께 그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제가 몰랐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함께 계신 것을 제가 정말 몰랐습니다.' 아마 그렇게 이야기하게 될 거예요.
▲여러분 오늘 말씀을, 사도바울이라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주 특별한 체험을 했던 기사다.. 라고만 읽으면 안 돼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건 남의 이야기, 사도바울 이야기지...'
그렇게 성경의 책장을 넘겨버리면 안 돼요.
사도바울이 핍박자였어요.
'도대체 나 같은 사람이 사도바울처럼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데 사도바울은 핍박자 였어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스데반 순교의 주동자였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바울에 비하면 너무 착해요. 정말 너무 착한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에게도 이런 은혜를 주셨다면, 여러분에게는 더한 은혜를 주시죠.
당연히 그렇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정말 오셨어요.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세요.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교회가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한 것이라.. 그렇게 받으셨어요.
그 말은, 지금도 똑같아요.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이는 이 교회가 정말 예수님(또는 예수님의 몸)이구나' 그 눈이 뜨여야 합니다.
우리가 (비욘드교회의) 새 예배당을 지금 준비하고 있는데, 참 하나님의 은혜죠.
제가 생각해도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예측이 안 되는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러나 이 일 속에는, 우리를 여러 가지로 힘들게 하는 일들도 동시에 따라옵니다.
이제 인테리어 공사도 하고, 또 예배처소도 옮겨가고,
예배처소가 커진다는 말은 '해야 될 일도 많아진다'는 거고,
이 일 속에 또 필요로 하는 일들, 재정의 문제나 봉사 문제나
여러 가지 일들이 같이 따라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꼭 기억하셔야 돼요.
눈에 보이는 일들 하나하나, 힘들고 어려운 일들에 반응하다 보면
맨날 불평과 원망 나올 일밖에 안 돼요.
그런데 '아~ 주님이 역사 하시는구나' 그 점을 주목해서 봐야 돼요.
'주님이 하시는 일!'
사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 교회 안에, 주님의 역사가 있어요.
우리 눈에는 지금 주님은 안 보이시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예수님이 와 계시고,
우리를 이 교회로 모아주시는... 주님의 역사가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잖아요.
찬양 인도하고, 안내도 서시고, 영상과 음향도 섬기시고...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도록 주차 안내나 봉사도 하시고...
이렇게 하시는 그분들이 각각 다 '주님'이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어떤 일을 하든지, 주님이 하시는 일을 주목해야 돼요.
그러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참 많지만, 불평과 원망이 없어지고
정말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되고,
그리고 지나 놓고 보면 주님의 역사가 더 강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이 본문을 가만히 주목해 보면, 주님이 참 이상한 일을 하세요.
사도바울을 그렇게 놀랍게 만나 주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러면 사도바울에게 하실 말씀을 직접 다 하셔야 되잖아요.
그날 그렇게 만나 주셨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빛으로 강하게 사도바울에게 딱 만나 주시고는,
'이제 너는 아나니아를 만나라' 그렇게 말씀하세요.
'아나니아가 이제 네가 할 일을 다 가르쳐 줄 거다.'
그리고 주님은 또 아나니아 에게 찾아가세요.
'너는 직가 라는 거리로 가서 사울을 찾으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지시한 내용을
다 그에게 말해주라'
그래서 실제로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서 만나게 되는데,
아나니아로서는 정말 가슴 떨리는 일이에요.
왜냐하면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를, 당시에 다메섹 교인들은 다 알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잡아 죽이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나라는 거예요.
아나니아로서는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주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시니까 가서 사울을 만나고,
그리고 그에게 안수하니, 사울의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비로소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사울에게 들려주었어요.
'이제 사울이 어떤 고난을 당하게 될 건지...
앞으로 어떤 어려움 중에 사명을 감당할지를...' 다 전달했어요.
사도 바울은 앞으로 자기가 고난을 받으면서 사명을 감당할 것을,
그날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에겐 더 이상 고난이 문제가 되질 않아요.
고난을 받을 거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아나니아가 세례를 주는데...
예수님이 직접 하시면 되지... 왜 아나니아를 통해서 일하시느냐 말이에요.
이유는 하나예요. 사울을 그때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와 초대교회의 공통체 속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였어요.
사도 바울이 워낙 특별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고 강력하게 복음전도자가 되긴 했지만
문제는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없었어요.
그때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 바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 일을 하시고,
바나바를 통하여 또 그 일을 하십니다.
교회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냥 주님이 직접 만나서, 모든 거를 다 말씀하시고 (아나니아를 거치지 않고)
'이제 너는 내 종이야! 그러셔도 될 일을,
굳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되어지는 일로 만드십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거니까요.
▲주님은 지금도 그렇게 하세요.
마18: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교회로 모인 바로 이 자리가,
그대로 주님을 만나는 그 자리예요.
여러분이 이 사실에 대해서 눈이 뜨이면,
비로소 (교회 속에서) 신경 안 쓸 일과, 진짜 중요한 일이 구분이 돼요.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많이 나오고...
마음에 드는 사람/ 안 드는 사람도 생기고...
하여튼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요.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서 섬기다 보면, 정말 신경 쓸 일이 많아요.
'차라리 이렇게 시험들 일이 많을 바에야, 혼자서 예수님 믿는 게 좋겠다'
그런 말이 나올 만해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 뜻이 아니에요.
여러분에게 그런 마음이 들 때, 마귀가 유혹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교회를 떠나라. 이제는 혼자서 예수 잘 믿어라'
여러분 시험도 많고, 문제도 많은 것 같은 그 교회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되고, 세례도 받게 되고, 전도도 하게 되는 일입니다.
이따금 여러분도 들으실 거예요. 어떤 목사님이 큰 추문에 휘말리고
어떤 교회가 큰 문제, 시험거리가 있고
'그러니 정말 교회는 믿을 데가 못 되는구나, 갈 데도 못 되는구나' 생각하기 쉽지만
그래도 보세요. 그런 교회 공동체가 있으니까
모여서 전도도 하게 되고, 같이 예배도 드리게 되고, 그리고 세례도 받게 되고
어린 아이들이 그래도 어릴 때부터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왜 교회에 부족한 게 많은데도,
그렇게 지난 2000년 동안 계속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셨느냐?
우리가 잘 알아야 돼요.
▲우리에게는, 사도바울처럼, 강력하게 빛으로 주님을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도바울에게 이렇게 강력한 빛으로 만나 주신 이유는
사도바울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일에는, 그런 (다메섹의) 역사가 필요했던 거예요.
사도바울은, 예수님 믿는 사람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어요.
그런 사도바울이니까, 눈을 열어서 주를 바라보는 체험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사도바울에게 분명히 믿게 해주시려고... 그런 체험을 주신 거예요.
또 예수님만이 참 생명의 길이고,
십자가를 지는 사명의 길이 진짜 복 있는 길임을
사도바울이 정말 믿게 하려고... 그럴려면 이런 체험이 사도바울에게는 필요했었어요.
그래서 그날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강력한 빛으로 주님이 만나주셨던 거예요.
그리고 사도바울의 이 회심을 통하여,
어떤 사람도 십자가의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음을, (사울 같은 사람도 변화된 것을 보니)
'사울조차도 예수 믿고 사도가 되었대.. 그러면 예수 못 믿을 사람이 없네..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사람이 없네...' 그렇게 증거하게 하시려고
사도 바울을 회심시킨 거예요.
우리에게는 굳이 (다메섹 체험을 주실) 필요가 없는 이유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다 믿으시죠? 네!
그거 봐요. 다 믿으시는데, 굳이 또 주님이 강력한 빛 가운데 나타나서
우리 눈을 멀게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예수 믿는 길이 삶 생명의 길인 걸 다 믿으시죠?
사명의 길이 진짜 복된 길임을 믿으시죠?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걸 믿으시죠?
여러분은 이미 청년 사울보다 더 놀라운 체험을 하신 거예요.
우리는 이미 믿고 있는 그 내용을, 청년 사울은 믿기가 참 어려웠던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에게는 그런 강력한 체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다 믿으면서도 계속 '나도 좀 보게 해주세요.
나도 좀 이렇게 꼬꾸라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그렇게 나가면, 잘못된 신앙으로 갈 수밖에 없는 미혹에 빠집니다.
강력한 체험, 더 강력한 체험.. 그런 걸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가면,
영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길로 가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이 내게 청년 사울보다 더 큰 체험을 주셨구나!'
이 사실을 믿음으로 취하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해요.
'목사님, 그래도 그런 은혜를 내가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내가 믿음으로 살아지지 않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놀랍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내가 살지 못하는데...
그러니 뭔가 체험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도,
실제로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놀랍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체험이 우리에게 아주 작기 때문이 아니고,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 것을,
내가 진짜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아무리 체험이 커도, 결국은 우리가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 이 엄청나고 놀라운 은혜에
내가 믿음으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면
그 체험이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고후4: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도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믿는 예수님, 이 신앙을 '보화'라고 그렇게 표현을 하셨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팔고 그 보화를 샀다' 그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진짜 보배이신데, 우리는 보배라고 여기지를 않는 겁니다.
이건 이제 우리들의 문제예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데, 그 예수님을 보배라고 여기지 않는 신자들...
▲ <하나님이 당신에게 윙크할 때>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참 매력적이에요.
그 책 제목이 너무 제 마음에 확 와닿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그동안 제게 윙크하셨던 그 순간들이 많았구나!'
어떤 때는 주님이 '내가 너를 주목하고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와 늘 함께하고 있어'
그런 싸인을 저에게 주셨던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나에게 윙크하시는...
윙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로는 좀 경망스러운 일이긴 해요.
어린애들한테 잠깐 윙크하는 일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그렇게 누가 나를 안다고.. 나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눈웃음을 할 때는 너무 좋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제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제가 페이스북에 그 글을 올렸어요.
"<하나님이 당신에게 윙크할 때>라는 책이 있는데
정말 하나님은 그동안 제게 여러 가지 경우에서
그렇게 윙크하시는 그런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페이스북 글에, 댓글을 다신 한 분이 굉장히 언짢은 반응을 하셨어요.
"그게 하나님의 윙크인지 /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그래도 많은 분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이 있는 분인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 답글을 보고, 제 마음이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여러분 한번 대답해 보세요.
-'내가 너에게 언제 윙크했냐?' 하나님이 그러시겠어요? or
-'내가 그렇게 네게 많이 윙크를 했는데도 (못 깨닫다가) ... 이제야 깨달았니?'
하나님은 어느 쪽이실까요?
-하나님은 '내가 네게 윙크한 적도 없어. 그런데 뭘 윙크했다고 설레발이냐?' 그러시겠어요?
-아니면 '내가 너에게 얼마나 윙크를 많이 했는데, 이제서야 그걸 깨달았니?'
네 후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동안 계속 말씀하시고, 싸인도 주시고
'내가 너를 좋아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두려워하지 마!' 그렇게 하셨음에도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거예요. 그게 우리들의 문제죠.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좀처럼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한 번은 교인들 심방할 때, 대심방 선물을 하나 만들어 드리기로 했는데
그때의 선물이 <예수님의 근엄한 얼굴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서
성도들 심방 갈 때, 각 가정에 선물로 드렸어요.
저는 '교우들이 굉장히 좋아하시겠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아주 잘 그린 성화 액자를 선물로 드리니까요.
그런데 교우님들의 반응이 너무 의외였어요. '무섭다' 였어요.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액자 선물을, 거실에 걸어놓고 보니 '너무 무섭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액자를 창고에다 걸어놓은 분들도 있고, 뒤집어 놓은 분도 계시고...
주님이 이렇게 그 액자속에서 쳐다보시는 눈이 너무 무섭다는 거예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혹시 술 마실 때였나?'
하여튼 교인들이 너무 두려워하는 것을 느끼고, 제가 너무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것을,
사진으로 보면서 우리가 늘 상상하자' ...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진짜 주님은 실제로 우리와 함께 계시거든요.
만약 예수님 얼굴 액자가 무서우면... 우리 삶을 바꿔야 되는 거죠.
그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죠.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에도
그것을 실제로 내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에게 더 큰 체험이 필요한 게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 은혜에 대한 정당한 반응, 진짜 믿음의 반응이 필요했던 거예요.
▲미국의 유명한 설교학자인 스티븐 로슨이
'예수님 때문에 당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당신이 만났던 예수는 다른 예수다.'
C S 루이스는 '삶에 변화가 없는가? 그렇다면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않았다.'
우리가 이미 예수님을 다 만났고,
만난 정도가 아니고 우리 안에 오셨음에도
우리의 삶에 사도바울과 같은 극적인 변화가 없는 이유는
체험이 작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진짜 반응을 안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이 내 마음에 거하신 것이 진짜 믿어지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오직 예수님! 반드시 예수님! 항상 먼저 예수님!' 이런 태도가 돼요.
'예수님의 사람' 제자훈련이 끝나고 수료식 때, 어느 교우가 그런 간증을 하시더라고요.
자기가 '예수님의 사람' 제자훈련을 받고, 가장 은혜 받았던 부분이 이 단원이었다는 겁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
한마디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정말 계시다면, 죄 짓는 것이 어려워야 맞다고 하신 말씀은
이전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며 살았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란 메시지는, 하루 종일 묵상거리였습니다.
그날 이후 계속 무언가를 할 때마다 '예수님, 제가 해도 되나요?' 라고 묻게 되었습니다.
물론 순간순간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시간들도 있었지만
계속 다시 의식하며 예수님과 하나된 삶을 살기를 날마다 결단하고 있습니다.」
이게 믿음의 제대로 된 반응이죠.
그래서 <예수 동행 일기>를 쓰게 되기도 한 거예요.
'그냥 그렇게 믿으십시오!' 이렇게만 하고 끝내서는,
(성도의 삶의 변화가) 안 되는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고
'매일 내가 얼마나 믿음으로 주님께 반응하고 있는지'를, 일기로 기록해 보시라고 한 거예요.
▲김하중 장로님은 대한민국의 최 장수 중국대사입니다.
그렇게 오래 중국대사를 지내신 분이 없어요.
우리나라 외교사에 하여튼 대단한 분이신데,
그분이 김대중 대통령의 외교안보수석 비서관이었을 때,
그는 항상 대통령에게 결제를 받으러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철저하게 지켰어요.
'대통령의 결제인데 하나님이 역사해 주세요.
대통령에게 바른 판단도 주시고, 분별도 주시고...' 항상 그런 마음으로 먼저 기도했어요.
우리나라 외교가 참 어렵습니다. 중국, 북한, 일본, 미국 그 사이에서... 지금도 그렇죠.
김하중 장로님이 그 가운데서 아주 탁월하게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기도였어요.
한 번은 김대중 대통령 비서관으로 있을 때, 급하게 어떤 일을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결재를 맡아야 되는데, 너무 급하다 보니까, 대통령 앞에 섰을 때 '아차, 기도를 안 했다'
이런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내가 기도를 안 하고, 지금 대통령 앞에 결재판 서류를 내고 있구나'
그래서 그때 '이거 어떻게 해야 되나?' 하다가 전광석화처럼 이렇게 말을 했대요.
'각하, 제가 깜빡 잊고 가지고 오지 못한 게 있습니다.
잠깐 제가 사무실에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 자리를 물러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업무를 위한 기도를 몇 분간 잠시 하고, 다시 똑똑똑 노크하고 들어가서
결재서류를 올리고, 결재를 받았다는 간증을.. 그분의 책에서 했습니다.
우리가 진짜 주님 앞에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거예요.
'항상 주님 앞에 먼저 묻고, 항상 기도하고 응답 받고,
항상 주님을 의식하고, 무슨 말이든 무슨 행동이든지 그렇게 해야 되겠다...'
그렇게 해야 돼요.
▲사도바울은 행9:9절에 보면, 예수님 만나고 완전히 사람이 뒤집어집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다..' 충격이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극적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저도, 예수님의 제 안에 계시다는 사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이 복음을 알고 난 다음에, 그런 비슷한 충격을 받았어요.
굳이 예수님을 그렇게 강한 빛으로 보아야만, 사람이 충격을 받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진짜 '지금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다'
이 사실을 정말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여러분의 인생은 이제 옛날의 삶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이 사실을 반드시 믿고 살리라!'
그때부터 어떻게 옛날처럼 살아요?
여러분 별의별 충동도, 욕구도, 생각도, 여러분 안에 많이 일어나요. 그죠?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겠어요?
주님이 이제 내 안에 계시고, 내 왕이신데...
제게도 똑같은 역사가 있어요.
'제 삶이 바뀌는 것이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정말 믿어요.
그때 진짜 믿기로 결단하고...
몇 번 그 믿음이 또 흔들리고 흔들릴 때가 왔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믿음으로 일어서고... 또 믿음으로 일어서고... 했습니다.
때때로는 성경을 묵상하다가
'진짜 정말 주님이 내게 이 말씀을 하시는구나' 깨달아진 적도 있었고
어느 순간에는 기도하다가 통곡을 하고 울게도 되고...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았는지 깨닫고,
마음 깊은 곳에서 회개도 하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게 믿어지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게 너무 믿어지고...
그러니까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나만 들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일들도, 제게 있고...
그렇게 주님이 이끄시더라고요.
여러분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세요.
우리는 사도바울이 체험했던 그 체험을, 그대로 사실 (오늘날에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진짜 그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또 순종하고 나가기 시작하면
강력한 빛으로 주님을 만났던 사도바울의 그 삶을, 우리도 그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빛으로 (한 번) 만난 게 아니고, 빛 가운데서 (계속) 살아요.
요3:20~21절에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아멘
우리는 계속 빛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비홀드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교회가
마치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난 그 은혜의 체험을
분명히 하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