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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을 찾아 가신 예수님

LNCK 2024. 5. 15. 12:0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부르심, 소명>

 

2022 07 24 / 사도행전 강해 (34)  / 사울을 찾아가신 예수님 (youtube.com)

사울을 찾아 가신 예수님                행9:1~9

※급하게 보실 분들은, 맨 아래 단락 ◑9:8~9절을 보십시오.

 

▲도입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장면입니다. 바로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작업이 하나 있는데요.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본문의 장면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핵심 구절은 1:8절이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 순서대로  사도행전의 행적이 펼쳐집니다. 

1) 예루살렘 과 온 유다 : 행1~7장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습니다. 그들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 집니다. 
예루살렘 과 온 유대에 복음이 증거되는 거죠. 

2) 사마리아 : 행8장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 이야기가  8장부터 시작됩니다. 
그 스토리의 중심에는 빌립이 있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 결과 사마리아에도 교회가 세워졌죠. 

3) '땅 끝'   행9장~

그 다음 순서는, 1:8절에 의하면,  남은 곳은 '땅 끝'입니다. 
'땅 끝'은 이방인 지역이죠. 이 '땅 끝'에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가 본문인 9장부터 준비 됩니다. 

그러면 땅 끝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인물은 누구인가요? 
그 주인공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사울이죠.
오늘 본문 9:1~9 에서,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할 새로운 인물인 사울을 준비시킵니다. 

우리는 사울을 이미 만난 적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순교의 현장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을 주도했던 자입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죽인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배후에서 조정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 스데반의 죽음을 시작으로, 사울은 전면에 나섭니다. 
는 맨 앞에 앞장서서, 초대교회의 탄압을 주도했는데요. 

어느 정도로 사울이 교회를 박해했느냐? 
앞에서 누가는 '큰 박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8:1

여기서 '큰'은, 헬라어나 영어로 '메가'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메가톤 급의 박해를 사울이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사마리아 와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것으로도 만족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 본문에 사울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을 하죠?

◑9:1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등등하여'는 헬라어로 엠프네오, '숨을 헐떡이다' 라는 뜻인데요. breathing out 
배고픈 짐승이 먹이를 발견하면 숨을 거칠게 내뿜지 않습니까. 
우리 말로 '씩씩거린다'고 표현하나요? 그 단어가 지금 사울에게 쓰이고 있습니다. 
위협과 살기로 숨을 내뱉듯 헐떡거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사납고 잔인한 맹수처럼 사울을 표현한 것입니다. 
먹이는 누구예요? 주의 제자들입니다.
지금 사울은 마치 맹수처럼, 주의 제자들을 잡아먹기 위해 
숨을 거칠게 내뿜으면서 씩씩거리면서 좇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다 잡아 먹겠다는 거죠. 
마치 먹잇감을 좇아 끝까지 추격하는 맹수처럼 
주의 제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라도 찾아가 잔멸하려고 했습니다.

◑9:2절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다메섹으로 원정을 떠납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 까지는 248 Km 입니다.

그러니까 시간 상으로는, 걸어서 약 52시간이 걸리는데, 
하루에 40킬로씩 강행군해서 걷는다면, 6일이나 걸리는 거리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이곳으로까지 흩어진 것입니다. 
특히 이 다메섹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약 4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다메섹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 정말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던 거죠. 

그만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어디 보다 안전하고 피하기 유리한 곳이 
다메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또 사울이 모를 리가 없었겠죠. 
다메섹의 소문이 사울에게 들렸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으러 사울은 다메섹까지 좇아 갑니다. 

그 정도로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사울이 지금 미쳐 있었던 거죠. 
그래서 사울은 다메섹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얻기 위해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이 공문은, 오늘날의 체포 영장과 같은데요. 
이 공문을 가지고 가면, 외국으로 도피한 유대인들을 체포해서
 본국으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체포 영장을 가지고 사울은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이 사울을 찾아오십니다. 사울이 주님을 만납니다.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 거죠. 

◑9:3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주님이 사울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시각적으로 나타내 보이시고(:3), 또 하나는 청각적으로 나타내 보이십니다.(:4)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사울에게,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비춥니다. 
그런데 행22장에 보면, 이 시간이 정오 때였다고 말합니다. 

낮 열두 시에는, 핸드폰 플래시를 키면 후레시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태양 빛이 워낙 강하고 환해서, 플래시의 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비췬 빛이 얼마나 강하고 환했는지, 
제일 밝을 때인 정오인데도, 사울은 그 빛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빛이 강했는지, 바울은 그 자리에서 바로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청각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요. 

◑9:4절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청각적으로도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7절을 한 번 보십시오. 
사울과 같이 있었던 일행들이 있습니다. 
아마  붙잡으러 왔으니까, 성전 경비대(대제사장 부하들)이었을 거라고 말하는데요. 
그러나 이 일행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그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는 못한' 거죠.               주1)
이건 오늘날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똑같이 지금 교회에 모여서 함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겐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 사람은 설교를 통해 믿음이 생깁니다. 설교 가운데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죠.
성경말씀이나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말소리는 들리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주님은 만나지 못합니다. 
똑같은 소리를 듣는데도 결과가 다른 거죠. 

이런 일이 오늘도 교회 안에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만나주시고, 구원 하시는 역사는 어떻게 일어나는가요? 
목사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게 하심으로... 그의 구원은 일어납니다. 

▲제가 군대에서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때는 설교를 들으면, 그렇게 제가 잠을 잤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잤습니다. 

그런데 제대하고 교회를 나가게 됐는데요. 
어느 날 설교를 듣는데, 하나님의 음성 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영혼에, 마음에 들리더라고요. 
그러니까 제 마음에, 하나님이 옆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와서, 제 마음에 박히는데요. 꽂힌다고 하죠. 
하나님이 제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분명히 목사님의 소리인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렸던 거죠. 

그때 '아~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 안에도 동일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울과 똑같은 체험을 한 건 아닙니다. 
우리도 정오에, 주님이 비춰주시는 물리적인 빛을 본 거는 아닙니다. 

그러나 , 우리도 구원을 받았다면, 다 이 빛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 빛을 다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 증거가 고후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우리에게도 이 빛을 비추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고후4:6)을 지금 누가 하는 거예요? 

본문 행9장에서 빛을 본 사울이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이 빛이 동일하게 비춰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깜깜한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춰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이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어둠으로 덮여있는 우리의 깜깜한 심령 가운데 
이 빛을 비춰주심으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 하나님께서 어두운 심령을 걷어내어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시고 
진리의 음성을 들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사울과 같은 동일한 회심, 동일한 거듭남, 동일한 믿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정말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셨구나.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 우리에게도 사울과 같은, 동일한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이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도 사을과 같은 이 회심을 경험한 자입니다. 

그러니 '나도 사울과 같은 영적인 체험을 한 번 해보고 싶다'
이렇게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거죠. 
우리도 동일하게 이 빛을 경험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구원받은 우리가, 큰 체험, 큰 은혜를 받은 자입니까? 
오늘 바울의 일행도 똑같이 듣고 보았습니다. 
자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사울은, 빚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을 보았고요. 
그 소리 가운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이고 주권적인 구원의 은혜 였던 거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죄인을 만나시고, 구원 하시는 역사는, 이렇게 일어납니다. 

오늘 바울에게 일어난 이 구원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사울에게 비춰진 하늘로부터 비춰진 빛, 
고린도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두운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구원의 빛, 진리의 빚, 믿음의 빛 우리 모두에게 비쳐지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9:4~5절에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유의해서 볼 점이 있습니다.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장면도 흥미로운 대목인데요. 
사울은 주님을 박해 한적이 없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미 승천하신 상태이고,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승천해서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사울이 박해 한 대상이 누구죠? 9:1절에 '주의 제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남기고 간 교회이죠. 사울은 교회를 핍박을 했지, 주님을 박해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하시죠?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사울은, 나중에 엡1:23절에서 교회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죠.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 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교회는 한 운명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몸과 머리'의 구조는 굉장히 특별한 구조입니다. 
몸과 머리는 때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죠. 

좀 극단적인 예이지만, 이해하고 들어주세요. 
제가 손이 잘렸습니다. 
그러면 '잘려진 손'이 저입니까, 아니면 '남은 몸'이 저입니까? 
'남은 몸'이 저예요. 

제 다리가 잘렸어요. 
그러면 잘린 다리가 저입니까? 아니면 남은 몸이 저입니까? 
남은 몸이 저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잘렸습니다. 
그러면 잘린 머리가 저 입니까, 아니면 남은 몸이 저 입니까? 
둘 다 '저'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잘리면, 둘 다 죽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스스로 '내가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신 것은,
교회와 예수님께서 한 몸임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교회와 더불어서 자신과 공동운명체 라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여러분이 교회를 버린다면, 
여러분 스스로를 그리스도와 떼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와 예수님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화 : 교회의 알맹이                    주2)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지금 사울은 완전히 뒤집혀진 상태입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주님으로부터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주님으로 부터 배울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울에게 직접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어떻게 하시죠?
9:10절에 보면 아나니아 라는 제자를, 사울에게 보내십니다. 
아나니아 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하십니다. 

칼빈은 이 부분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직접 가르치지 않고, 아나니아를 보내신 것은 
교회 사역의 존귀를 더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사울을 가르칠 수 있으셨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구약성경을 가지고, 사울에게 가르칠 수 있으십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성경을 풀어 주신 것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구약 성경을 펼치면서, 가르쳐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사울이 아나니아를 통해, 교회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하십니다. 
교회에 사울을 위탁하신 거죠.  

이것이 주님이 오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신앙을 위해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의 신앙을 위한다면, 교회를 절대로 떠나서 안 됩니다. 
승천하는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에, 성도들을 위탁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해 주님은 지금도 가르치고 계십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우리의 신앙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갖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칼빈은 이렇게 얘기했는데요. 
'어머니 같은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사함을 받거나 구원을 바랄 수 없다'
그러므로 '나 혼자 산다'(TV프로)는 있어도, '나홀로 신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사울에 게 '네가 왜 나를 박해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자신과 교회를 동일시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버린다면,  스스로를 그리스도로 부터 끊어내는 일과 같습니다...  중략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 오늘 본문을 보면, 1절과 9절이 대비됩니다.
저자 누가의 의도적인 배치라고 보는데요. 

1절에서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으로 향해 나아갔습니다. 
마치 맹수처럼,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 처럼 날뛰면서, 씩씩거리면서 다메섹으로 갔던 거죠. 

그런데 9절에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그렇게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주님을 만나고서 완전히 구부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살기가 다 빠진 거죠.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 처럼 힘이 다 빠져서 
고꾸라져 있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2) 또 하나의 대비는, 2절과 8절입니다.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여기서 주목할 표현이 있는데, '잡아오려 함이라'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갔습니다.   *아고, to lead, to condust, to bring

그런데 잡힌 자가 누구죠?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8절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에이스+아고

여기서 누가의 재미있는 워드 플레이가 나오는 거죠.   *아고 - 아고
여기 보면 막상 끌려간 자가 누구예요? 사울 자신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갔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손에 붙잡힌 자가 되었습니다

자 이때부터 사울은 십자가의 원수에서 → 십자가의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훼방하는 자에서 → 복음의 일꾼이 되었고요.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에서 →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사울의 삶은 180도로 변합니다. 
이때부터 사울은 이방인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왜 이제서야 주님이 사울을 찾아오셨는가요?

하나님은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사울을 선택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방인의 사역을 위해서 바울을 찍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왜 이제야 사울을 찾아오셨는가요?  
이왕 찾아오시려면, 언제 찾아오는 게 가장 좋죠? 
스데반을 죽일 때 찾아 오셔야 더 좋지 않겠습니까?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려 할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때 스데반을 찾아오셨으면 더 좋지 않습니까? 

사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스데반을 죽인 사건이, 복음을 증거 하면서도 
얼마나 사울의 입장에서 뼈아픈 과거로 남았겠습니까? 

실제로 사울은 나중에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 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의 이면에는 스데반을 죽인 사건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내가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 했다'는 죄책감이, 사울에게 있었던 거죠.  

혹시 <바울>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거기에 보면  바울이 꿈을 꾸는 장면이 있어요. 
근데 꿈에서 누가 나오냐면, 자신이 핍박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놀라서 잠에서 깨는 데요. 
바울 자신도 그 사건을, 쉽게 잊지 못하는 거죠. 

자 그러면, 예수님이 어차피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실 거면, 
좀 더 일찍 스데반을 죽이기 직전에 찾아와야 하지 않습니까?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지 않았다면, 
사울이 사도로 일하는데, 훨씬 더 떳떳하고, 훨씬 더 자랑할 게 있지 않습니까? 

자 그러나 여러분, 그게 아니더라고요. 
스데반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성경의 바울이 있었던 겁니다.  
이후에 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 어디에도 바울의 자랑과 교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15:9 '나는 사도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우리가 아는 바울이 누구예요? 신약성경을 13권이나 저술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고요. 수많은 사람을 회심시킨 사람입니다. 

신약의 대표적 지도자를 꼽자면, 원 탑은 항상 바울일 거고요. 
그래서 그런지 영어 이름 중에도 폴(바울)이라는 이름도 굉장히 많이 있죠. 

그런 그가 자신을 뭐라고 말하죠?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도로 칭함받기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표현 하나,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이 없습니다. 
자신을 은근히, 은밀히 자랑하는 표현이 없습니다. 

'내가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 신약교회가 세워졌다' 그런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내가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이 고백의 한 가운데 뭐가 들어가 있냐면, 바울의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고백이죠?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즉 '나는 스데반을 죽였으므로' 

이 과거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자랑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겁니다. 
스데반을 죽였던 과거의 사건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일깨웠던 것입니다. 

자 그래서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내가 누구보다 가장 못 났기 때문에 나를 불렀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나를 보면서, 누구나 다 소망을 갖게끔 하기 위해 나를 부르셨다. 

나를 보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가?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이신가? 
얼마나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신가? 를 알수 있게 나를 부르셨다. 
바울이 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딤전1:12~16절에도 또 나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 16절을 보십시오.
'나 같은 자가 구원을 받았다면,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는 샘플로 
내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면 
누구라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는 샘플로 내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낙심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문의 사울을 찾아오신 사건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유능해서 쓰임 받은 게 아니라, 제일 못 나서 쓰임을 받은 거다.' 

'스데반을 죽인 죄인도 내가 사용했다면, 너희를 더욱 사용하지 않겠느냐? 
내가 이 꼴통같은 자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했다면, 
너희의 못남과 부족함과 실패가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스데반을 죽였던 사울조차도 은혜와 긍휼을 입게 하였다면, 
이 세상의 누구도 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거 아니겠느냐? 
누구도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보다는, 더 밑바닥 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당연히 나는 너희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희가 너희 자신을 보고 낙심하고 절망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하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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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9:7절에 그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는 못한' 거죠.
그런데 22:9절에 보면, 이것과 반대로 말해요.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여기서는 '빛은 보면서도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7절과 반대로 말합니다.

그러면 이건 뭔가요? 서로 모순 되는 거 아닌가요?
9:7에는 '소리만 듣고 빛은 못 보았다'고 하고,
22:8에는 '소리는 못 듣고 빛은 보았다'고 합니다.

자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요?
간단하게 합치면 됩니다. 

무리들은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들었습니다. 
똑같이 빛을 보았고요. 소리를 들은 겁니다. 

9:7에 '소리만 듣고 빛은 못 보았다'는 말은,
그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그게 주님의 목소리인 줄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2:8에는 '소리는 못 듣고 빛은 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빛을 보았으나, 주님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과 무리들이 모두 빛도 보았고,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만 그것을 주님의 빛으로, 주님의 음성으로 알아들었고,

나머지 무리들은, 빛을 보았든지, 소리만 들었든지...
그게 그냥 우연히 보이는 (햇)빛, 우연히 들리는 (바람)소리인줄 알았다는 거죠.
그러나 내적으로는 개인적으로는 주님을 만나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주2) 교회의 알맹이
성전보다는 성경을, 성경보다는 사랑을!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7:8~9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위 (글의 제목) 순서를 거꾸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즉 사랑은 없이, 성경(율법)에 매달렸으며
그보다는 성전에 더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실 성전이나, 성경(책)은 호두의 껍질이라면
그 속 알맹이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거꾸로 신앙을 살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예수님과 제자들을 책망하고 비난했는데요,

예수님이 성경(율법)과 성전을
무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막7:5등

이에 대해 예수님이 교정해서 가르쳐 주신 바는
'성전(건물)'보다는 '성경'이요,  (*성경은 여기서 신학이나 교리 의미)
'성경'보다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중요도의 순서를 올바로 바로잡아 주셨지요!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만의 문제는 아니라
지난 2천년 교회 역사를 보면, 심지어 현재도
우리는 ‘사랑’을 버린 채
교리를 수호하고, 교단과 교권을 목숨처럼 지키려하며
그런 와중에 정작 복음의 정신인 사랑은 내던져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례로, 교회 건물과 시설, 부속 기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나기 수준의 큰 예산을 아깝지 않게 쏟아부으면서도

사회의 소외자들에 대한 도움의 손길에는
가랑비나 안개비 수준으로 겨우겨우 내려보내고 있습니다.

성경의 정신이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마22:37~38
교리와 교의와 교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타 교단, 이웃교회, 교회 바깥의 저변층 형제들을 따돌리는 것은 아닌지요!

이에 대한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어느 날 자기 두 아들을 프란시스 수도원에 보낸 어머니가
성 프란시스를 찾아왔습니다.

생계를 꾸리던 아들들이 수도원에 들어가버려서
먹고살기가 힘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시스가 동료 형제들에게
공동체에 있는 뭐라도 드리자고 하니
아무 것도 줄 것이 없고
있는 것이라곤 신약성서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에 성 프란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팔아 요긴한 데 쓰도록
그 신약성경을 우리의 어머니께 드리시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깨우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무시한 채, 성경을 낭독하는 것보다
차라리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당시 13세기에는 양피지에 필사한 성경이, 꽤 값이 나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에 성경책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성 프란시스 말의 의미는, 당연히 성경책도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사랑)을 지키며 성경 없이 지내는 일이라면,
성경만 지낸 채 계명(사랑)을 무시하고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어떤 특정 신학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각 교단, 교파마다 특성이 있고, 전통이 있고,
전래되어 내려오는 고유한 신학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성경의 정신인, 호두의 알맹이인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호두의 껍데기를 지키기 위해
호두 알맹이를 내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성 프란시스처럼
성경책(신학적 전통)을 내다 줘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는 공동체에 성경 없는 것보다
사랑 없는 것이 더 잘못이라는 생각 때문이고,
성경에서 주님도 이렇게 가르치셨다고 성 프란시스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과 이런 믿음에 기초한
사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배당(건물)보다는 성경책(진리)이고
성경책(진리의 껍질)보다는 사랑(내용)입니다!